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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마뉘엘 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20세기 프랑스 철학을 대표하는 사상가로서, 서구 철학 전통에 근본적인 전환을 촉발한 ‘타자의 윤리학’을 주창하였다. 그는 자신의 주요 저작인 <전체성과 무한>을 통해 윤리를 제일철학으로 격상시키며, 전통적인 존재론 중심의 철학을 비판하고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형이상학적 초월과 책임의 문제를 새롭게 조명하였다.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1906년 러시아 제국 치하의 리투아니아에서 유대인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히브리어와 러시아 문학, 유럽 철학에 두루 친숙했던 그는 1923년 프랑스로 유학하여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였다. 이후 독일 프라이부르크로 건너가 현상학의 창시자 에드문트 후설과 하이데거의 세미나에서 수학하였고, 1929년에는 후설의 <데카르트적 명상>을 가브리엘 페페를 통해 불어로 번역 소개하는 등 현상학을 프랑스 철학계에 알리는 데 공헌했다. 1930년에 발표한 학위 논문 「후설 현상학에서의 직관 이론」은 프랑스 최초의 후설 연구서로 평가받는다. 철학계에 입문한 초기부터 레비나스는 현상학과 실존철학의 흐름 속에서 사유했으나, 곧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한계를 느끼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 중반에 이르면 <탈출에 대하여>등의 에세이에서 존재로부터의 ‘탈출’과 초월의 필요성을 논하며, 인간 주체가 스스로의 실존적 한계를 넘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구상을 예고했다. 이러한 초기 사상은 훗날 윤리적 타자와의 조우라는 주제로 발전하게 된다. 레비나스의 생애에서 제2차 세계대전은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그는 전쟁 발발 직후 프랑스 군에 입대하였으나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5년여를 수용소에서 보내야 했다. 수용소에서 그는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철학 서적을 탐독하고 사유를 이어갔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의 리투아니아의 가족과 친지들은 모두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희생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난 후 가족의 비극을 접한 레비나스는 문명적 충격과 함께, 서구 철학 자체에 내재한 폭력의 문제를 깊이 성찰하게 된다. 그는 “유럽의 전체주의는 유럽 철학이 빚어낸 파국”이라는 신념을 품게 되었고, 전후 철학적 과제로 전체주의적 폭력의 근원을 밝히고 이를 초월할 길을 모색하는 일에 매진하였다. 전쟁 이후 레비나스는 파리로 돌아와 유대인 학교의 교장으로 재직하며 철학 강의를 이어갔다. 1947년에는 전쟁 중 집필한 원고를 토대로 <존재와 존재자>을 출간하여 실존의 익명적 ‘현존’ 개념을 논했다. 또한 <시간과 타자>등의 강연을 통해 시간성, 죽음, 에로스, 출산 등의 주제를 타자와의 관계 맥락에서 철학적으로 성찰하였다. 이러한 전후의 저작들은 모두 훗날 <전체성과 무한>으로 결실을 맺을 사유의 토대를 쌓는 과정이었다. 1961년, 마침내 레비나스의 주저인 <전체성과 무한>이 출간되었다. 이때 레비나스의 나이 55세로, 이는 그의 철학적 여정에서 하나의 정점이자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전체성과 무한>은 프랑스에서 그의 박사 학위 제출 논문이기도 했는데, 이 방대한 저작을 통해 레비나스는 윤리를 제일철학으로 선언하며 본격적으로 철학계에 자신만의 독자적 입장을 천명하였다. 이후 그는 푸아티에 대학과 파리 낭테르 대학, 그리고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교수로 임용되어 학계의 인정을 받으며 철학 활동을 이어갔다. 만년에는 <존재 너머 혹은 존재를 넘어>와 다수의 탈무드 해설 글을 발표하며 윤리 메타철학과 종교철학까지 아우르는 폭넓은 사유를 전개했다.

