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20세기 영화사에서 가장 시적이고 영적인 영화 세계를 구축한 러시아의 영화 감독이다. 그는 단 7편의 장편영화를 남겼지만, <이반의 어린 시절>, <안드레이 루블료프>, <솔라리스>, <거울>, <스토커>, <노스탈지아>, <희생> 등 그의 작품들은 독창적인 미학과 깊은 철학적 주제로 세계 영화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들은 길고 느린 숏, 자연과 초현실이 어우러진 영상미, 인간 내면과 영혼에 대한 탐구로 특징지어지며, 상업적 흥행보다는 예술적 완성도와 진정성을 추구하는 작가주의 영화의 정점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그의 예술관과 영화 철학이 집약된 저서가 바로 <봉인된 시간>으로, 타르코프스키는 이 책에서 자신의 미학적 원칙과 영화에 대한 사유를 체계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는 팬들과 평론가들이 자신의 영화에 담긴 의미를 궁금해하는 데 답하고자, 생애 말기에 직접 펜을 들어 영화 예술의 본질과 예술가의 사명을 논했다. 본 평론에서는 <봉인된 시간>에 담긴 타르코프스키의 핵심 미학과 영화 철학을 분석적으로 조망하고자 한다. 타르코프스키는 예술을 단순한 오락이나 미적 향유의 수단이 아니라, 인간이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영혼의 여정으로 파악한다. 그는 예술을 통해 인간이 궁극적인 진실과 마주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예술은 과학과 마찬가지로 세계를 인식하고 삶의 본질적 의미를 탐구하기 위한 도구이다. 예술적 창작은 현실 너머에 존재하는 이상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되며, 진정한 예술 작품은 그 이상을 향한 갈망과 인간 정신의 탐구를 형상화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타르코프스키는 예술이 현실의 모방이나 단순한 감각적 쾌락에 머무를 수 없으며, 반드시 인간 내면의 진실과 절대적 가치에 접근하는 숭고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영화 예술의 본질에 대해 타르코프스키가 제시하는 개념의 중심에는 ‘시간’이 놓여 있다. 그는 영화를 “시간을 조각하는 예술”로 규정하는데, 이는 영화 매체가 필름을 통해 시간의 흐름 자체를 포착하고 재현할 수 있는 독특한 능력에 주목한 것이다. 타르코프스키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영화라는 예술을 통해 시간의 인상을 기록하여 보존할 수 있게 되었으며, 필름 속에 한 번 담긴 시간은 영원히 반복 재생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영화 감독의 역할은 마치 조각가가 대리석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깎아내 조형물을 만들어내듯이, 방대한 현실의 ‘시간의 덩어리’에서 본질적인 순간들을 포착해 배열함으로써 하나의 의미 있는 시간의 형상을 창조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는 영화의 기본 단위를 움직이는 이미지와 그 안에 흐르는 시간으로 보고, 숏의 길이와 리듬을 통해 정서와 의미를 형성하는 것을 중시한다. 이처럼 시간의 흐름과 리듬을 창의적으로 조직하는 행위가 곧 영화 연출의 핵심이며, 그렇게 형성된 시간의 조각들이 모여서 영화적 이미지의 시적 힘을 발휘한다고 보았다. 타르코프스키는 특히 기억과 꿈의 역할에 주목한다. 기억은 개인이 체험한 시간의 응축이며, 꿈은 무의식 속에서 재편되는 시간의 단편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기억을 시간의 영적인 측면으로 간주하여, 영화가 현재의 현실만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과 내면의 꿈까지도 화면에 구현함으로써 한 인간 존재의 전체적인 시간을 서사화할 수 있다고 여긴다. 실제로 그의 영화들에서는 자전적 기억의 파편이나 몽환적인 장면들이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이는 인물의 내면 세계와 시간의 깊이를 동시에 표현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다. 타르코프스키는 이러한 기억과 꿈의 이미지들을 통해 관객이 시간의 본질과 인간 경험의 연속성을 사유하도록 이끈다. 영화 속에 각인된 시간의 조각들은 곧 관객 각자의 기억과 교감하며, 예술이 개인의 삶에 보다 보편적인 성찰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된다고 믿었다. 현실에 대한 진실한 묘사는 타르코프스키 미학의 또 다른 축이다. 그는 영화에서 인공적인 연출 기교나 과장된 표현을 지양하고, 현실 세계의 질감과 디테일을 충실히 담아내고자 했다. 연극적인 과잉 연기나 지나치게 꾸며진 세트, 억지스러운 특수 효과 등은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고 영화의 진실성을 손상시키는 요소로 보았다. 대신 자연광, 자연 환경, 일상의 소음과 같은 현실의 요소들을 있는 그대로 활용하여 화면 속에 살아 있는 현실감을 부여하려 했다. 그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비, 불, 바람, 물 등의 자연 요소는 이러한 철학의 반영으로, 인위적 장치를 넘어 현실 그 자체가 빚어내는 아름다움과 의미를 담아낸다. 이는 미장센의 사실성을 높여 관객으로 하여금 화면 너머의 실제 세계와 교감하게 함으로써, 영화적 체험을 통한 삶의 진실에 다가가게 하는 태도라 할 수 있다. 배우의 연기 또한 마찬가지로, 과장 없이 인물의 순간순간의 진짜 심리와 감정을 포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그는 역설했다. 