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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솔라리스

1960~70년대 소비에트 영화의 거장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현실과 영혼을 아우르는 시적 영상미로 세계 영화사에 독보적 흔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의 세 번째 장편 <솔라리스>는 SF라는 외양을 두르고 있지만, 전통적 장르 공식을 넘어 인간 내면의 영적 성찰을 추구한 작품이다. 타르코프스키는 <이반의 어린 시절>과 <안드레이 루블료프>으로 이미 국제적 명성을 얻었으나, 검열 당국과의 갈등으로 차기작 구상이 어려웠다. 이때 현실적으로 승인받기 쉬운 소재로 스타니스와프 렘의 과학소설 솔라리스를 택한 것이 본 작품의 출발점이었다. 당국의 예상을 저버린 이 영화는 1972년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특별대상과 국제비평가연맹상을 수상하며, 타르코프스키를 세계 영화계의 중심에 우뚝 세웠다. <솔라리스>는 제작 과정에서부터 타르코프스키의 예술적 고집과 전략이 드러난다. 그는 기존의 우주 SF 영화와 차별화하기 위해 할리우드식 특수효과와 미래지향적 디자인을 최소화했다. 대신 촬영감독 바딤 유소프와 함께 삶의 질감이 느껴지는 리얼한 영상과 긴 호흡의 미장센을 구현했다. 특히 우주정거장 세트를 할리우드 SF의 전형처럼 반짝이는 첨단 공간이 아닌, 어딘가 낡고 어수선한 장소로 묘사했는데, 이는 쿠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와 대비되는 미학적 선택이었다. 실제로 미술감독 미하일 로마진은 “우리는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처럼 번쩍거리고 정갈한 미래를 그리지 않았다”고 밝히며, 1960년대 구형 컴퓨터와 허름한 장비들을 소품으로 배치해 생활감 있는 우주공간을 연출했다. 이러한 세팅에 감탄한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가 촬영장을 방문해 찬사를 보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배우 캐스팅 면에서도 흥미로운 배경이 있다. 주인공 크리스 켈빈 역에는 리투아니아 배우 도나타스 바니오니스가 발탁되어 묵직한 존재감을 보여주었고, 켈빈의 아내 하리 역에는 신예 나탈리아 본다르추크가 기용되었다. 특히 본다르추크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학교 동창으로, 그에게 렘의 원작 소설 솔라리스를 처음 소개해준 인물이기도 했다. 타르코프스키는 1970년 그녀를 오디션 보았을 때는 나이가 너무 어리다고 느껴 탈락시켰지만, 이후 그녀가 출연한 다른 영화 <너와 나>를 보고 마음을 바꾸어 하리 역에 최종 낙점했다. 촬영이 끝난 뒤 타르코프스키는 배우들의 연기를 평가하며 “나탈리아 B.가 모두를 압도했다”고 일기에 남겼을 만큼 본다르추크의 섬세한 연기는 영화의 정서적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한편, 촬영은 1971년 모스필름 스튜디오에서 시작되어 도중에 감독과 촬영감독 유소프 사이에 잦은 충돌이 벌어졌는데, 결국 이 작품을 끝으로 두 사람의 오랜 협업 관계도 마무리되었다고 전해진다. 제작 과정의 마찰에도 불구하고 <솔라리스>는 2시간 40분 분량의 최종 편집본으로 완성되었고, 소비에트 검열 기관은 영화의 종교적 함축을 문제 삼아 40여 군데 수정을 요구했으나(일례로 성경적 이미지나 ‘신’에 대한 직접 언급들을 삭제토록 압력을 가함), 타르코프스키는 오히려 지루함과 암시로 검열을 교묘히 통과시켜 자신의 주제를 스크린에 실어냈다.