레비나스가 <전체성과 무한>을 집필하던 1950년대 후반부터 1961년 사이의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의 상흔이 여전히 짙게 드리워진 채 냉전이 본격화되던 격동의 시대였다. 철학적으로는 전후 실존주의 열풍이 한풀 꺾이고, 구조주의와 언어학적 전회가 막 대두하기 시작한 과도기였다. 장 폴 사르트르와 가브리엘 마르셀 등의 실존철학,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적 존재론이 프랑스 지성계를 주도하던 분위기 속에서, 레비나스는 주류와는 다른 문제의식을 심화시켜갔다. 전체주의의 경험과 그 철학적 원인에 대한 문제의식은 이 시기 레비나스 사유의 핵심이었다. 그는 나치즘과 같은 정치적 전체주의의 뿌리가 단순한 사회경제적 조건이나 악한 의지에만 있지 않고, 서구 형이상학 전통 자체의 “동일성의 철학”에 내재한 폭력성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근대 철학의 출발점이라 할 데카르트의 코기토, 즉 “사유하는 주체”의 관점에서 세계를 파악하는 사유 방식은, 결국 ‘나’ 밖의 모든 것을 나의 인식과 동일성의 체계 안으로 포섭하려는 경향으로 이어졌다. 플라톤에서 헤겔에 이르는 서구 형이상학은 끊임없이 타자를 동일자로 환원하고, 존재자를 존재의 보편 개념 속에 통합하는 전체성의 철학을 전개해온 것으로 진단되었다. 레비나스는 이를 “존재론적 사유의 자기회귀성”이라고 지적했는데, 주체가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언제나 대상들을 자기 의식의 동일성 안에 붙잡아 넣는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론적 전통에 맞서 레비나스는 형이상학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여기서 말하는 형이상학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존재 일반의 학문이라기보다, “절대적인 타자성에 대해 열려 있는 사유”를 의미한다. 레비나스는 형이상학적 사유를 “자기 한계를 넘어 타자를 향해 나아가는 자기초월적 사유”로 규정하였다. 이는 자아가 파악하거나 소유할 수 없는 것을 향해 스스로를 열어두는 태도, 곧 초월의 지향이다. 20세기 중반의 철학 담론에서는 하이데거가 존재 망각을 비판하며 존재론의 재건을 시도했으나, 레비나스는 하이데거마저도 ‘존재’라는 동일자의 관점에 머물렀다고 보았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서구 철학이 망각한 것은 존재가 아니라 타자의 절대적 이질성이다. 그는 “철학의 제일 물음은 ‘존재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타자는 누구인가’여야 한다”고 천명하며, 전통 형이상학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뒤집고자 했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철학계의 지배적 패러다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고, 실존주의적 휴머니즘이나 구조주의적 인간과학의 흐름과도 구별되는 독자적 입지로서 부각되었다. 또한 문화적으로, 레비나스의 사유는 유대인 지식인으로서의 정체성과 분리할 수 없다. 그는 평생 정통 유대교 전통과 현대 철학의 대화를 모색했으며, 전후 파리의 유대 지성 모임에서 탈무드 강해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자신의 철학이 특정 종교 교의에 의존한 신학적 윤리가 아니라, 보편 철학의 언어로 서술된 윤리적 현상학임을 분명히 했다. 실제로 <전체성과 무한>에서는 성경이나 종교적 용어를 직접 거론하지 않으면서도, “타자에 대한 무한한 책임”, “메시아적 시간”, “출애굽으로서의 초월” 등 유대-기독교적 함의를 지닌 개념들을 세속 철학의 담론 속에 스며들게 하였다. 이는 당대 프랑스 철학 담론에서 보기 드문 접근이었는데, 초월과 윤리의 문제를 세속 철학의 범주 안에서 다루되 영적 깊이를 확보하려는 시도로 평가할 수 있다. 결국 1960년대의 지적 풍경 속에서 레비나스는 전쟁의 트라우마와 도덕적 위기의식을 철학적으로 승화시켜,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하는 데 몰두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전체성과 무한>의 문제의식 전반에 깊숙이 반영되어 있다.

