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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앙리 베르그송은 20세기 초 프랑스 철학을 대표하는 인물로, 지속, 직관, 엘랑 비탈 등의 핵심 개념을 통해 독자적인 형이상학 체계를 구축했다. 지속은 베르그송 철학의 출발점으로서 인간이 즉각적으로 경험하는 내적 시간의 흐름을 가리킨다. 그는 칸트 이후 철학이 시간과 공간을 혼합함으로써 진정한 시간의 모습을 놓쳤다고 비판하며, 의식의 즉각적 자료는 공간적이 아니라 시간적임을 밝혔다. 베르그송에게 지속은 여러 의식 상태들이 동시적·연속적으로 서로 침투하는 질적 다수성의 흐름이며, 균질적인 공간 안에 대상들을 병렬적으로 놓고 셈하는 양적 시간과 구별된다. 이러한 순수 지속 속에서는 사건들의 외재적 연결이나 기계적 인과가 성립하지 않으며, 매 순간 새로움이 창출되기에 인간 자유의 가능성도 그 안에서 찾을 수 있다. 베르그송의 유명한 말대로 “의식적 존재에게 동일한 두 순간은 없다”는 통찰은, 지속 개념을 통해 시간의 창조성과 질적 변화를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지속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베르그송은 직관과 지성을 대비시킨다. 우리의 지성은 실용적 필요에 따라 세계를 공간화하고 고정된 개념들로 파악하는 능력으로서, 사물을 분할하고 추상화하는 데 뛰어나지만 지속하는 삶의 실재를 불연속적 파편으로 왜곡해버린다. 반면 직관은 지속 자체에 공감적으로 진입하는 능력으로, 사물을 외부에서 대상화하지 않고 그 내부로부터 동화함으로써 사물 고유의 “유일무이하고 표현 불가능한” 요소에 직접 닿는 방법이다. 베르그송 본인은 직관을 동감에 비유하면서, 지성이 대상의 겉모습과 실용적 속성에 주목한다면 직관은 대상의 내재적 흐름과 본질에 참여한다고 설명한다. 요컨대 직관은 지속이라는 생생한 시간의 흐름에 스며들어 그것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인식 방법이며, 논리적·분석적 사유로는 포착할 수 없는 삶과 의식의 진리를 드러낼 수 있는 도구로 간주된다. 이러한 이유로 베르그송은 철학의 임무를 직관적 방법에 의한 새로운 형이상학의 건설로 이해했고, 이를 통해 지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참된 실재 인식을 추구했다. 베르그송 철학의 또 다른 핵심 개념인 엘랑 비탈은 특히 <창조적 진화>에서 전면에 등장하는 “생명적 충동”으로, 모든 생명 현상의 원동력으로 제시된다. 엘랑 비탈은 물질과 기계적 인과율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삶의 창조적 에너지를 가리키며, 진화의 방향성과 운동성을 부여하는 근원적인 생명 추진력이다. 이는 다윈식 기계론적 진화나 전통 형이상학의 목적론적 진화로는 포착할 수 없는, 능동적이고 자유로운 창발의 원천으로서 제안되었다. 요컨대 베르그송에게 우주는 하나의 거대한 지속적 생성 과정이며, 엘랑 비탈은 그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형상을 낳는 창조의 흐름을 상징한다. 이러한 엘랑 비탈 개념은 지속과 직관의 철학을 생명 현상 전체로 확대시킨 것으로, 물질 세계에 내재한 생명력의 형이상학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이 개념은 베르그송 철학의 제3의 기둥으로 여겨지며 (지속, 직관과 함께), 생명철학과 진화론 논쟁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정리하면, 베르그송은 지속 개념을 통해 시간의 질적 창조성을, 직관을 통해 지성 비판과 새로운 인식 방법을, 엘랑 비탈을 통해 생명 진화의 역동적 원리를 제시했다. 이러한 사상들은 모두 “고정된 것”보다 “생성하는 것”을 중시하는 철학적 입장에 서 있으며, 베르그송은 이를 통해 근대 기계론과 추상적 이성에 맞서 생명의 창조성과 직접적 경험의 가치를 부각시켰다. 그의 철학은 개념적으로 난해하면서도 시적 언어로 전개되었는데, “언어는 공간적 분할의 도구이므로 지속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고 말할 정도로 베르그송은 언어와 논리의 한계까지 의식하며 자신의 통찰을 전달하고자 했다. 이러한 특징은 그의 작품 전반에 일관되게 흐르는 사상적 맥락을 형성한다.

