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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후명, 둔황의 사랑

윤후명(1946~2025)은 시인이자 소설가로서 한국 문단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 작가이다.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그는, 1967년 시 <빙하의 새>로 등단하여 시작 활동을 이어가다 1979년 단편소설 <산역>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소설가로도 데뷔했다. 이후 시와 소설의 경계를 넘나들며 활동한 윤후명은 문단에서 “한국문학의 독보적 스타일리스트”로 불리었는데, 이는 그의 작품이 시공간의 한계를 무너뜨리고 시적인 문체로 새로운 서사에 도전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윤후명은 전통적인 기승전결식 플롯의 관념을 떨쳐내고 이미지에 집중하는 실험적 소설들을 선보였고, 일부 평론가들로부터 “그게 소설이냐”는 의구심을 받을 정도로 파격적인 문체 미학을 개척했다. 그의 이러한 문학 세계는 시적 감수성과 철학적 사유가 결합된 독특한 소설들로 구현되었다. 특히 1980년대 초반에 집필한 <둔황의 사랑>은 윤후명의 첫 소설집이자 그의 소설 세계를 본격적으로 열어 준 중요한 작품이다. 윤후명은 오랜 시인 생활을 바탕으로 1980년에 전업 작가의 길에 들어섰고, 1983년 발표한 중편 「돈황의 사랑」(둔황의 사랑의 옛 표기)으로 제3회 녹원문학상을 수상하며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김원우, 이문열, 이외수 등 당대 작가들과 교류하며 동인지 <작가>를 창간하기도 했으나, 작품 경향에 있어서는 이들과 차별되는 길을 걸었다. 윤후명은 1980년대 당시 유행하던 현실 참여적 리얼리즘의 흐름에서 한 걸음 비켜서, 환상과 주술의 세계를 자유롭게 비상하는 시적 서사를 개척하였다. 이는 직접적인 사회 현실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으면서 인간 내면과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려는 작가적 의지였다. 그는 <둔황의 사랑> 집필 당시 폐허가 된 문명과 생멸의 순환에 대한 통찰을 품고 있었고, 이를 아름다운 문체와 상징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자신의 문학적 지평을 넓혀나갔다.

<둔황의 사랑>이 집필되던 1982~83년경 윤후명은 마흔 언저리의 신예 소설가로서, 오랫동안 간직해온 철학적 질문들을 문학으로 풀어놓기 시작한 시기였다. 철학도 출신답게 그는 존재와 사랑의 본질을 천착하였고, 그 표현 방식으로 실크로드의 옛 도시 둔황과 로울란 같은 동서 교류의 역사지대를 상징적 배경으로 택했다. 실제로 윤후명은 중국 둔황 지역을 직접 답사한 경험을 계기로 불교와 동양문화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전해지며, 이러한 경험이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당시 그는 “생성과 소멸의 땅”이라 할 서역의 문명에서 삶의 근원을 찾고자 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연작소설 <둔황의 사랑>으로 탄생하였다. 이 소설집은 시적 언어와 철학적 통찰이 어우러진 윤후명 문학 세계의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윤후명의 문학사적 위치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가 1980년대 한국문학의 주류 경향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는 점이다. 80년대 초반 한국 문단은 거대담론과 사회적 상상력이 지배하던 시대였으나, 윤후명은 <둔황의 사랑>에서 둔황과 로울란, 사막 같은 이국적 소재를 통해 삶의 본원적 문제를 탐구하는 긴 여정을 시작했다. 이는 당대 문학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우리 문학의 지평을 동서 교류의 역사와 인간 존재의 근원 쪽으로 확장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시 말해, 윤후명은 <둔황의 사랑>을 통해 현실 비판이나 민중 의식의 담론 대신 인류 문명의 순환과 개인 존재의 의미를 심미적으로 성찰함으로써 한국문학에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한 셈이다. 이러한 작품 세계 덕분에 그는 시와 소설의 경계를 허무는 창작자로 인정받았고, 이후에도 꾸준히 환상적이면서도 쓸쓸한 정조의 작품들을 발표하며 한국 문학사에 자신만의 자취를 남겼다. <둔황의 사랑>이 발표된 1980년대와 그 이후 1990년대는 한국 사회가 격동의 변화를 겪던 시기였다. 1980년대 초반은 군부 독재 체제 하에서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충격이 깃들어 있던 암울한 시대였다. 문학계에서는 산업화와 독재로 인한 모순을 고발하고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려는 현실 참여 문학이나 민중문학이 대세였고, 황석영, 조세희, 박태순 등의 작가들이 리얼리즘 계열의 작품을 통해 사회 비판적 목소리를 높였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거쳐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한국 사회는 민주화와 함께 급속한 경제 성장, 소비 문화의 확산, 그리고 이념의 해체와 개인주의적 가치관의 대두를 경험하게 된다. 