<전체성과 무한>은 레비나스 철학의 핵심 개념들을 망라하여 전개한 방대한 논쟁적 저작이다. 이 책은 전통 형이상학이 동일자와 타자의 관계를 어떻게 왜곡해왔는지를 폭로하고, 타자와의 만남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형이상학을 모색한다. 책의 제목이 시사하듯, 핵심 주제는 “전체성”과 “무한”의 대립이다. 레비나스는 먼저 전체성의 개념을 분석하는데, 전체성이란 모든 이질적인 것들을 하나의 통일된 체계나 동일성으로 통합하려는 경향을 말한다. 역사상 많은 철학 사조—이를테면 절대정신에 모든 개별성을 포섭한 헤겔의 체계—가 이러한 전체성 지향을 보여주었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철학이 결국 자기 폐쇄적 동일성의 순환에 빠지며, 철학적 사유뿐 아니라 인간 사회에 폭력적 효과를 끼친다고 비판한다. 전체성의 사유에서는 타자가 진정한 타자로서 나타날 수 없고, 언제나 나의 이해 안에서 납작하게 파악된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는 윤리적으로 볼 때 타자에 대한 억압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응하여 레비나스는 전체성에 포획되지 않는 “무한의 사유”를 제시한다. 무한은 단순히 크기나 양적으로 무한한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절대성을 가리킨다. 그는 데카르트의 제3성찰에 나오는 “무한의 관념”에서 영감을 받아, 우리 마음속에 있지만 우리의 의식이 끝내 완전히 포섭할 수 없는 타자의 아이디어를 논한다. 데카르트에게 “무한의 관념”은 유한한 인간 정신 속에 들어 있으나 그 자체로는 인간을 초월하는 신의 흔적이었다. 레비나스는 이 개념을 변용하여, 타자의 얼굴에서 드러나는 무한을 이야기한다. 타자란 나와 전적으로 다른 주체로서, 그의 얼굴은 나의 경험과 지식으로 다 소화되지 않는 초월적 의미를 지닌다. “얼굴”은 레비나스 철학에서 가장 유명한 개념 가운데 하나다. 여기서 얼굴이란 단순히 타인의 물리적 얼굴 모습이 아니라, 타자가 드러내는 표현성과 절대적 타자성의 현현을 뜻한다. 타자의 얼굴은 벌거벗고 취약한 채로 나와 마주서서 아무런 강제력도 없이 나에게 말을 건네는 것 같은 상황을 연출한다. 레비나스는 얼굴을 통해 타자가 “나에게 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타자가 나의 생활세계 속으로 객체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해 호소하는 주체로 나타난다는 의미이다. 얼굴과 얼굴이 마주할 때, 나는 타인을 하나의 이미지나 개념으로 파악하기 이전에 이미 그의 존재 앞에 놓여 양심의 가책과 같은 도덕적 울림을 느끼게 된다. 예컨대 길에서 마주친 낯선 이의 고통에 찬 눈빛, 또는 약자의 무방비한 얼굴을 마주할 때, 우리는 이유를 설명하기에 앞서 타인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즉각적인 호소를 직감한다. 레비나스의 표현에 따르면, 타자의 얼굴은 그 침묵의 언어로 “나를 죽이지 말라”고 명령한다. 폭력을 당할 수 있는 노출된 얼굴이면서도, 바로 그 취약함으로 인해 살해를 금하는 절대 명령을 발하는 것이다. 이렇게 타자의 얼굴에서 오는 요구를 받는 순간, 나의 의식은 더 이상 자족적일 수 없고, 타자를 향한 책임으로 인해 근원적으로 분열되고 각성된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타자와의 만남을 “메타-물리적 관계”, 곧 초월적 관계라고 부른다. 이것은 대상과 인식 주체 사이의 인식 관계와 구별되는데, 인식 관계에서는 주체가 대상을 파악하여 지식을 얻고 자기 세계에 통합한다. 반면 초월적 관계에서는 타자가 끝내 나의 동일성에 통합되지 않은 채 타자로 남아 있으면서도 나와 관계 맺는 역설이 일어난다. 레비나스는 이를 가리켜 “관계 아닌 관계”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언뜻 모순된 말처럼 보이지만, 이는 타자를 대상으로 삼아 파악하는 관계가 아니라 타자를 주체로 맞아들이는 환대를 뜻한다. 