<창조적 진화>가 출간된 1907년 무렵, 유럽 지성계에는 실증주의와 과학만능주의가 강력한 흐름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19세기 실증철학자 콩트 이후 경험과학의 방법만이 진리를 파악한다는 입장이 주류를 이루었고, 자연과학의 성공에 힘입어 전통적인 형이상학은 구시대의 유물로 여겨지는 분위기마저 형성되었다. 실제로 1907년 프랑스에서 시행된 한 철학교육 조사에 따르면, 대다수 교사들이 “형이상학은 이제 과거보다 덜 수행되며, 철학 교육은 보다 역사비판적이고 과학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응답했다. 청소년들에게 추상적 형이상학 사유는 해롭다는 견해마저 있었고, 순수 이성의 형이상학이나 형식논리학은 시대에 뒤떨어진 학문으로 간주되어 교육현장에서 쇠퇴하고 있었다. 대신 심리학, 사회학 등 “당대의 문제”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철학 역시 사변적 사유보다는 실증적 연구에 가까워지는 경향을 보였다. 요컨대 1900년 전후의 유럽 철학계는 칸트 이후의 비판철학과 과학 지상주의의 영향 아래 형이상학의 퇴조와 실증주의의 대두라는 지적 풍토가 지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칸트 이후 철학의 맥락에서 보자면, 18세기 말 칸트가 순수이성의 한계를 지적하고 “물자체”에 대한 인식을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선언한 이후, 많은 철학자들은 형이상학적 탐구를 자제하거나 새로운 방식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19세기 독일에서는 헤겔 등의 관념론으로 형이상학이 일시적으로 부흥했지만, 신칸트학파를 비롯한 주류 학계는 과학적 인식의 조건을 연구하는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한편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공리주의나 실증주의 영향으로 경험과 과학적 방법론이 강조되어, 전통 형이상학은 “공허한 사변”으로 폄하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르그송은 직관에 입각한 새로운 형이상학을 주창하며 칸트 이래 닫혀버린 물자체에의 접근을 시도한 이단아적인 존재였다. 그는 칸트의 비판철학이 시간을 공간처럼 취급함으로써 살아있는 시간의 참모습을 간과했다고 보았고, 참된 형이상학은 개념적 추상이 아닌 지속의 직접 경험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베르그송은 칸트 이래 철학이 봉인한 절대적 인식의 가능성을 직관을 통해 복권하려 하였고, 이는 당대 철학계의 대세와는 분명한 대조를 이루는 지적 태도였다. 또한 1907년은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유럽 지성계를 뒤흔든 지 반세기가 지난 시점이었다. 이 무렵 생물학계에서는 진화가 사실로 널리 받아들여졌지만, 진화의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여전히 격렬한 논쟁이 진행 중이었다.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를 주장한 다윈설 외에도, 획득형질의 유전을 주장한 라마르크설이나 내재적 방향성을 지닌 정향진화 가설 등 여러 이론이 경합하고 있었다. “종의 변천은 일반적으로 수용되었지만, 진화의 기작에 관한 문제는 아직 결론나지 않았다”는 평이 나올 정도로, 20세기 초반의 진화론 담론은 과학적 사실과 형이상학적 해석이 뒤섞인 무대였다. 한편 생명 현상을 단순한 물리·화학적 인과로 설명하려는 생기론 대 기계론 논쟁도 벌어졌다. 생기론은 생명에는 비물질적 “활력”이나 “생명력”이 있다고 보는 입장으로, 당시 생리학자 한스 드리슈의 실험적 생기론이 주목받고 있었다. 이에 반해 기계론자들은 생명도 물질적 기계처럼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는 이러한 맥락에서, 기계론과 전통적 목적론 모두에 반대하면서도 생기론에 새로운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형태로 등장했다. 그는 “전체가 처음부터 주어져 있다”고 보는 결정론적 설명들 – 즉, 과거 원인에 모든 것이 포함되었다고 보는 기계론이나 미래 목적이 애초에 설정되었다고 보는 완고한 목적론 – 모두 참된 창조의 새로움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대신 삶의 내부에서 작용하는 창조적 충동에 의해 예측불가능한 진화적 진보가 일어난다고 주장함으로써, 과학과 형이상학의 접점을 새롭게 모색한 것이다. 이는 형이상학이 퇴조하고 과학만능주의가 득세하던 시대에, 과학적 진화 이론을 포용하면서도 그 너머의 철학적 의미를 탐구하려는 야심찬 시도였다. 당시 프랑스 철학계 내부를 살펴보면, 베르그송은 완전히 고립된 존재는 아니었다. 19세기 후반 프랑스에는 펠릭스 라바쏭이나 에밀 부트루 등 영적 실재론의 전통이 있었고, 이는 물질주의와 실증주의에 대한 비판적 대안으로 직관과 내적 경험을 중시하는 흐름이었다. 베르그송도 이러한 맥락에서 라바쏭의 제자로 불리며 직관적 형이상학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대체로 보아 1907년 전후의 유럽에서 베르그송의 등장은 주류를 거스르는 혁신에 가까웠다. 독일과 영미권이 한층 실증적 연구와 논리적 분석으로 기울던 시기에, 베르그송은 “생은 오직 생으로써 파악된다”는 생의 철학적 기치를 들고 기계적·물질적 세계관에 대한 반란을 이끈 것으로 평가된다. 실제로 니체와 함께 베르그송은 “물질주의와 기계론에 대한 네오-로맨틱한 반발”의 주역으로 묶여 언급되며, 이성 중심의 계몽전통에 대한 역류를 대표하는 철학자로 간주된다. 