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즈 야스지로는 일본 영화사의 거장으로, 일상의 가족사를 담담하면서도 깊이 있게 그려낸 독자적인 영화 세계로 유명하다. 그는 1920년대에 영화 경력을 시작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특히 전후 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특유의 정제된 스타일과 가족 드라마에 집중한 작품들로 국제적인 찬사를 받았다. 1949년 작품인 <만춘>은 이러한 오즈의 예술 세계에서 전환점을 이룬 걸작으로 평가된다. 일본 패전 직후의 사회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오즈가 전쟁 후 처음으로 선보인 본격적인 현대 가족극의 정수이자, 이후 그의 1950년대 작품들에 지속될 미학과 주제 의식을 확립한 작품이다. 실제로 <만춘>은 일본에서 개봉 당시 키네마 준보 등 평단의 극찬을 받았고 1949년 최고의 영화로 선정되었으며, 훗날 서구에 소개된 이후로도 오즈 영화 가운데 “가장 완벽한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만춘>이 제작된 1949년의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패배 후 연합군 군정 하에 급격한 사회 변화를 겪고 있었다. 전통적인 생활양식과 가치관은 서구적 민주주의와 개인주의의 물결 속에서 도전을 받았고, 가족 제도와 결혼에 대한 관념 역시 빠르게 변화했다. 미군 점령군의 검열 당국은 구시대적이라고 간주된 요소들을 일본 영화에서 억제하려 했는데, 특히 ‘중매 결혼’을 봉건적 제도라 하여 부정적으로 보았다. <만춘>은 아버지와 친척들이 주선한 약혼을 통해 딸 노리코가 결혼하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고 있어, 검열의 제약을 받을 소지가 있었다. 실제로 각본 단계에서는 노리코의 결혼이 가족의 결정에 따른 것으로 묘사되었으나, 검열의 지적을 받아 최종 영화에서는 그녀 스스로 결혼을 수락하는 형식으로 수정되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극중에서 전통을 미화하거나 미군 점령을 부정적으로 암시하는 장면들 역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그럼에도 오즈는 이 작품에 당대 일본 사회의 전통과 근대화 사이의 긴장, 세대 간의 갈등을 우아하게 담아내어, 검열을 피해가면서도 깊은 울림을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만춘>이 겉보기에는 평범한 부녀 이야기이지만, 그 이면에는 전후 일본인의 정서와 가치관 변화가 깃들어 있다.
<만춘>은 도쿄 인근 가마쿠라에 사는 아버지 소미야 슈키치와 혼기를 놓친 그의 딸 노리코의 일상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두 부녀는 소박하고도 단란한 생활을 꾸려가며 서로에게 깊은 유대를 느끼고 있다. 영화는 일본의 전통 문화 향기가 물씬 풍기는 다도 모임 장면으로 시작한다. 다다미 방에 정좌한 노리코와 이모 마사는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차를 기다리며 담소를 나누는데, 대화의 내용은 다소 엉뚱하게도 해진 바지를 기우는 이야기다. 이처럼 영화는 첫 장면부터 전통적인 의식의 공간에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를 교차시켜, 옛것과 새로운 것이 공존하는 당시의 생활 단면을 보여준다. 다도 모임이 끝난 뒤 등장하는 슈키치와 노리코 부녀의 집안 풍경은 정갈하면서도 평범하다. 다다미 거실에 나란히 앉아 차를 마시는 부녀의 모습은 안정적인 구도로 담기는데, 낮은 카메라는 마치 같은 방 안에서 두 사람을 바라보는 관객을 연상시킨다. 화면에는 여유롭고 단촐한 생활 소품들이 배치되고, 창 너머로는 조용한 마을 풍경이 비친다. 이 모든 미쟝센이 전하는 느낌은 평온함과 따뜻함이며, 관객은 이 가정의 편안한 공기를 함께 호흡하게 된다. 노리코는 가사와 부친 돌보기를 자기 삶의 행복으로 여기며 지내고 있지만, 주변인은 그녀의 혼기를 걱정한다. 노리코는 도쿄에 나갔다가 아버지의 친구 오노데라를 우연히 만나 그의 재혼 소식을 듣게 된다. 그가 새 아내를 맞았다는 말에 노리코는 웃으며 농담조로 대꾸하지만, “더러운 느낌이 든다”며 재혼에 대한 불쾌감을 드러낸다. 아버지 슈키치는 노리코의 그런 반응을 놀리듯 가볍게 타이르며 웃어넘긴다. 이 장면은 노리코의 속마음을 드러내는데, 즉 그녀는 부모 세대의 재혼이나 자신의 결혼 같은 변화에 본능적 거부감을 갖고 있음을 암시한다. 사회 통념상 스물일곱 살은 결혼을 해야 할 시기이지만, 노리코는 현재 생활에 만족하고 있으며 결혼으로 인한 변화가 오히려 두렵거나 불쾌한 것이다. 이모인 마사는 노리코의 혼사를 적극 주선하려 한다. 마사는 오랜 독신으로 남아있는 조카가 안쓰러운 나머지, 오지랖 넓게도 여기저기 후보자를 물색한다. 그녀는 처음엔 노리코와 친분이 있는 젊은 의학도 핫토리를 떠올리지만, 이미 그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헛물켜는 소동을 벌인다. 곧이어 마사는 유망한 신랑감으로 도쿄 대학을 나온 엘리트 청년 사타케를 소개하려 한다. 사타케에 대해 마사는 “생김새가 미국 영화배우 게리 쿠퍼를 빼닮았다”는 우스갯소리를 하며 노리코의 흥미를 끌려 한다. 그러나 노리코는 아버지를 혼자 두고 결혼할 수 없다는 이유를 대며 맞선을 완강히 거절한다. 그녀에겐 자신이 시집가 버리면 홀로 남을 아버지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과, 현재의 안정된 생활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이 뒤섞여 있다. 노리코의 이러한 태도에 아버지와 이모는 은근한 위기감을 느낀다. 마사는 심지어 “사실 너희 아버지에게도 중매 이야기가 있다”고 노리코에게 귀띔하는데, 과부인 미와라는 젊은 여자와 슈키치의 재혼을 추진 중이라고 말한다. 이는 반은 농담이자 반은 노리코를 자극하기 위한 심리전이다. 실제로 슈키치 본인은 재혼 생각이 없지만, 딸을 독립시키기 위해서라면 그런 거짓말이라도 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이러한 상황 설정은 영화 내에서 일종의 희극적 장치로도 작용한다. 다가올 갈등의 씨앗을 심어두되, 심각한 대립이 아니라 가족 간의 속임수와 오해로 풀어가며 부드러운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이다. 