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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정신과 전문의의 역할 재정립: 과거, 현재와 미래 방향

Figure adapted from Potash, James B., et al. “The Future of the Psychiatrist.” Psychiatric Research and Clinical Practice (2025).

 

서론: 변화하는 정신과 전문의의 전문영역

정신과 전문의들은 시대에 따라 그 역할과 전문성이 크게 변화해왔다. 한 세기 전만 해도 정신과 의사는 프로이트로 대표되는 정신분석 등 심층 정신치료의 영역을 주도하며, 환자의 내면 탐색과 대화를 치료의 주된 도구로 삼았다. 이후 과학의 발전과 함께 생물학적 정신의학이 급속히 부상하면서, 1950년대 항정신병 약물의 도입은 정신의학에 혁신적 전기를 마련하였다. 예를 들어 1952년 프랑스에서 처음 사용된 클로르프로마진은 기존의 진정제들보다 월등한 효과로 당시 흥분상태의 정신과 입원병동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고, 이를 계기로 다양한 향정신성 의약품 개발의 “황금기”가 열렸다 . 이러한 약물 치료의 등장은 정신질환 치료 패러다임을 입원 중심의 장기치료에서 약물 중심의 외래치료로 전환시켰고, 정신과 전문의들의 주된 역할도 자연스럽게 약물 처방과 생물학적 치료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약물치료의 부상과 더불어 정신과 전문의의 심리치료 역할 약화도 진행되었다. 20세기 후반에는 인지행동치료 등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단기 심리치료 기법들이 발전했으나, 이는 주로 임상심리사 등 비의사 전문가들에 의해 시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의료 시스템의 구조와 수가 체계 등의 영향으로 정신과 의사의 심리치료 제공은 감소해 왔다. 예컨대 미국에서는 1990년대 이후 정신과 전문의가 상담치료를 제공하는 비율이 지속적으로 떨어져, 2016년경 정신과 외래 진료 중 심리치료를 포함한 비율이 5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는 보고가 있다. 이는 정신과 의사가 환자를 직접 오래 면담하며 치료하는 대신, 짧은 시간의 약물 점검과 처방 조정을 하는 역할로 점차 한정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역사적 흐름 속에서 정신과 전문의의 정체성과 전문영역은 약물치료를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정신치료는 심리학자, 상담사 등의 분야로 많이 이양된 실정이다.

현재의 도전: 다학제적 환경과 정신과 의사의 역할 경계

오늘날 정신건강 분야는 의사, 심리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공학자 등 다양한 전문인력이 팀을 이루는 다학제적 환경으로 변화했다. 심리치료나 인지행동치료는 더 이상 정신과 의사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임상심리사나 전문상담사 등 여러 직역이 이러한 치료를 활발히 제공하고 있다. 한편 생물학적 정신의학 연구는 뇌과학, 유전학 등의 기초과학 연구자들이 선도하고 있고, 새로운 뇌자극 치료기기의 개발은 공학자들이 주도하고 있다. 최근 부상한 인공지능(AI) 기술 또한 정신건강 분야에 도입되고 있지만, 이 역시 개발과 혁신의 중심에는 컴퓨터 과학자와 데이터 전문가들이 있다. 이렇듯 정신과 의사를 둘러싼 환경은 여러 전문직과 기술영역이 중첩되어, 정신과 전문의의 고유한 역할에 대한 혼란과 위기감이 대두되고 있다.