한마디로, <창조적 진화>가 탄생한 배경에는 과학적 세계관의 도전과 형이상학의 위기, 그리고 생명과 직관의 재평가라는 복합적 사상사적 흐름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베르그송의 저작 중 <창조적 진화>(1907)는 그의 사상 전개에서 정점에 위치하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베르그송은 비교적 저술 편수가 많지 않은 철학자였으며, “한 가지 사상의 사람, 자신의 모든 저술은 하나의 주제를 변주한 것”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일관된 철학적 문제의식을 추구했다. 그의 저작들 가운데 <창조적 진화>는 베르그송 철학 체계의 중심축을 형성하는 작품이다. 앞선 저서들이 시간의 지속과 기억 등 심리적·인식론적 주제를 다루었다면, <창조적 진화>는 그것을 생명 전체의 진화 과정에 적용함으로써 철학적 논의의 스펙트럼을 우주론적 차원으로 확장했다. 이를 통해 베르그송은 자신의 핵심 개념(지속, 직관, 창조성 등)을 진화생물학의 맥락에서 통합적으로 전개하였고, 과학과 형이상학의 융합이라는 야심찬 과제를 시도했다. 예컨대, 베르그송의 초기 철학이 “순수 지속”을 통해 개인의 의식 흐름과 자유를 조명했다면, <창조적 진화>는 “엘랑 비탈”을 통해 생명계 전체의 창조적 진보를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확장과 종합의 시도 덕분에 <창조적 진화>는 베르그송 사상의 정점이자 전환점으로 간주된다. 철학사적으로도 <창조적 진화>의 영향력은 막대했다. 이 책이 출간되자마자 프랑스에서는 베르그송을 둘러싼 숱한 논쟁과 열광이 일어났다. 1907년 이후 1910년대 초반까지 프랑스 파리에서는 “베르그송주의의 광풍”이 분다고 할 만큼, 베르그송의 강의에는 청중이 넘쳐났고 그의 사상을 찬양하거나 비판하는 글들이 쏟아졌다. 동시대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조차 “베르그송의 강연은 브로드웨이에 교통정체를 일으킨 첫 사례”라고 비꼴 정도로, 베르그송은 지적 유행의 중심에 섰다. 1911년 영어 번역을 비롯하여, 독일어·이탈리아어 등 다수 언어로 <창조적 진화>가 속속 번역되면서 그의 명성은 국제적으로 확산되었다. 독일 철학자 빈델반드가 베르그송 저작의 독어판 서문을 직접 써줄 정도였고, 미국의 프라그마티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영어판 서문을 쓰려 했으나 1910년 사망으로 무산되기도 했다. 이러한 일화들은 <창조적 진화>가 단순한 한 철학자의 저술을 넘어, 당대 지성사의 사건으로 받아들여졌음을 보여준다. 요컨대 <창조적 진화>는 베르그송 철학의 집대성이라는 내부적 의의와 더불어, 20세기 초 철학계의 지형을 뒤흔든 문제작이라는 외부적 중요성을 모두 지닌다. 이 책을 통해 베르그송은 19세기적 사유 방식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형이상학을 선언했고, 이는 그를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자 현대 철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만들어주었다. 비록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동안 그의 영향력이 감소하였지만, 들뢰즈 등 후대 사상가들에 의해 재조명되면서 베르그송의 이 작품은 여전히 철학적 영감의 원천으로 평가되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서도 “베르그송 르네상스”라는 말이 나올 만큼 그의 철학이 재평가되고 있다는 사실은, <창조적 진화>가 던진 사상적 화두가 얼마나 심오하고 풍부한지 잘 보여준다.

<창조적 진화>는 베르그송이 자신의 철학 개념들을 총동원하여 생명 진화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해명하려는 시도를 담고 있다. 이 책의 주된 목표는, 모든 생명 존재에 관통하는 연속성(창조성)과 종분화와 발전의 단절성(다양성)을 동시에 설명할 수 있는 원리를 찾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해 베르그송은 “삶이란 곧 창조”라는 핵심 명제를 제시하며, 오직 진정한 창조성만이 생명의 지속성과 진화적 불연속성을 함께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먼저 19세기 생물학 담론을 지배하던 기계론과 목적론을 비판한다. 엄격한 기계론은 변화의 매 순간이 선행 상태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 보아 새로움의 가능성을 부정하며, 전통적 목적론은 궁극적 최종 목적이 애초부터 정해져 있다고 보아 마찬가지로 진정한 창발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베르그송은 이 양 극단을 넘어, “전체가 주어지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것이 실현될 수 있는” 제3의 설명으로서 생명적 원리를 가설한다. 다시 말해, 텔로스를 미래가 아닌 기원에 배치하고 그 원천이 단일하고 불가분하다고 가정함으로써 기계론과 구별되는 생명의 창조적 진화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베르그송은 이와 같은 주장을 네 단계의 논증으로 전개한다:

  1. 공통의 생명 충동 가설: 모든 생물종들의 창조적 생성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의 본원적 충동이 존재해야 한다고 본다. 이 “생명의 원형질”과 같은 충동이야말로 온갖 생명 형태를 산출해낸 근원적인 추진력이며, 베르그송이 말하는 유일한 생명 원리이다. 엘랑 비탈로 상징되는 이 원초적 생명 에너지는 생명 진화를 내부로부터 추동하는 창조의 불꽃으로 묘사된다.