<솔라리스>가 만들어진 1970년대 초반은 미중 냉전과 우주 경쟁이 한창인 시기로, 과학기술에 대한 낙관과 회의가 교차하던 시대였다. 서구권에서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첨단 기술과 인류 진화를 경탄 어린 시선으로 그려내며 SF 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지만, 타르코프스키는 그 영화에 대해 “감정적 울림이 부족하고 너무 기술 숭배적”이라며 혹평했다. 그는 쿠브릭의 미래관이 “차갑고 불모적”이라고까지 언급하며, <솔라리스>를 일종의 “반 2001”로 의도했음을 드러냈다. 실제로 평단은 <솔라리스>를 “쿠브릭의 영화에 대한 소비에트의 응답”으로 받아들였고, 타르코프스키는 인간적 드라마와 정서를 전면에 내세워 서구 SF의 과학만능주의에 맞서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는 “과학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은 주변의 힘을 먼저 길들여야 한다”는 신념 아래, 냉철한 진보 이념을 의심하고 인간 내면의 신념과 도덕을 중시하는 이야기를 구상했다. 다시 말해, <솔라리스>는 우주 탐사의 외피 속에 인간 정신에 대한 탐구, 나아가 냉전 시대 소비에트 체제가 내세우던 과학적 합리주의에 대한 은근한 반론을 담고 있다. 한 프랑스 평론가는 이 영화를 두고 “인간을 창조주 앞에 세우는 신비적 작품으로, 신념이 과학에 우선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어 당시 소련 체제의 노선과 정반대에 서 있다”고 평했다. 이는 곧 타르코프스키가 예술을 통해 체제의 엄격한 합리주의에 도전하고, 사랑과 믿음의 가치를 역설했음을 의미한다. 또 다른 맥락에서 <솔라리스>는 원작 소설 솔라리스와의 대화이기도 하다. 렘과 타르코프스키는 각본 작업 단계부터 견해차를 보였는데, 렘은 영화가 소설의 핵심인 “인간과 타자의 소통 불가능성”을 충실히 담아주길 원한 반면, 타르코프스키는 원작으로부터 독자적인 영화적 세계를 창조하려 했다. 렘은 결국 “타르코프스키는 솔라리스가 아니라 <죄와 벌>을 우주에서 찍었다”고 불만을 터뜨렸고, 소설의 인식론적·과학적 질문들이 영화에서 축소되었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영화 <솔라리스>는 외계 지능과의 소통 가능성처럼 하드 SF적인 주제보다, 기억과 양심 그리고 사랑의 죄책감이라는 인간적 고민에 초점을 맞춘다. 타르코프스키는 렘이 끝내 영화에 불만을 표하자 “그는 영화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원작의 삽화 정도로 여기려 했다”면서, 영화적 미학을 통한 독창적 해석의 정당성을 옹호했다. 이러한 갈등은 작품 자체에 흥미로운 긴장을 부여한다. 즉 원작이 인간이 풀 수 없는 우주의 수수께끼를 다뤘다면, 영화는 우주가 반사해주는 인간 자신의 수수께끼를 응시한다. 영화 속 한 대사는 이를 상징적으로 압축한다. “중요한 것은 다른 세계를 정복하는 데 있지 않고, 거울을 찾는 데 있어”라는 말은, 결국 인류가 우주에서 마주치는 것은 알 수 없는 타자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내면이라는 메시지로 읽힌다. 이처럼 <솔라리스>는 시대 상황과 원작 담론을 토양으로 삼아, 과학 진보와 인간 정신의 관계, 그리고 예술의 역할에 대한 타르코프스키의 사유를 반영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솔라리스>의 이야기는 지구에서 시작하여 우주로 이동하며 전개된다. 도입부에서 영화는 놀랍도록 “지상적”인 이미지들로 관객을 맞이한다. 푸른 연못 속을 나부끼는 수초와 잔물결, 나무숲과 안개 등의 자연 숏들이 잔잔한 클래식 바흐의 코랄과 함께 이어진다. 심리학자 크리스 켈빈은 시골의 오래된 부모님 댁 정원에서 물속에 손을 담근 채 사색에 잠겨 있다. 한 비평가는 이 장면에서 켈빈이 “마치 물에 가라앉은 여인의 머리카락을 바라보는 듯하다”고 묘사했는데, 실제로 화면에 흐르는 수초는 켈빈의 잃어버린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이 무의식중에 투영된 이미지로 보인다. 이렇게 <솔라리스>는 시작부터 우주과학이 아닌 상실의 정조를 화면에 깔아 놓는다. 켈빈의 표정에는 어떤 깊은 슬픔과 번민이 서려 있고, 아버지와 친지가 그를 걱정스레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곧 인류가 20년째 연구 중인 행성 “솔라리스”로 떠날 준비를 한다. 출발 전날, 켈빈의 가족들은 그의 냉담하고 침울한 태도를 염려하며 “네 감정은 마치 회계원 같다”고 타이른다. 