특히 정신과 의사의 핵심 업무 중 하나였던 진단과 치료 계획 수립 영역에서도 이러한 도전이 나타난다. 전통적으로 정신과 전문의는 면밀한 면담과 관찰을 통해 정신질환을 임상적으로 진단해왔으나, 최근 뇌영상 데이터와 AI를 활용하여 진단을 보조하려는 시도가 활발하다. 예를 들어 뇌 MRI 영상을 인공지능으로 분석해 조현병이나 치매 환자를 감별하는 연구들이 진행되어, 일부 연구에선 80% 이상의 정확도로 환자와 정상인을 구분할 수 있었다는 보고도 있다. 다만 이런 성과는 작은 규모의 연구에 국한되며 실제 임상에 적용하기에는 한계가 명확하므로, 아직 AI 진단 보조는 연구 단계에 머물러 있다. 치료 측면에서도, 치료 동맹과 의사-환자 관계는 정신과 임상에서 매우 중요한데, 고도로 발달한 AI가 등장하더라도 환자들이 기계와 마음을 나눌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2015년 옥스퍼드대와 BBC의 공동 연구에서도 수백 개 직업의 자동화 위험도를 분석한 결과, 정신과 의사나 상담사의 직업은 AI로 대체될 가능성이 가장 낮은 직종 중 하나로 평가되었다. 이는 인간만이 제공할 수 있는 공감과 소통의 가치가 정신건강 진료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방증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정신과 전문의들은 지속적으로 업무 범위의 중첩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오늘날 미국의 경우 처방권을 가진 전문인력으로 정신과 전문의 외에도 정신건강 임상간호사나 정신과 의사보조인력 등이 등장하여, 약물관리 업무를 분담하고 있다. 특히 경증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등 일부 정신건강 문제는 1차 진료의나 간호사 등이 관리하고, 정신과 의사는 자문역할을 수행하는 통합진료 모델도 확산되는 추세다. 이러한 팀 기반 진료에서 정신과 의사는 다학제 팀을 총괄하거나 자문하는 리더십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현대 정신건강체계에서 정신과 전문의는 가장 복잡하고 난치성인 환자군에 집중하고, 일상적인 추적 관리나 경미한 상담 등은 다른 전문인력이 맡는 형태로 업무 재분배가 이뤄지고 있다. 정신과 의사가 전체 정신건강 인력의 불과 5%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통계도 있어, 한정된 전문의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려면 이들의 고급 전문성을 난치 환자에 집중시키는 전략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다행히 정신과 의사는 전통적으로 신체의학 교육과 정신치료 수련을 모두 갖춘 폭넓은 양쪽 분야의 전문가로 훈련받아 왔으며, 뇌자극술 등 새로운 치료에도 대한 지식을 습득하고 있기 때문에 심신을 아우르는 통합적 치료에 기여할 수 있는 독자적 강점이 있다. 문제는 이러한 강점을 실제 임상현장에서 발휘할 수 있도록 역할을 재정립하고 전문성을 더욱 특화시키는 일이다.

최신 치료의 부상: 뇌자극과 기타 생물학적 개입

21세기에 들어 약물치료만으로 한계가 있는 일부 난치정신질환에 대해 뇌자극 및 첨단 생물학적 치료법들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전기경련치료는 오랜 역사를 지닌 치료이지만 현대에 와서 기술적으로 개선되고 안전하게 시행되면서 재평가되고 있고, 경두개 자기자극술은 2000년대 이후 우울증 치료에 유효성이 입증되어 비교적 표준 치료로 자리잡았다. 더 나아가 경두개 직류자극, 심부뇌자극, 고주파 초음파 자극 등 다양한 신경조절 기법들이 연구 및 임상에 적용되고 있다. 이러한 중재 정신의학의 등장은 정신과 전문의들에게 새로운 전문역량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 등 일부 국가에서는 이미 간질환치료나 통증치료 영역에 인터벤션 개념이 정착된 바 있는데, 정신의학에서도 “인터벤션 정신과”라는 이름의 세부 분야가 생겨나 뇌자극이나 케타민 주입치료 등의 시술을 전문으로 수행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흥미로운 것은, 많은 전문가들이 머지않아 이러한 구분이 불필요해질 것으로 전망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한 전문가는 “TMS나 케타민 치료 같은 기술을 포함하는 인터벤션 정신과라는 용어 자체가 곧 사라지고 이들이 표준적인 정신과 진료의 일부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만큼 신경조절 기법의 보편화가 예상되며, 미래의 정신과 전문의들은 약물 처방에 더해 이러한 첨단 뇌기술을 직접 활용하여 치료 스펙트럼을 넓혀야 할 것이다.