문학의 경향도 변화하여 1990년대에는 포스트모던적인 실험, 자전적 내면 탐구, 다양한 장르의 혼재 등 한층 다원화된 문학 경향이 나타났다. 윤후명의 작품 활동은 바로 이 80~90년대의 전환기에 이루어졌으며, 시대적 배경이 그의 소설 세계에 미묘하게 반영되어 있다. 흥미로운 점은, 윤후명의 <둔황의 사랑>이 시대 현실을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그 배경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 작품은 현실의 무게에 눌린 당대 젊은 지식인의 내면을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예컨대 <둔황의 사랑>의 주인공 ‘나’는 1980년대 한국 사회의 한 단면을 체현한다. 현실에서는 취업난과 권위주의, 사회적 억압이 존재하지만, 주인공은 이에 저항하거나 맞서기보다는 일상의 답답함에서 탈출하고 싶은 갈망을 품고 있다. 이는 “일상의 현실에서 끊임없이 탈출을 꿈꾸는 한 남자”의 모습으로 작품에 그려지는데, 이러한 탈출 욕구 자체가 당대 사회 분위기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압박적인 현실을 견디는 방식으로, 주인공은 저 먼 서역의 옛 도시에 대한 환상으로 도피하는 것이다. 1980년대 많은 사람들이 현실의 고단함 속에서 정신적 위안을 찾고자 종교, 철학, 예술에 심취했던 현상이 있었는데, 윤후명의 작품에서 둔황과 로울란은 그러한 도피와 위안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또한 80년대는 한국에서 전통 문화와 역사에 대한 재인식이 일어난 시기이기도 하다. 군사 정권이 민족 문화 강조 정책을 펴기도 했고, 해외로 눈을 돌리던 지식인들은 한국과 동양의 뿌리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윤후명의 <둔황의 사랑>에 등장하는 불교 예술과 실크로드 문명은 이러한 문화적 분위기와 맥을 같이한다. 작중에 묘사되는 둔황의 비단길, 불상과 비천상 등의 이미지는 한국인의 전통적 심상과 맞닿은 동양 문화 코드로 제시된다. 특히 한국 문화에서 중요한 정서인 ‘한’의 미학이 작품 배경에 깔려 있다는 분석이 있다. 사막과 폐허에 대한 동경,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에 대한 허망감 등은 한의 정서와 통하며, 이는 80~90년대 한국인의 집단적 무의식과 사회심리가 작품의 배경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1990년대로 넘어가며, 한국 문학은 소재와 양식 면에서 다채로워졌고 개인의 내적 이야기들이 전면에 부상했다. 윤후명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서 90년대에 자전적 색채의 여로형 소설들을 써나갔다. <둔황의 사랑> 이후의 연작들은 40대에 접어든 작가가 삶의 근원적 쓸쓸함과 마주하는 과정을 담아냈는데, 이는 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적 경향과도 맞닿아 있다. 즉, 거대담론이 해체된 후의 허무와 개인의 방황이 윤후명의 작품에 진하게 스며드는 것이다. <둔황의 사랑> 자체는 80년대 초의 작품이지만, 이후 개작과 연작을 거치며 90년대적인 자기 성찰의 깊이를 더해갔다. 실제로 <둔황의 사랑>은 초판(1983) 이후 2005년에 대폭적인 퇴고를 거쳐 개정 출간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작가는 불필요한 설명을 덜어내고 작품을 보다 밀도 있게 다듬었다. 이는 당대 독자들의 변화된 감각에 부응하려는 시도로도 해석된다. 요컨대, <둔황의 사랑>은 1980~90년대 한국의 사회·문학적 배경과 교묘한 대화를 나누는 작품이다. 겉보기에는 현실과 유리된 듯한 실크로드의 낭만적 세계를 다루지만, 그 이면에는 현실에 지친 한국인의 내면 풍경과 당대의 문화심리적 욕구가 자리한다. 윤후명은 시대의 소음을 직접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그 침묵 속에 시대를 담아내는 법을 알았던 셈이다. 결과적으로 <둔황의 사랑>은 한국 현대사의 한 복판에서 문학의 다른 가능성을 모색한 작품으로, 시대적 질곡에 대한 우회적 응답이라 할 수 있다.

<둔황의 사랑>은 하나의 장편소설처럼 읽히지만, 사실 <둔황의 사랑>, <로울란의 사랑>, <사랑의 돌사자>, <사막의 여자> 등 일련의 연작 중단편으로 이루어진 작품집이다. 이 연작들은 서역의 신비로운 지명을 제목에 품고 서로 연결되는데, 각각의 이야기가 독립성을 띠면서도 인물과 주제가 유기적으로 이어져 전체로서 하나의 서사를 구성한다. 작품의 화자는 일관되게 1인칭 ‘나’로 등장하며, 그의 의식 흐름을 따라 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이 교차되는 독특한 전개를 보여준다. 줄거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 이야기 「둔황의 사랑」으로 들어서면, 배경은 의외로 현대의 서울 변두리 한 작은 방이다. 여기서도 여자가 마련한 방에 얹혀 사는 ‘나’가 등장한다. 경제적 능력이 없는 ‘나’는 직장 다니는 여자 친구의 돈으로 얻은 단칸방에 같이 살고 있다. “내가 지닌 것이라곤 장롱 한 칸 차지할 옷가지와 몇 권의 책이 전부였다”라는 식으로, 자신의 초라한 처지를 담담히 묘사하는 나의 독백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 동거 상황은 둘 사이의 미묘한 긴장감을 내포한다. 