관객은 켈빈이 과거에 겪은 정신적 충격이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출발에 앞서, 옛 우주비행사 버튼이 방문하여 과거 솔라리스 탐사 중에 겪은 기묘한 경험을 증언하는 비디오 영상을 함께 시청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때 영화는 갑작스레 흑백 화면으로 전환되어 일종의 다큐멘터리풍 회상 장면을 보여주는데, 버튼이 위원회 앞에서 “솔라리스 해양에서 본 환영”에 대해 진술하는 내용이다. 그는 영상 속에서 당황하고 격앙된 모습으로, 거대한 유아나 변형된 인간 형상이 나타났다고 보고하지만, 회의석상의 과학자들은 그의 증언을 냉소적으로 받아넘긴다. 이 장면은 느닷없는 흑백 텔레비전 화면 연출을 통해 극적 리얼리티를 부여하는 동시에, 관료주의적 학술 문화에 대한 풍자를 담고 있다. 타르코프스키는 카메라를 방청객이 지루해하는 표정, 과학자들의 무표정한 얼굴에 오래 머물게 함으로써, 신비한 현상을 인간이 이해하려 하지 않고 규격화된 지식으로 무시해버리는 태도를 비판한다. 이는 훗날 솔라리스에서 켈빈이 겪을 일을 암시하면서, 영화의 주제적 대립선을 미리 부각시키는 장치다. 지구를 떠나기 전, 영화는 또 하나의 파격적인 시퀀스로 관객을 의아하게 만든다. 바로 ‘미래 도시’ 차량 질주 장면이다. 켈빈이 우주정거장으로 향하기 위해 차를 타고 공항으로 이동하는 이 장면에서, 타르코프스키는 5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도쿄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차 안 풍경을 담는다. 미래 도시의 환상을 구현하기 위해 의외로 선택된 배경은 당시 가장 현대적인 도시 중 하나였던 1970년대의 도쿄였다. 밤의 고속도로를 미끄러지듯 통과하는 차량들, 겹겹이 꼬인 고가도로와 터널 내부의 불빛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며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장면은 대사도 음악도 거의 없이 현대 도시의 소음을 깔고 흑백에서 다시 컬러로 서서히 전환되는데, 현실의 도쿄를 촬영하면서도 그것을 “가까운 미래”의 이미지처럼 낯설게 보여주는 효과를 낸다. 감독은 굳이 SF적인 특수효과 없이도 현재의 도시 풍경만으로도 미래적 이질감을 줄 수 있다고 보았다. 실제로 “왜 현재 세계를 SF 의상으로 치장해야 하는가, 낯선 미래는 이미 도래했다”는 견해를 고다르의 <알파빌>처럼 공유했다고 전해지는데, 이 도로 시퀀스는 그런 철학을 체험하게 하는 예다. 한편으론, 지구를 떠나 우주로 향하는 과정을 자동차 여행의 형태로 지루하리만치 길게 묘사함으로써 관객을 현실로부터 서서히 이탈시키고, 솔라리스라는 미지의 공간으로 함께 이행시키는 역할도 한다. 마침내 켈빈이 도착한 솔라리스 우주정거장은 예상과 달리 황폐하고 음울한 분위기다. 활기차야 할 연구 기지는 텅 빈 복도와 어수선한 짐들로 가득하고, 마주친 연구원 스나우트는 몹시 지친 얼굴로 불안해 보인다. 동료 과학자 기바리안은 켈빈 도착 직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유일하게 남은 다른 과학자 사토리우스는 연구실에 틀어박혀 켈빈을 경계할 뿐이다. 정거장의 내부 연출은 기괴할 정도로 일상의 파편들로 채워져 있다. 곳곳에 지구에서 가져온 가족 사진, 책더미와 낡은 가구, 고전 명화가 붙은 벽 등이 눈에 띄는데, 이는 외딴 우주에서 인간이 간신히 붙잡고 있는 현실 감각의 흔적들처럼 보인다. 특히 도서관 겸 응접실에는 브뤼겔의 명화〈눈 속의 사냥꾼>이 크게 걸려 있고, 고전 양식의 흉상과 샹들리에 등이 있어 마치 구식 살롱을 옮겨놓은 듯하다. 이러한 세팅은 우주 공간에 생뚱맞지만, 곧 펼쳐질 기이한 사건들과 대비를 이루며 영화의 메타포적 무대 장치로 기능한다. 켈빈은 곧 기바리안이 남긴 비디오 편지를 통해 이 정거장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전해 듣는다. “우리가 보는 환영들은 양심과 관련되어 있다”는 불길한 힌트를 남긴 채, 기바리안은 영상 속에서 절망에 찬 눈빛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머지않아 켈빈 자신도 그 말을 실감하게 된다. 정거장에 온 첫날 밤, 켈빈은 자신의 숙소에서 죽은 아내 하리가 갑자기 나타나는 것을 목격한다. 몇 년 전 자살로 세상을 떠난 아내가 눈앞에 살아있는 모습으로 다가오자, 켈빈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다. 처음 등장한 ‘하리’는 아무 기억도 모른 채 천진난만하게 켈빈에게 애정을 보이지만, 켈빈은 이것이 진짜 아내일 리 없다는 이성적 판단과 동시에 밀려드는 감정 때문에 혼란스러워한다. 결국 그는 급히 우주복을 입혀 하리를 소형 우주 캡슐에 강제로 태운 후, 정거장 밖으로 내보내버린다. 이 장면은 매우 고통스럽게 묘사되는데, 켈빈의 얼굴엔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감과 슬픔이 교차하고, 문 밖에서 갇힌 채 두려움에 떠는 하리의 모습이 교차 편집된다. 