영화의 중반부에는 인상적인 야외 장면들이 등장한다. 하나는 노리코가 아버지의 제자였던 핫토리와 자전거를 타고 해변 근처를 달리는 시퀀스이다. 둘은 바닷가 도로를 따라 나란히 자전거를 몰고 가는데, 카메라는 이례적으로 움직이는 트래킹 숏으로 그들을 따라간다. 오즈 작품에서 드물게 볼 수 있는 카메라 이동이기에 이 장면은 특히 눈길을 끈다. 푸른 하늘과 바다를 배경으로 달리는 청춘 남녀의 모습은 잠시 영화 전체의 느긋한 리듬에 산뜻함을 더한다. 이때 화면 한쪽에는 커다란 코카콜라 간판이 영어로 선명하게 보이는데, 전통적인 해안 도로 풍경 속에 불쑥 등장한 이 서양 광고는 당시 일본 사회에 스며든 미국 문화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오즈는 이 코카콜라 로고를 통해 점령기 미국 자본주의의 침투를 암시했다고 해석되며, 이후 세대의 영화인들이 그의 선구적 표현을 언급하곤 했다. 자전거 장면에서 노리코와 핫토리는 한때 결혼 상대로 거론되었던 사이이지만 서로 친구로서 편하게 어울릴 뿐이고, 노리코도 밝은 미소를 띠며 오랜만에 또래 청년과 자유로운 한때를 즐긴다. 이 장면은 노리코의 젊음과 즐거움이 드러나는 순간인 동시에, 현대 일본의 새로운 풍속이 전통적 풍경과 조우하는 순간으로 영화의 테마를 시각화한다. 또 다른 중요한 장면은 전통 예술 공연인 노 관람 시퀀스다. 아버지와 함께 노 가부키 공연을 보러 간 노리코는 객석에서 무대를 바라보지만, 그녀의 시선은 곧 근처에 앉은 미와 부인에게 향한다. 공연 중 휴식 시간에 슈키치가 미와 부인과 다정히 인사를 나누자, 노리코는 순간 표정이 굳고 질투 섞인 불편함을 드러낸다. 아무 말 없이 살짝 굳어지는 노리코의 얼굴과 시선의 변화로만 그녀의 감정을 전달하는 이 미묘한 연출은, 관객으로 하여금 노리코 내면의 동요를 직감하게 한다. 전통 예능의 장엄한 소리와 동작이 흐르는 공간에서, 딸은 처음으로 아버지를 다른 여성에게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을 체험하는 것이다. 노 공연의 북소리와 창이 배경음으로 깔린 채, 오즈는 노리코의 옆모습과 아버지-미와의 뒷모습 등을 절제된 숏으로 교차시킨다. 이 장면 이후 슈키치는 딸에게 본격적으로 맞선 볼 것을 권유하며, 자신도 곧 미와 부인과 재혼할 생각임을 넌지시 알린다. 결국 노리코는 충격을 받지만 겉으로는 묵묵히 받아들이고, 마침내 사타케와의 만남을 승낙할 결심을 한다. 노 가극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노리코의 운명이 큰 전환점을 맞는 순간이다. 노리코가 결혼을 받아들이겠다고 결정한 후, 슈키치는 딸과 함께 결혼 전에 마지막 부녀 여행을 떠난다. 두 사람은 교토로 1박 여행을 가서 절과 정원을 관광하고 옛 친구 온도라 부부를 만난다. 교토의 고즈넉한 사찰 풍경과 선 정원의 이미지들은 영화 후반에 이르러 더욱 빈도 높게 삽입되는데, 이는 일본의 전통문화 유산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교토 료안지 석정의 장중한 정경, 고즈넉한 고찰의 지붕과 고탑들은 부녀의 정서를 둘러싼 배경으로 비춰지며, 현대적 변화 속에서도 변함없이 지속되는 무언가를 상징한다. 한편으로 검열을 연구한 학자들은 이러한 역사적 장소의 이미지들이 “현대의 혼탁함에 대비되는 고풍 일본의 아름다움”을 부각하려는 의도였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여행지에서 노리코의 심경에도 변화가 찾아온다. 교토에서 만난 온도라의 새 아내가 다정하고 상냥한 인물임을 알게 된 노리코는, 얼마 전까지 자신의 속마음에 있던 재혼에 대한 혐오감이 잘못된 편견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녀는 온도라 부인에게 진심으로 호의를 느끼며, 아버지의 재혼도 그렇게 더러운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행 중 여관에서 묵는 밤에 부녀는 나란히 이부자리에 누워 조용히 대화를 나눈다. 어둑한 등불 아래, 노리코는 아버지에게 자신이 예전에 온도라 씨의 재혼을 “더럽다”고 말했던 것을 후회하며 “온도라 부인은 참 좋은 사람이었어요. 제 생각이 짧았어요”라고 속내를 털어놓는다. 슈키치는 웃으며 대수롭지 않다고 딸을 안심시키지만, 노리코는 곧 조심스럽게 본론을 꺼낸다. “아버지… 아버지까지 그렇게 되시면(재혼하시면) 저 정말 싫을 것 같아요. 생각만 해도…”라며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토로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이 말을 듣는 상대편 슈키치는 이미 잠든 듯 코골이 소리만 돌려줄 뿐이다. 아버지가 자는 줄 알게 된 노리코는 말끝을 흐리며 천장을 바라본다. 바로 이때 그녀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기가 떠오른다. 그 동안 감정 표현을 절제해 온 노리코가 드물게 보여주는 편안한 미소다. 마치 “아버지는 결국 재혼 따위 하지 않을 거야, 우린 이대로 행복할 거야”라고 안도하는 듯한 표정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영화사에서 가장 유명한 숏 가운데 하나가 그녀의 웃음을 얼어붙게 만든다. 바로 여관방 한 구석에 놓인 꽃무늬 도자기 화병의 정물 숏이 불쑥 삽입되는 것이다. 방 안 한켠에 세워진 평범한 도자기 꽃병을 어둑한 조명 속에서 6초간 비추는 정지 화면 — 이는 이전까지 진행되던 부녀의 감정 교류를 갑자기 중단시키는 듯한 시각적 쉼표다. 다시 노리코의 얼굴로 컷이 돌아오면, 그녀의 표정은 순식간에 웃음에서 근심으로 바뀌어 있다. 방금 전까지 미소짓던 얼굴이 금세 울먹임을 머금은 슬픈 얼굴로 변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같은 각도에서 그 화병이 10초가량 화면을 가득 채운다. 그 순간 배경에 흐르던 음악이 조용히 고조되며 다음 날 아침의 장면으로 넘어간다. 이 이질적인 화병 숏은 관객에게 강렬한 여운과 함께 여러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분명 화면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바로 직전에 노리코의 내면에서는 커다란 감정의 파동이 지나갔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노리코가 웃음에서 눈물로 바뀌는 찰나에 존재한 그 “고요한 화병”은, 마치 그녀의 운명이 정해졌음을 깨닫는 순간 혹은 행복했던 현재가 영원하지 않음을 자각한 순간과 함께 한다. 