남성 화자는 스스로를 무기력하고 현실 부적응적인 인물로 느끼며, 여성에게 경제적으로 기대어 사는 데서 오는 위축감과 미안함을 지닌다. 방 한 칸에 함께 지내며 둘은 애정을 나누지만, 화자의 내면에는 어디엔가 훌쩍 떠나버리고픈 탈주 욕망이 꿈틀거린다. 그는 밤이면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벽에 걸린 실크로드 지도나 모래시계 따위를 멍하니 바라본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자문한다. “이 사랑은 영원할 수 있을까, 아니 우리 삶 자체가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 이러한 화자의 고독한 성찰은 작품 전반에 흐르는 정조를 예고한다. 화자는 곧 현실의 답답함을 벗어나 둔황에 대한 환상으로 빠져든다. 어느 날 그는 책에서 우연히 “둔황의 비단길에는 꽃비처럼 별빛이 내린다”는 구절을 읽고 강렬한 상상을 시작한다. 삭막한 서울의 골목에 앉아 있지만, 그의 눈앞에는 수천 년 전 사막 도시 둔황의 풍경이 펼쳐진다. 화자는 마치 꿈을 꾸듯 환영을 본다. 달빛 아래 모래언덕 위에 우뚝 선 둔황의 사원과, 벽화 속에서 날아오르는 비천들이 그의 환상 속에 살아난다. 그는 둔황 막고굴의 거대한 석굴 벽화를 떠올리며, 거기 그려진 비천들이 피리와 비파를 연주하며 하늘을 나는 장면을 생생히 그려본다. 현실에서는 누추한 방 안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을 뿐이지만, 그의 정신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둔황의 별밭 속을 헤매는 것이다. 이러한 몽환적인 장면 묘사는 윤후명 특유의 환상적 리얼리티를 보여준다. 독자는 화자의 의식에 깊이 이입하여, 현실의 방과 상상의 둔황이 겹쳐지는 이중 노출된 화면을 보게 된다. 이 순간 화자의 내면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경외와 설렘이 차오른다. 그는 자기 앞에 다가온 한 비천의 여인을 환영 속에서 마주하며, 묘한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이렇듯 <둔황의 사랑> 편에서는 현실의 연인과 환상의 비천 여성 이미지가 겹쳐지며, 사랑에 대한 화자의 갈망과 이상이 시적으로 형상화된다. 두 번째 이야기 <로울란의 사랑>에서는 화자의 현실 에피소드가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화자 ‘나’와 동거 중인 그녀 사이에는 갈등의 기운이 감돈다. 그녀는 바쁜 직장 생활에 지쳐 있고, ‘나’는 여전히 무직에 가까워 경제적 기여 없이 집에 머물며 글을 쓰거나 책만 읽는다. 어느 추운 겨울 저녁, 그녀는 퇴근 후 지친 얼굴로 돌아와 말없이 웅크리고 눕는다. 화자는 그녀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보살피지만, 마음 한켠에서는 이 관계의 불안정함과 끝에 대한 예감을 떨칠 수 없다. 그는 옆에 누운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며 속으로 생각한다. ‘로울란… 사막 속 신기루처럼 사라진 도시. 우리의 사랑도 언젠가 그렇게 될까?’ 이 독백에서 알 수 있듯, 화자는 자신들의 사랑이 로울란의 운명을 닮았다고 느낀다. 로울란은 한때 오아시스 도시로 번영했으나 결국 모래 속에 파묻혀 사라진 허망한 옛 문명이다. 화자는 현재의 행복이 영원하지 못할 것이라는 체념 어린 통찰을 갖고 있으며, 사랑의 유한성을 받아들이려 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동시에 로울란을 동경의 대상으로 삼는다. “머나먼 서역의 땅 로울란을 동경하며 자신을 속박하는 일상으로부터 끊임없이 탈출을 꿈꾸”는 한 남자의 욕망이 바로 이 <로울란의 사랑>의 핵심 주제이다. 작중에서 화자는 실제로 고향 친구를 통해 로울란 유적 발굴단에 합류할 기회를 제안받는 에피소드가 있다. 친구는 우연히 중앙아시아 탐험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고, 화자에게 함께 가보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이는 화자에게는 현실에서 로울란으로 향할 수 있는 일생일대의 제안이다. 그는 순간 가슴이 뛰지만, 한편으로 동거 중인 그녀와의 관계가 걸림돌이 된다. “현실의 사랑과 미지의 꿈, 두 갈래 길 앞에서 나는 주저했다”는 식의 갈등이 묘사된다. 결국 화자는 친구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현실에 머무르기로 한다. 이 선택에는 그녀를 향한 책임감과 애정, 그리고 두려움이 뒤섞여 있다. 그는 스스로를 “현실을 버리지 못하는 비겁한 탐험가”라고 자조한다. 그러나 그 밤, 그녀가 잠든 사이 화자는 창가에 앉아 모래시계를 뒤집어 보며 눈물을 흘린다. 로울란으로 가는 꿈은 접었지만, 마음만은 이미 사막 한가운데를 헤매고 있는 자신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러한 장면에서 윤후명은 인간 내면의 갈등과 욕망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화자의 심리는 현실 연인에 대한 사랑과, 자유를 향한 동경 사이에서 찢길 듯 흔들린다. “로울란의 모래바람이 내 가슴속에서 불었다”는 문장은 그의 내적 상황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세 번째 이야기 <사랑의 돌사자>에서는 작품의 분위기가 다소 변모한다. 화자와 그녀는 결혼하여 부부가 되었고, 시간은 조금 흐른 설정이다. 그러나 결혼 이후에도 둘의 삶에 완전한 안식이 찾아온 것은 아니다. 