  2. 진화의 분기와 다양성: 한편, 동일한 생명 충동에서 출발했음에도 자연에는 무수한 종들과 형태상의 다양성이 존재한다. 베르그송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경향 이론”을 제시한다. 엘랑 비탈이 역사 속에서 전개되는 과정에서 여러 갈래로 분기하며, 서로 다른 발전 경향으로 갈라져 나갔다는 것이다. 진화는 직선적 진행이 아니라, 끊임없는 가지치기를 통해 복잡한 생명의 나무를 형성해왔으며, 이러한 분화의 원리가 바로 생명 충동에 내재한 자기 복제와 발산의 성질이라고 주장한다.

  3. 본능과 지성의 두 방향: 베르그송은 진화 과정에서 드러난 두 가지 주요 경로를 본능과 지성으로 규명한다. 생명이 분기하여 나온 수많은 종들 가운데, 특히 동물과 식물의 갈래에서 그 차이가 극명하다. 식물은 주로 광합성을 통해 정착 생활을 하는 생명 형태로, 생존에 이동이 필수적이지 않은 경향을 보여준다. 반면 동물은 먹이를 찾아 이동해야 하므로, 감각과 행동 중심으로 발달했다. 동물 중에서도 곤충과 같이 완성된 본능을 지닌 생명들이 있는가 하면, 인간처럼 발달된 지성을 지닌 존재가 등장한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인간은 호모 파베르, 즉 도구를 제작하는 인간으로 정의될 수 있다. 지성이란 본래 도구 제작과 외부 사물의 조작이라는 실용적 필요에서 진화한 능력이기에, 분석적이고 양적인 사고를 특징으로 한다. 지성은 세계를 공간적으로 파편화하고 균질한 개념으로 바꾸어 다루기 때문에, 그 한계로 인해 생명의 지속적 실체를 직접 파악하지 못한다. 반면 본능은 동물이 자연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얻은 직접적 지각과 행위의 능력으로서, 지성보다 한층 직통으로 삶과 연결되어 있다. 특히 곤충의 본능(예컨대 벌의 벌집 짓기)은 대단히 정교한 창조성을 보이지만, 폐쇄적 본능은 특정 행동에 고정되어 반성적 통찰의 능력이 제한된다. 이렇게 진화는 본능의 길(동물적 경향)과 지성의 길(인간적 경향)이라는 두 방향을 주된 축으로 삼아 전개되었고, 인간은 생명을 알고자 하는 유일한 종이면서도 지성으로 인해 오히려 생명의 본질에 도달하지 못하는 모순에 처하게 되었다고 베르그송은 진단한다.

  4. 직관을 통한 극복: 그렇다면 지성의 한계를 넘어 생명의 참모습을 파악하는 길은 무엇인가? 베르그송은 그 해결책으로 “직관적 노력”을 제시한다. 다행히 인간의 지성 한복판에도 “본능의 주변”, 즉 미약하나마 잔여적 본능이 살아남아 있기 때문에, 이를 단서로 삼아 우리는 직관을 발전시킬 수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지성 속에 남은 본능의 섬광이 바로 직관이며, 이를 의식적으로 훈련하고 지성을 거슬러 활용함으로써 인간은 원초적 생명 충동과 부분적으로 합일할 수 있다. 이렇게 직관에 의한 동화가 이루어질 때, 마침내 우리는 창조적 진화의 내부에 들어가 생명의 진리를 체험할 수 있게 된다. 베르그송은 이것이 곧 철학이 궁극적으로 나아가야 할 인식 방법의 혁신이라고 보았다. 직관에 의해 지성의 맹점을 넘어서면, 그동안 형이상학사에 쌓여온 온갖 장애(잘못된 이원론, 실체관 등)도 비로소 해소되고 “절대적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네 단계 논의를 통해 베르그송은 진화론에 대한 철학적 재해석을 완성한다. 그는 엘랑 비탈이라는 개념적 “이미지”를 활용하여 다윈주의가 설명하지 못한 생명의 능동적 진면목을 파헤쳤다. 특히 기계론적 진화관이 놓치는 “새로움의 등장”을 엘랑 비탈의 창조적 에너지로 설명함으로써, 진화를 하나의 열린 과정으로 이해하도록 했다. 또한 지성과 직관의 대비를 통해, 왜 인간이 과학적으로 진화론을 이해하면서도 그것의 내적 의미를 상실했는지를 지적하고 해결책을 제시했다. 베르그송은 인간 지성의 본래 기능이 도구제작과 실용에 있었기에 생명을 기계처럼 환원하고 무질서 개념 등으로 현실을 왜곡한다고 비판한다. 대신 예술적·철학적 직관을 통해 우리는 진화하는 생명에 참여함으로써 질서와 무질서 이분법을 넘어 진정한 조화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창조적 진화> 말미에서 베르그송은 영화의 필름 조각들을 하나하나 분석한다고 운동을 이해할 수 없듯, 살아있는 운동 자체를 직관적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런 논지를 펼친 <창조적 진화>는 당대 독자들에게 상당한 지적 충격을 주었는데, 생물학적 진화 개념을 철학적으로 “창조적인 것으로 재규정”한 베르그송의 시도는 진화론을 둘러싼 기계론-목적론 논쟁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창조적 진화>는 출간 직후부터 다양한 철학자들과 비교되고 비판받으면서, 20세기 철학 담론의 중요한 논제로 부상했다. 