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1930~40년대 나치 독일에서는 의료인이 자신의 환자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한, 역사상 유례없는 비극이 발생하였다(Luty, 2014). 나치 정권은 우생학적 인종위생 이념에 따라, 정신질환자 특히 조현병 환자들을 유전적으로 열등하며 생존 가치가 없는 존재로 낙인 찍고, 이들을 대상으로 한 강제 불임 및 살해 정책을 국가 주도로 실행하였다(Strous, 2007; Torrey & Yolken, 2010). 이 사건은 인류 의학사에서 가장 암울한 사례 중 하나로 평가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대학살에 가려져 대중에게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Haefner, 2010), 정신의학계 내부에서도 오랜 기간 충분한 반성과 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Strous, 2007). 그러나 나치 정신과 의사들의 적극적 가담과 이로 인한 수십만 명의 희생은, 의학이 어떻게 전체주의적 이념에 의해 악용될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참사는 현대 정신의학에 중대한 윤리적 교훈을 남기며, 유사한 사태가 반복되지 않도록 철저한 성찰이 요구된다. 본 논문은 나치 정권하 정신질환자 대상 우생학 정책의 전개, 정신의학계의 역할과 책임, 정책의 집행 구조 및 사회적 배경, 생존자 증언과 윤리적 쟁점을 종합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또한 이 정책이 조현병 유병률에 미친 영향을 둘러싼 학술적 논쟁을 고찰하고, 생물학적 환원주의와 낙인의 상호작용을 살펴볼 것이다. 끝으로 전후 독일 및 국제사회의 반성과 사법적 청산, 현대 정신의학의 윤리 및 제도 변화, 나아가 오늘날 유사한 낙인 메커니즘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통해 정신의학의 미래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나치 독일의 우생학 정책과 정신질환자 말살의 전개
나치 독일의 정신질환자 말살 정책은 20세기 초 우생학 사조와 사회진화론의 영향 아래 형성되었다 (Haefner, 2010). 1920년대 독일 의학자들은 이미 “살 가치 없는 생명” 이라는 개념을 논하며 불치 정신질환자의 안락사를 정당화하려 하였고, 이 사상은 나치 정권에 의해 수용되고 극단화 되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유전적으로 열등한 집단을 제거하여 우월한 인종의 순수성을 유지하려 했으며, 정신질환자는 그 주요 표적이었다 (Haefner, 2010). 1933년 7월, 나치 정권은 ‘유전병 자손 예방법’을 제정하고 광범위한 강제 불임 정책을 공식적으로 시행하였다 (Government, 1933). 해당 법은 선천성 정신박약, 조현병, 조울병, 간질, 헌팅턴병, 유전성 시각·청각장애, 중증 기형 및 알코올중독 등 9가지 유전 질환을 가진 자에 대한 강제 불임 시술을 허용하였다. 이 법의 시행을 위해 설치된 유전건강법정은 형식적인 절차만을 거친 채, 대부분의 신청자에게 불임 시술을 승인하였다. 그 결과, 나치 시기 독일과 점령지에서는 약 40만 명이 불임 시술을 받았고, 이들 중 다수는 조현병 등 정신질환을 가진 환자들이었다. 정신과 의사 에른스트 뤼딘(Ernst Rüdin)은 해당 법의 입안과 해설서 작성에 핵심적으로 참여했으며, 조현병 환자는 예외 없이 불임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Torrey & Yolken, 2010). 뤼딘과 나치 보건 당국자들은 조현병이 유전성이 강하고 생산적 노동이 어렵다는 이유로, 모든 환자를 예외 없이 불임시켜야 한다고 믿었다 (Torrey & Yolken, 2010). 뮐러-힐(Müller-Hill)의 연구에 따르면, 나치 치하 독일에서 조현병 진단을 받은 환자들은 대부분 강제 불임 대상이 되었고, 5년 이상 장기 입원한 환자들은 거의 모두 안락사 위험에 처했다 (Brace, 2001; Torrey & Yolken, 2010). 이처럼 초기 불임 정책부터 이미 정신질환자는 배제와 제거의 표적이 되었던 것이다.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히틀러는 “쓸모없는 생명을 제거하라”는 성경 구절을 인용한 비밀 지령을 내려 성인 환자에 대한 ‘자비로운 죽음’을 허용했으며, 이 조치는 전쟁 개전일인 9월 1일자로 소급 적용되었다 (Strous, 2007). 