특히 ‘나’의 아내(이제 ‘그녀’는 아내로 호칭된다)가 건강 문제를 겪고 있어 갈등이 증폭된다. 작중에서 아내는 자궁근종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화자는 병원 복도를 서성이며 불안에 시달리는데, 그의 곁을 지켜주는 것은 한 오랜 친구다. 이 친구는 고고학을 전공하여 박물관에 근무하는 인물로, 예전 화자에게 로울란 여행을 제안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두 남자는 병원 근처 허름한 식당에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인다. 이 장면에서 윤후명은 한국적인 삶의 애환과 전통 문화를 절묘하게 엮어낸다. 친구와의 대화 중에 ‘사자놀이’에 대한 이야기가 오간다. 친구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조상들도 탈을 쓰고 놀면서 삶의 고단함을 달랬지”라고 말한다. 사자춤에서 등장하는 사자 탈은 여기서 중요한 상징이 된다. 화자의 친구는 “조선시대 탈춤의 역사와 사자놀이의 의미”를 열정적으로 설명하며, 사자 탈이 마을의 액운을 쫓는 주술적 도구였음을 상기시킨다. 그러자 화자는 문득 둔황 석굴 앞을 지키던 돌사자를 떠올린다. 그는 친구에게 말한다. “자네, 둔황에도 수천 년을 지킨 돌사자가 있더군. 그 사자들은 어떤 액운을 막으려 했을까?” 친구는 조용히 잔을 내려놓으며 대답한다. “아마 인간의 망각이겠지. 영원한 것 따위 없다는 사실을 잊으려는 우리 자신 말이야.” 이 짧은 대화는 작품의 철학을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핵심 장면이다. 사랑의 돌사자란 결국 인간이 영원을 갈구하며 세워놓은 신화적 표식이지만, 정작 그 영원은 존재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이후 병원에서 퇴원한 아내와 화자는 일상으로 돌아오지만, 둘 사이에는 이전보다 깊은 정서적 거리가 느껴진다. 네 번째 이야기 <사막의 여자>에서 화자는 아내와 함께지만 외로운 내면을 숨기지 못한다. 어느 여름날, 아내가 잠든 오후에 화자는 홀로 마당에 나와 패랭이꽃을 바라본다. 마당 구석 돌담 틈에 피어난 자줏빛 패랭이꽃은 메마른 흙바닥에서도 꿋꿋이 꽃을 피우는 강인한 생명력이 있다. 화자는 그 패랭이꽃을 보며 지나온 사랑의 시간을 떠올린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패랭이꽃 속에서 다시 사랑이 꽃핀다면, 나는 오늘 다시 나라는 사람으로 새로이 태어날 것이다.” 패랭이꽃의 꽃말이 ‘영원한 사랑’임을 아는 화자는, 마치 그 상징을 통해 사랑의 부활을 염원하는 듯하다. 그러나 문득 담 모퉁이에서 다람쥐 한 마리가 나타나 꽃 곁을 스르륵 지나간다. 화자는 그 다람쥐를 보고 빙그레 웃으며 중얼거린다. “그래, 저 다람쥐처럼 언젠가 나도 작은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리라.” 이 대목에서 윤후명은 다람쥐의 의인화를 통해 삶과 사랑의 순환을 암시한다.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도 꽃은 피고 지고, 다람쥐는 달려간다. 화자는 그 광경 속에서 자신들의 사랑 역시 형태를 바꾸어 이어질지 모른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이 섬세한 자연 묘사와 내면 독백은 독자에게 잔잔한 여운을 준다. 이처럼 <둔황의 사랑>은 표면적으로는 한 남자의 사랑 이야기로 읽히지만, 그 내적 흐름을 따라가 보면 자아 탐색의 여정이자 존재 의미에 대한 성찰의 기록이다. 주요 인물인 화자의 내면 심리는 작품 전반에 걸쳐 불안에서 희망으로, 혼돈에서 깨달음으로 변화한다. 동거녀에서 아내로 변모하는 여성 인물은 구체적인 개별성보다도 화자의 내적 거울로 기능한다. 그녀의 모습과 상태—경제적으로 자립적이나 정서적으로 지친 모습, 병을 앓으며 연약해진 모습 등—은 모두 화자 자신의 불안과 상처, 그리고 책임의식을 비추는 거울이다. 이에 대한 묘사는 세밀하면서도 절제되어 있어 독자로 하여금 직접 해석하게 만든다. 윤후명은 인물들의 심리를 설명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상징과 사건의 여운 속에서 암시할 뿐이다. 예컨대 화자와 그녀가 크게 다투는 장면이나 노골적인 갈등 장면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대신 두 사람이 말없이 서로를 등진 채 앉아 있는 장면, 또는 함께 보던 촛불이 꺼지는 장면 등을 통해 관계의 균열과 회의를 암시한다. 이러한 여백의 심리 묘사는 독자에게 인물들의 감정을 깊이 느끼게 하며, 행간을 읽도록 유도한다. 정리하면, <둔황의 사랑>의 줄거리는 한 남녀의 만남과 이별, 그리고 재회의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얼개일 뿐, 실제 독서 경험에서는 꿈과 환상, 회상과 사색이 어지러이 교차하는 서사시 같은 인상을 받는다. 각 편의 제목에 등장하는 둔황, 로울란, 돌사자, 사막, 쿠처 등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화자의 내면 심경을 대변하는 상징 기호들이다. 그리고 그 상징들은 연결되어 한 인간이 사랑을 통해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려낸다. 윤후명은 찰나의 삶과 사랑을 포착하여 영원의 시공간으로 끌어올리는 문학적 마술을 부린다 – 바로 그 점에서 이 작품의 문학성이 확보된다는 평도 있다. 시간적·공간적 배경은 수시로 변주되지만, 궁극적으로 화자가 되돌아오는 곳은 ‘나’라는 존재의 심연이다. <둔황의 사랑>은 그렇게 한 개인의 내면 순례기로서, 독자를 현실과 환상의 경계 어디쯤으로 안내한다.