우선, 니체와 베르그송의 비교는 자주 언급되는 주제이다. 두 사람 모두 생명과 창조를 철학의 중심에 놓았고, 기계론적 물질세계관에 반발하여 새로운 가치 창출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생명철학의 계보를 함께 한다. 실제로 “베르그송은 니체와 동일한 사조에 속하되, 물질주의와 기계론에 대한 반발을 한층 더 발전시켰다”는 평가가 있으며, 두 철학자는 과학주의 시대의 낭만적 반동이라는 지적 흐름 속에 같이 묶여왔다. 그러나 니체와 베르그송의 사상 간에는 중요한 차이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니체의 “권력 의지” 개념은 생명의 원동력을 힘과 지배의 의지로 파악하지만, 베르그송의 “생명의 비약”은 창조적 발전과 생명의 약동 자체에 주안점을 둔다. 니체는 영원회귀나 운명애 등의 사유를 통해 삶의 반복과 긍정을 역설한 반면, 베르그송은 지속적인 창조와 예측불가능한 진화를 옹호하며 미래의 열림을 강조한다. 또한 니체 사상에는 그 자신의 “앙양과 추락”이 얽힌 내적 모순과 비극성이 있는데, 베르그송은 니체가 제기한 문제들 – 예컨대 시간 속에서의 존재, 도덕의 기원, 진리 개념 등 – 에 대하여 보다 체계적이고 낙관적인 해법을 제시하려 시도한 것으로 평가된다. 한 연구에 따르면 베르그송은 “니체를 괴롭힌 철학적 난점들에 대해 초이성주의적 철학으로 답했고, 기계론적 사고방식을 분석하여 그 적용 범위를 제한함으로써 니체가 풀지 못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베르그송은 종종 “니체의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으로 해석되며, 생명에 대한 긍정과 창조에의 의지를 공통점으로 하면서도 사유의 엄밀성과 체계성에서 차별화를 보인다. 화이트헤드와 베르그송의 관계도 흥미로운 비교 대상으로 꼽힌다. 화이트헤드는 수학자이자 철학자로서 과정 철학의 창시자 중 한 명인데, 그는 베르그송과 마찬가지로 정적인 실체관을 거부하고 존재를 일련의 과정과 사건의 흐름으로 파악했다. 실제로 화이트헤드는 베르그송의 영향을 직접 인정하기도 했는데, “화이트헤드 자신의 사상 형성에 베르그송이 직접 영향을 주었다”는 진술이 전해진다. 두 철학자는 창조성 개념을 중심에 두고 우주를 이해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베르그송의 엘랑 비탈이 창조적 생명 충동이었다면, 화이트헤드의 철학에서도 “창조성은 존재의 궁극적 원리”로 간주된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논리와 수학의 언어로 정교한 형이상학 체계를 세운 반면, 베르그송은 직관과 비유의 언어로 유동적 형이상학을 전개했다는 차이가 있다. 흥미롭게도, 화이트헤드와 러셀 등 동시대 일부 철학자들은 한때 “베르그송이 순수한 개념 구조를 희생하면서까지 유동적 생성만을 중시한다”고 보고 그를 비판적으로 여겼다. 예컨대 러셀은 베르그송이 지성 대신 본능에 호소함으로써 철학을 과학적 엄밀성에서 멀어지게 한다고 비꼬았고, 화이트헤드도 초기에는 베르그송을 반(反)지성주의자로 간주했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후 화이트헤드는 자신만의 유기체 철학을 발전시켜가면서 베르그송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변용하였다. 두 사람의 공통 과제는 뉴턴식 고정적 세계관을 넘어 시간적 창조성을 철학에 도입하는 것이었고, 화이트헤드는 베르그송의 사유를 자신의 이론으로 통합함으로써 과학과 형이상학의 연결고리를 찾고자 했다. 결국 화이트헤드의 “과정” 개념과 베르그송의 “지속” 개념은 서로 대화 속에서 현대 과정철학의 두 축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화이트헤드와 베르그송의 비교를 통해 우리는 베르그송 철학이 20세기 형이상학에 미친 영향을 가늠할 수 있는데, 현대 과정사상의 많은 주제가 이미 베르그송에게 선취되어 있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들뢰즈는 베르그송 철학을 20세기 후반에 새롭게 부흥시킨 인물로 언급해야 한다. 1966년 들뢰즈는 저서 <베르그송주의>를 통해, 기존의 실존주의나 구조주의 흐름에서 소외되어 있던 베르그송 사상을 혁신적으로 재해석했다. 들뢰즈는 특히 베르그송의 “다양체” 개념에 주목했는데, 이것은 이질성이면서도 연속적인 다수성이라는 베르그송 철학의 핵심 아이디어다. 베르그송의 지속 개념은 바로 질적 다양체로서, 들뢰즈는 이를 자신의 차이와 반복 철학의 토대로 삼았다. 