이 지침에 따라 즉시 실행된 것이 성인 정신질환자와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살해 계획, 즉 ‘T4 작전’이었다(명칭은 베를린 티어가르텐슈트라세 4번지에 위치한 실행본부 주소에서 유래함). Aktion T4 계획에 따라, 독일 전역의 정신병원 및 요양소에 입원한 환자들의 정보가 수집되었으며, 대부분 정신과 의사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이 서류만으로 생사를 결정하였다 (Strous, 2007). 환자들은 특수 제작된 회색 버스를 통해 6개 비밀 안락사 시설로 이송되었으며, 도착 즉시 일산화탄소 가스로 살해되었다(Müller, 2018). 시신은 즉시 화장되었고, 유가족에게는 병사로 가장된 허위 사망진단서가 발송되었다 (Strous, 2007). 1940~41년 사이 약 7만 명의 정신질환자 및 장애인이 T4 프로그램에 따라 살해된 것으로 추산된다 (Müller, 2018). 나치 정권은 이 과정을 극비리에 진행했으나, 대규모 환자 이송과 갑작스러운 사망 통보로 인해 독일 사회 내에 소문이 확산되었고 일부에서는 항의와 저항이 발생하였다. 1941년 8월, 가톨릭교회의 갈렌 주교(Clemens von Galen)는 설교를 통해 안락사 프로그램을 공개적으로 비판했고, 이에 따른 사회적 반발이 커지자 히틀러는 T4 작전의 공식 중단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는 단지 일시적인 전술적 중단이었으며, 실제로는 살해가 비밀리에 계속되었다. T4 작전 중단 이후, ‘야생 안락사(wild euthanasia)’로 불리는 분산적 학살 단계가 전개되어, 지방 정신의료기관에서도 환자 살해가 계속되었다. 종전이 이루어진 1945년까지, 안락사 희생자는 총 20만에서 3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나치 독일의 학살과 정신의학계의 반응
나치 정권은 장애인과 정신질환자 학살에 의료 체계를 조직적으로 활용하였다. 안락사 작전에는 약 45~50명의 의사들이 선발되어 참여하였으며, 이들은 환자 선별, 이송, 살해, 사후 처리 등 모든 과정에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Strous, 2007). 당시 독일 정신의학계는 세계적 권위를 가졌지만, 그 전문성은 윤리적 제어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오히려 나치 정책 실행의 수단이 되었다. 많은 정신과 의사들은 우생학과 인종위생 이념에 적극 동조하며 환자 말살 정책에 협력하였다. 예를 들어 에른스트 뤼딘(Ernst Rüdin)은 국제 우생학 단체 회장을 역임하며, “정신병자의 강제 불임은 종족 보호를 위한 필수 조치”라고 주장하였고, 1933년 불임법 제정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Torrey & Yolken, 2010). 그의 연구와 이념은 나치의 보건정책을 과학적으로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고, 나치는 그가 소속된 독일정신의학연구소에 재정과 인력을 지원하며 협력을 유도하였다 (Torrey & Yolken, 2010). 또한 오이겐 피셔(Eugen Fischer), 오트마르 폰 페어쇼어(Otmar von Verschuer) 등 인종유전학자와 저명한 정신과 교수들 역시 정책 자문에 참여하였고, “무가치한 생명(Ballastexistenzen)”, “열등 유전자 보유자” 등의 용어를 통해 환자 제거를 학술적으로 정당화하였다 (Torrey & Yolken, 2010). 직접적으로 학살에 가담한 정신과 의사는 소수였지만, 침묵하거나 방조한 다수의 의사들도 체제 유지에 기여하였다. 예를 들어 정신과 의사 베르너 하이데(Werner Heyde)와 파울 니체(Paul Nitsche)는 T4 작전의 의료 책임자로서 환자 선별과 실행을 감독하였고, 이르므프리트 에베를(Irmfried Eberl)은 안락사 시설 책임자를 거쳐 트레블링카 수용소의 초대 소장으로 발탁되었다 (Strous, 2007). 에베를은 환자 학살 경험을 바탕으로 트레블링카에서 효율적 대량 학살을 수행한 인물로 평가된다. 안락사 시설에서는 정신과 의사들이 환자 진료를 가장하여 가스실로 인도하고, 살해 후 부검 및 허위 사망진단서를 작성하는 일까지 맡았다 (Strous, 2007). 살해 과정에서 환자의 사인은 심장마비나 폐렴 등으로 조작되었고, 유가족에게는 병사로 위장된 편지가 전달되었다(Strous, 2007). 일부 의사들은 희생자의 뇌를 수집하여 연구 자료나 해부 실습 교재로 활용하기도 했다. 하다마르(Hadamar)와 괴팅겐(Göttingen) 등의 정신병원은 안락사 피해자의 뇌 조직을 병리 표본으로 보관하였으며, 일부는 전후까지 남아 있었다. 학살에 직접 가담한 의사들 뿐 아니라, 대학의 정신과 교수들도 학문적 차원에서 이 정책을 지지하거나 방조하였다. 