그는 “타자를 맞아들임”이라는 표현으로, 타자를 환영하며 자기 집의 문을 여는 주체의 모습을 묘사한다. 이때 주체는 더 이상 완결된 주인이 아니라, 타자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존재로 거듭난다. 향유, 거주, 노동 등의 개념도 <전체성과 무한>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레비나스는 우선 주체의 일상적 삶을 “향유”라는 범주로 설명한다. 인간은 세계 속에서 먹고 마시고 거주하며 즐거움을 얻는데, 이러한 향유의 세계에서는 사물이 주체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는 동일자의 체계로 기능한다. 우리는 사물을 지각하고 사용함으로써 세계를 내재적 의미망 안에 끌어들이며 살아간다. 이러한 향유의 삶은 자기 만족적인 폐쇄계를 이룰 수 있지만, 언어와 타자의 출현을 통해 균열된다. 레비나스는 언어를 매우 독특하게 파악하는데, 그것은 단순히 정보를 교환하는 도구가 아니라 타자가 주체와 관계 맺는 주요한 방식이다. “말”은 말하는 이를 드러내는 행위이며, 특히 타자가 나에게 말을 건넬 때, 비로소 주체의 자기 완결적 세계가 흔들린다. 이 책에서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대화적 관계”를 존재론적 동일성을 넘어서는 핵심 경험으로 본다. 타자의 얼굴은 곧 말을 거는 얼굴이며, 주체는 그 부름에 응답함으로써 책임을 지기 시작한다. 흥미롭게도 레비나스는 에로스와 출산의 경험도 타자 관계의 한 형태로 논한다. 사랑하는 사이에서 타자는 에로스를 통해 단순한 인식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매혹적인 타자로 나타난다. 특히 “여성적인 타자”에 대한 언급은 논란을 빚기도 했는데, 레비나스는 여성성을 하나의 은유로서 타자가 주체의 동일성 안에 머물지 않고 은근히 미끄러져 빠져나가는 존재로 묘사했다. 또한 출산을 통해 태어나는 아이라는 존재는 부모와 연결되어 있지만 동시에 완전한 타자로서 미래로 열려 있는 존재로 제시된다. 이러한 논의들은 타자성과 무한의 관점을 인간의 근원적 경험들에 적용해보는 철학적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전체성과 무한>에서 레비나스는 주체-타자 관계의 구조를 새롭게 그려낸다. 주체는 더 이상 데카르트적 자기충족의 주체가 아니며, 타인으로 인해 끊임없이 교란되고 호출되는 책임의 주체이다. 그는 이 책임을 가리켜 무한책임이라 부르는데, 타자의 타자성은 무한하므로 주체의 책임도 한계가 없다는 뜻이다. 타자는 나에게 빚이 없지만 나는 타자에게 빚을 진 것처럼, 윤리적 관계는 비대칭적으로 이해된다. 나아가 레비나스는 “타자를 위한 존재”를 주체성의 본래 의미로 파악하면서, 윤리학이 곧 존재론을 넘어서는 초월의 철학임을 역설한다. 이러한 철학은 인간을 고립된 실존으로 보던 시각에서, 관계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시각으로의 전환을 이끈다.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철학은 발표 당시에는 그 난해함과 독창성 때문에 즉각적인 주류 담론이 되지는 못했으나, 점차적으로 그 가치가 인정되어 20세기 후반의 철학적 전환을 이끈 중요한 흐름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레비나스는 스스로를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사유에 맞서는 대안적 형이상학자로 자처했으며, 이는 “윤리학은 제일철학”이라는 기치로 요약된다. 그가 말하는 윤리학은 통상적인 도덕철학이나 규범윤리가 아니라, 철학의 근본 출발점이 타자와의 관계이어야 한다는 주장이기에, 형이상학과 존재론의 지위를 대체하는 근본철학으로서의 윤리학이었다. 