이후의 전개를 보면 이 밤 이후 노리코는 완전히 체념한 듯 결혼을 받아들이게 되므로, 이 화병 장면은 그녀의 내면 변화를 표현한 시적이고도 미스터리한 시퀀스로 남는다. 영화 역사에서 이른바 ‘화병의 수수께끼’라 불리며 수많은 비평가와 연구자들이 분석을 시도한 장면이기도 하다. 다음 날 아침, 교토에서 돌아가기 전 짐을 꾸리며 노리코는 마지막으로 아버지에게 속내를 털어놓는다. “우리 그냥 이대로 살면 안돼요? 아버지가 정말 재혼하셔도… 저, 지금이 제일 행복한데요” 하고 간절히 말하는 노리코에게, 슈키치는 단호하지만 따뜻한 어조로 인생의 이치를 일러준다. “안 된다. 너에게도 네 인생이 있어. 사타케와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지. …그게 인간 삶의 순리고 역사의 흐름이다.” 아버지의 이 한마디는 딸을 향한 사랑과 동시에 사회의 질서를 받아들이라는 권고이다. 노리코는 눈물을 글썽이지만 이내 자신의 “어리석음과 고집”을 사과하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흐르고, 부녀는 담담히 가방을 싸 마무리한다. 교토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노리코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없이 미소 짓는다. 여기서의 노리코 미소는 초반부의 해맑은 웃음과는 달리,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고 체념이 깃든 표정이다. 이는 그녀가 마음 깊이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결혼을 결심했음을 보여준다. 영화의 결말부는 노리코의 혼례와 그 이후의 여운을 잔잔히 그린다. 전통 혼례 의상 차림의 노리코가 집에서 마지막 인사를 드리는 장면에서, 그녀는 정갈한 신부 복장을 한 채 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앉아 감사 인사를 올린다. “그동안 키워주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감사합니다…” 하고 조용히 말하는 딸과 그런 딸을 마주보며 애써 웃어 보이는 아버지의 모습은 절제된 감정 속에서 깊은 애틋함을 전한다. 노리코가 친정집 문을 나서 자동차로 떠날 때, 슈키치와 마사는 마당까지 배웅을 나온다. 차창 너머로 보이는 노리코의 얼굴에는 미소가 어려 있지만, 눈빛은 이미 울고 있는 듯하다. 딸을 태운 차가 멀어지고, 뒤에 남은 아버지 슈키치는 문 앞에 한참을 서 있다. 이때 함께 있던 친구 아야가 조용히 다가와 그를 위로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슈키치와 아야는 동네 술집으로 자리를 옮겨 한 잔 술을 나눈다. 취기가 오른 슈키치는 아야에게 그동안 숨겨왔던 비밀을 털어놓는다. 사실 자신은 재혼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딸 노리코를 결혼시키기 위해 거짓말을 했던 것임을 말이다. 그는 딸의 장래를 위해 자기 스스로 고독을 선택했노라고 담담히 고백한다. 이를 들은 아야는 “참 희생이 크시네요…” 하며 눈시울을 붉히고, 앞으로 자주 찾아뵙겠다고 약속한다. 이 대화를 통해 관객은 아버지의 깊은 부성애와 희생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슈키치는 홀로 집으로 돌아온다. 조용한 저녁, 아무도 없는 빈 거실에 슈키치 혼자 들어와 앉는다. 그는 옆자리에 아무도 없는 다다미 방에서 천천히 과일 하나를 꺼내어 깎기 시작한다. 한층 깊어진 적막 속에서 그는 천천히 사과 껍질을 벗기다 말고, 홀연히 손을 멈춘다. 카메라는 그의 얼굴을 클로즈업하지 않고 방 한 구석에서 지켜보듯 담는다. 멈춰 선 슈키치의 어깨 너머로, 그의 고개가 스르륵 숙여진다. 딸을 떠나보낸 아버지의 쓸쓸함과 허망함이 그 작은 몸짓에 오롯이 드러난다. 잠시 후 화면이 암전되며 영화는 끝이 난다. 대미를 장식하는 이 여운 어린 결말은 관객의 가슴 속에 묵직한 울림을 남긴다. 평범한 한 가족의 이야기로 시작된 영화가 삶의 보편적 진실 — 즉, 사랑하는 이들과 결국에는 이별하게 되는 인간사의 무상 — 에 대한 깊은 성찰로 마무리되는 순간이다.
<만춘>은 줄거리의 겉모습만 보면 소소한 가정사에 불과하지만, 오즈의 영화언어적 기법을 통해 매우 독특한 미학적 체험을 제공한다. 서사, 편집, 카메라, 미장센, 사운드, 연기 등 영화 언어의 여러 요소가 조화를 이루어 관객을 오즈만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오즈 영화의 내러티브는 종종 극적인 사건을 최소화한 채 일상의 단편들을 누적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만춘> 역시 특별한 극적 사건보다는 인물들의 미묘한 감정 변화와 관계의 흐름에 중점을 둔다. 관객은 노리코가 결혼을 결심하기까지 겪는 작은 해프닝들과 대화들을 따라가며, 표면 아래 흐르는 “숨은 물결”을 느끼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오즈가 일부러 관객이 기대할 만한 결정적 장면들을 생략하거나 간접 처리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노리코가 맞선 상대 사타케를 처음 만나러 가는 장면이나, 실제 결혼식 장면은 화면에 전혀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사타케 본인은 영화 내내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맥거핀처럼 언급될 뿐이며, 관객은 그의 외모조차 볼 수 없다. 이러한 전략은 관객의 관심을 로맨스나 신랑 인물에 빼앗기지 않게 하고, 대신 부녀간 정서와 이별의 테마에 집중하도록 이끈다. 오즈 본인도 “남녀 간의 연애 감정보다는 가족 간의 사랑에만 관심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만춘>의 내러티브는 바로 그런 감독의 철학을 그대로 구현한다. 결과적으로 <만춘>의 이야기는 겉으론 단순해 보이지만 (아주 평범한 일상의 연속처럼 보이지만), 그 단순함 속에 생략과 여백, 함축이 가득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러한 여백의 미학은 일본의 전통 미의식과도 통하며, 작품 전체에 은은한 여운을 준다. 또한, 오즈의 편집 기법은 전세계 영화 문법과 비교해도 독창적이다. 