더 나아가 들뢰즈는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 속 “부정의 철학 비판”을 계승하여, 1960년대 프랑스 철학계의 지배적 경향이었던 헤겔주의와 구조주의를 비판하는 데 활용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언어학적 전회와 반헤겔주의가 대두했는데, 들뢰즈는 베르그송이 헤겔적 정립-반정-종합의 변증법에서 벗어나 긍정의 철학을 제시한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실제로 베르그송은 <창조적 진화>에서 “부정은 단지 존재의 그림자일 뿐, 실재하는 것은 지속적 창조뿐”이라는 식으로 헤겔의 부정 개념을 비판했는데, 들뢰즈는 이것이 존재를 다원적 흐름으로 파악하는 자신의 철학과 상통한다고 보았다. 또한 들뢰즈에게 베르그송은 현상학 및 실존철학에 대한 대안이었다.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 이후 프랑스 철학이 독일 현상학에 경도되면서 베르그송은 한때 잊혀졌지만, 들뢰즈는 “베르그송주의는 현상학의 지배를 넘어 삶 그 자체의 문제를 다시 제기한다”고 선언했다. 덕분에 20세기 후반 “베르그송 르네상스”가 일어났고, 베르그송 철학은 현대의 비판적 생명정치, 생성의 철학 등 다양한 흐름에 영감을 주는 사상적 보고로 재평가되었다. 가령 현대 프랑스 철학에서 “되기” 또는 “생성”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경향은, 들뢰즈, 가타리, 푸코 등이 모두 베르그송의 지속과 창조 개념에서 영향을 받은 결과로 볼 수 있다. <창조적 진화>는 진화론과 형이상학의 접점을 개척한 책이기에, 생명철학 및 현대 생물학 철학과의 연계성도 중요한 비평 주제이다. 베르그송 스스로 “현대 과학과 메타피직스의 협력”을 꿈꾸며 이 책을 집필했고, 실제로 그는 생물학의 최신 논의를 면밀히 검토하면서도 과학이 다루지 못하는 “삶의 내부적 의미”를 포착하려 했다. 이는 과학 만능주의와 형이상학적 직관이 서로 보완될 수 있다는 베르그송의 신념에 기반한 것으로, 그는 과학과 형이상학이 서로 상이한 접근을 취하지만 궁극적으로 동일한 실재를 다루므로 서로 보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예컨대, 과학은 진화의 메커니즘을 설명하지만, 형이상학은 진화의 본질적 성격 – 곧 창조와 지속 – 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베르그송은 생물학적 사실들을 철학적 사변으로 연결하여 “진화의 철학”을 구축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대담한 시도였다. 그 결과 <창조적 진화>는 진화론과 형이상학이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여러 논점을 제기했다. 생명의 목적성과 기계성의 문제, 정신과 물질의 교호 관계, 의식의 진화적 의의 등이 그것이다. 베르그송은 전통 형이상학의 언어를 부분적으로 탈피하여 새로운 은유와 이미지를 사용함으로써, 생명 진화를 역동적 과정으로 그려냈다. 이러한 방식은 한편으로 생명론 논쟁에 불을 붙였고, 다른 한편으로 과학을 넘어선 생명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담론을 활성화시켰다. 나아가 베르그송 철학은 현대 철학 전반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20세기 초중반 프랑스의 메를로-퐁티, 사르트르 등은 젊은 시절 베르그송에게 큰 영향을 받았고, 베르그송 철학의 지속, 지각, 신체 개념을 부분적으로 계승했다. 다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들 실존주의 세대는 자신들을 이전 세대와 차별화하기 위해 현상학과 실존철학을 선택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베르그송의 명성이 한동안 퇴색하기도 했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물결 속에서 베르그송은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했다. 들뢰즈 외에도 미셸 푸코는 1966년 “프랑스 철학은 베르그송주의로 되돌아가고 있다”고 언급했고, 앙리 르페브르, 가브리엘 마르셀 등도 베르그송의 영향력을 인정했다. 현대에 와서는 과학철학, 인지과학, 생명윤리 분야에서도 베르그송의 아이디어를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있다. 이를테면 베르그송의 지속 개념은 현대 의식연구에서 주관적 시간 경험의 문제를 다루는 데 선구적 통찰로 평가받고, 엘랑 비탈 개념은 현대 자기조직화 이론이나 복잡계 이론에서 비선형적 창발의 비유로 종종 인용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창조적 진화>는 100년도 넘은 저술임에도 여전히 “살아있는 철학”으로 남아, 학제간 대화 속에 새로운 의미를 덧입혀가고 있다.