이는 전통 철학사에서 전례를 찾기 힘든 입장으로, 서양 철학의 뿌리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존재와 진리를 탐구하는 형이상학이 제일철학의 역할을 해왔던 데 비해, 레비나스는 인간 사이의 윤리적 만남을 존재 탐구보다 선차적인 문제로 격상시킨 것이다. 이러한 전회는 철학사적으로 볼 때 근대 주체 철학에 대한 해체이자 극복의 움직임과 통한다. 데카르트적 주체, 칸트의 자율적 이성주체, 헤겔의 보편정신에 이르는 여정이 자기 동일성을 강화하는 철학이었다면, 레비나스 이후 철학은 자기 외부로 향하는 철학의 가능성을 모색하게 되었다. 레비나스의 사유는 동시대 여러 철학적 흐름과 독특한 대화를 나눈다. 한편으로 그는 후설과 하이데거로 대표되는 현상학적 전통을 깊이 있게 이어받았다. 의식 경험의 기술이라는 현상학 방법론은 레비나스에게도 유효했으나, 그는 현상학을 윤리적 만남의 현상학으로 변형시켰다. 이를테면, 지향성과 현상에 대한 기술 대신 타자의 얼굴이 드러나는 현상의 기술로 초점을 바꾸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현상학적 윤리”의 창시자로 평가될 수 있다. 다른 한편, 레비나스는 실존주의 특히 사르트르와 대비되는 입장을 취한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타인의 시선이 자신을 대상화함으로써 “타인은 지옥”이라고까지 말했지만, 레비나스에게 타인의 얼굴은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그는 자아의 자유와 자발성을 넘어, 타인에 대한 책임 속에서 비로소 참된 주체성에 도달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입장은 인간의 실존을 관계론적이고 이타적인 존재로 파악함으로써, 실존주의의 자유와 주체성 개념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또한 레비나스 철학은 후기 구조주의와 해체주의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자크 데리다는 1960년대에 레비나스의 철학을 주목하여 <폭력과 형이상학>이라는 글로 그의 사상을 해석하고 비평함으로써, 레비나스의 이름을 철학계에 널리 알렸다. 데리다는 레비나스가 서구 형이상학의 로고스 중심주의와 동일성의 폭력을 해체하는 선구적 작업을 했다고 평가하면서, 자신의 해체 전략과 연관 지어 논의하였다. 이후 미셸 푸코, 모리스 블랑쇼, 폴 리쾨르 등 여러 지성인들이 레비나스의 타자 철학에 공감하거나 영향을 받았다. 현대 윤리학과 신학 분야에서도 레비나스의 영향은 두드러지는데, 타자에 대한 무한책임이라는 개념은 신학적 사랑의 개념이나 실천윤리의 토대에 새로운 영감을 주었다. 예컨대 페미니스트 윤리학이나 돌봄의 윤리등에서 타자의 구체적 요구에 응답하는 윤리의 중요성이 대두된 것도, 철학적 배경에는 레비나스 식의 타자중심 사고가 자리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물론 레비나스의 철학이 모든 면에서 찬사만을 받은 것은 아니다. 난해한 문체와 개념들은 독해를 어렵게 하여 일각의 비판을 받았다. 그의 독특한 서술방식—앞서 언급한 “전언 철회” 기법, 즉 모순어법을 통한 표현—은 독자들에게 철학적 수수께끼를 던지는 효과를 냈지만, 동시에 전통 논증 방식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모호하고 비체계적이라는 인상을 주기도 했다. 또한 윤리적 책임의 무한성이나 비대칭성에 대한 그의 주장에 대해, 현실 윤리의 장에서는 구현 불가능한 과도한 이상주의라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예를 들어 모든 타자에게 무한 책임을 진다면 구체적 정치 공동체에서는 어떻게 행위 규범을 정립할 수 있는가, 혹은 나 자신에 대한 정당한 권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질문들이다. 레비나스도 이러한 문제를 의식하여, 제3자의 등장을 논의함으로써 순수한 일대일의 관계가 다수자의 사회로 확장될 때 정의의 필요를 언급했다. 