<둔황의 사랑>은 그 주제의식과 서사, 문체에 있어서 한국 문학사에서 이채로운 빛깔을 띤 작품이다. 먼저 주제의식을 살펴보면, 이 작품은 사랑과 존재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다루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 존재의 고독과 구원에 대한 탐구가 놓여 있다. 작품 속 화자는 사랑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의미를 찾아가며,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허무와 깨달음을 마주한다. 결국 윤후명이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모든 사랑은 한때의 신기루일지라도 그 여정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이는 작품 곳곳에서 반복되는 모티프로 드러난다. 예컨대 사막의 신기루, 별빛, 비천상 등의 이미지들은 모두 덧없음 속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며, 이는 사랑의 속성과도 맞닿는다. 인연의 시작과 끝은 모래바람처럼 덧없이 지나가지만, 그 순간에 빛났던 감정과 깨달음은 영원의 한 조각처럼 남는다는 역설적인 메시지가 작품 전반에 깔려 있다. 서사구조 측면에서 <둔황의 사랑>은 전통적인 소설 문법을 따르지 않고 에피소드의 연쇄와 단절로 이루어진다. 서사 진행이 순직하게 흐르는 대신, 이야기 “스토리가 끊어졌다 이어지면서 곁가지를 치는 가운데 시공간이 확장”되는 독특한 구조를 보인다. 각 연작은 독립된 이야기이면서도, 인과적 연결보다는 심상의 연결을 통해 이어진다. 윤후명은 의도적으로 기승전결을 해체하고 몽타주 기법처럼 장면을 병치하는데, 이는 마치 한 편의 시를 연상시키는 구성이다. 실제로 그의 작품은 “마치 시와 같은 스타일의 소설”이라는 평을 받았으며, 이것이 그만의 문체적 개성으로 인정받았다. 이러한 비정형적 구조 덕분에 독자는 작품을 읽는 동안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유영하는 듯한 체험을 하게 된다. 현실의 서울, 과거의 둔황과 로울란이 하나의 의식 흐름 속에 결합되고, 인과율보다는 연상과 상징의 논리로 전개된다. 이는 일반 소설 독법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난해하게 느껴질 수도 있으나, 바로 그 점이 작품의 미학적 도전이라 할 수 있다. 윤후명은 이러한 자유로운 서사 이동을 통해 현실과 비현실, 현재와 영원을 겹쳐 보여주는 효과를 거두었다. 그 결과, 독자는 주인공의 내면을 보다 직접적으로,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소설의 외형은 분절적인 단편 연작이지만, 그 내적 리듬은 한 편의 서정시처럼 응집되어 흐른다. 언어적 특성 면에서, 윤후명의 문체는 지극히 서정적이고 함축적이다. 그는 군더더기를 최대한 배제한 간결하면서도 시적인 문장을 구사한다. <둔황의 사랑>에는 눈에 띄는 수사나 화려한 비유보다는, 사물과 풍경을 통해 감정을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섬세한 문장이 많다. 예컨대 “촛불이 한 자락 바람에 떨었다” 같은 묘사 하나로 두 인물 사이의 불안과 흔들림을 암시하는 식이다. 또한 윤후명은 특정 단어나 이미지를 반복하여 상징망을 구축하는데, 모래, 별, 바람, 새, 돌사자 등의 요소들이 작품 전체에 걸쳐 끊임없이 등장하여 의미를 축적한다. 이러한 언어의 반복과 변주는 마치 음악의 모티프처럼 소설에 운율감을 부여한다. 실제로 <둔황의 사랑>을 읽다 보면 활자들이 별처럼 빛난다는 어떤 독자의 표현처럼, 문장이 한편의 서정시나 음악적 프레이즈처럼 다가온다. 윤후명 스스로 시인이기도 했던 만큼, 시는 소설의 심장으로 그의 작품 안에 뛰고 있다. 또한 놓치지 말아야 할 언어적 특징은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지점에서의 서술 태도이다. 윤후명의 문장은 환상 장면에서도 과장되거나 들뜬 표현을 쓰지 않고, 담담하고 차분한 어조를 유지한다. 이것이 오히려 환상의 실재성을 높여주는 효과를 낸다. 독자는 인물의 환각이나 상상이 아닌, 실제 현실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 받는다. 예컨대 화자가 둔황의 비천을 떠올리는 대목에서도, “그 여인이 내게로 걸어왔다”는 식으로 지극히 현실 현재형의 진술을 한다. 덕분에 독자는 그것이 상상이란 걸 알면서도 마치 눈앞의 현실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한 기법은 매직 리얼리즘에 비견될 수 있으나, 윤후명의 경우 라틴아메리카적 마술적 사실주의와는 또 다른 동양적 환상성을 선보인다는 점이 독특하다. 