나아가 바이오마커 기반의 정밀정신의학도 미래 유망 분야로 거론된다. 유전학, 혈액검사, 뇌영상 등의 발전으로 향후에는 환자 개개인의 생물학적 특성을 반영한 맞춤 치료가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 정신과 전문의는 이러한 기초과학 발견을 임상에 적용하는 교량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어떤 환자에게 어떤 약물이나 자극치료가 최선일지 예측하고 선택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최근 연구들은 딥러닝 AI를 활용하여 환자의 진단과 증상 심각도를 예측하거나, 방대한 의료 데이터를 분석해 최적의 치료결정을 도와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일례로 한 연구에서는 임상 상황을 요약한 시나리오를 놓고 ChatGPT 같은 거대 언어모델이 최종 진단의 77% 정도를 정확히 맞혔다고 하지만, 이는 제한된 실험 맥락의 결과로 실제 환자 진료에 바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럼에도 이러한 기술들은 임상의사 결정지원 도구로서 잠재력이 크므로, 정신과 의사가 적극 활용한다면 치료의 효율과 정확도를 높이고 환자 맞춤형 접근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또 한편으로 주목받는 분야는 정신과적 질환에 대한 새로운 약물/생물학적 치료제의 등장이다. 최근 난치성 우울증 등에 케타민 주입치료가 도입되고, 향정신성 물질인 사이키델릭스(환각제)를 활용한 치료 연구도 부활하고 있다. 예컨대 실로시빈(psilocybin)이나 MDMA를 기존의 심리치료와 병행하는 임상시험들이 긍정적 결과를 보이며, 향후 일정 조건 하에 의료용으로 승인될 가능성이 논의된다. 이러한 신규 치료제의 통합 과정에서도 정신과 전문의의 역할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약리학적 지식과 신체에 대한 이해를 갖춘 의사만이 이러한 물질의 안전한 사용을 관리하고, 치료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의학적 부작용을 모니터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들 치료는 기존의 심리치료 기법과 결합되어야 최대 효과를 발휘하므로, 약물치료와 심리치료를 아우르는 정신과 전문의의 지식이 필수적이다. 실제로 전문가들은 미래의 정신과가 첨단 신경과학과 고전적 심리치료 전통을 통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하루는 뇌의 해부학적 표적을 자극할 방법을 고민하고 다음 날은 케타민이나 사이키델릭 치료에서 심리적 의미와 세팅을 논의하는” 식으로, 뇌와 마음 양 측면을 모두 다루는 진료가 새 시대의 정신과 의사가 지향해야 할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의 정신과 수련과정 역시 변화가 필요하다. 오랜 생물의학적 모델 교육에 더해 정신역동적 이해 등 고전적 심리학 지식도 재무장하고, 나아가 최신 기술에 대한 숙련도를 높이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제언이 나오고 있다. 결국 미래의 정신과 전문의는 생물학적 치료, 심리사회적 접근, 기술 활용 능력을 고루 갖춘 융합형 전문가로 거듭나야 한다.

인공지능 시대의 도래와 정신과 전문의의 대응

오늘날 의료 전반에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의 물결이 일고 있으며, 정신건강의학 분야도 예외가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 AI는 진단 보조나 치료 매칭 등에 활용 가능성이 있지만, 그 외에도 행정업무 경감, 임상 의사결정 지원, 환자의 자가관리와 교육 측면에서 폭넓은 활용을 기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전자의무기록 데이터에서 패턴을 학습하는 AI는 진료노트 자동 작성이나 처방 제안 등의 방식으로 의사의 업무 부담을 줄여줄 수 있고, 환자들에게는 챗봇을 통해 정신건강 교육자료를 제공하거나 간단한 자가 보고설문을 도와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기술 산업계에서는 우울증을 감지하는 스마트폰 앱, 대화 내용을 분석해 자살 위험을 예측하는 알고리즘, 가상현실을 이용한 불안장애 노출치료 등 다양한 디지털 정신건강 솔루션을 속속 선보이고 있다.

