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오야마 신지는 1990년대 중반부터 두각을 나타낸 일본의 영화감독이다. 그는 릿쿄 대학 시절 저명한 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의 영향을 받으며 영화 미학을 탐구했고, 졸업 후 구로사와 기요시 등의 연출부를 거치며 현장 경험을 쌓았다. 1996년 첫 장편 <헬프리스>로 데뷔한 이후, 90년대 후반까지 활발하게 작품을 발표했다. 특히 <헬프리스>, <차가운 피> 등의 초기작은 느와르나 범죄 스릴러 장르의 외형을 빌리면서도, 불안과 허무로 가득 찬 당대 일본 청년들의 정서를 담아내며 주목받았다. 아오야마의 영화 스타일은 한마디로 차분한 관조와 실험정신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는 긴 러닝타임과 느린 호흡, 그리고 장르적 문법의 변용을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온 작가다. 화면 구성은 정밀하고 절제되어 있으며, 인물의 내면과 풍경을 긴 숏으로 포착하는 것을 즐긴다. 이러한 스타일은 그의 영화에 묵직한 서정성과 철학적 울림을 부여해준다. <유레카> 이전까지 아오야마 신지는 일본 영화계의 신예 작가주의 감독으로 서서히 명성을 쌓아가고 있었다. <야생의 삶>, <셰이디 그로브> 등으로 장르 영화의 틀을 실험적으로 확장했고, 영화 비평과 소설 집필에도 참여하며 지적인 영화관을 드러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의 이름은 주로 영화제와 평단에서 호평받는 정도였고, 대중적 인지도는 높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2000년에 발표된 <유레카>는 아오야마의 커리어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이 작품으로 그는 칸 영화제 국제비평가연맹상과 에큐메니컬상을 수상하며 국제적 주목을 받았고, 일본 내에서도 차세대 거장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유레카>는 그간 아오야마가 탐구해온 주제 의식과 스타일을 집대성한 영화로 평가받는다. 감독 특유의 느린 미학,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 그리고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연출이 이 작품에서 정점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유레카>는 아오야마 신지 영화 세계의 정수라 할 만하다. <유레카>가 제작되고 공개된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의 일본 사회는 깊은 혼란과 내적 불안의 시기였다. 1980년대 말 거품 경제 붕괴 이후 지속된 “잃어버린 10년” 동안 경제적 침체와 고용 불안이 이어지면서, 사회 전반에 미래에 대한 회의감과 무기력이 퍼지고 있었다. 특히 1995년은 일본인들의 집단적 트라우마를 형성한 해로 기록되는데, 1월에 발생한 한신 대지진과 3월 옴진리교에 의한 도쿄 지하철 사린 가스 테러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며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이 비극들은 예측 불가능한 재난과 폭력이 일상의 안전을 송두리째 흔들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사회는 정신적으로 깊은 상처를 입었다. 이후 몇 년간 일본 사회에는 상실감, 불안, 그리고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심리적 회복의 욕구가 공존했다. 영화계 역시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작품들이 등장했다. 90년대 후반부터 죽음과 상실, 그리고 기억의 문제를 다루는 영화들이 두드러졌는데,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환상의 빛>, <원더풀 라이프>는 죽음 이후의 세계나 남은 이들의 삶을 성찰했고, 구로사와 기요시의 <큐어>, 후카사쿠 킨지의 <배틀 로얄> 등은 현대 일본 사회의 폭력성과 불안을 은유적으로 드러냈다. <유레카> 역시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 위치한다. 