보통 영화에서는 장면 전환 시 페이드아웃이나 디졸브, 또는 새로운 장소의 전경을 보여주는 방식을 사용하지만, 오즈는 독특하게도 ‘삽입 정경숏(일명 필로우숏)’을 즐겨 활용한다. 한 장면이 끝나고 다음 장면이 시작되기 전에, 얼핏 보면 이야기와 무관해 보이는 풍경이나 사물의 정지화면을 몇 초간 보여주는 것이다. <만춘>에서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가지, 한적한 골목길, 기차가 지나가는 철교, 텅 빈 방 안의 풍경 등이 그러한 베개숏으로 등장한다. 이 숏들은 서사의 진행을 잠깐 멈추는 역할을 한다. 관객은 이야기에서 잠시 벗어나 그 공간의 공기와 시간의 흐름 자체를 느끼게 된다. 예컨대 극 중간에 노리코와 아버지가 산책하는 장면이 끝난 후 삽입되는 조용한 바닷가 풍경은 다음 상황으로 급히 넘어가기 전에 잠시 숨을 고르는 느낌을 주며, 한편으로 영화의 배경인 가마쿠라 지역의 정취를 체득하게 한다. 이러한 편집 리듬은 관객에게 사색의 여지를 제공하고, 작품의 감정적 울림을 배가시킨다. 앞서 언급한 화병 장면은 이러한 베개숏 기법이 한층 실험적으로 쓰인 예이다. 오즈는 그 화병 정물을 장면 전환이 아닌 장면 중간에 배치함으로써, 관객에게 극적인 심리 변화를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했다. 이는 일종의 시간 정지 화면이라 할 수 있는데, 움직이지 않는 사물을 응시하는 동안 관객은 인물의 내면에 일어난 변화(노리코의 미소 뒤에 찾아온 슬픔)를 스스로 완성하게 된다. 이처럼 오즈의 편집은 이야기 전달 효율성보다는 정서적・형식적 패턴을 중시하며, 관객의 감정이입을 독특한 방식으로 유도한다. 이러한 스타일을 영화이론가 데이비드 보드웰은 ‘파라메트릭 내러티브’라고 규정하기도 했는데, 내용보다는 형식의 반복과 변주가 영화의 리듬을 이끈다는 것이다. 오즈의 편집 미학은 현대 관객에게는 오히려 신선하고 실험적으로 다가오며, 그 자신은 디졸브나 페이드를 “장면을 어설프게 속이는 속임수”라고까지 말하며 철저히 배제했다는 일화도 있다. 오즈 영화의 시각적 특징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다다미 숏이라 불리는 저평평한 카메라 앵글이다. <만춘>에서도 카메라는 거의 대부분 바닥 가까이 낮게 자리잡고 인물을 담는다. 이는 방 안에서 인물들이 다다미나 방바닥에 앉아 생활하는 일본 전통 생활양식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내부 장면에서뿐만 아니라, 실외 장면에서도 오즈는 카메라를 비슷한 높이로 유지하는데, 이 때문에 인물들이 서 있을 때는 카메라가 무릎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구도가 된다. 이러한 비정상적으로 낮은 시점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일부는 “아이의 시선”이라고도 하고, 일부는 “앉아 있는 사람과 동일한 눈높이”라고도 한다. 무엇보다 영화학자들은 이 카메라 위치가 만들어내는 안정감과 균형에 주목한다. 낮은 앵글에서 넓게 방을 비추면, 인물 위로 여유 공간이 많아져 천장이나 벽, 가구의 배열이 뚜렷이 보인다. 오즈는 이를 통해 화면 속 기하학적 구도를 부각하고 질서를 느끼게 한다. 실제로 <만춘>의 실내 숏들을 보면 창틀, 미닫이문, 다다미 매트 줄눈 등이 수평과 수직의 선을 이루며 마치 한 폭의 구조화된 그림처럼 보인다. 인물 배치는 주로 화면의 중앙이나 좌우 대칭에 가깝게 이뤄져, 큰 움직임 없이도 시각적 안정을 준다. 카메라는 거의 움직이지 않고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관객은 마치 그 방의 한 자리에 함께 앉아 있는 느낌을 받는다. 이러한 정적인 카메라와 대칭적 구도는 오즈 영화만의 침착하고 명상적인 분위기를 조성한다. 미국의 폴 슈레이더는 자신의 저서에서 오즈를 브레송, 드레이어와 함께 소개하며, 그의 영화에서 이러한 정적인 화면이 만들어내는 성찰적이고 초월적인 감흥을 논했다. 실제로 <만춘>의 한 장면을 멈춰 보면, 인물의 위치와 시선, 배경 사물의 배치가 치밀하게 계산된 하나의 정물화처럼 느껴진다. 예를 들어 노리코와 슈키치 부녀가 거실에서 나누는 담화 장면들을 보면, 두 사람은 늘 바닥에 정좌한 채 거의 같은 프레임 안에 잡히곤 한다. 대화를 할 때 할리우드 영화처럼 어깨너머 반쇼트로 교차편집하지 않고, 오즈는 두 사람이 나란히 혹은 마주보고 앉은 정면 혹은 측면 숏으로 담는다. 때로는 인물이 관객 쪽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180도 시선선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오즈만의 대화 연출 방식이다. 그 결과 관객은 대화 속에 제3의 참가자처럼 포함되어 인물의 눈을 직접 마주치는 느낌을 받는다. 정적인 카메라, 낮은 시점, 대담한 시선 처리 등 오즈의 촬영 미학은 <만춘>에서 절정에 달했으며, 이후 그의 작품들에서도 일관되게 유지되었다. 오즈의 연출 스타일 하에서 배우들의 연기는 극도로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미묘한 뉘앙스를 전한다. <만춘>의 중심에 선 하라 세츠코와 류 치슈의 연기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라 세츠코가 연기한 노리코는 밝고 다정한 딸이지만 내면에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는 인물이다. 하라는 이 역을 겉으로는 환하고 천진한 웃음과 가벼운 목소리 톤으로 표현하면서, 결정적인 순간에는 말없이 표정만으로 감정 변화를 전달한다. 앞서 언급한 노 공연 장면에서 질투 어린 얼굴, 교토 여관에서의 미소와 울먹임의 대조 등은 하라의 섬세한 표정 연기가 없었다면 그 감동이 반감되었을 것이다. 류 치슈가 연기한 슈키치 역시 과묵하고 소박한 아버지 상을 완벽히 체현한다. 그는 딸과 대화할 때 늘 자상하고 너그러운 미소를 띠고 있지만, 혼자 있을 때나 딸이 등을 돌렸을 때 문득 노쇠와 고독의 그림자를 드러낸다. 배우들은 과장된 몸짓이나 격앙된 감정을 배제하고, 마치 실제 그 인물이 된 듯 자연스럽게 행동한다. 이러한 연기 철학은 오즈가 배우들에게 반복해서 절으로 리허설하고 불필요한 동작을 제거하게 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배우들의 제스처는 작지만 정확하며, 움직임의 안무처럼 화면 구성에 녹아든다. 인물 배치 또한 특징적이다. 