그의 환상은 요란하거나 기괴하지 않고, 고요하고 은은한 빛으로 일상의 틈에 스며든다. 이는 한국 문학의 맥락에서 보면 김승옥, 이청준 등의 선배 작가들의 계보와도 통한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이나 <서울, 1964년 겨울> 같은 작품들은 1960년대에 도시적 소외와 내면의 감수성을 세련된 문체로 그려낸 바 있다. 김승옥은 서정적이면서도 모더니티를 담아낸 문체로 잘 알려져 있는데, 윤후명은 한 세대 뒤에 와서 보다 환상적이고 철학적인 차원으로 그 서정성을 확장한 셈이다. 가령 두 작가 모두 안개 낀 공간이나 쓸쓸한 밤거리 등을 배경으로 인물의 내적 고독을 묘사하지만, 김승옥이 그 고독을 사회 현실과 연결지어 암시했다면 윤후명은 그것을 문명사의 시간축으로 끌고 간다는 차이가 있다. 이청준의 경우 1970년대에 <이어도>나 <눈길> 등을 통해 한국적 신비와 원형질을 파헤쳤는데, 윤후명 역시 한국인의 전통 정서(한과 구원에의 열망 등)를 바탕에 깔고 있다는 점에서 정신적 맥이 닿아 있다. 그러나 이청준이 민담이나 무속적 상징에 기대어 토속적인 신비를 탐구했다면, 윤후명은 그것을 실크로드라는 더욱 광활한 문화사의 무대로 확장했다. 이는 곧 그의 작품이 국내적인 토양을 넘어 인류 문명의 보편적 상징들을 끌어들였음을 의미한다. 그의 상상력은 단군신화나 한국의 무속이 아니라, 불교,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신화까지 아우른다. 이런 측면에서 윤후명은 동시대 다른 작가들과 차별화된다. 동시대 1980년대의 대표 작가들과 비교하면, 윤후명의 위치는 더욱 선명해진다. 80년대 현실 참여 문학의 한 축을 담당했던 황석영이나 조정래 등이 민중의 삶과 역사 현장을 사실적으로 복원하고 있을 때, 윤후명은 개인의 내면과 상상력을 통해 역사와 문명을 은유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황석영의 <오 발자국>이나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집단의 역사적 고통을 서사화한 것이라면, 윤후명의 <둔황의 사랑>은 한 개인의 상처와 구원을 우주적 스케일로 형상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90년대에 들어와 포스트모던 경향으로 주목받은 작가들 – 예컨대 은희경, 최인호, 윤대녕 등 – 과 견주어 볼 때, 윤후명은 그들의 도시적 세련됨이나 아이러니 대신 원형적 이미지와 신화적 상상력에 천착했다. 특히 윤대녕의 <피아노와 백합의 사막>은 윤후명의 둔황 시리즈에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윤후명 문학이 후배 세대의 감수성에도 스며들었음을 보여준다. 윤후명은 분명 당대의 주류 문학과 궤를 달리하면서도, 한국 문학의 저변에서 문체 미학의 새 길을 개척한 셈이다. 문체적인 실험성 면에서 보면, 윤후명의 글쓰기는 시와 산문의 융합이라는 점에서 한국 문학 전통 속 선구자들을 떠올리게 한다. 앞서 언급한 김승옥이나 이청준 이외에도 박태원, 이상 같은 모더니스트들의 영향 역시 감지된다. 이상의 시적 산문, 박태원의 의식의 흐름 기법 등은 윤후명의 내레이션 방식과 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윤후명은 이를 더욱 자기화하여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의 문체를 완성했다. 연합뉴스의 부고 기사에서는 그를 두고 “소설과 시의 경계, 시공간의 한계를 무너뜨리는 작가”라고 평했는데, 이는 그의 문학이 지닌 형식적 혁신을 잘 요약한다. 그는 한국 소설에서 비교적 드문 심미적 환상성을 구현함으로써, 문학의 표현 범위를 넓혔다. 정리하자면, <둔황의 사랑>의 문학비평적 가치는 주제의 보편성과 형식의 독창성의 결합에 있다. 윤후명은 사랑, 삶, 허무, 구원이라는 인류 보편의 주제를 다루면서도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에 있어 전혀 새롭고 개성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했다. 환상적이되 진솔하고, 서정적이되 사변적인 그의 소설은 당대 문학장에서 고립된 섬처럼 보였으나, 오히려 그 독자성 덕분에 오랫동안 읽히며 영향력을 끼쳤다. 다른 작가들의 작품과 비교해보면, 윤후명의 작품은 문학적 흐름의 중심에 서기보다는 주변에서 고고하게 빛나는 별과 같았다. 그러나 그 별빛은 꾸준히 동시대인과 후배들에게 영감을 주어, 한국문학의 미학적 스펙트럼을 한층 넓히는 역할을 했다. <둔황의 사랑>은 바로 그러한 윤후명 문학의 정수가 응축된 작품으로서, 주제·구조·언어 모든 면에서 음미할 거리가 풍부한 문학적 성취라 할 수 있다.