이러한 현실 존중의 원칙은 그의 영화에 깃든 시적 영상미와 어우러져, 관객으로 하여금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눈앞의 구체적 이미지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진리를 느끼도록 만든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미학은 흔히 난해하고 상징적이라는 인상을 주지만, 정작 그는 의도적인 상징 사용을 거부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작품에 특정한 상징이나 숨은 메시지를 심는 행위를 경계했는데, 그러한 장치가 오히려 예술의 깊이를 얕게 만들고 관객의 자유로운 해석을 방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떤 장면에 등장하는 사물이나 이미지의 ‘의미’를 미리 규정해버리면, 관객은 그 정해진 틀에 따라 받아들이게 되어 예술적 체험의 폭이 좁아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타르코프스키는 영화의 이미지가 풍부한 다의적 해석의 여지를 지니도록 열어두고자 했다. 관객마다 각자의 삶의 경험과 감수성에 비추어 영화를 느낄 수 있도록, 일부러 분명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 모호성과 여백을 남겨두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영화에서 특정 장면이 무엇을 상징하느냐고 묻는 태도는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이는 장면 그 자체가 불러일으키는 감정과 생각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즉 한 이미지가 전달하는 정서는 그것이 배치된 맥락과 인물의 내면에 비추어 스스로 의미를 획득하며, 이를 통해 관객은 각자 고유한 해석과 감응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철학 아래에서 그의 영화들은 명시적 교훈이나 쉬운 설명을 피하고, 오히려 시처럼 함축적이고 개방적인 영상 언어를 구사한다. 관객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보며 적극적으로 사고하고 느껴야 하며, 그는 이러한 능동적 관람 과정을 예술 체험의 본질로 보았다. 예술가의 창작 태도와 영화 산업에 대한 타르코프스키의 견해 역시 책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진정한 영화 예술은 결코 상업적 틀 안에서 완성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흥행을 위한 공식에 따라 장르적 관습을 반복하거나, 관객의 즉각적인 만족만을 노리고 제작된 영화들은 그의 관점에서 예술의 범주에 들지 못한다. 타르코프스키는 영화가 상품이나 대중 소비재로 전락하는 상황을 비판하며, 예술적 영화와 상업 영화는 애초에 추구하는 바가 다르다고 보았다. 따라서 영화 예술가라면 대중의 유행이나 외부의 압력에 영합하지 말고, 스스로 전달해야 할 내적 진실과 독창적 비전을 끝까지 고수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창작 과정에서 제작 환경의 어려움이나 검열, 자금 압박, 심지어 동료들의 의견 충돌 등 수많은 장애물이 있을 수 있으나, 예술가는 그러한 외부 요인에 타협함으로써 자신의 작품성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오히려 그러한 난관을 극복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지켜낼 때 비로소 작품에 영혼이 깃들며, 그것이 예술로서의 가치를 지닌다고 믿었다. 동시에 타르코프스키는 예술가와 관객의 관계에 대한 균형 잡힌 통찰을 보여준다. 그는 결코 예술가가 관객의 기호에 맞춰 창작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관객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는 태도를 취한다. 그는 예술가가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온 진실한 경험과 생각을 담아 작품을 만들면, 그 진정성은 언젠가 관객의 마음에 닿는다고 믿었다. 예술가는 비록 대중을 좇아 변절하지는 않더라도, 자신의 작품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고 감화를 주어야 할 도의적 책임이 있다고 본 것이다. 특히 그의 영화처럼 난해한 작품의 경우, 이를 깊이 이해하고 공감하는 일부 관객들에게는 그 작품이 영혼의 양식이 될 수 있다. 타르코프스키는 이러한 관객들을 소중히 여겼고, 자신의 표현이 진솔할 때 관객 또한 진심으로 반응해 줄 것이라 믿었다. 요컨대 예술가는 대중을 좇아 저급한 취향에 타협해서는 안 되지만, 예술의 결과물은 궁극적으로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정신적 교감의 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예술가에게 자기 자신에 대한 성실함과 동시에 관객에 대한 책임 의식을 모두 요구함으로써, 예술 창작의 윤리를 성찰하게 한다. 타르코프스키의 철학에서 예술은 곧 영성의 표현이다. 그는 예술이 인간 정신을 고양시키고 영혼을 깨우는 힘을 지닌다고 여겼다. 현대 문명이 풍요와 기술 발전 속에서도 한편으로는 깊은 내면의 공허와 도덕적 혼란을 겪고 있다고 진단한 그는, 예술이야말로 이러한 시대에 필요한 정신적 치유와 성찰의 매개라고 주장한다. 