<창조적 진화>는 발표 직후부터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은 논쟁적인 저작이었다. 주요 학술지 서평과 논문들에서 제기된 평가들과 논쟁의 쟁점을 몇 가지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 엄청난 인기와 “베르그송 붐”: 이 책은 발간 즉시 학계와 대중의 폭발적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베르그송의 강의에는 사회 각계인사와 철학교수 지망생들은 물론 문인들까지 몰려들었고, 신문과 문예지에서는 연일 베르그송을 다루는 기사가 실렸다. 뉴욕타임스는 1913년 베르그송의 미국 방문 소식을 대대적으로 전했고, 그의 강연에는 브로드웨이 최초의 교통체증이 빚어졌다는 일화도 있다. 이처럼 <창조적 진화>는 단숨에 베르그송을 당대의 사상적 스타로 부각시켰으며, 이러한 인기는 곧 “베르그송 전설”로 불릴 만큼 대중문화와 지식사회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너무 과도한 열광은 “베르그송 유행은 철학을 대중 속으로 희석시킨다”는 우려를 낳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그의 사상을 충분한 비판 없이 추종하는 현상을 “베르그송 숭배”라고 비꼬았고, 이처럼 대중적 인기와 학문적 평가 사이의 간극 자체가 하나의 논쟁 주제가 되었다.

  • 러셀 등 이성주의 진영의 비판: 베르그송에 대한 철학적 반론을 주도한 인물 중 하나는 영국의 수리논리학자이자 철학자인 버트런드 러셀이었다. 러셀은 1912년 논문 <베르그송의 철학?을 통해 베르그송을 신랄하게 비판했는데, 특히 베르그송이 지성보다 본능과 직관을 옹호하는 태도를 문제삼았다. 러셀은 “베르그송은 우리를 꿀벌로 되돌려놓길 원하는 것 같다”고 조롱하며, 인간 이성의 능력을 경시하고 본능적 직관에 의존하는 베르그송 철학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평했다. 또한 러셀은 베르그송 철학이 전통적 분류로 어디에도 속하지 않아 “경험론, 실재론, 관념론 할 것 없이 모든 구분을 가로지른다”고 하면서, 체계적 엄밀함이 부족하고 모호하다고 지적했다. 러셀의 이런 평가는 영미 분석철학 진영 전반의 정서를 대변한 것으로, 이후 오랫동안 베르그송은 영어권 학계에서 비판적 사례로 언급되곤 했다. 즉, 그의 문체는 아름답지만 논증이 명확치 않고, 과학에 대한 비판도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합리론적 비판에 대해 베르그송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러셀이야말로 베르그송의 개념을 피상적으로 이해했다고 반박했다. 예컨대 러셀은 베르그송의 직관을 “비이성적 충동” 정도로 여겼지만, 베르그송 추종자들은 직관도 일종의 지성의 연장선이며 다만 논리 언어로 포착되지 않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이렇듯 지성과 직관을 둘러싼 논쟁은 당시 철학계에서 베르그송 철학을 평가하는 핵심 쟁점 중 하나였다.

  • 진화론적 관점에서의 논쟁: 생물학자들과 과학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창조적 진화>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신비주의적 생기론 대 과학적 기계론이라는 오래된 대립 구도가 베르그송으로 인해 재점화되었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생기론자들이 베르그송에게 호의적이었다. 대표적 사례로, 앞서 언급한 독일의 생물학자 한스 드리슈는 <창조적 진화>를 긍정적으로 서평했고, 자신의 실험적 생기론에 철학적 힘을 실어주는 동지로 베르그송을 환영했다. 실제로 드리슈와 베르그송은 “신생기론”의 양대 인물로 자주 묶여 언급되었고, 1920년대에 미하일 바흐친 등은 두 사람을 동시에 거론하며 생기론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베르그송 철학은 전통 생기론과는 미묘하게 결이 달랐다. 그는 엘랑 비탈을 하나의 비유로 제시했을 뿐, 그것을 엄격한 과학 개념으로 뒷받침하지는 않았다. 베르그송 자신은 “엘랑 비탈은 지시적 개념이 아닌 삶의 이미지”라고 밝히기도 했는데, 이런 모호함은 과학자들의 비판을 사는 원인이 되었다. 분자생물학과 유전학이 발전한 20세기 중엽 이후로는,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생기적 생명력이라는 것은 없으며 유전자라는 조직 행렬만이 존재한다”고 보게 되었고, 베르그송의 생명충동 개념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폄하되었다. 프랑스의 노벨상 수상 생물학자 자크 모노는 1970년 저서 우연과 필연에서 베르그송을 “합리성에 반기를 든 가장 저명한 형이상학적 생기론자”라고 혹평했고, 그의 철학이 과학의 진보를 거스르는 신비주의라고 비난했다. 이러한 비판으로 베르그송은 한동안 과학사와 생물철학 담론에서 소외되었다. 심지어 20세기 중반 교과서적 통념에서는 베르그송의 철학을 “영감은 주었지만 과학에는 기여하지 못한 생기론”으로 일축하기도 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일부 학자들은 베르그송의 사상을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예를 들어 2015년 제임스 디프리스코는 베르그송의 열역학적 아이디어에 주목하여, 엘랑 비탈을 “엔트로피 증가에 대항하는 조직화 경향”으로 해석함으로써 그것을 영적 힘이 아닌 자연의 경향성으로 재규정했다. 이처럼 현대 이론생물학의 관점에서 보면 베르그송의 통찰이 열역학적 개방계의 자기조직화나 비평형계의 창발 등을 선구적으로 직감한 면이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요컨대 과학과 베르그송 철학의 관계는 여전히 토론 중인 주제로, “베르그송은 시대에 뒤떨어진 신비주의자인가, 아니면 당대 과학이 표명하지 못한 통찰을 제공한 철학자인가”라는 물음은 현재진행형 논쟁이라 할 수 있다.