<둔황의 사랑>은 철학적으로도 다층적인 해석이 가능한 작품이다. 앞서 언급했듯 윤후명은 철학을 전공한 경력이 있고, 실제로 그의 작품 속에는 존재론적·실존적 사유와 불교적 세계관이 자연스레 녹아 있다. 이 작품을 철학비평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특히 주목할만한 것은 불교 사상, 그리고 실존주의 철학과의 접점이다. 먼저 존재론과 실존주의의 측면에서 보자. 작품의 주인공 ‘나’는 끊임없이 자기 존재의 의미를 묻고 불안해하는 실존적 주체로 그려진다. 사르트르나 카뮈 같은 실존철학자들이 말한 부조리와 불안의 정조가 화자의 내면에 깊게 자리하고 있다. 현실에서 그는 부조리한 상황에 놓여 있다: 사랑하지만 끝을 알 수 없는 관계, 꿈을 좇고 싶지만 발목 잡는 일상. 이는 실존 철학의 화두인 “부조리한 세계 속에서 의미를 찾는 인간”의 모습과 겹친다. 화자는 자기 삶이 하나의 부질없는 반복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사랑마저 덧없이 사라질 것을 예감하며 실존적 공허를 체험한다. 그런데 실존주의에 따르면 이러한 공허 속에서도 자유로운 선택과 책임을 통해 자신만의 의미를 창조할 수 있다. <둔황의 사랑>에서 화자는 결국 현실에 남기로 결정하고, 사랑을 지키기 위해 자기 욕망(로울란으로 떠나는 것)을 포기하는 선택을 한다. 이것은 한편으로 그의 자유로운 결단이며,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떠안는 태도다. 그는 환상을 현실로 만들 수는 없지만, 현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성장한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카뮈의 시지프스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시지프스가 끝없이 바위를 밀어올리는 부조리한 형벌 속에서도 자기 운명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듯이, 화자도 무의미해 보이는 일상과 끝이 보이지 않는 사랑의 노력을 견디며 그 안에서 삶의 의지를 발견한다. 작품의 마지막에 화자가 보여주는 평온은, 실존주의적으로 해석하면 부조리를 끌어안은 자의 초연함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더 이상 도피하지 않고 자기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경지에 도달한다. 이것은 실존 철학에서 말하는 실존의 완성, 곧 자기 삶에의 주체적 확신과 통한다. 다음으로 불교적 세계관의 관점에서 <둔황의 사랑>을 살펴보자. 작품의 배경과 상징에는 불교 문화가 짙게 배어 있다. 둔황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불교 유적지이며, 작품 속에 등장하는 비천상, 사막, 석굴 등은 모두 불교적인 함의를 지닌다. 특히 이 작품이 내포한 주제의 핵심 중 하나는 제행무상, 즉 모든 것은 변하여 없어짐이다. 사랑도, 인간의 젊음도, 찬란했던 문명도 결국 허물어지고 만다는 무상의 진리가 작품 전반에서 반복된다. 이는 불교의 핵심 교리 중 하나로, 윤후명은 이를 서정적인 서사로 풀어냈다. 예컨대 로울란의 폐허나 사막의 신기루는 무상의 상징이다. 작품 속 화자가 느끼는 허망감 역시 삶의 무상함에 대한 직관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는 단순히 모든 것이 덧없다고만 하지 않고, 그 무상을 깨닫는 것으로부터 해탈의 길을 찾는다. <둔황의 사랑>의 결말부에서 화자가 보여주는 태도 변화를 불교적으로 보면, 그는 집착을 내려놓음으로써 마음의 자유를 얻는 모습과 닮았다. 애초에 화자는 사랑이 영원하길 바라는 집착, 이상향(둔황, 로울란)에 가고 싶다는 집착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알고 고통스러워한다. 그러다 마침내 “모든 건 흘러가지만 그 흐름 자체가 삶이다”라는 깨달음에 이르러 집착을 내려놓는다. 이 순간 화자는 불교의 깨달음에 비유될 만한 평온과 자족을 맛본다. 비유하자면, 그는 바닷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 애쓰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의 달을 바라보는 사람과 같다. 더 이상 신기루를 붙들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이것은 곧 불교의 지혜인 지족을 아는 마음과 통한다. 또 다른 불교적 개념인 공(空)과 연기(緣起)도 이 작품을 이해하는 열쇠다. 작품 속에서 화자는 자기 자신과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본질적인 공허를 느낀다. 그러나 그 공허를 절망으로만 소비하지 않고, 오히려 관조의 매개로 삼는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이란 모든 존재에는 고정된 자성이 없고 서로 의존하여 일어난다는 가르침이다. 화자는 사랑과 인생의 허무를 통찰하면서, 자신도 거대한 인연의 흐름 속 일부임을 받아들인다. 예컨대 그가 둔황의 별빛과 한국의 자신을 연결짓는 상상을 할 때, 이는 시공간을 초월한 연기의 그물망을 느끼는 행위로 볼 수 있다. 그는 수천 년 전의 별빛이 지금도 우리를 비춘다는 사실에서 시간의 상호연결성을 깨닫고 위안을 얻는다. 이것은 곧 자기 고통에만 함몰되지 않고 우주적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다는 뜻이며, 불교의 연기관과 상통하는 심경이다. 또한 작품에 자주 나오는 환생이나 재생의 암시는 윤회 사상을 연상케 한다. 화자가 다람쥐를 보며 새로운 생을 떠올리는 장면, 사랑이 다른 모습으로 계속될 거라는 믿음 등은 죽음과 끝을 영원한 소멸로 보지 않는 불교적 세계관을 반영한다. 모든 것은 사라지지만, 또 다른 형태로 이어진다는 순환의 사상은 작품의 정조를 이루는 희미한 희망의 근거이기도 하다. 이는 실존주의의 냉정한 인간관에 비하면 보다 구원론적인 전망이라 할 수 있다. 동양철학 전반으로 넓혀 보면, <둔황의 사랑>은 노장사상의 무위자연이나 유교의 인생무상과도 접점을 갖는다. 그러나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앞서 살핀 불교적 색채다. 실제로 윤후명은 불교 문화에 관심이 깊어서, 소설 속에서도 혜초나 마라난타 같은 승려-순례자의 이미지를 암암리에 불러온다. 화자는 현대인이지만, 그의 영혼은 마치 천 년 전 혜초 스님(8세기경 인도 순례 후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신라의 승려)의 자취를 쫓는 듯하다. 이는 곧 깨달음을 향한 구도자의 이미지로 화자를 격상시킨다. 결국 사랑을 찾아 방황하던 현대의 남자가 어느새 진리를 찾아 떠나는 순례자의 모습으로 겹쳐지는 것이다. 이러한 구도자의 테마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 정신사를 관통하는 보편적 모티프다. 