그는 역사를 돌아볼 때 물질적 번영만을 추구하던 문명은 결국 쇠퇴와 파국을 맞이했다고 지적하면서, 현대 사회 역시 물질주의에 치우쳐 인간성이 황폐화될 위험에 놓여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술은 단순한 개인 취미가 아니라 인류의 정신적 진화를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며, 예술가에게는 시대의 영적 지도자로서의 소명이 부여된다고까지 말한다. 예술 작품이 줄 수 있는 진정한 감동과 깨달음은 관객 개개인의 삶에 긍정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고, 나아가 사회 공동체의 가치관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었다. 특히 영화와 같은 매체는 대중에게 널리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속에 담긴 정신적 메시지가 사람들의 의식에 스며든다면 거대한 문화적 각성을 불러올 수도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타르코프스키는 예술의 이러한 숭고한 힘을 확신하며, <봉인된 시간> 곳곳에서 물질적 성공과 쾌락만을 좇는 현대 예술 풍토를 비판하고 잃어버린 영성을 회복할 것을 촉구한다. 주목할 것은, 타르코프스키가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면서도 이상주의에만 머무르지 않고 현실에 대한 성찰도 함께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는 책에서 자신이 제시하는 높은 미학적 기준들이 현실에서 구현되기 어려운 이상향임을 인정하고, 때로는 본인 역시 그 원칙들을 영화 현장에서 모두 실천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솔직한 언급을 남겼다. 이는 자신의 이론에 도취되기보다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냉철하게 인지하는 예술가의 자기반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타르코프스키는 예술가란 바로 그 이상을 향해 평생토록 정진하는 존재라고 믿었고, 자신 역시 매 작품마다 완성을 향한 투쟁을 거듭해왔다고 술회한다. 이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의 시행착오와 한계마저도 예술의 일부로 포용하는 그의 태도는, 궁극적으로 예술에 대한 진지한 헌신과 열정이야말로 작품을 통해 드러나는 진실의 원천임을 보여준다. <봉인된 시간>의 말미, 즉 “‘향수’ 이후” 장에서 타르코프스키는 자신의 마지막 시기 예술관을 담담히 정리하고 있다. 소련 당국으로부터 오해와 검열을 받으며 끝내 망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개인사적 배경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음을 밝힌다. 이 장에서는 이탈리아와 스웨덴 등 타국에서 영화를 제작하던 말년에 그가 느낀 예술적 고뇌와 성취,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함께 드러난다. 타르코프스키는 비록 조국을 떠나 있었지만, 예술에 대한 그의 열정은 더욱 순수하게 타올랐고 오히려 어떠한 체제나 이념에도 속박되지 않는 보편적 예술의 가치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회고한다. 또한 그는 미래의 영화가 기술 발전과 상업주의의 물결 속에서도 본연의 시적 감수성과 철학적 깊이를 잃지 않기를 바라는 염원을 피력한다. 실제로 그는 생전 인터뷰에서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영화화하고 싶다는 구상을 밝히는 등 죽음 직전까지 새로운 작품에 대한 꿈을 놓지 않았는데, 책의 마지막에는 이러한 예술적 열망과 함께 후배 영화인들에게 순수한 영화 정신을 이어갈 것을 당부하는 듯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결국 타르코프스키는 삶의 최후까지도 예술가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길을 걸어갔으며, <봉인된 시간>을 통해 그 길이 어떠한 신념으로 구축되어 있었는지를 우리에게 유산으로 남겼다.
결론적으로, <봉인된 시간>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평생에 걸쳐 추구한 영화미학과 예술관을 집대성한 불멸의 평론집이다. 이 책에서 그는 영화 예술의 본질을 ‘시간의 예술’이라는 통찰로 정의하고, 예술의 목적을 인간 영혼에 대한 성찰과 진실 추구에 둠으로써 영화의 가능성을 철학적 높이에서 논의하고 있다. 그의 미학적 원칙들 – 시간의 흐름을 통한 시적 영상 창조, 현실에 뿌리내린 진정성, 관객의 능동적 해석을 촉발하는 개방성, 그리고 예술가의 도덕적 책임과 영적 사명에 이르기까지 – 은 단순히 그의 개인적인 창작 지침을 넘어, 예술이 어떻게 인간과 세계를 연결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보편적 성찰을 제공한다. 학술적이면서도 열정적인 어조로 쓰인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타르코프스키 예술 세계의 근본에 자리한 철학적 사유를 접하게 되며, 영화 예술에 대한 시야를 넓히고 깊은 영감을 얻게 된다. <봉인된 시간>은 출간된 지 여러 해가 지났음에도 여전히 유효한 울림을 지니고 있으며, 상업성과 속도에 치우친 현대 영화 문화 속에서 예술의 본령을 상기시키는 소중한 고전으로 평가된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철학은 이 책을 통해 한 시대의 유행을 넘어 보편적 예술정신의 가치를 설파하고 있으며, 그의 통찰은 오늘날에도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과 예술가들에게 지속적인 지침과 도전을 안겨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