아오야마 신지는 1995년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이 자신의 창작에 직접적인 영감을 주었다고 밝힌 바 있으며, 전후 일본 사회에 누적된 심리적 짐까지도 이 사건과 연결지어 고찰했다. 개인의 트라우마와 사회 역사적 트라우마를 겹쳐서 바라본 그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상흔을 끌어안고 어떻게 삶을 지속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영화의 중심에 놓았다. <유레카>가 담고 있는 고통과 치유의 서사는, 세기말 일본이 처한 현실—혼란 속에서 새로운 희망의 단서를 찾아야 했던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는 하나의 우화처럼 읽힌다.
영화 <유레카>의 이야기는 한 비극적 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일본 규슈의 한 지방 도시. 평범한 통학 버스에 한 총기 무장 괴한이 올라타 승객들을 인질로 잡는 버스 납치 사건이 발생한다. 긴박한 대치 끝에 경찰이 버스를 포위하지만, 상황은 참혹한 결말을 맞는다. 순식간에 총성이 울리고, 현장에는 여섯 구의 시신이 남는다. 범인과 경찰관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오직 세 사람만 살아남는다. 버스 운전사 사와이 마코토와 그 버스에 타고 있던 타무라 코즈에와 타무라 나오키 남매가 그들이다. 영화는 이 참혹한 사건 장면을 직접적으로 상세히 묘사하지는 않는다. 관객은 사건의 전말을 파악하기도 전에 이미 비극이 지나가버리고, 곧바로 트라우마에 잠식된 인물들의 사후 삶이 전개된다. 사건 이후, 생존자 세 사람의 삶은 뿔뿔이 흩어진다. 사와이는 극심한 죄책감과 충격으로 정신이 무너져버린다. 자신이 살아남은 것에 대한 생존자 죄의식과 타인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무력감에 사로잡힌 그는, 가족을 남겨둔 채 행방을 감추고 떠돌아다닌다. 한편 코즈에와 나오키 남매는 아직 어린 나이에 겪은 충격으로 마음을 닫아버린다. 두 사람 모두 실어증에 걸린 듯 말문을 닫고 학교에도 나가지 않는다. 그들의 어머니는 감당하지 못하고 가출해버리고, 아버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교통사고로 사망한다(사고에 숨겨진 자살의 가능성도 암시된다). 졸지에 부모 없는 아이들이 된 코즈에와 나오키는 자기들만의 세계 속에 갇혀 집 안에 틀어박혀 지낸다. 시간이 흘러 2년 후, 마코토는 고향으로 돌아온다. 집을 떠나 있는 동안 그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어 있었다. 아내는 이미 그를 떠나 다른 곳에서 새 삶을 시작했고, 그는 더 이상 버스를 운전하지 못한 채 고향에서 막일 노동자로 지내기 시작한다. 마코토가 돌아오자 주변 사람들은 그를 기묘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과거의 끔찍한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산 증인의 귀환은 마을에 불길한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마코토 자신도 여전히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그러던 중 마코토의 주변에서 이상한 사건이 벌어진다. 동네에서 젊은 여성들이 잔혹하게 살해당하는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공교롭게도 마코토는 희생자들과 마지막으로 함께 있던 인물로 지목된다. 경찰은 그를 용의자로 의심해 거칠게 심문하지만, 뚜렷한 증거가 없어서 결국 풀려난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의 의혹과 편견어린 시선은 여전히 마코토를 따라다닌다. 고립무원의 심정이 된 마코토는 문득 자신처럼 세상에 버려진 존재인 코즈에와 나오키 남매를 떠올린다. 