많은 교수들은 학술 논문과 강연을 통해 “열등 유전자의 제거는 인류 진보에 기여한다” 는 주장을 펼치며, 정책의 이론적 정당성을 제공하였다. 이는 전쟁 기간 동안 독일 정신의학계가 집단적으로 수행한 가장 어두운 실천이었으며, 그 결과 수십만 명의 정신질환자가 동료 의료인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Strous, 2007) 나치 정권하 정신의학계 내부의 조직적 저항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일부 양심적 의사들이 개별적으로 환자를 보호하려 했다는 사례가 있으나, 공개적이고 조직적인 반대는 사실상 없었다(Strous, 2007). 이는 정치적 공포와 동료 집단의 압력 때문이기도 했지만, 많은 의사들이 우생학 이념을 신념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도 설명된다(Haefner, 2010). 1941년 갈렌 주교의 공개 비판 이후 일부 의사들은 작전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관여를 피하고자 했으나, 체제에 저항하기보다는 조용히 물러나는 데 그쳤다. 결국 나치 하의 독일 정신의학계는 윤리적으로 거의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환자 학살은 동료 전문가들에 의해 실행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윤리적 붕괴는 오늘날까지도 독일 정신의학계의 부채의식으로 남아 있으며, 전후 오랜 기간 금기시되었던 자기반성과 청산은 최근에야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나치 정권 하에서 독일 정신과 의사들이 조현병 환자 학살에 침묵하거나 적극 가담한 행위는 표면적 개인의 동기만으론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이를 이해하려면 개인이 전체주의 집단에 포함될 때 벌어지는 무의식적 집단 역동과 정신적 퇴행을 고찰해야 한다. 영국 정신분석가 비온(Wilfred Bion)의 이론은 이러한 집단 수준의 심리를 분석하는 데 유용한 틀을 제공한다. 특히 비온은 집단이 스트레스 하에서 합리적이고 현실 지향적인 ‘과업 집단(work group)’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원초적 가정에 따라 움직이는 ‘기본 가정 집단’(basic assumption group)으로 퇴행할 수 있다고 보았다 (Bion, 1961). 나치 체제는 정신과 의사들을 바로 이러한 기본 가정 집단 상태로 끌어들였고, 그 결과 그들의 비판적 사고능력과 윤리적 판단력은 마비되었다고 볼 수 있다. 비온의 이론에 기대어 당시 나치 체제하에서 침묵적 동조를 한 이들의 행동을 다음과 같이 가정해볼 수 있다. 첫째, 의존 기본 가정에 따른 집단 동조 현상을 들 수 있다. 비온에 따르면 집단은 때때로 전능한 리더에게 의존하며 자기 생각을 포기하는 퇴행을 보인다 (Bion, 1961). 나치 정권 하에서 많은 의사들은 히틀러와 나치 이데올로기를 절대시하고 거기에 의존함으로써, 자신들의 초자아 기능을 지도자에게 양도해 버렸다. 다시 말해, 윤리적 판단을 스스로 내리는 대신 “지도자가 옳다고 하는 것은 모두 옳다”는 식의 무의식적 신념이 자리 잡았다 (Roth, 2013). 집단이 권위주의적 리더를 이상화 하면, 그 리더의 명령과 이념은 의심 없이 “진리”로 수용되고, 개인은 더 이상 자기 판단을 실행하지 않게 된다. 실제로 전체주의 집단에서 지도자는 일종의 “전지전능한 메시아”로 떠받들어지며(Bion, 1961의 지적), 개인들은 그 메시아적 지도자가 제시하는 미래 유토피아 환상에 몰입한다. 이러한 맹목적 의존 속에서 독일 정신과 의사들 역시 히틀러를 절대선으로 동일시하고(공격자와의 동일시), 그의 자아이상을 내면화함으로써 자신의 윤리적 의문을 유예시켰다. 집단적 이상화와 동일시를 통해 이들은 마치 “새로운 정체성”을 얻은 듯한 심리에 빠졌고, 그로 인해 오만감과 현실에 대한 왜곡이 발생했다. 한나 아렌트가 지적했듯이, 이러한 무사유의 상태야말로 악의 평범성의 토양이다 (Arendt, 2018). 다시 말해, 각 개인이 아무런 생각이 없는 상태에 빠져들면서 비판적 양심은 흐려지고, 상부로부터 주입된 관념을 그대로 실행하는 도구적 자아로 기능하게 된다 (Bion & Hinshelwood, 2023). 둘째, 집단 방어기제로서의 투사와 분열 메커니즘을 들 수 있다. 비온을 비롯한 대상관계론적 관점에서는 전체주의 사회에서 집단적 투사가 광범위하게 일어난다고 본다 (Roth, 2013). 