  • 종교 및 형이상학 논쟁: <창조적 진화>는 진화론과 접목된 형이상학인 만큼, 종교적 담론과도 얽혔다. 아이러니하게도, 베르그송은 가톨릭 교회로부터 책이 금서로 지정되는 탄압을 받았다. 1914년 가톨릭 교회는 베르그송의 진화철학이 진화론을 옹호한다는 이유로 그의 저서를 금서 목록에 올렸다. 이는 교회가 여전히 진화론에 거부감을 가졌던 맥락에서 이해되는데, 정작 베르그송의 철학은 유신론적 진화론으로 보기는 애매한 면이 있었다. 그는 엘랑 비탈을 신학적 창조주로 동일시하지 않았고, 오히려 열린 창조를 강조하며 전통적 기독교 교리와 거리를 두는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교회 측에서는 엘랑 비탈 개념 자체를 유물론적 진화론의 변종으로 받아들였고, 이단시했다. 반대로, 후기 베르그송이 1932년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에서 엘랑 비탈을 신비주의적 사랑과 연결짓자, 이번에는 세속 철학자들이 그를 종교적 신비주의로 회귀했다고 비판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렇게 베르그송 철학의 정체 – 과연 엄밀한 철학인가 시적 신비주의인가 – 에 대한 논쟁은 그의 생전부터 존재했다. 그의 문체가 아름답고 은유적이라는 점, 그리고 직관을 옹호한다는 점 때문에, 비판자들은 베르그송을 “시인인가 철학자인가”하고 공격했다. 이에 대해 옹호자들은 베르그송이 과학·철학·문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종합적 사상가라고 반박하며, 그의 저술에 등장하는 은유와 이미지들은 개념을 쉽게 풀기 위한 보조 수단일 뿐 핵심 논증은 탄탄하다고 주장했다. 이 논쟁은 오늘날에도 철학의 문체와 전달 방식에 관한 흥미로운 화두를 던져준다.

종합하면, <창조적 진화>는 격찬과 혹평 양극단의 평가를 받아왔다. 1927년 노벨 문학상 수상식에서는 이 책이 “만물의 상승적 생명력으로 가득 차 인간을 행동으로 몰아붙인다”고 찬양받았고, 윌리엄 제임스, 에띠엔 질송 등은 베르그송을 철학을 시적으로 혁신한 거장으로 평가했다. 반면 20세기 중엽의 논리실증주의자들과 과학자들은 베르그송을 시대착오적 형이상학자로 치부하며 관심 밖에 두었다. 하지만 21세기적 관점에서 볼 때 베르그송의 창조와 지속의 철학은 재조명받고 있다. 현대 철학자들은 베르그송이 제기한 “열린 창조적 진화”라는 문제가 여전히 유효하며, 오히려 기계론과 결정론이 다시 도전을 받는 오늘날 그의 사유가 신선한 통찰을 준다고 본다. 예컨대 포스트모던 과학철학은 결정론적 패러다임을 넘어서려 애쓰는데, 베르그송은 100년 전에 이미 “닫힌 체계로서의 과학”을 비판하며 “열린 진화로서의 삶”을 노래했다는 점에서 시대를 앞선 면이 있다. 또한 인공지능과 생명윤리 논의에서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묻는 목소리가 커지는 상황에서, 베르그송의 지성과 본능 이원화 논의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는 평가도 있다. 끝으로, 들뢰즈 등이 강조했듯 베르그송 철학은 부정성을 배격하고 긍정적 생성만을 강조함으로써 전통 변증법적 사유를 넘어서는 대안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여전히 사상사적 독창성을 지닌다. 이러한 재평가 작업이 이어지면서, <창조적 진화>는 단순한 한 시대의 유행서가 아니라 “계속 읽혀야 할 철학적 고전”으로 자리매김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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