그는 오랜 죄책감과 슬픔을 등에 진 채 타무라 남매의 집을 찾아가 함께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두 남매의 집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어지럽혀져 있고, 아이들은 최소한의 생계유지조차 힘겨워하고 있다. 마코토는 묵묵히 그 집에 들어가 가사일을 돌보고 식사를 차려주며, 마치 가장처럼 그들을 보살핀다. 세 사람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상처 입은 영혼들끼리 의지하며 기묘한 대가족 비슷한 공동생활을 시작한다. 처음에는 침묵과 어색함만 가득하던 집 안에 차츰 일상의 온기가 돌아온다. 마코토의 헌신적인 돌봄으로 코즈에는 조금씩 마음을 열고 입을 떼기 시작한다. 그러나 나오키는 여전히 말을 하지 않고, 밤마다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이들 앞에 한 인물이 합류하면서 집단의 구도는 또 변화를 맞는다. 타무라 남매의 사촌인 아키히코(사이토 요이치로 분)가 느닷없이 그들의 집에 찾아온 것이다. 대학생인 아키히코는 여름 방학을 지내러 왔다며 당분간 같이 지내겠다고 한다. 그의 등장은 마코토에게 경계심을 불러일으킨다. 어딘지 모르게 가볍고 냉소적인 태도의 아키히코와, 삶의 무게를 온몸으로 짊어진 마코토 사이에는 미묘한 긴장이 흐른다. 그럼에도 네 사람은 한지붕 아래 생활하며 임시적이나마 가족의 형태를 이룬다. 하지만 평온을 찾나 싶던 이 공동체에 다시금 폭력이 파고든다. 앞서 계속되던 연쇄살인 사건이 또 벌어지고, 이번에는 마코토의 가까운 친구마저 희생된다. 경찰의 의심이 거세지는 가운데, 마코토는 더 이상 이곳에 머물러선 안 되겠다고 판단한다. 그는 코즈에, 나오키, 그리고 아키히코에게 뜻밖의 제안을 한다. 오래된 중고 버스를 한 대 구입해 캠핑카처럼 개조한 뒤, 함께 먼 길을 떠나자는 것이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고, 네 사람은 살던 집과 과거의 어둠을 뒤로 하고 길 위에 오른다. 큐슈 섬 곳곳을 유랑하는 로드 무비가 이렇게 전개된다. 여행 초반, 바깥세상과 다시 접촉하면서 코즈에는 서서히 미소를 되찾고 말문을 연다. 마코토 역시 오랜만에 느끼는 자유 속에서 삶의 의지를 회복해간다. 그러나 나오키의 상태는 점점 불안정해지고, 아키히코는 그런 나오키를 못마땅해하며 빈정대기 일쑤다. 긴 여정 속에서 누적된 긴장감은 마침내 폭발하고, 숨겨져 있던 진실이 드러난다. 연쇄살인의 범인은 다름 아닌 나오키였던 것이다. 어린 나오키는 버스 납치 사건의 트라우마와 가족의 해체로 심각한 상처를 입은 나머지, 내면의 분노와 공허를 통제하지 못하고 살인을 저질러왔다. 이 충격적인 사실과 마주한 순간, 마코토는 비로소 과거의 악순환을 끊어낼 결심을 한다. 그는 도망치는 나오키를 붙잡아 절규하며 스스로 죄를 받아들이고 멈추라고 설득한다. 결국 나오키는 눈물을 흘리며 무너져내리고, 마코토의 품에 안긴 채 경찰에 자수하기로 한다. 나오키를 하차시킨 뒤, 남은 셋은 다시 길을 떠난다. 그러나 아키히코의 이기적이고 경박한 태도는 끝내 마코토의 인내심을 한계에 다다르게 만든다. 어느 날 마코토는 깊은 분노를 터뜨리며 아키히코를 버스에서 쫓아내고 만다. 결국 버스 안에는 마코토와 코즈에 단 둘만 남는다. 두 사람은 과거의 망령들을 모두 떨쳐내기라도 하듯, 묵묵히 목적 없이 도로를 달린다. 마침내 그들이 도착한 곳은 큐슈에서 가장 높은 산 정상 부근의 한 길. 버스를 세우고 밖으로 나온 마코토와 코즈에는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주변 풍광을 바라본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본다. 이제는 괜찮다는 듯 코즈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마코토 역시 잔잔히 미소 짓는다. 두 생존자는 비로소 일상의 삶으로 되돌아갈 용기를 얻은 것이다. 그 순간, 영화 내내 우중충한 세피아 색조로 표현되었던 영상이 서서히 컬러로 변모한다. 잿빛이 감돌던 세계에 처음으로 자연의 생생한 색깔이 돌아오며, 영화는 열린 결말 속에 두 사람의 앞날에 잔잔한 희망의 빛을 비춘다.