나치 이데올로기는 정신질환자를 “민족 공동체의 삶에 부정적인 요소”로 낙인찍었는데, 이는 집단이 자기내부의 불안과 부정성을 환자들에게 투사적 동일시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독일 사회와 의료진은 자신들의 무의식적 열등감이나 취약성을 조현병 환자들에게 뒤집어씌우고, 그들을 사회로부터 격리·제거함으로써 스스로를 순수하고 건강한 집단으로 보존하고자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편집-분열적 심리가 두드러지는데, 세상을 철저히 선/악의 이분법으로 바라보는 절대적 도덕관이 형성되고, 환자들은 악이나 불결함의 화신으로 탈인간화되었다. 실제로 나치는 정신장애인을 “살 가치가 없는 생명”(Lebensunwertes Leben)으로 규정했는데, 이는 환자를 인간 공동체의 일부로 보지 않는 극단적 분열의 사례다 (Chalmers, 2011). 집단적 분열과 투사의 결과로 공감의 급속한 철회가 일어나고 환자에 대한 감정적 둔마가 진행된다. 무의식적으로 환자들은 집단이 제거해야 할 악을 담는 그릇(container)으로 취급되었고, 그들에게 향하는 잔혹한 폭력조차도 대의명분으로 미화되었다 (Roth, 2013). 요컨대 환자들은 집단의 부정적 감정과 공격성을 떠맡는 희생양이 되었고, 그들을 제거하는 행위는 집단 내부의 불안과 죄책감을 해소하는 의식화되지 않은 의례가 되었던 것이다. 셋째, 이러한 집단 상황에서 개인들은 심리적 퇴행을 일으켜 원시적 공격성에 동원되기 쉬워진다. 비온은 집단에서 공격-도피 기본 가정(attack-flight assumption)이 지배적이 될 경우, 구성원들이 마치 위협에 맞서 싸우거나 도망치는 원시 부대처럼 행동하게 된다고 보았다 (Bion, 1961). 나치 정권은 의사들을 “민족의 건강을 위협하는 유전적 열등집단에 맞서 싸우는 전사”로 호명함으로써, 이 기본 가정에 불을 붙였다. 집단적으로 볼 때 이는 공격적 동일시의 한 형태로 나타났는데, 많은 정신과 의사들이 자신들을 가해자(권력자)와 동일시하여 공격자의 시각으로 세계를 보게 된 것이다. 안나 프로이트가 논한 “가해자와의 동일시”는 원래 불안에 대한 방어기제지만, 나치 체제하 의사들의 경우에도 유사한 심리가 관찰된다 (Freud, 2018). 즉, 이들은 체제에 순응하고 적극 가담함으로써 자신이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의 편에 서 있다는 환상을 유지했고, 이를 통해 오히려 심리적 안정과 우월감을 얻었다. 그 결과 개인의 도덕적 판단은 집단의 병리적 논리에 합류하게 되었고, 윤리적 죄책감은 부인되거나 합리화되었다. 예컨대 많은 의사들은 학살을 생물학적 정화 작업이나 환자들을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자비로운 죽음으로 미화하며 스스로를 속였는데, 이는 현실과 진실을 연결하는 사고 과정에 대한 공격으로 해석할 수 있다 (Bion, 2013). 학살 행위의 잔혹한 실체와 자기 역할에 대한 인식을 연결 짓는 고리를 파괴함으로써, 의사들은 인지적 부조화와 양심의 가책을 차단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의미 있는 사고와 감정의 연결고리가 끊어지면, 사람은 끔찍한 행위를 하면서도 그것을 제대로 생각하거나 느끼지 않게 된다. 이러한 상태에서 잔인한 행동이 일상적 업무로 둔갑하고, 행위자는 자기 행위의 파괴성을 자각하지 못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된다. 결론적으로, 나치 체제하에서 독일 정신과 의사들이 저지른 집단 살해 가담은 개인적 악의나 사이코패스적 특성 때문이 아니라, 집단 무의식의 소용돌이 속에서 야기된 심리적 동조와 퇴행의 산물로 이해될 수 있다. 비온 이론에 비추어보면, 이들은 정상적인 치료자로서의 “과업 수행 집단” 기능을 상실하고 전체주의 이념에 몰입한 “기본 가정 집단”의 일원으로 변모하였다. 그 결과 초자아적 판단 능력은 지도자에게 위탁되고, 공감과 개별적 사고는 마비되었으며, 원시적 분열-투사적 환상이 지배하는 심리적 공간에서 잔혹한 행동도 당연시될 수 있었다. 집단이 제공하는 유토피아 환상과 병적인 도덕 이분법 속에서, 개별 의사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악이 아닌 선으로 느꼈을 것이다. 이러한 분석은 인류 역사상 유사한 집단 범죄가 어떻게 가능해지는지에 대한 하나의 심층적 설명을 제시하며, 집단 상황에서 전문가조차도 무의식적 동조와 퇴행을 통해 잔혹한 행위의 공모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볼 때, 전체주의 체제는 하나의 거대한 병리적 정신구조처럼 기능하여 개인들을 동화시키고, 결국 아무 생각 없는 동조가 난무하는 구조를 만들어낸 것이다 (Roth, 2013). 이는 곧 인간 개개인의 양심과 사고를 마비시키는 집단 광기로 이어지며, 그 속에서 윤리적 판단은 끝없이 유예되다가 끝내 실종되고 만 것이다.