가족 구성원들이 방에 함께 있는 장면에서 오즈는 그들을 한 숏에 가급적 모두 담으려 하고, 인물이 자리를 이동하는 동선도 제한적이다. <만춘>에서 노리코가 방에서 나가거나 앉았다 일어서는 동작 하나하나가 신중하게 포착되는데, 이는 인물 사이의 거리를 변화시키며 감정을 암시하는 연출이다. 예컨대 아버지가 재혼 의사를 거짓으로 밝힐 때 노리코가 서서 아버지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자리에 앉는 장면은, 충격을 받은 딸의 심경 변화를 동작 하나로 드러낸다. 한편 조연들의 활용도 흥미롭다. 이모 마사나 친구 아야 등은 때로 코믹 릴리프 역할을 하며 무거운 분위기를 환기한다. 마사가 길에서 주운 동전을 슬쩍 자기 주머니에 넣었다가 오빠인 슈키치에게 “경찰에 가져다줘라” 잔소리를 반복해서 듣는 에피소드는 작은 웃음을 주는 동시에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이는 검열의 지적으로 생긴 장면이지만 결과적으로 영화의 일상성과 유머를 더해주는 요소가 되었다. 이렇듯 배우들의 연기 톤과 인물간 거리, 위치까지도 오즈는 철저히 계산하여 과장 없지만 흡인력 있는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오즈 영화에서 사운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주인공과 같다. 그는 소리 또한 절제와 선택의 미학을 적용한다. 배경 음악은 필요한 순간에만 절도로 사용되고 침묵과 생활음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만춘>에서는 이토 센지가 작곡한 음악이 사용되었는데,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단아한 현악 위주의 테마가 극을 받쳐준다. 그러나 음악은 감정을 직접 밀어붙이기보다, 때론 중요한 장면에서 아예 흐르지 않음으로써 관객이 정적의 힘을 느끼게 한다. 예를 들어 부녀의 갈등이 잠복해 있는 노 공연 신이나 교토 여관 신의 대화에서는 별다른 음악이 없이 전통 가면극의 타악 장단이나 실내의 정적만 들린다. 그러다 노리코의 감정이 폭발 직전인 화병 장면에서에야 비로소 배경음악이 부드럽게 커지며 다음 날로 넘어간다. 이러한 음악 처리 방식은 관객의 감정을 섬세하게 조율한다. 또한 생활음, 환경음의 쓰임도 현실감을 더한다. 극중에서 자주 언급되는 야구는 소리로도 표현되는데, 뒷마당에서 아이들이 야구공을 치며 뛰노는 소리가 집안에 은은히 들려온다든지, 노리코와 아야가 야구 시합 이야기를 하는 동안 어딘가에서 응원 소리가 흘러오는 등 현실적인 배경음을 활용한다. 이는 전후 일본에서 인기 스포츠였던 야구를 통해 현대적 분위기를 자아냄과 동시에, 영화 공간을 입체적으로 만든다. 대사 면에서 오즈는 일상어를 고집했고, 연기자들로 하여금 낮은 목소리와 완만한 말투로 대화하게 했다. 노리코의 대사들은 한결같이 공손하고 부드러우며, 그녀가 감정을 토로할 때조차 목소리는 거의 떨리지 않는다. 이러한 언어 스타일은 영화 전체의 톤을 차분하게 유지시킨다. 대신 관객은 말간 목소리 뒤편의 슬픔을 스스로 느끼게 된다. 이상과 같이 <만춘>의 영화언어적 특징들은 하나하나 보면 소박하거나 파격적이지만, 모두 합쳐져 독특한 조화를 이룬다. 움직임을 자제한 카메라와 과장 없는 연기, 여백을 살린 편집과 절제된 사운드는 결합되어 오즈만의 시네마틱 문법을 완성한다. 그 결과 관객은 마치 맑은 거울을 보듯, 인물들의 내면과 자신의 정서를 동시에 비추어 보게 된다.
<만춘>은 오즈 야스지로의 필모그래피 가운데서도 중요한 변곡점에 위치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흔히 “노리코 3부작”으로 불리는 연작의 첫 번째 작품이기도 하다. 노리코 3부작이란 모두 하라 세츠코가 주연하고 이름이 노리코인 젊은 여성을 연기하는 세 영화 — <만춘>(1949), <초여름>(1951), <동경 이야기>(1953) — 를 가리킨다. 이 세 작품은 내용상 직접 연결되지는 않지만, 공통적으로 전후 일본의 한 가족 안에서 딸 세대의 결혼 문제가 주요 갈등으로 등장하며, 가족의 형태 변화와 세대 간의 관계를 다룬다는 유사성을 지닌다. 그 가운데 <만춘>은 전쟁 직후의 혼란이 어느 정도 수습된 뒤의 안정기 가정에서 딸의 혼인이라는 주제를 정면으로 다룬 최초의 영화였다. 이전까지 오즈는 1930년대에는 주로 청년 남녀의 연애나 하층 계급의 삶, 1940년대 초에는 전시 체제 속 가족을 그렸는데, 패전 후에는 곧바로 가족과 결혼 문제를 현대적 시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만춘>에서 마련된 이러한 테마와 서정적 스타일은 이후 약 15년 동안 오즈 작품의 근간이 되었다. 이를 두고 평론가들은 <만춘>을 가리켜 “오즈가 마침내 오즈다움을 완성한 작품”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실제로 오즈 자신의 언급에 따르면, 그는 <만춘>부터 시작된 계절 제목 시리즈(예: <만춘>, <맥추: 초여름>, <동경 이야기>는 아니지만, <초가을>, <늦가을>, <가을 오후> 등)에서 인생의 순환을 담아내려 했다고 한다. 우선 <초여름>과 비교하면, 이 작품은 같은 노리코라는 이름의 딸(역시 하라 세츠코 분)이 등장하고 결혼을 소재로 하지만, 전개 양상과 메시지는 사뭇 다르다. <초여름>에서 노리코는 부모와 조부모, 오빠 가족과 대가족을 이루며 살다가 친척들의 성화에 못 이겨 결혼을 고려한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중매로 나온 명망있는 상대 대신, 자신이 원했던 소꿉친구와 갑작스레 결혼하겠다고 결정한다. 즉, <초여름>의 노리코는 보다 능동적인 선택을 하며, 가족들도 결국 이를 받아들인다. 이것은 <만춘>의 노리코가 가족과 전통의 뜻에 순응하여 수동적으로 결혼한 것과 대조적이다. 따라서 두 영화 모두 겉보기에는 “시집가는 딸 이야기”이지만, 해석의 뉘앙스는 다르다. <만춘>은 딸이 자신의 행복보다 아버지의 안위를 생각해 헌신하고, 아버지도 딸을 위해 외로움을 감수하는 희생과 순응의 이야기에 가깝다면, <초여름>은 딸 세대의 자아 실현과 개인 선택을 조금 더 긍정적으로 그렸다고 볼 수 있다. 흥미롭게도 두 영화에서 모두 하라 세츠코가 노리코를 연기하지만, <만춘>의 노리코가 다소 유약하고 부끄러움 많은 인물인데 비해, <초여름>의 노리코는 밝고 활달하며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표현하는 성격이다. 