사랑하는 이의 재현이라는 기적 앞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이란 결국 두려움에 의한 배척이었다는 점에서, 이 장면은 관객에게도 깊은 상흔을 남긴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곧이어 두 번째 하리가 나타난다. 켈빈이 잠든 사이, 솔라리스 행성의 바다가 발산하는 미지의 힘은 다시 한 번 그의 내밀한 기억을 실체화시킨다. 이번에 나타난 하리는 이전보다 자기 의식을 조금씩 갖추기 시작한다. 그녀는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한 채 켈빈에게 강한 애착을 보이고, 켈빈 또한 이번엔 그녀를 함부로 내치지 못한다. 죄책감과 애정이 섞인 심경으로 켈빈은 하리를 곁에 머물도록 허용한다. 시간이 흐르며 하리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된다. 그녀는 본인이 원본 하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극심한 불안을 겪고, 켈빈의 사랑이 진실인지 두려워한다.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 하리의 불안은 마침내 자해로 이어진다. 하리는 켈빈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액체 산소를 마셔 자살을 시도하고, 몸이 뼛속까지 얼어붙는 끔찍한 고통을 겪는다. 하지만 솔라리스 바다가 만들어낸 그녀의 몸은 죽음마저 이겨내듯 다시 재생하고, 그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사토리우스와 스나우트는 경악한다. 이 장면에서 타르코프스키는 SF 공포영화에나 나올 법한 섬뜩한 재생의 순간을 담담한 카메라 워크로 포착한다. 켈빈이 돌아와 회복된 하리를 끌어안으며 흐느낄 때, 관객은 기쁨과 공포가 뒤얽힌 복잡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는 사랑하는 이를 살려냈지만 동시에 그 존재가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다는 모순적 현실을 확인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중반부는 켈빈과 하리가 우주정거장에서 보내는 나날들을 서정적으로 그려낸다. 특히 무중력 공간 장면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으로 꼽힌다. 어느 한때, 정거장의 인공 중력이 잠시 꺼지면서 켈빈과 하리, 그리고 방 안의 물체들이 부유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때 두 사람이 머물던 도서관 세트가 배경으로 등장하는데, 벽에 걸린 브뤼겔의 겨울 풍경화,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 방 한가운데 펴져 있던 책 등이 모두 공중에 뜬 채 천천히 회전한다. 켈빈과 하리는 부유하는 서로를 끌어안으며 마치 꿈결 같은 포옹을 나눈다. 타르코프스키는 여기에 바흐의 장중한 합창곡을 다시 흘려보내어, 일종의 성스러운 순간을 연출한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흔들림 없이 두 연인의 모습을 클로즈업과 원거리 숏으로 교대로 잡아내며, 시간이 멈춘 듯한 환상을 실감나게 전달한다. 부유하는 물방울과 유리잔 파편, 천천히 뒤집히는 책장의 이미지들은 초현실적인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관객은 잠시나마 과학과 이성이 설 자리를 잃은 순수한 몽상의 세계에 빠져든다. 이때 브뤼겔의 그림과 음악, 그리고 두 인물의 공중정지는 모두 과거와 현재, 예술과 삶이 뒤섞이는 한편의 시적 몽타주로 기능한다. 평단은 이러한 시퀀스를 두고 “타르코프스키가 순간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붙잡아 화면에 영원의 일별을 담아냈다”고 평하며, 그의 영화미학이 응축된 결정적 장면으로 손꼽는다. 실제로 타르코프스키 자신도 이같은 느리고 명상적인 연출로 “흐르는 시간 속에서 또 다른 시간의 층위를 찾는” 실험을 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이 몽환적 평화는 오래 가지 못한다. 솔라리스 행성의 신비를 두고 과학자들은 논쟁을 이어가며, 켈빈은 현실과 환영 사이에서 심신이 지쳐간다. 스나우트와 사토리우스는 솔라리스 바다가 인간의 뇌파를 흡수하여 ‘손님’을 만들어낸다는 가설을 세우고, 이를 종결짓기 위해 강력한 방사선으로 바다를 조사하기로 결정한다. 그 전에 켈빈의 뇌에 담긴 정보를 바다에 역으로 쏘아보내면 혹시 바다가 인간을 이해하여 실험을 멈추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하지만, 결국 그들의 선택은 폭력적인 해결책으로 기운다. 