유병율과 유전적 제거 효과에 대한 논쟁
나치의 환자 제거 정책은 “열등 유전자”를 제거하면 조현병과 같은 질환의 유병률이 감소할 것이라는 과학적 전제에 기초하고 있었다(Torrey & Yolken, 2010). 에른스트 뤼딘을 포함한 나치 정신과 의사들은 조현병을 멘델 유전법칙에 따른 단일유전병으로 간주하며, 이를 근절하기 위한 대규모 불임 및 살해 정책을 과학적 실험처럼 시행하였다(Burleigh, 1997; Torrey & Yolken, 2010). 그러나 현대 유전학에 따르면 조현병은 단일 유전자가 아닌 다유전자성과 환경 요인의 상호작용에 의해 발현되는 복합질환이며, 나치 시대에는 이러한 과학적 통찰이 결여되어 있었다. 뤼딘의 연구조차 유전 양상이 단순하지 않다는 결과를 보였으나, 그는 기대에 어긋난 결과를 묵살하거나 왜곡하고 표본을 확대해 의도한 결론을 도출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Yudell, 2015). 이처럼 과학이 아닌 이념이 우선되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잘못된 유전론은 조현병 환자에 대한 폭력적 제거 정책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었다. 나치의 조현병 제거 시도는 근본적으로 과학적 근거가 결여된 채 시행되었으며, 오히려 현대 유전학의 관점에서 볼 때 큰 오류였다. 실제로 나치는 1934년부터 1945년 사이 약 13만 명의 조현병 환자가 불임 시술을 받았고, 10만 명이 살해되었으며, 중복을 감안하더라도 총 22~26만 명에 달하는 환자가 제거된 것으로 추산된다 (Haefner, 2010; Torrey & Yolken, 2010). 당시 독일 내 조현병 환자 수가 약 30만 명이었음을 고려할 때, 70% 이상이 불임 또는 살해되어 유전자 풀에서 제거된 셈이다 (Haefner, 2010; Torrey & Yolken, 2010). 조현병 유병률 감소라는 나치의 기대와는 달리, 전후 연구들은 유의미한 발병률 감소가 관찰되지 않았다고 보고하였다 (R. D. Strous, 2010). 전쟁 직후 독일에서는 조현병 유병률이 일시적으로 감소한 것으로 보였으나, 이는 대규모 학살로 인해 환자 수가 물리적으로 줄어든 결과였다. 이후 신규 발병률은 오히려 높게 나타났으며, 이는 나치의 유전적 제거 시도가 조현병의 장기적 발생률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음을 시사한다(Torrey & Yolken, 2010). 예컨대 1960년대 중반 만하임 지역의 역학조사에 따르면, 조현병의 연간 발병률은 인구 10만 명당 53.6명으로, 당시 국제 평균의 두 배에 달하는 높은 수치였다 (Haefner, 2010; Torrey & Yolken, 2010). 물론 진단 기준과 조사 방법의 차이를 고려할 필요는 있지만, 최소한 한 세대가 지난 시점에도 조현병은 여전히 높은 발생률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는 ‘열등 유전자 제거’를 통한 질병 박멸이라는 나치의 전제가 과학적으로 잘못되었음을 시사한다. 전후 유전학 연구는 조현병이 유전적 소인과 환경 요인의 복합적 상호작용에 의해 발생한다는 점을 밝혀내며, 나치의 단선적 유전주의가 얼마나 과학적 근거가 부족했는지를 보여주었다. 또한 환자들을 물리적으로 제거하더라도, 해당 유전자는 가족과 혈연 집단 내에 남아 있기 때문에 단기적인 제거 시도로는 유병률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기 어렵다. 또한, 전쟁 트라우마, 영양실조, 피난 등 극심한 환경을 겪은 인구에서 정신증적 장애가 증가했고, 종전 직후 정신의료기관은 환자들로 과밀해졌다는 보고도 있다(McMahon et al., 2023). 이러한 점을 종합할 때, 나치의 대규모 유전 제거 시도는 “궁극의 유전 실험”이었지만, 조현병 발병률 감소라는 목표 달성에는 실패했다(R. D. Strous, 2010).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정신질환의 원인을 오직 생물학적 요인에만 환원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공학적 개입을 시도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보여준다. 정신질환은 복합적인 인간현상임에도 불구하고, 나치는 이를 단순한 유전적 결함으로 간주하며 폭력적 제거 정책을 시행했고, 이는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의도한 목표를 전혀 달성하지 못했다.