그러나 기술에 대한 기대만큼이나 우려도 큰 것이 현실이다. 정신과 영역에서 AI를 도입할 때 가장 큰 위험으로 지적되는 것은 오류와 윤리 문제이다. 예컨대 LLM 기반 챗봇이 환자 상담을 모방하더라도 부정확한 정보를 주거나 현실과 동떨어진 환각 답변을 할 가능성이 있고, 의료 데이터에 내재한 편향으로 인해 취약계층에 불리한 결정을 내릴 우려도 있다. 실제로 한 익명의 정신건강 앱에서는 환자 모르게 인간 상담자의 답변을 AI로 대체했다가 부적절한 대응으로 물의를 빚은 사례도 있었다. 이러한 사례들은 신속히 발전하는 기술에 비해 임상 활용 지침과 윤리적 논의가 뒤따르지 못하는 현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전문가 집단은 AI를 성급히 임상에 적용하기보다, 충분한 검증과 안전장치 마련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신과 전문의들은 AI 시대에 두 가지 태도를 모두 견지해야 한다. 하나는 혁신 기술의 잠재력을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하려는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기술의 한계를 분별하며 핵심 가치를 지키는 태도다. 미국정신의학회 신임 회장은 “AI가 정신의학에 큰 영향을 미치겠지만, 인간 대면을 통한 치유적 관계를 대체할 수는 없다”고 전제하면서, “의사들이 AI 개발에 주도적으로 관여하여 임상에 유용한 방향으로 발전하도록 이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정신과 의사가 단순히 기술의 소비자가 아니라, 기술이 임상현장에서 올바르게 쓰이도록 가이드하는 역할을 해야 함을 시사한다. 예를 들어 알고리즘이 제시하는 진단이나 치료 추천이 있더라도, 그것을 해석하고 환자 특수성에 비추어 최종 판단을 내리는 것은 인간 의사의 몫으로 남을 것이다. 또한 기술 개발자들과 협력하여 정신과 임상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AI 모델을 만들 때, 윤리적 원칙과 환자 프라이버시를 수호하는 데에도 의사들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 요컨대 AI 시대에도 정신과 전문의의 통찰력과 인간적 교감 능력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며, 기술을 도구로 삼아 임상 지평을 넓히되 인간 중심의 치료라는 본령은 지켜나가는 균형 잡힌 접근이 필요하다.

미래를 향한 제언: 정신과 전문의 전문성의 재특화 전략

이처럼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정신과 전문의들은 자신의 전문성을 재정의하고 특화해나가야 할 필요성이 크다. 앞으로 정신과 전문의가 집중해야 할 핵심 분야와 역량에 대해 몇 가지 방향을 제언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정신과 전문의는 통합적 치료의 전문가로서 입지를 굳혀야 한다. 이는 단순히 약물만 잘 쓰는 의사가 아니라, 약물치료와 정신치료를 결합하고 거기에 필요한 경우 뇌자극술이나 디지털 기법까지 아우르는 포괄적 치료 계획을 수립할 수 있는 전문성을 의미한다. 현재 많은 정신질환 환자들이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고, 동반질환이나 심리사회적 스트레스 요인이 얽혀 있는 경우가 많다. 정신과 의사는 의학적 지식과 심리적 이해를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복합적 문제에 대한 총체적 접근을 주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약물로 생물학적 증상을 안정시키는 동시에, 심리치료로 환자의 사고패턴을 교정하고, 필요시 가족 상담이나 사회복지 자원 연결까지 조율하는 등 종합적 관리를 제공함으로써 환자 예후를 극대화할 수 있다. 이런 역할은 다른 어느 단일 직역도 단독으로 수행하기 어렵기 때문에, 정신과 전문의만이 제공할 수 있는 고유한 가치로 남을 것이다.

둘째, 정신과 전문의는 가장 어려운 환자군의 치료를 책임지는 고난도 전문인력으로서 자리매김해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정신과 의사는 절대 수가 부족하며 정신질환 유병률에 비해 인력이 제한적이다. 따라서 모든 환자를 일대일로 다 볼 수 없기에, 경증이거나 비교적 표준화된 치료가 가능한 경우에는 일부 업무를 다른 전문가에게 위임하고, 정신과 의사는 난치성 우울증, 치료저항성 조현병, 중증 자살위험 환자 등 고위험·고난도 케이스에 집중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이는 의료자원의 효율적 분배 측면에서도 합리적일 뿐 아니라, 정신과 의사의 전문성 유지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가장 어려운 사례들을 다루면서 축적한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정신과 전문의는 해당 분야의 임상 리더로 인정받게 된다. 나아가 이러한 고난도 치료 경험은 표준치료로 잘 낫지 않는 환자들을 위한 새로운 치료법 개발이나 연구의 영감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정책결정자들은 이러한 역할 분담이 원활히 이뤄지도록 적절한 보상체계와 협업 모델(예: 일차진료-정신과 협진 모델, 원격 정신과 자문 등)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셋째, 커뮤니티와 공중정신건강 분야에서의 리더십을 강화해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정신건강 문제는 개인 진료실을 넘어 지역사회와 국가적 차원의 대응이 요구된다. 정신과 전문의는 자신의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자살 예방, 중독 문제, 노인 정신건강, 아동·청소년 정신건강 정책 등에 전문적 조언자로 참여할 수 있다. 과거 대한신경정신의학회에서도 미래 발전 전략으로 사회 및 지역 기반 프로젝트에 대한 리더십 강화를 제언한 바 있는데, 이는 정신과 의사가 정신건강 옹호자로서의 역할을 적극 수행하라는 의미다. 예를 들어 지역사회 정신건강센터와 협력하여 퇴원 환자의 지역사회 복귀를 돕거나, 학교 정신건강 프로그램 개발에 참여하고, 미디어를 통해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 해소와 올바른 정보 전달에 힘쓰는 것이 그러한 역할에 해당할 것이다. 정신과 전문의가 정책결정자들과 소통하며 공공 정신건강 향상에 기여할 때, 사회 전반의 정신건강 증진과 더불어 전문의로서의 사회적 위상과 보람도 함께 높아질 것이다.