이는 오즈가 불과 2년 사이에 변화한 일본 사회의 분위기(개인주의의 확산과 연애결혼의 증가)를 반영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동경 이야기>는 전후 가족을 다룬 오즈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데, <만춘>과는 역으로 부모 세대의 시각에서 가족 문제를 바라본 작품이다. <동경 이야기>에서는 시골의 늙은 부모가 도쿄의 자식들을 방문하지만, 바쁜 자식들은 부모를 냉대하고 유일하게 며느리 노리코(역시 하라 세츠코 분)만이 정성껏 시부모를 챙긴다. 이 영화에서 하라 세츠코가 연기한 노리코는 <만춘>과 <초여름>의 노리코들과 이름만 같을 뿐, 설정과 캐릭터는 전혀 다르다. 그는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과부로, 시부모에게 헌신적인 ‘이상적 며느리’로 그려진다. 그러나 공통점이라면, 이 노리코 역시 자신의 재혼이나 개인 행복보다 가족(시부모)에 대한 의리를 중시한다는 점이다. <만춘>의 노리코가 아버지와의 가정을 지키려 했듯이, <동경 이야기>의 노리코는 이미 사별한 남편의 부모를 친부모처럼 모시는 데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 결국 <동경 이야기>는 <만춘>의 이야기와 세대구도가 바뀐 형태로 볼 수 있다. <만춘>이 “딸을 보내는 아버지의 고독”을 그렸다면, <동경 이야기>는 “부모를 떠나보내는 자식들의 후회”를 다뤘다고 할 수 있다. 한쪽은 결혼을 통해 딸이 독립하는 이야기이고, 다른 한쪽은 노년의 부모가 세상을 떠나며 가족이 해체되는 이야기이다. 두 작품 모두 가족 내 필연적인 이별과 세대 간 간극을 담담히 포착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깊은 공감을 자아낸다. 실제로 <만춘>과 <동경 이야기>는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명작 반열에 함께 올라 있으며, 영국 사이트 앤 사운드의 역대 영화 순위에서도 <동경 이야기>가 3위, <만춘>이 15위에 꼽힐 정도로 높이 평가받았다. 오즈는 <만춘> 이후로도 꾸준히 가족과 결혼을 소재로 변주를 거듭했다. 1960년작 <늦가을>은 <만춘>의 설정을 성별만 바꾸어 재활용한 작품이다. 즉 홀어머니(역할을 하라 세츠코가 맡아 이번엔 엄마 역으로 출연)가 딸을 시집보내려는 이야기로, 모녀 관계를 그린 점만 다르다. <늦가을>에서는 코믹한 중매쟁이 남성들이 등장해 어머니와 딸을 곤란하게 만드는 등, <만춘>보다 좀 더 희극적 터치가 가미되었다. 하지만 결국 딸은 결혼하고, 어머니는 혼자 남겨진다는 귀결은 동일하다. 말하자면 오즈는 자신이 창조한 서사를 여러 각도로 다시 쓰면서, 매번 조금씩 다른 분위기와 의미를 빚어냈다. 그의 유작인 <가을 오후>는 <만춘>의 테마를 가장 어둡고 쓸쓸하게 마무리한 작품이라 할 만하다. 이 영화에서도 중년의 홀아비(류 치슈 분이 다시금 아버지역)를 주인공으로 삼아 딸의 결혼을 다루는데, 엔딩에서 딸을 보낸 아버지가 텅 빈 집에서 홀로 술취해 흐느끼는 모습은 <만춘>의 결말을 떠올리게 한다. 다만 <가을 오후>에서는 딸 세대가 아버지의 고독을 깊이 헤아리지 못하는 뉘앙스를 풍기고, 세대 단절의 느낌이 한층 쓸쓸하게 다가온다. 이렇듯 오즈의 후기 작품들은 <만춘>으로 확립된 ‘결혼 = 가족 해체 = 새로운 시작’이라는 모티프를 변주하며, 변화하는 시대와 함께 가족관계의 여러 단면을 탐구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만춘>은 오즈 스타일의 정점을 보여준 이후 그가 일관되게 고수한 미학의 출발점이었다. 사실 오즈는 1930년대 후반부터 이미 낮은 카메라 앵글과 정태적인 연출을 실험해 왔지만, <만춘>에서 그것이 완전히 자기 것으로 정착했다. 이후 <동경 이야기>나 <안녕하세요>, <부초>등에서 오즈는 동일한 촬영, 편집 기법을 반복 활용하며 자기만의 영화 문법을 더욱 세련되게 가꾸었다. 이런 이유로 일각에선 그의 작품들이 비슷비슷하다는 지적도 있지만, 오즈는 미세한 변주의 차이를 통해 매 작품마다 새로운 울림을 주었다. 어떤 평론가는 “오즈는 같은 영화를 반복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의 형식 안에서 삶의 여러 결을 채집했다”고 평하기도 했다. <만춘>이 그러한 형식 실험과 주제의식 탐구의 토대가 되었기 때문에, 오즈의 말년작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작품으로 인식된다. 전후 일본 가족사의 한 단면을 조용한 연민으로 포착한 <만춘>은, 오즈 영화 세계의 출발점이자 정수로서 지금까지도 영화 연구자와 애호가들에게 꾸준히 회자되고 있다.
<만춘>이 담고 있는 중심 주제들은 시대를 초월하여 보편적인 동시에, 일본 사회의 특정 맥락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표면적으로 영화는 한 딸의 결혼 성사 과정을 그리고 있지만, 그 밑바닥에는 가족과 개인의 관계, 전통과 현대의 충돌, 여성의 역할과 행복 등에 대한 성찰이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주제 의식을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오즈 감독이 보여준 태도는 복합적이며, 다양한 해석을 불러일으켜 왔다. 우선 가족과 결혼에 대한 오즈의 시선을 살펴보자. <만춘>에서 노리코와 슈키치 부녀의 관계는 지극히 화목하고 친밀하다. 두 사람은 마치 친구처럼 농담을 주고받고 함께 자전거 여행을 다닐 만큼 정서적으로 유대되어 있다. 사실 노리코가 결혼을 주저하는 가장 큰 이유도 현재 아버지와 누리는 이 단란한 생활이 깨질까 두렵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 부녀 관계를 매우 따뜻하고 아름답게 그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관계가 영원히 지속될 수 없음을 서서히 드러낸다. 아버지 슈키치는 “그게 인간 삶의 순리”라는 말로 딸에게 언젠가 독립해야 함을 설득하고, 딸 노리코도 그것을 받아들인다. 여기에는 일본의 전통적인 가족관, 즉 부모 세대는 자녀를 길러내어 사회로 보내고, 자녀 세대는 장성하면 가정을 꾸려 부모 품을 떠난다는 가족 순환의 가치관이 담겨 있다. 오즈는 이러한 세대 교체를 한편으로는 자연스러운 질서로 묘사한다. 슈키치의 말은 작중 논리에서는 딸을 달래는 대사이지만, 동시에 작품이 전달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영화의 마지막에 슈키치가 쓸쓸히 남겨지기는 하지만, 그것을 억지 비극으로 그리지 않고 인생의 한 모습으로 담담히 보여준다. 