생물학적 환원주의와 낙인
나치 정권하 독일의 정신의학계는 극단적 생물학주의와 결정론에 깊이 물들어 있었다. 정신질환자는 고통받는 인간이 아니라, ‘유전자 풀’에 해를 끼치는 생물학적 존재로 간주되었다(Haefner, 2010; Kevles, 1999). 이러한 시각은 환자의 존엄성과 고통을 배제한 채, 그가 사회 전체에 미칠 해악만을 강조하였다. 이는 생물학적 특성만으로 인간의 가치를 판단하려는 사고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낙인 이론에 따르면, 사회적 낙인은 개인의 자기 정체성과 행동에 영향을 주며, 나치 시대 정신질환자들은 ‘살 가치 없는 생명’이라는 낙인으로 인해 보호받지 못한 채 학살당했다. 나치 정신의학은 정신질환을 유전자와 뇌의 문제로만 환원하고, 사회적·환경적 맥락을 철저히 배제하였다. 이러한 일면적 생물학주의는 공감과 이해를 마비시키며, 환자를 ‘문제 유전자 보유자’로 대상화하게 만들었다. 결국 생물학적 결정론은 극단적 낙인으로 이어졌고, 과학의 이름 아래 인간성을 말살하는 결과를 낳았다 (Kevles, 1999; Kvaale et al., 2013). 당시 선전물은 정신병원을 ‘민족의 쓰레기통(Die rassenhygienische Kehrichtschübe)’이라 부르며, 환자를 민족 공동체에 대한 위협으로 묘사하였다 (Strous, 2007). 이러한 선동 속에서 의사들은 환자를 ‘제거되어야 할 해로운 존재’로 간주하며 학살을 실행하였다. 이에 부응하여 의사들은 환자를 “사회에서 제거해야 할 유해생물”로 간주하고 의학적 살인을 집행했다. 과학의 이름으로 자행된 이러한 인간성 말살은 의학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정신질환에 대한 생물학적 설명이 낙인을 줄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낙인을 심화시킬 수도 있다. 최근 메타분석에 메타분석에 따르면, 생물학적 설명은 비난을 줄이지만 동시에 회복 가능성에 대한 비관과 사회적 거리감을 심화 시킨다(Kvaale et al., 2013). 이는 생물학적 환원주의가 낙인의 또 다른 형태—두려움, 격리—를 유발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비판적 정신의학 진영에서는 뇌나 유전자 중심의 접근이 인간의 복합성을 간과하고 편견을 고착 시킬 수 있다고 지적한다 (Thachuk, 2011). 나치 사례는 생물학적 설명이 윤리적 경계 없이 활용될 때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현대 정신의학에서 생물학화(biomedicalization) 경향이 강화됨에 따라, 유전자 결정론이 다시 낙인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주의가 요구된다(Kotsyubinsky & Kotsyubinsky, 2023). 이에 따라 학계는 생물학-심리-사회적 통합 관점의 유지를 강조하고, 생물학적 환원주의에 대한 비판적 경계를 촉구하고 있다
기억과 책임, 그리고 현대 정신의학의 과제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나치 의료 범죄에 대한 재판이 연합군과 독일 법정에서 열렸다. 1945년 10월 미국은 하다마르 재판을 통해 정신병원 내 환자 학살에 가담한 의료진을 기소하였고, 7명 중 3명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어 1946~1947년 뉘른베르크 의사재판에서는 안락사 프로그램에 관여한 카를 브란트(Karl Brandt) 등 4명이 기소되었고, 이 중 3명이 사형되었다. 동시기 소련 점령지 드레스덴에서도 T4 실행 책임자였던 정신과 의사 파울 니체 등이 재판을 통해 처형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가담 의사들은 책임을 회피한 채 의료계로 복귀하였고, 서독 정부는 처벌보다 체제 안정과 의료 재건을 우선시하였다(Strous, 2007; Rael D Strous, 2010). 그 결과, 많은 가해 의사들은 신분을 숨기고 학계 및 병원에서 활동을 이어갔으며, 일부는 교수나 전문가로 재등장하였다 (Lindert et al., 2012). 예를 들어 T4 작전 핵심 인물인 베르너 하이데는 전후 가명을 사용하며 숨어 지내다 1959년 체포되었고, 재판 직전 자살하였다. 이처럼 책임 회피와 은폐로 인해 독일 정신의학계의 자기반성과 개혁은 오랫동안 지연되었다. 1950년대 이후 독일 내에서 관련 사건이 점차 공론화되었고, 1980년대부터 학계와 언론을 통해 나치 의사들의 범죄가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1989년 서독 의사협회장이 처음으로 공식 사과를 표명하였고, 1990년대 이후 일부 의과대학은 관련 역사 교육을 도입하였다. 특히 2010년, 독일정신의학회는 창립 160주년을 맞아 나치 시대의 가담 사실을 인정하며 공식 사죄 성명을 발표하였다(Gale, 2013). 