즉, 한 사람만을 향한 절대적 책임이 아니라 여러 타자들 사이에서 책임의 균형과 비교를 고려하는 정의의 문제를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은 <전체성과 무한>보다는 이후 저작에서 더 깊이 다루어지며, 그 체계가 완전히 명료하진 않다는 지적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비나스의 철학사적 의의는 분명하다. 그는 서구 철학의 오래된 물음인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답하기 위해 “인간은 타인에 대한 책임이다”라는 혁신적인 정의를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존재론적 인간관을 윤리적 인간관으로 대체함으로써, 철학을 폭력에 맞서는 학문, 인간성과 평화를 지향하는 학문으로 재정향하였다. 레비나스는 어느 대담에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며, “타인의 이질성은 곧 당신과 상관있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낯설고 나와 공통되지 않은 타자성 자체가 도리어 나를 윤리적으로 각성시키는 힘이라는 뜻이다. 이는 우리가 타자를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타자의 타자성에 응답해야 함을 강조하는 말이다. 요컨대 레비나스에게 윤리란, 알 수 없는 타자를 환대하고 응답하는 끝없는 책임의 여정이다. 이러한 사상은 홀로코스트 이후 인류 보편윤리의 기반을 재구성하려는 철학적 노력으로서, 20세기 후반 도덕적 사유의 지형을 바꾸어 놓은 업적으로 평가된다. 마지막으로, 레비나스와 프랑수아 푸아리에의 대담에서 엿볼 수 있는 그의 인간적 면모와 철학적 신념은 앞서 논의한 바를 뒷받침해준다. 레비나스는 그 대화에서 자신의 생애를 회고하며, 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겪은 고통과 신념이 철학에 녹아 있음을 밝혔다. 그는 학문적 이론을 전개하면서도 늘 인간 존재의 구체적 현실—특히 타인에 대한 책임의 현실—을 잊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또한 자신이 유대인으로서 겪은 추방과 환대의 경험, 전쟁 포로로서 맛본 인간성 상실의 공포 등이 모두 철학적 영감의 원천이었다고 술회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개인적 경험이 보편 철학으로 승화되어야 함을 믿었고, 철학은 곧 인간에 대한 책임을 묻는 작업이라 정의하였다. 이는 레비나스 철학의 출발점이 구체적 삶의 고뇌이면서도, 그 도달점은 전 인류를 향한 윤리 메시지로 확장된다는 것을 방증한다.

<전체성과 무한>을 중심으로 한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학’은 전통 형이상학의 한계를 뛰어넘어 철학의 지평을 윤리적으로 전환시킨 기념비적 성과로 평가된다. 레비나스는 철학적 사유를 존재의 탐구에서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성찰로 이동시킴으로써, 20세기 사상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였다. 그의 철학은 전쟁과 폭력의 시대 속에서 인간다움의 근거를 묻는 과정이었고, 그 해답으로 타자에 대한 무한한 책임이라는 윤리적 원칙을 내놓았다. 이는 동일자와 타자의 관계를 재설정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타인을 객체가 아닌 주체로 대면하도록 요구한다. 오늘날 다문화, 타자 혐오, 세계적 갈등의 문제가 첨예한 현실 속에서, 레비나스의 사상은 왜 타자의 얼굴을 마주하는 일이 윤리의 시작인가를 일깨우며 여전히 강력한 울림을 준다. 그의 ‘타자의 윤리학’은 철학사에 있어 윤리적 전회의 상징으로 남았고, 앞으로도 인간과 타자의 관계에 대한 사유를 이끌어가는 나침반 역할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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