<유레카>는 형식 면에서 매우 독특하고도 대담한 미학을 구현하고 있다. 러닝타임이 218분에 달하는 이 영화는 극단적으로 느린 호흡과 최소화된 서사적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오야마 신지 감독은 의도적으로 빠른 서사 전개나 자극적인 연출을 배제하고, 지극히 묵묵하고 관조적인 카메라로 인물들의 일상과 내면을 응시한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세피아 톤의 흑백 영상으로 촬영되었는데, 이는 컬러 필름에 흑백처럼 담아낸 독특한 질감으로, 화면에 고요하고도 우울한 분위기를 입혀준다. 이러한 탈색된 영상은 인물들이 겪는 정서적 무채색 상태, 즉 삶의 활력을 잃어버린 상태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한다. 카메라는 광활한 풍경이나 적막한 방 안을 오랫동안 비추고, 인물들의 동작을 느릿하게 따라간다. 롱테이크와 롱샷의 활용이 두드러지는데, 종종 한 씬이 몇 분간 컷 없이 지속되며 관객에게 시간의 흐름을 체험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마코토가 혼자 창밖을 바라보거나, 네 사람이 버스에서 묵묵히 이동하는 장면 등에서는 인위적인 편집을 배제한 채 실제 시간에 가까운 길이로 한 숏을 지속함으로써, 인물들의 고독과 침묵의 무게를 고스란히 느끼게 한다. 편집 또한 극도로 절제되어 있다. 불필요한 장면 전환이나 설명적인 몽타주는 거의 없고, 컷 사이의 연결도 여유롭게 이루어진다. 시간의 점프가 있을 때도 설명적 자막 없이 인물들의 변화로 암시하는 식이다. 이러한 편집 리듬은 관객으로 하여금 서두르지 않고 인물의 심리에 천천히 동조하도록 만든다. 미장센 측면에서, 영화는 공간과 사물의 배치를 통해 인물들의 정서를 은유한다. 타무라 남매의 지저분하게 방치된 집안은 그들의 정체된 삶과 내면의 혼란을 반영하고, 버스 내부의 한정된 공간은 인물들이 피할 수 없이 직면한 공동의 운명을 상징한다. 넓게 펼쳐진 큐슈의 들판과 하늘은 인물들에게 열려 있는 치유의 가능성과 자유를 암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거대한 자연 속에 고립된 개인들의 작음을 부각한다. 사운드 역시 인상적이다. 영화 전반에 걸쳐 침묵과 생활음이 주된 소리 풍경을 이룬다. 대사는 최소한으로 압축되어 있는데, 코즈에와 나오키가 말을 잃은 설정 덕분에 초중반에는 거의 대화가 없다시피 하다. 대신 시계 초침 소리, 바람이나 곤충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 인물들의 발걸음과 숨소리 등이 증폭되어 들린다. 이러한 극도의 정적은 관객을 영화 속 세계의 고요한 긴장으로 끌어들이며, 인물들의 내면에 집중하게 만든다. 음악은 아오야마 신지 본인이 공동 작곡에 참여했는데, 극히 제한적으로 사용되어 필요한 순간에만 등장하는 미니멀리즘 음악으로서 큰 울림을 준다. 예컨대 극 후반부, 마코토와 코즈에가 산 정상에 도달하는 장면에서 처음으로 맑은 피아노 선율이 흐르는데, 이는 마치 긴 어둠 뒤에 찾아온 한 줄기 빛처럼 느껴져 깊은 감동을 자아낸다. 전반적으로 <유레카>의 형식적 요소들은 느림의 미학으로 통합되어 있으며, 이는 영화의 주제인 상처 치유의 과정을 형식적으로 체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관객은 느린 호흡에 동참함으로써 인물들과 함께 정신적 재생의 여정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유레카>에는 여러 인상적인 장면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영화의 서두와 말미에 해당하는 두 시퀀스는 형식과 주제 양면에서 특히 주목할 만하다. 먼저 오프닝 버스 납치 시퀀스를 살펴보자.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한적한 시골 도로를 주행하는 통학 버스와, 그 안에 타고 있는 코즈에와 나오키 남매의 모습을 비춘다. 카메라는 차창 밖으로 펼쳐진 풍경과 아이들의 무표정한 얼굴을 번갈아 잡으며 일상의 한 순간을 담는다. 이때 코즈에가 조용히 중얼거리듯 말한다: “곧 큰 파도가 몰려와 우리를 휩쓸 거야.” 이 예언적 대사는 곧 닥칠 재앙을 암시하면서 관객의 긴장감을 높인다. 곧이어 버스에 권총을 든 범인이 올라타는 순간, 아오야마는 클로즈업이나 흔들리는 카메라 대신 멀리서 지켜보는 시선을 유지한다. 