당시 학회장 프랑크 슈나이더는 “독일 정신의학회와 그 의사들이 피해자들에게 끼친 고통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한다”며, 사과가 ‘부끄럽도록 늦었다’는 점도 함께 인정하였다(Müller, 2018). 같은 해 학회는 “기록되고, 박해당하고, 말살되다”라는 제목의 순회 전시회를 개최하며 나치 정신의학 범죄를 대중에 공개하였다(Müller 2018). 해당 전시는 베를린 티어가르텐슈트라세 4번지(과거 T4 본부 자리)에 위치한 추모관을 포함해 독일 각지를 순회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한편 독일 정부는 1980~90년대에 걸쳐 강제 불임 피해자에게 배상을 실시하며 제도적 반성을 병행하였다. 나치 의학의 범죄는 국제 사회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고, 전후 세계 의료윤리 체계의 형성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48년 세계의사협회는 제네바 선언을 통해 “인류에 봉사하고 생명을 최상의 존중으로 다루겠다”는 새로운 윤리 강령을 채택하였다. 1975년 세계정신의학회는 하와이 선언을 통해 정신과 의사의 윤리 원칙을 제시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환자 인권 침해를 허용하지 않아야 함을 명시하였다. 나치 우생학에 대한 반성은 각국의 과거 우생학 정책 재조명으로 이어졌다.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 미국, 일본 등은 20세기 중반까지 강제 불임이나 격리 정책을 시행해왔으며, 1990년대 이후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보상에 나섰다. 스웨덴은 1935~1975년 약 6만 명을 불임시킨 사실이 1997년 공개되자 정부가 공식 사과하고 피해자 배상을 실시하였다(Tydén, 2002). 일본은 1948년 우생보호법 제정 이후 약 1만6천 명이 불임 수술을 받았고, 해당 법은 1996년까지 시행되었다(Hovhannisyan, 2021). 일본 정부는 오랜 기간 책임을 부인하다가, 2019년 피해자들에게 공식 사과하고 1인당 320만 엔의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하였다. 미국에서는 32개 주에서 우생학적 강제 불임법을 시행하였으며, 약 6만 명이 시술을 받았다. 21세기에 들어 일부 주는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보상을 시행하였다(Reilly, 2015). 이처럼 나치의 사례는 우생학적 국가 개입의 위험성을 전 세계에 각인 시켰으며, 각국은 과거를 재조명하고 제도를 개선하는 계기로 삼았다. 나치 정신의학의 교훈은 현대 의료윤리 및 제도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대표적으로 인체실험에 관한 뉘른베르크 강령과 헬싱키 선언, 그리고 강제 불임과 유전학적 차별에 대비한 각국의 법·제도 정비를 들 수 있다. 미국은 2008년 ‘유전정보 비차별법(GINA)’을 제정하여 고용이나 보험에서 유전적 정보로 차별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이는 개인의 유전적 소인이 사회적 불이익으로 연결되지 않게 하려는 안전장치다. 그러나 법과 별개로, 사회적 인식과 윤리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유전정보 활용은 언제든 차별로 이어질 수 있다. 예컨대 일부 보험사는 비공식적으로 고객의 가계력이나 DNA 데이터를 입수해 보험료에 반영하려 한다는 의혹도 있고, 유전자 편집 기술의 발전으로 “맞춤아기” 논쟁도 현실화되고 있다. 이런 흐름에 대해 세계보건기구(WHO) 등은 기술의 진보가 나치식 우생학의 재현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나치 정신의학의 비극에 대한 반성을 토대로, 현대 정신의학은 향후 몇 가지 핵심적인 의료윤리 원칙을 더욱 구체적으로 견지해야 한다. 첫째로, 인간 존엄성의 절대적 존중이다. 환자는 어떤 경우에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받아야 하며, 그 생명과 가치가 어떠한 이념이나 사회적 목적보다 우선한다. 나치 의학은 ‘유전적 열등’이라는 명분 아래 인간을 도구화한 극단적 사례였고, 그 교훈은 모든 치료 행위의 최우선 기준이 환자의 존엄과 권리임을 일깨운다(O’Mathuna, 2006). 둘째로, 환자 인권과 자기결정권의 철저한 보호이다. 