이 과정에서 하리는 자신이 결국 켈빈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임을 자각하고, 켈빈의 행복을 위해 스스로 사라지길 결심한다. 그녀는 사토리우스에게 부탁하여 반중력 입자 해체 장치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소거해버린다. 켈빈이 이를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고, 그는 절망 속에 심한 열병을 앓으며 정신을 잃는다. 이때 영화는 또 하나의 몽환적 이미지를 펼쳐 보인다. 켈빈의 꿈 장면인데, 여기서는 지구의 자연 풍경, 어린 시절 기억, 어머니의 모습 등이 뒤섞여 나타난다. 카메라는 물 속에 잠긴 방 안에 켈빈의 어머니가 들어오는 초현실적 장면을 보여주거나, 녹슨 금속 구조물 사이로 아이였던 켈빈이 달리는 플래시백 등을 비춰주며 인과관계가 끊긴 순수한 영상 흐름을 구성한다. 이 일련의 장면들은 훗날 타르코프스키가 <거울>에서 본격적으로 선보일 시적 이미지 몽타주의 전조라 할 만하다. 꿈을 통해 켈빈의 무의식을 탐색한 후, 영화는 그를 지구로 “귀환”시키는 것으로 보이는 결말로 향한다. <솔라리스>의 결말은 해석의 여지를 남긴 채 강렬한 잔상을 준다. 켈빈은 병상에서 회복된 뒤 지구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마지막 장면에서 어느새 아버지의 집 앞 연못가에 서 있다. 집 주변 풍경은 영화의 도입부와 똑같이 보이지만 어딘가 정적이고 기묘한 분위기가 감돈다. 켈빈은 현관으로 걸어가서 마중 나온 아버지에게 다가간다. 그는 마치 렘브란트의 회화 〈탕자의 귀환〉을 연상시키듯 무릎을 꿇고 아버지의 다리를 끌어안는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아들을 감싸 안는다. 카메라는 서서히 이들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줌 아웃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서서히 밝혀지는 충격적 사실: 이들이 있는 곳은 지구의 농장이 아니라 솔라리스 행성의 한 조그만 섬 위라는 것이다. 집 주변으로 카메라가 더 멀어지자, 끝없이 펼쳐진 솔라리스의 물결치는 대양(大洋)이 화면을 채운다. 결국 켈빈은 지구로 귀환한 것이 아니라, 솔라리스의 바다가 보여주는 환영 속 현실 안에 머물게 된 것이다. 바흐의 엄숙한 음악이 다시 흐르며 화면이 암전된다. 이 엔딩은 다층적인 의미를 지닌다. 표면적으로는 솔라리스의 미지 지성(知性)이 켈빈의 가장 간절한 바람 – 속죄와 화해 – 을 이루어주는 듯 보인다. 죽은 아내도 잃고 모든 실험이 실패로 끝난 뒤, 켈빈은 차마 이루지 못한 소원, 즉 아버지와의 화해를 그 ‘거짓 현실’ 속에서나마 성취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현실 도피를 뜻하기도 한다. 켈빈은 더 이상 차가운 현실 세계로 돌아가지 않고, 자신의 기억으로 구성된 환영의 낙원에 머무르기로 암묵적으로 선택한 셈이다. 이는 쿠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인간의 새로운 진화를 암시하며 끝나는 것과 정반대 방향의 결말이다. <솔라리스>의 마지막은 인류의 미래에 대한 어떤 해답도 내리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 우주에서 발견한 것은 신비한 거울 속 자기 위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쓸쓸한 통찰을 던진다. 한 비평가는 이 마지막 숏에 대해 “지구(인간의 현실)와 솔라리스의 바다(인간이 풀지 못한 무한)가 하나로 이어진 모습”이라 평하며, “타르코프스키에게 인간과 거대한 무한 사이에는 불가분의 연결 고리가 존재한다. 비록 그것이 끝내 해독 불가능한 상태로 남을지라도”라고 해설했다. 관객은 켈빈의 선택이 구원인지 타락인지 쉽게 판단할 수 없으며, 그저 여운 어린 질문만을 안은 채 영화의 크레딧을 맞이하게 된다.

타르코프스키는 <솔라리스>를 통해 자신의 독자적인 영화 미학을 유감없이 펼쳐 보인다. 그는 동시대 소비에트 영화인들이 주로 활용하던 몽타주보다는 씬 하나하나의 지속시간과 유려한 롱테이크를 중시했다. 덕분에 이 영화는 SF 장르로서는 이례적으로 완만한 템포와 긴 숏들로 이루어져 있다. 타르코프스키는 “영상은 피상적 순간 뒤에 숨은 더 깊은 진실을 드러내야 한다”는 신념 하에, 급박한 편집 대신 관조적 카메라 움직임을 택했다. 예컨대, 켈빈이 솔라리스 정거장에 도착하는 시퀀스에서 카메라는 그의 뒤를 따라 천천히 정거장의 복도를 배회하며 공간을 탐색한다. 이때 관객은 주인공과 함께 낯선 공간을 체험하고 그 분위기에 잠식된다. 이러한 롱테이크 기법은 관객의 능동적 주시를 요구하는데, 빠른 전개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지루한 영화”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실제로 미국의 비평가 로저 에버트는 이 영화를 처음 접하고 “<솔라리스>는 빠른 액션 영화가 아니라, SF의 자유를 이용해 인간 본성을 성찰하는 깊고 사려 깊은 작품”이라고 평했다. 