윤후명은 이를 동양적 정서 속에 녹여냄으로써, <둔황의 사랑>을 인간 내면의 순례 기록으로 승화시켰다. 철학비평적으로 결론을 내리자면, <둔황의 사랑>은 실존적 인간의 고뇌와 불교적 깨달음의 여정이 만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화자는 카뮈의 이방인처럼 처음엔 세상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방황자였지만, 최종적으로는 석가모니의 깨달음에 한 걸음 다가선 구도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부조리한 현실을 살아내는 동시에, 무상한 세계를 관조하며 해탈에 이르는 길을 모색한다. 물론 화자가 완전히 해탈한 열반의 경지에 오른 것은 아니겠지만, 최소한 스스로의 삶을 이전보다 가볍게 그리고 자비롭게 바라볼 줄 알게 되었다는 점에서 변모가 있다. 독자는 그의 변화를 보며 함께 사색한다. 우리 삶의 애환, 사랑의 비애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받아들이고 극복할 수 있는지를 스스로 묻게 된다. <둔황의 사랑>은 이렇게 철학적 주제들을 서정과 서사 속에 자연스럽게 융합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인생의 본질에 대한 사유를 촉발시키는 작품이다. 윤후명의 <둔황의 사랑>은 겉으로는 한 편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처럼 다가오지만, 그 깊은 심층에서는 인생무상의 철학과 인간 구원의 염원을 노래하는 작품이다. 작가는 실크로드의 신화적 공간과 현대인의 일상을 직조해서, 사랑의 기쁨과 상실, 삶의 방황과 성찰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독창적 서사로 풀어냈다. 작품의 주제의식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모든 것은 스쳐가나 그 순간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신과 만난다”는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은 이루어져도 지나가고, 이루어지지 않아도 사라진다. 도시 둔황과 로울란처럼, 한때 찬란했던 것들도 결국 시간 앞에 사라진다. 그러나 윤후명은 그 사라짐을 한탄하거나 비극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사라짐 속에 깃든 아름다움과 그로 인한 성찰을 보여준다. 둔황의 폐허 속에서도 벽화의 색은 남아 있듯이, 우리 삶의 덧없음 속에서도 인간만이 얻을 수 있는 지혜와 사랑의 기억이 남는다. 이것이 이 작품이 전달하는 궁극적인 주제 의식이다.

독자는 <둔황의 사랑>을 읽고 난 뒤, 마치 긴 여행을 다녀온 듯한 심경에 젖게 된다. 작품은 뚜렷한 교훈을 제시하지 않지만, 그 여백 속에서 수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현실에 지친 현대인에게 이 소설은 사유의 계기를 제공한다. 나는 지금 어떤 신기루를 좇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 사랑은, 내 삶은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가? 화자의 방황과 깨달음을 함께 따라가며, 독자도 자기 내면을 비추어보게 되는 것이다. 특히 사랑에 대한 관점에서, 이 작품은 독자로 하여금 사랑의 본질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흔히 사랑은 영원하거나 절대적인 감정으로 이상화되곤 하지만, 윤후명은 사랑 역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고 소멸하는 존재임을 섬세히 보여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무의미한 것이 아님을, 오히려 그 덧없음 때문에 더욱 아름답고 소중한 것임을 일깨운다. 이러한 메시지는 읽는 이의 가슴에 묵직한 감동과 여운을 남긴다. 감정적 여운 측면에서 <둔황의 사랑>은 독특한 정서를 남긴다. 읽고 나면 왠지 모를 쓸쓸함과 따스함이 교차하는 느낌이 인다. 이는 작품이 지닌 비극성과 희망의 이중주 때문이다. 화자의 사랑 이야기는 완전히 해피엔딩이라 할 수 없고, 작품 전체에 잔잔한 슬픔이 흐른다. 그러나 그 슬픔은 절망이 아니라, 아름다운 슬픔, 즉 비애의 미학으로 승화된다. 독자는 작품 속 인물들의 상처에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로 그들이 보여주는 깨달음과 성숙에 위안을 얻는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 마음에 남는 것은 씁쓸한 미소일지도 모른다. “그래, 우리 모두 저렇게 살아가고 또 배우며 나아가는 거겠지.” 작품은 독자에게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하지는 않지만, 대신 사색의 시간과 잔잔한 감동을 선사한다. 무엇보다도, <둔황의 사랑>이 남기는 가장 큰 울림은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다. 윤후명은 등장인물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비록 그들이 허약하고 방황하지만, 작가는 그들의 고통을 존중하고 그 노력에 작은 구원을 내린다. 이 점에서 독자는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포용과 애정을 느끼게 된다. 소설의 마지막에 화자가 아내에게 건네는 속삭임처럼, 이 작품은 독자에게도 조용히 말을 거는 듯하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헛될지라도, 그 속에서 분명 빛나는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이러한 메시지는 독자의 마음에 감미로운 여운으로 남아, 오래도록 생각을 맴돈다. 결국 윤후명의 <둔황의 사랑>은 문학과 철학, 현실과 환상이 어우러진 한 편의 서정시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문장은 독자를 사막의 별빛 아래로 이끌어, 사랑과 존재에 대한 깊은 사유의 밤을 통과하게 한다. 그리고 새벽녘에 이르면, 우리는 주인공과 함께 스스로에게 되돌아와 있다. 손에는 아무것도 쥔 것 없지만, 마음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경험의 흔적과 깨달음이 남아 있다. 그것이 이 작품이 독자에게 주는 소중한 선물이며, 문학이 삶에 줄 수 있는 최고의 가치 중 하나일 것이다. 윤후명의 <둔황의 사랑>은 그렇게 독자로 하여금 자기 삶을 다시 한 번 음미하고 성찰하게 만드는, 아름답고도 깊이 있는 여운을 간직한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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