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깊은 슬픔과 함께 묘한 수긍을 느끼게 한다. 어쩌면 오즈는 우리에게 “이것이 가족의 모습이며, 세월의 법칙”이라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많은 비평가들은 오즈의 가족 영화들을 “인생의 한 사이클”로 해석해왔다. 태어나서 자라고 분가하고 늙고 죽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보편적 순환을 오즈는 가족을 통해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만춘>의 결말에서 느껴지는 먹먹한 감정은, 바로 그러한 보편 인식에서 우러나오는 공감의 정서일 것이다. 일본적인 ‘모노노아와레(物の哀れ)’ — 모든 것은 변하고 결국 사라진다는 무상에 대한 애수 — 가 부녀의 미소와 눈물 속에 깃들어 있다고도 평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만춘>은 단순히 보편적 생애주기를 담은 것이 아니라 특정 사회적 제도에 대한 은근한 비판을 내포한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노리코의 결혼은 엄밀히 보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들에 의해 떠밀린 결정이다. 그녀는 애초에 결혼을 원치 않았고, 끝까지 아버지와 함께 살기를 바랐다. 그런 그녀를 주변 가족들은 “너를 위해서”라며 결혼시키고야 만다. 결과적으로 노리코는 사회의 기대에 순응하여 개인적 행복(아버지와 함께 지내는 삶)을 포기한 셈이다. 이 과정에서 노리코 본인이 얼마나 행복해질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결혼식 날까지도 노리코의 속마음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관객은 그녀가 아버지 앞에서 애써 웃으며 “저 괜찮아요”라고 말할 때 그 안타까움을 느낄 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일부 평론가들은 <만춘>을 가부장적 사회와 결혼 제도에 대한 조용한 비판으로 읽기도 한다. 즉, 개인의 행복보다 “적당한 시기에 시집보내야 한다”는 사회 규범을 따르느라 부녀가 희생되는 모습을 통해, 오즈가 가족제도의 부조리를 드러냈다는 견해다. 실제로 영화 초반 노리코와 친구 아야의 대화에는 이런 사회 분위기에 대한 논평이 담겨 있다. 노리코는 이혼녀인 아야에게 “이혼한 게 차라리 나아. 나 같은 노처녀보단”이라고 말한다. 이는 당시 가치관으로 미혼 여성으로 늙는 것은 이혼보다도 낫지 않다고 여겨졌음을 보여준다. 노리코 본인은 그 말을 웃으며 했지만, 사회의 시선에 대한 일말의 불안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아야는 야구 경기 비유까지 써가며 “인생은 여러 번의 이닝이 있다”며 재혼에 긍정적이지만, 노리코는 그런 친구를 신기하게 바라볼 뿐이다. 이런 장면들은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과연 노리코가 꼭 결혼해야만 했을까? 그녀가 원하지 않는데도 사회가 등을 떠민 것은 아닌가? 오즈는 작품 속에서 직접 답을 내리지는 않는다. 다만 노리코가 웅크리고 울던 그 밤의 화병 숏은, 그녀 내면의 슬픔과 상실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결혼의 이면에 자리한 고통을 암시한다. 특히 일부 서양 평론가들은 이 화병을 노리코의 억눌린 자아나 여성성의 상징으로 해석하며, 전통에 순응하느라 ‘멈춰버린’ 그녀의 욕망을 읽어내기도 했다. 반면 어떤 이들은 그저 “이 영화는 옳고 그름을 말하지 않고 인생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결국 <만춘>은 가족과 결혼 문제를 두고 운명에 대한 순응과 사회 규범에 대한 비판이라는 양면을 동시에 담고 있으며, 보는 이에 따라 다양한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전통과 근대화의 충돌은 <만춘>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맥락이다. 영화 곳곳에는 옛 일본과 새로운 일본이 대비되는 상징들이 배치되어 있다. 앞서 논의했듯, 다도나 노 공연, 교토의 옛 절들과 같은 요소들은 일본의 전통을 표상한다. 반면 코카콜라 간판, 야구 경기, 서양식 결혼 문화는 서구 현대 문명의 침투를 나타낸다. 재미있게도 노리코와 그녀의 주변 인물들은 모두 이 두 세계를 혼재한 삶을 살고 있다. 노리코는 집에서는 기모노 차림으로 다과회에 참석하지만, 친구들과 카페에서는 양장을 입고 커피를 마신다. 전통적인중매 결혼에 주저하면서도, 친구 아야의 서구적 생활 방식을 부러워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그녀의 정체성은 과도기적이다. 슈키치 역시 집에서는 고서적과 다도를 즐기는 구세대로 보이지만, 극 중 딸과 함께 서양식 클래식 음악 연주회(바이올린 콘서트)에 가기도 한다. 이모 마사는 낡은 도덕 관념을 가졌으면서, 한편으론 돈지갑을 슬쩍하는 잔재미를 부리는 현실적인 모습도 있다. 이렇듯 인물들이 전통과 현대 사이에서 갈등하고 조율하는 모습 자체가 영화의 한 주제이다. 노리코 부녀가 함께 떠난 교토 여행은 상징적이다. 교토는 일본의 옛 수도로서 전통의 정수가 남아있는 곳인데, 거기서 노리코는 비로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게 된다. 마치 전통의 땅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의무(결혼이라는 전통적 역할)를 깨닫는 듯하다. 하지만 영화는 단순히 전통의 편을 들거나 현대를 찬양하지 않고, 그 충돌 자체를 담담히 응시한다. 예를 들어 코카콜라 간판 장면에서 오즈는 그걸 비판하거나 우스꽝스럽게 묘사하지 않고 그저 화면 한 구석에 놓아둘 뿐이다. 관객은 거기서 시대 변화의 냄새를 맡지만, 인물들은 그저 스쳐지나간다. 