총구가 승객들을 위협하고 비명과 혼란이 퍼지지만, 카메라는 버스 내부를 직접 비추기보다는 바깥에서 정지된 숏으로 버스의 외부 모습과 경찰들의 움직임을 담는다. 이어지는 주차장 대치 장면에서도 마찬가지로, 넓은 공간에 고립된 버스를 롱샷으로 포착하여 인질들의 불안을 에둘러 표현한다. 그러다 돌연 총성이 연이어 울리고 사태가 종료되는데, 이 급작스런 폭력의 폭발을 감독은 생략과 여운으로 처리한다. 관객은 총소리를 듣고도 한동안 화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고, 연기가 자욱해진 버스 주변을 보여주는 광활한 숏이 한동안 지속될 뿐이다. 그리고 연기가 걷히며 드러나는 것은 망연자실한 표정의 마코토와 아이들뿐이다. 이 오프닝 시퀀스는 숏의 길이와 거리감을 통한 충격의 전달이라는 아오야마의 미학을 잘 보여준다. 사건의 폭력성을 직접적으로 소비시키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거리 두기와 정적을 통해 트라우마의 여파를 실감나게 체험하게 하는 연출이다. 한 숏 한 숏 신중하게 계산된 이 오프닝은 이후 전개될 느린 영화의 톤을 설정함과 동시에, 관객을 일상의 한복판에서 갑작스레 탈선한 비극으로 안내한다. 대조적으로, 클라이맥스 격인 최후반부 산정 장면은 어둠에서 빛으로 넘어가는 변화를 시각적으로 극대화한 숏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 나오키가 경찰에 자수하고 난 뒤, 버스에 남은 마코토와 코즈에는 깊은 침묵 속에 달린다. 그리고 마침내 산길에서 버스가 멈추고, 두 사람이 걸어 나오는 장면이 펼쳐진다. 이때 카메라는 이들을 뒷모습의 롱숏으로 잡는다. 구름 낀 하늘과 안개 자욱한 산봉우리의 풍경이 화면 가득 펼쳐지고, 그 한가운데 조그맣게 서 있는 두 사람의 실루엣이 보인다. 지속되던 세피아 톤의 흑백 영상이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이때다. 마코토와 코즈에가 서로를 바라보는 정면 클로즈업으로 전환되며, 아주 천천히 화면에 옅은 색감이 스며든다. 코즈에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고, 마코토의 거친 얼굴에도 온기가 피어오른다. 이어서 둘이 함께 정면을 응시하는 투샷에서 배경의 하늘이 탁한 회색에서 푸른빛으로 변모하고, 주변 나무들에도 녹색기가 번진다. 점진적인 채도 변화를 통해 흑백에서 컬러로의 이동을 보여주는 이 숏 전환은 서서히 피어나는 희망을 형상화한 백미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천천히 버스 쪽으로 걸어가는 롱테이크가 이어지는데, 이때는 완전히 컬러로 바뀐 풍경 속에서 카메라가 그들을 뒤에서 따라간다. 산 아래로 내려가는 구불구불한 길과 멀리 비치는 햇살을 한 프레임에 담은 이 숏은, 마치 새로운 시작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의 뒷모습처럼 경건하고 아름답다. 숏 바이 숏 따져보면, 인물의 클로즈업에서 배경 숏으로, 정지된 앵글에서 움직이는 트래킹 숏으로 변화하는 구성인데, 이는 인물 내면의 변화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연출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유레카>의 핵심 장면들은 치밀한 숏 구성과 미세한 영상의 변화를 통해 주제 의식을 담아낸다. 관객은 하나하나의 숏을 따라가며 인물과 함께 절망의 터널을 지나 희망의 빛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아오야마 신지 감독은 <유레카>를 통해 트라우마 이후의 삶이라는 주제를 깊이 있게 탐구한다. 그는 범죄나 폭력의 가해자보다는 피해자와 생존자의 시선에 주목하고자 했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대개 영화는 범죄를 저지르는 자에게 관심을 두지만, 나는 이 작품에서 피해를 입은 이들이 겪는 고통과 치유의 과정을 그리고 싶었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로 <유레카>는 버스 납치라는 범죄 자체보다는, 그 사건으로 인해 삶이 파괴된 이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갈 힘을 찾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마코토와 남매는 모두 무고한 피해자들이지만, 사회는 그들을 충분히 보듬어주지 못한다. 