그는 처음에는 영화의 느린 길이와 템포에 주저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철학적 야심을 존중하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나아가 2003년에는 이 영화를 자신의 “위대한 영화” 리스트에 올리며 “어떤 감독도 타르코프스키만큼 관객의 인내심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숭배자들은 열정적이며 그들도 타당하다. 타르코프스키는 의식적으로 크고 심오한 예술을 창조하고자 했고, 정신적 힘으로 현실을 변모시킬 수 있다는 낭만적 비전을 고수했다”고 극찬했다. 이러한 언급에서 드러나듯, 타르코프스키의 연출은 관객에게 일종의 명상적 몰입을 요구하며, 인위적 감정 유도 대신 스스로 사유할 시간을 부여한다. 영상미적인 측면에서, <솔라리스>는 자연과 산업, 빛과 어둠의 대비를 통해 인물 심리를 표현한다. 지구 장면들은 싱그러운 녹색과 부드러운 자연광으로 촬영되어 켈빈의 잃어버린 평화와 향수를 상징한다. 반면 우주정거장 장면들은 차가운 형광빛과 금속성 색조로 채워져 인공적이고 불안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특히 타르코프스키와 유소프는 동양적 미감을 일부 차용하여 색채를 운용했는데, 예를 들어 도쿄 고속도로 시퀀스에서는 도시의 네온빛과 자동차 불빛이 자극적인 팔레트를 이루는 반면, 그 장면 직후 켈빈이 바라보는 우주정거장 창밖의 솔라리스 행성은 잿빛 구름으로 덮여 있다. 이러한 색 대비는 현실 세계의 과잉 자극과 우주에서의 무채색 고독을 대조시킨다. 또한 물과 거울의 이미지가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이것들은 모두 반사의 모티프로서 캐릭터의 내면 성찰을 시각화한다. 켈빈은 지구의 연못에 비친 자기 모습, 정거장 창문에 어른거리는 자기 얼굴 등을 바라보는 장면이 몇 차례 나오며, 이를 통해 관객은 그가 자기 자신의 기억과 정면으로 대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삭제된 장면 중에는 정거장 내 ‘거울의 방’에서 켈빈이 자신과 수없이 마주보는 장면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정거장 공간 자체가 거울처럼 그의 과거를 비춰주는 장치인 셈이다. 사운드 디자인 면에서, <솔라리스>는 특유의 실험적 접근을 보인다. 음악은 전자음악 작곡가 에두아르트 아르테미예프가 맡았는데, 그는 신시사이저를 활용한 전자 음향과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고전음악을 교차시켰다. 도입부와 무중력 장면에서 울려 퍼지는 바흐의 “Ich ruf zu Dir, Herr Jesu Christ” 코랄 전주곡은 영화 전체에 영혼의 울림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반면 솔라리스 행성을 비출 때 흐르는 전자음향은 심해(深海)처럼 낮게 웅웅거리는 소리와 신비로운 멜로디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관객에게 막연한 불안과 경외심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타르코프스키는 인위적인 영화음악을 쓰지 않으려 했고, 필요 이상의 설명적 사운드를 배제했다는 점에서 음악도 미니멀리즘에 가깝다. 또한 그는 환경음을 중요하게 활용했다. 지구 장면에서는 바람 소리, 새소리, 나뭇잎 스치는 소리 등이 자연스럽게 들려오고, 정거장 내부에서는 기계의 저음 진동, 발자국의 울림 등이 정적 속에서 강조된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침묵의 활용이다. 클라이맥스에서 하리가 사라진 후 켈빈이 좌절하는 일련의 시퀀스는 긴 침묵과 느릿한 효과음으로만 채워져 있다. 관객은 켈빈의 절망을 과장된 음악 없이 정적 속에서 체험하게 되는데, 이로써 그의 감정이 더욱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한편, 극 중 인물들의 대화 역시 과묵하고 간결하다. 불필요한 말은 거의 없이, 때로는 철학적 문장이나 시적 대사가 툭 던져진다. 예컨대 사토리우스 박사는 켈빈에게 “진리를 찾는 과정에서 인간은 지식에 사로잡힌 신세”라고 단언하고, 하리는 “사랑은 우리가 느낄 수 있지만 결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라는 말을 남긴다. 이런 대사는 SF 영화에서 흔한 과학용어 대신, 작품을 철학적 에세이처럼 만드는 요소다. 물론 이로 인해 <솔라리스>는 서사적 친절함을 포기했다는 비판도 받았지만, 반대로 영화가 지닌 시적 깊이를 더해주는 중요한 축이기도 하다.