다만 어떤 연구자(예: 라스 마틴 쇠렌센)는 오즈가 의도적으로 사찰의 미닫이문, 교토의 탑, 다도구 같은 전통 이미지를 <만춘>에 많이 삽입한 것을 지적하며, 이것이 서구화에 대한 은근한 저항의 표현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로 오즈 본인은 전쟁 후 바뀌어가는 일본 사회를 복잡한 심경으로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표현방식은 결코 선동적이지 않고 잔잔한 관조에 가깝다. <만춘>의 결말에서 아버지 슈키치가 남겨진 모습은,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아버지 세대가 근대화의 흐름 속에서 고독하게 잊혀가는 모습을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오즈는 그를 비극의 희생자로 그리기보다는, 세월을 받아들이는 한 인간으로 그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여성의 역할과 관련해, <만춘>은 당시 일본 영화로서는 매우 흥미로운 여성상을 보여준다. 노리코라는 캐릭터는 순종적 딸이면서도 주체적인 면모를 함께 지닌 복합적 인물이다. 그녀는 겉으로는 얌전하고 아버지 말에 잘 따르는 “착한 딸”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초반부를 보면, 재혼한 온도라 씨를 “더럽다” 표현하고, 이혼 경험이 있는 친구와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중매 결혼을 거부하는 등 기존 여성상과 다른 솔직함과 개방적 태도를 보인다. 당시는 아직 보수적인 분위기가 강했음을 감안하면, 노리코의 이러한 면모는 상당히 현대적인 여성 캐릭터라 할 수 있다. 특히 하라 세츠코의 트레이드마크인 환한 미소는 노리코를 매력적이면서도 의지적인 인물로 만든다. 그녀는 분명 아버지와 가족의 기대를 거역하지 않지만,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행복에 미련을 두고 “이대로 살고 싶다”고 말할 만큼 자기 욕구를 표현할 줄 안다. 이는 전쟁 전의 일본 영화들에서 흔히 그려지던 순종적인 딸이나 아내의 이미지와는 차이가 있다. 또한 친구 아야 캐릭터를 통해 오즈는 전통 사회에서 금기시되던 이혼 여성을 긍정적으로 그렸다. 아야는 독립적이고 쾌활하며 경제적으로도 자립해 살아가는 인물이다. 노리코는 아야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그녀의 라이프스타일을 어느 정도 동경하는 모습까지 있다. 두 사람이 맥주를 마시며 자유롭게 수다떠는 장면은, 전통적인 부녀 집안 풍경과 대조되는 해방감을 보여준다. 물론 영화는 결국 노리코를 전통적 궤도로 다시 돌려놓지만, 이러한 묘사를 통해 전후 일본 여성의 삶의 변화를 포착하고 있다. 일본의 평론가 사토 타다오는 오즈 영화의 여성상에 대해 “오즈는 가부장적 세계에서 스스로 길을 찾는 새로운 여성들을 보여주었다”고 평한 바 있다. 노리코는 그 대표적인 예로, 그녀의 웃음과 눈물이 함의하는 바는 곧 전통과 현대 사이에서 고민하는 일본 여성의 자화상인 것이다. 오즈 감독은 여성 캐릭터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그리면서도, 그들이 처한 사회적 제약을 은근히 드러낸다. <만춘>에서 노리코는 결국 아버지와 사회의 뜻에 순응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선택이 완전히 부정되거나 비극으로만 그려지지는 않는다. 이는 당대 현실에서 여성으로서 최선이라 여겨진 선택이었음을 영화도 인정하는 듯하다. 오즈의 태도는 여성의 희생을 미화하거나 옹호한다기보다, 그 희생의 아름다움과 슬픔을 동시에 응시한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카메라는 노리코의 환한 웃음과 눈물 어린 얼굴을 똑같이 아름답게 담아내며, 그 내면의 목소리를 관객이 읽도록 여백을 남긴다. 철학적 함의 측면에서, <만춘>은 오즈 영화 특유의 인생관이 녹아있는 작품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오즈는 인생의 변화와 무상함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겉으로 드러나는 얕은 이야기를 말하기보다는, 삶의 흐르는 물밑을 그리고 싶었다. 그래서 드라마틱한 행동을 밀어붙이기보다, 빈 공간을 남겨 두어 관객이 그 뒤의 여운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고 말한 바 있다. <만춘>은 바로 그런 의도로 만들어진 영화다. 변화는 반드시 찾아오며, 아름다운 순간도 결국 지나간다. 이것이 영화 전반에 깔린 정조다. 그러나 오즈는 변화에 저항하거나 비관하지 않는다. 그는 마치 선승처럼 그 흐름을 받아들이고 관조한다. 영화 마지막에 슈키치가 혼자 남아 과일을 깎다 멈추는 장면은, 한 인간이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앞에 잠시 명상에 잠긴 모습으로 볼 수도 있다. 관객은 그 고요한 뒷모습을 통해 삶의 진리를 직감적으로 느낀다. 가족이란 언젠가 흩어지고, 자녀는 성장해 떠나며, 부모는 홀로 남는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사랑과 감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노리코가 떠나기 전 아버지에게 “감사합니다”라고 한 말과, 아버지가 딸의 행복을 빌며 거짓말까지 감행한 행동은, 이 가족에게 깊은 사랑이 있었음을 확인시켜준다. 그래서 비록 이별이 찾아와도 그것이 헛된 것은 아니다. 오즈 영화의 철학은 이처럼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인생의 양면을 고요히 응시하는 데 있다. <만춘>에서 오즈 야스지로는 전후 일본의 한 단란한 부녀를 통해, 개인과 사회, 전통과 변화의 상호작용을 섬세하게 포착했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감정들은 보편적이어서, 문화와 시대를 넘어 많은 관객들의 가슴에 와 닿는다. 영화학자 도널드 리치는 오즈의 작품들을 두고 “겉으로는 일본의 서민 가정 이야기이지만, 그 안에는 누구나 겪는 인생 문제가 담겨 있기에 전세계인이 공감한다”고 했다. 실제로 <만춘>이 주는 감동은 특별한 사건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사람들의 진실한 감정이 잔잔히 전해지기 때문이다. 가족 간의 사랑과 희생, 떠나보내는 이의 쓸쓸함, 떠나가는 이의 눈물, 시대가 바뀌어도 변치 않는 인간사의 희로애락 – 이 모든 것이 오즈의 간결한 화면에 응축되어 있다. <만춘>은 영화 예술이 어떻게 소소한 일상 속에 숨은 삶의 진실을 포착해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예이며, 오즈 야스지로의 미학과 철학이 아름답게 만개한 “늦봄”의 걸작이라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