오히려 두려움과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상처 입은 이들을 소외시키고 의심할 뿐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감독은 연대와 공동체의 힘을 하나의 답으로 제시한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마코토와 아이들이 서로를 가족처럼 돌보는 이야기는, 상처 입은 개인들이 서로 기대어 만들어낸 작은 공동체가 어떻게 치유의 출발점이 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영화 내내 마코토는 자책과 우울에 시달리면서도 끝끝내 아이들을 지키고자 헌신한다. 그의 이러한 희생적 행동은 아이들에게는 새로운 아버지의 탄생과도 같다. 감독은 부재했던 부모의 자리(헬프리스 등 이전 작품에서 결핍으로 그렸던)를 마코토라는 인물을 통해 메우며, 절망의 고리를 끊어낼 윤리적 가능성을 열어 보인다. 이것은 앞서 아오야마의 작품들이 암울한 시대상을 그리면서도 해답을 찾지 못했던 것과 대비되는 지점으로, <유레카>에서 비로소 재생의 희망을 선포하고 있는 셈이다. 영화의 제목 유레카는 그리스어로 “찾았다!”라는 의미를 지닌 표현으로, 흔히 큰 깨달음이나 발견의 순간을 가리킨다. 이 제목은 영화의 결말에서 드러나는 주제적 메시지와 직결된다. 어둠 속에서 헤매던 인물들이 마침내 터널의 끝에서 자신들의 삶을 되찾는 순간, 즉 일종의 각성과 구원의 순간을 암시하는 것이다. 버스가 정상에 올랐을 때 찾아온 컬러 영상의 회복은 곧 그들의 “유레카”의 순간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는 개인적인 치유일 뿐 아니라, 더 넓게 보면 세기말 혼란을 통과한 일본 사회가 맞이해야 할 정신적 회복을 상징하는 은유이기도 하다. 아오야마 신지는 이 영화를 일컬어 “현대를 살아갈 용기를 찾는 이들을 위한 하나의 기도”라고 표현했다. 실제로 <유레카>는 폭력과 상실로 얼룩진 세계 속에서도 인간이 끝내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음을 조용하지만 강하게 역설한다. 복수나 처벌의 카타르시스 대신, 지루하고 고된 자기 성찰과 용서의 과정을 택한 이 영화는 상업적 쾌감은 적을지언정, 보는 이로 하여금 삶과 구원에 대해 깊이 사유하게 만든다. 감독의 연출 의도는 분명하다. 그는 관객이 극중 인물들의 고통의 침묵을 함께 견디고, 그 속에서 비로소 작지만 소중한 희망의 숨결을 발견하도록 이끈다. 이러한 면에서 <유레카>는 한 편의 영화이면서 동시에 영적 여정에 가까운 체험을 제공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유레카>는 2000년대 일본 영화사에서 중요한 좌표를 차지하는 작품이다. 우선 국제 영화 무대에서 거둔 성취를 들 수 있다. 이 영화는 칸 국제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연맹상과 에큐메니컬 심사위원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일본 예술영화로서는 이례적인 3시간 30분이 넘는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외국 비평가들은 작품의 서사 규모와 깊이에 주목하며 “도스토옙스키적인 구원 서사”라는 호평을 보냈다. 국내외 영화제에서의 성과로 아오야마 신지는 단숨에 세계 영화계가 주목하는 감독으로 발돋움했고, 이는 동시대 일본 영화의 존재감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일본 영화 내에서 <유레카>의 위상은 세기말 뉴웨이브의 정점이라는 평가로 요약될 수 있다. 90년대 후반 등장한 새로운 감각의 감독들—예컨대 고레에다 히로카즈, 구로사와 기요시, 시오타 아키히코 등—과 나란히, 아오야마 신지는 자신만의 색깔로 일본 사회의 내면을 파고들었다. 그 중에서도 <유레카>는 주제의식의 선명함과 형식미의 완성도로 인해 동세대 작품들 사이에서 단연 두드러진다. 한편으로 이 영화는 서구 예술영화 전통과 일본적 정서를 창의적으로 결합한 예로서 영화사적 의미를 지닌다. 