<솔라리스>가 궁극적으로 묻는 질문은 영화의 형식, 이야기, 이미지 모든 요소와 맞물려 심오한 주제 의식을 형성한다. 가장 두드러지는 테마는 인간의 자기 성찰과 구원에 대한 갈망이다. 솔라리스 행성은 말하자면 인간의 양심과 기억을 비추는 거울로 기능한다. 이 거울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방식으로 작동하여, 인물들이 숨기고픈 내면의 죄의식을 외부 현실로 끄집어낸다. 켈빈에게 나타난 하리는 그가 과거 아내를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상처 준 죄책감의 화신이다. 과학자 기바리안에게는 어린 소녀 모습의 환영이 뒤따랐던 것으로 보이고, 사토리우스 역시 실험실에서 누군가를 숨기는 모습이 포착된다. 이것은 일종의 응보처럼 보이기도 하고, 동시에 치유의 기회처럼 보이기도 한다. 켈빈은 환영으로 되돌아온 아내를 통해 과거의 잘못을 직시하고 용서를 구할 기회를 얻지만, 그 과정은 또한 잔인한 상처를 동반한다. 영화는 우리가 맞닥뜨린 낯선 존재가 결국 우리 자신의 양심이라는 역설을 제시함으로써, SF 장르의 전형적인 주제를 내면의 드라마로 치환한다. 타르코프스키는 이를 통해 인간이 진정 정복해야 할 것은 우주가 아니라 자기 자신임을 암시한다. “다른 세계를 찾지 말고, 우리 자신을 비춰볼 거울을 찾자”는 영화 속 주제 의식은 결국 과학기술의 시대에 잃어버린 인간 정신의 자리를 회복하자는 메시지로 읽힌다. 영화의 또 다른 핵심 주제는 사랑과 희생, 그리고 그것의 영원성 혹은 무력함이다. <솔라리스>의 중심 서사는 일종의 SF 멜로 드라마로 볼 수도 있다. 죽은 연인이 기적으로 되살아와 다시 사랑을 나눈다는 설정 자체는 고전적 로맨스의 판타지이지만, 타르코프스키는 이를 몽환적이면서도 잔혹한 방식으로 변주한다. 켈빈과 하리의 관계에는 뜨거운 사랑의 재회와 동시에, 두 번에 걸쳐 반복되는 비극이 내재한다. 하리는 두 번이나 자살을 감행하고, 켈빈은 두 번 모두 그녀를 지켜주지 못한다. 이러한 반복 구조는 히치콕의 <현기증>를 연상시킨다는 평도 있다. 실제로 두 작품 모두 남성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인을 지키지 못하는 무력감과 동일 인물의 반복적 상실을 다룬다는 점에서 정서적 친연성이 있다. 다만 <솔라리스>에서는 그 원인이 초자연적 존재에 기인한다는 점이 독특하다. 요컨대 이 영화는 SF적 장치를 통해 인간 사랑의 근원적 비극성을 들여다보는 셈이다. 켈빈이 끝내 환영 속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선택은 어쩌면 하리를 잃은 후 현실에 대한 체념과 도피로 볼 수도 있고, 반대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차가운 진실이 아니라 자비로운 환상이라는 주장일 수도 있다. 이 모호한 결말은 관객 각자에게 사랑과 구원에 대해 사색할 여지를 남긴다. 삶과 죽음,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서사는 종교적·철학적 함의도 풍부하다. 솔라리스의 바다는 전지전능한 신 혹은 창조주의 은유처럼 읽히기도 한다. 어떤 평론가는 “솔라리스는 인간을 그의 창조주 앞에 세우는 신화적 영화”라며, “인간 관계에서 사랑을 최우선시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조용히 외친다”고 해석했다. 실제로 영화 속 솔라리스 해양은 인간의 마음을 훤히 꿰뚫어보고 기적을 일으키는 존재로 그려지지만, 끝내 자기 의지를 인간 언어로 전달하진 않는다. 이것은 침묵하는 신 혹은 우주의 신비를 상징적으로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타르코프스키 본인은 이 영화의 핵심을 “인간의 도덕적 순수성”에 관한 이야기로 보았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자연의 심원을 파고드는 탐구는 반드시 도덕적 진보와 연결되어야 한다. 지식이 한 계단 올라서면, 도덕도 한 계단 올라서야 한다”고 말하며, <솔라리스>를 통해 도덕적 책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영화에서는 과학자들의 윤리 문제가 비중 있게 다뤄진다. 사토리우스는 해양에 방사선을 쏘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하나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일이다. 영화는 이에 대한 직접적인 판단을 내리기보다는, 과학적 진보 뒤에 따라야 할 윤리의식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보인다. 냉전 시기 핵개발 경쟁이나, 우주개발 이면의 정치적 욕망 등을 떠올려 보면 이 주제는 더욱 시대를 초월한 울림을 준다. <솔라리스>는 개봉 당시 소련 당국의 이념과 어긋나는 정신성을 담고 있어서인지 국내에서는 미온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서구 평단에서는 “서구 문명이 가진 가치들을 진지하면서도 기묘한 방식으로 재검토한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예컨대 뉴욕 타임스의 빈센트 캔비는 이 영화를 두고 “서구 과학과 이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사랑의 신비를 탐구함으로써, 현대 문명이 잃은 영적 차원을 일깨운다”는 취지의 평을 남겼다. 인도계 영국 소설가 살만 루슈디 역시 <솔라리스>를 “최고의 SF 걸작”이라 부르며, “현실의 불확실성과 인간 무의식의 힘, 그리고 불행조차 아름다운 사랑의 힘을 탐구한 위대한 작품”이라고 격찬했다. 그는 나아가 “이 영화는 최대한 많은 이들이 반드시 보아야 한다”고 권하며, 타르코프스키가 보여준 시적 영상미와 철학적 통찰이 미래에도 길이 남을 것이라 예견했다. 이러한 국제적 호평에도 불구하고 정작 타르코프스키 본인은 <솔라리스>에 완전히 만족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1980년대 초 자서전적 다큐멘터리 <여정의 시간>에서 “<솔라리스>는 예술적으로 실패한 작품”이라고 언급하며, 그 이유로 “SF 장르를 초월하지 못하고 기술적 대사와 특수효과에 발목 잡혔다”는 점을 들었다고 전해진다. 