환자의 자율성 및 기본 인권은 전쟁이나 사회적 위기 속에서도 결코 유예되어서는 안 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제정된 뉘른베르크 강령, 세계의사협회 제네바 선언, 세계정신의학회 하와이 선언 등 국제 의료윤리 강령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의료인이 환자의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천명하고 있다. 셋째로, 정신의료 정책과 임상에서 당사자 참여를 보장하는 것이다. “우리 없이 우리에 관한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구호처럼, 정신질환 당사자와 가족의 목소리가 의사결정에 실질적으로 반영될 때 정책과 치료과정이 인간 존중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과거 나치 정신의학에서는 환자들이 철저히 배제된 채 객체화 되었기에 극단적 폭력이 가능했음을 돌아볼 때, 앞으로는 정신건강 영역에서 당사자의 참여와 권한 강화를 통해 투명성과 윤리성을 담보해야 한다. 넷째로, 윤리 교육의 내실화와 의료 전문직 문화의 개선이다. 나치 정신과 의사들의 윤리적 붕괴는 궁극적으로 의료인의 가치관 부재와 집단윤리 실패에서 비롯되었다고 평가된다 (Strous, 2007). 따라서 현대의 정신과 의사는 전문적 지식과 기술 뿐 아니라 환자의 인권을 옹호하고 부당한 명령에 저항할 수 있는 도덕적 용기를 함양하도록 체계적인 윤리 교육을 받아야 한다 (McMahon et al., 2023). 이를 위해 의료 현장에서도 지속적인 윤리 토론과 성찰의 장을 마련하고, 윤리 강령을 형식적으로 넘어 실제 행동원칙으로 정착시키는 노력이 요구된다. 궁극적으로 정신의학의 미래는 첨단 기술 발전보다도 이러한 윤리적 문화의 확립에 달려 있으며, 환자에 대한 존중과 인권 수호라는 가치 지향이 확고할 때 과거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Lindert et al., 2012; O’Mathuna, 2006). 위에서 살핀 현상들은 각기 맥락과 정도는 다르지만, 궁극적으로 사회가 얼마나 취약계층을 포용하느냐의 문제로 모아볼 수 있다. 정신질환자와 장애인, 빈곤층에 대한 차별과 낙인은 여전히 잔존하며, 때로는 제도와 과학의 모습으로 위장되기도 한다. 나치 시대의 비극은 극단적 특수성 속에서도 보편적 경고를 담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반성과 교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과학이든 정책이든 인간의 존엄과 연민을 상실할 때, 언제든 폭주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나치 시대는 명백히 보여준다. 현대사회는 공개적인 학살은 용납하지 않지만, 더 은밀하고 제도화된 방식으로 ‘불편한 존재’를 배제하려는 유혹에 직면해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인권 감수성과 윤리교육의 강화, 그리고 당사자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참여적 정책이 필수적이다. “우리 없는 우리의 정책은 없다(Nothing about us without us)”는 구호처럼, 정신질환자에 관한 정책 역시 당사자의 참여와 동의가 핵심 원칙으로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결론
결론적으로, 나치 정신의학의 비극은 윤리를 상실한 과학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경고하며, 정신의학의 미래는 기술이 아니라 윤리적 문화의 정착에 달려 있음을 일깨운다. 정신의학의 미래는 기술이 아니라 윤리적 문화의 정착에 달려 있으며, 의료인은 환자를 존엄한 인간으로 대하며, 환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인권을 수호하는 실천을 통해 과거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생학적 사고가 재등장하지 않도록, 대중 교육과 언론, 학계는 올바른 인식을 확산시키고, 환자와 회복자의 서사가 사회적 공감대 속에 존중 받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할 것이다. 독일 베를린의 티어가르텐슈트라세 4번지에 위치한 나치 정신질환자 안락사 희생자 추모비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들은 왜 죽어야 했는가?”(Warum mussten sie sterben?)”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하며, 같은 질문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역사를 기억하고 성찰해야 한다. 역사를 잊지 않는 지혜와 인간에 대한 존중—이것이 나치 정신의학이 오늘날 우리에게 남긴 과제이며, 정신의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