롱테이크 중심의 느린 영화 문법은 안토니오니나 벨라 타르 등 유럽 감독들의 영향을 떠올리게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 정서는 일본 특유의 잔잔한 정서와 공동체 의식으로 채색되어 있다. 또한 로드무비이자 심리 드라마, 더 나아가 현대적 서부극의 요소까지 품고 있다는 점에서도 독특하다. 감독 자신이 주인공 마코토의 여정을 존 포드의 <수색자> 속 존 웨인에 비유한 바 있듯이, <유레카>는 상처 입은 영웅이 자기 구원을 찾아 나서는 현대의 서부극으로 읽힐 수도 있다. 이렇듯 다층적인 장르 혼성은 일본 영화의 스펙트럼을 넓힌 실험이기도 하다. 비평적 시각에서 볼 때, <유레카>는 치유의 서사를 형식적으로 구현한 뛰어난 성취인 동시에, 일부에겐 난해하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몇몇 평자들은 극단적인 러닝타임과 느린 전개로 인해 “인내심을 시험하는 영화”라는 평을 하기도 했다. 실제로 영화 상영 당시 일반 관객들 사이에서는 호불호가 갈렸고, 흥행적으로는 미미한 성적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중적 어려움조차도 작품의 의도로 읽힌다. 고통의 치유란 쉽고 빠르게 이뤄지지 않는 법이고, <유레카>는 그 진실을 영화적 시간으로 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영화의 느림과 정적의 용기는 이후 많은 영화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2000년대 들어 아시아 영화계에서는 정지영, 차이밍량 등 슬로 시네마라 불리는 경향이 주목받았는데, <유레카>는 일본 영화에서 이러한 미학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회자된다. 또한 아오야마 신지가 이후 발표한 작품들—예컨대 <새드 배케이션> 등—이 <유레카>와 세계관을 공유하며 후속 이야기를 확장했다는 점에서, 본작은 감독 필모그래피의 중심축으로 기능한다. 요컨대 <유레카>는 21세기 일본 영화에 중요한 예술적 이정표를 세운 작품이며, 일본 현대사가 남긴 상흔을 영화라는 예술로 승화시킨 뛰어난 예로 평가된다.
처음 <유레카>를 접했을 때, 솔직히 당혹감을 느꼈다. 익숙한 영화 문법과는 거리가 먼 느릿느릿한 전개, 대사 한 마디 없이 흐르는 적막한 숏들, 그리고 거의 네 시간에 달하는 방대한 길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일반적인 감상 자세를 버리고 영화와 새로운 관계를 맺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차츰 작품에 몸을 맡기자, 그 묘한 몰입감과 정신적 울림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마치 긴 명상에 잠겨 있는 듯한 경험이었다. 영화 속 인물들이 겪는 고통과 고독이 화면 너머로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특히 함께 식사를 준비하고 조용히 식탁에 둘러앉은 네 사람의 모습을 오래도록 비추던 장면에서, 아무 말도 없는 그 적막 속에 오히려 수많은 감정의 파동이 느껴졌다. 서로가 없었다면 완전히 부서졌을 영혼들이 한데 모여 숨죽인 채 밥을 먹는 광경은, 슬프고도 아름다워서 잊기 어렵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산 정상에서 화면에 물들어온 한 줄기 푸른빛은, 오랜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눈과 마음에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마코토와 코즈에가 보인 미소는 어떤 말보다도 힘있는 희망의 증거처럼 느껴졌고, 그들이 앞으로 나아갈 일상을 나 역시 응원하게 됐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을 만큼, <유레카>는 깊은 잔상을 남겼다. 삶의 고통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와 예술적 형식의 조화에 감탄했고, 감독의 용기 있는 표현 방식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