후년에 만든 <스토커>를 두고는 장르의 한계를 극복한 성공작으로 친 것과 비교하면, 본인에게 <솔라리스>는 다소 아쉬움이 남는 실험이었던 셈이다. 일부 평론가들도 그의 견해에 동조하여, <솔라리스>가 타르코프스키 필모그래피 중 가장 난해하고 완성도 면에서 <희생>, <거울> 등보다 떨어진다고 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다수 평자들은 이 작품이 지닌 선구적 의미와 미학적 성취를 높이 평가한다. 일본의 구로사와 아키라는 평생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로 <솔라리스>를 꼽았고, 수많은 감독들이 타르코프스키의 이 영화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공언했다. 오늘날 <솔라리스>는 유럽 예술영화와 SF 장르의 가교 역할을 한 고전으로 자리매김하였으며, 여러 매체에서 역대 최고의 SF 영화 목록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솔라리스>는 표면적으로 우주를 배경으로 한 SF 영화이지만, 그 내면에는 철학적 사유와 영상 시의 정수가 흐르는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타르코프스키는 장르의 공식을 빌려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지고, 관객을 낯설고도 친숙한 자기 성찰의 거울 앞에 세운다. 영화 언어의 혁신과 주제의식이 긴밀히 엮여 있는 본작은, 형식주의 비평과 인문학적 해석 모두를 풍부하게 자극한다. 롱테이크, 자연 이미지, 서정적 사운드스케이프 같은 형식 요소들은 단순한 미학이 아니라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사유하기 위한 도구로 작용한다. 예를 들어, 물에 비친 영상과 거울 모티프는 인물의 정체성 혼란을 가시화함과 동시에 관객으로 하여금 “나는 누구인가”를 묻게 만든다. 또한 솔라리스의 미지의 지성은 인간 이성의 한계를 드러내며, 이는 20세기 후반 과학만능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읽힌다. 한 프랑스 비평지에서는 <솔라리스>를 “진보에 대한 믿음을 한 우화로 의문에 부치는 영화”라고 평했다. 즉 겉으로는 미래 우주 개척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인간이 진정으로 나아가야 할 ‘내면의 진보’를 묻는 작품이라는 뜻이다. 타르코프스키는 생전에 “예술은 현대의 세속화된 단편화를 치유하고, 보다 큰 영적 의미를 회복하려는 시도”라고 언급한 바 있다. <솔라리스>는 바로 그 시도를 스크린에 구현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과학 vs.신앙, 현실 vs.환상, 죄 vs.구원 등 거대한 이분법들을 한 공간에 불러모아 충돌시키고, 뚜렷한 해답 대신 한 편의 성찰의 장을 제공한다. 작품 말미에 켈빈이 환영 속 아버지에게 귀환하는 모습은, 1960년대의 모더니즘적 신념이 1970년대의 현실 앞에서 향수 어린 회귀로 바뀌는 장면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는 거대 담론의 좌절과 개인적 영성의 재부상을 보여주는 시대적 알레고리로 읽을 수도 있다. 반면 다른 시각으로는, 그 장면이 인간과 우주가 결국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몸임을 암시하는 화해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이렇듯 <솔라리스>의 엔딩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지만, 바로 그 수수께끼야말로 이 영화를 전설적 지위에 올린 요인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형식주의적 관점에서 보자면, <솔라리스>는 영화 매체가 어디까지 깊이 있고 독창적인 표현을 창조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다. 타르코프스키는 관습적 서사 전달을 넘어 이미지와 소리 자체로 사고하고 느끼게 하는 순수 영화의 경지를 추구했다. 그는 훗날 영화 이론서 <봉인된 시간>에서 “영화는 흐르는 시간을 조각하는 예술”이라 정의하며, 관객이 자신의 영화 속에서 심리적 시간을 체험하길 바랐다. <솔라리스>는 바로 그러한 심리적 시간이 흐르는 공간이다. 관객이 이 영화를 볼 때 느끼는 지루함, 경이, 혼란, 황홀감 등은 모두 타르코프스키가 설계한 정서적 리듬 안에 있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단순히 줄거리나 메시지로 환원되지 않고, 체험되는 예술로 남는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솔라리스>는 여전히 새로운 해석과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살아있는 작품이다. 어떤 이는 이 영화를 통해 우주에서 인간을 본다고 하고, 또 다른 이는 인간 속에서 우주를 본다고 한다. 분명한 것은, 이 영화가 던지는 “우리는 무엇을 찾아 우주로 나아가는가”라는 질문은 시대를 넘어 유효하다는 점이다. 타르코프스키는 이에 대한 답을 강요하지 않고 관객 스스로 답하도록 남겨둔다. 그리하여 <솔라리스>는 보는 이마다 다른 사유의 거울이 되어 준다. 1972년 칸 영화제 수상 당시에도 작품을 둘러싼 논란과 경이로움이 공존했듯이, 지금도 이 영화는 SF의 틀 안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심오한 시네마적 경험으로 평가받는다. 끝없는 해석을 품은 채, <솔라리스>는 우리 곁에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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