넷째, 평생교육과 연구역량 강화가 필요하다. 정신의학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약물, 뇌과학, 심리학, AI 등 매우 폭넓은 분야와 연결되어 있다. 새로운 치료 기술과 근거들이 쏟아지는 만큼, 정신과 전문의는 졸업 이후에도 끊임없이 배우고 업데이트해야 한다. 특히 빠르게 발전하는 뇌과학 지식과 데이터 과학을 이해하고 임상에 번역하는 능력이 중요해질 것이다. 또한 임상 현장의 문제를 과학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연구 마인드도 겸비한다면 금상첨화다. 모든 임상의가 직접 연구를 할 수는 없겠지만, 환자를 보면서 얻은 의문을 연구자들과 공유하거나 임상시험에 참여하는 등 근거 창출 과정에 기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는 결국 정신과 전문의 자신이 미래 의료의 방향 설정에 목소리를 내고 주도권을 잡는 데도 중요하다. 기술과 치료법의 개발을 다른 분야 전문가들에게만 맡겨둘 경우, 임상 현실과 동떨어진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 따라서 정신과 의사가 현장감 있는 질문과 통찰을 던지고, 다학제 연구팀에 참여하며, 최신 지견을 환자 치료에 적용하는 학습자이자 창조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윤리의식과 인간 중심 철학의 옹호자로 남는 것도 중요하다. AI 시대, 기술 지배의 시대일수록 인간의 존엄과 개별 환자의 가치를 지키는 일이 소홀해질 수 있다. 정신과 전문의는 전통적으로 전인적 인간이해를 추구해온 전문가로서, 어떠한 첨단 기술이 도입되더라도 치료의 목표는 인간의 마음과 삶의 질 향상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예를 들어 편의성만 앞세운 디지털 치료제가 환자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거나 인간적 접촉을 떨어뜨리는 부작용이 있다면,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균형 잡힌 시각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윤리적 딜레마에 대한 고찰과 환자 옹호는 정신과 의사의 전통적 책무이며, 미래에도 그 중요성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결론

정신과 전문의의 전문영역은 심리치료의 시대에서 약물치료의 시대를 거쳐, 이제 다학제 융합과 기술혁신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과거 정신과 의사들은 인간 정신의 심연을 탐구하는 치료자로서 활약했고, 이후 뇌와 약물의 힘을 빌어 의학적 치료자로 변모했다. 현재 우리는 심리사회적 치료는 심리전문가들에게 상당 부분 맡겨져 있고, 생물학적 연구는 기초과학자들이 이끌며, 새로운 디지털 도구는 공학자들이 개발하는 현실을 마주한다. 이러한 환경에서 정신과 전문의가 고유한 전문성을 유지·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역할을 재점검하고 혁신하는 노력이 요구된다. 다행히 정신과 전문의는 인간의 마음과 뇌를 잇는 독특한 교차점에 서 있는 전문가 집단이며, 의학적 지식과 심리학적 통찰을 겸비한 폭넓은 역량을 갖추고 있다. 이제 이 역량을 미래지향적으로 재포지셔닝할 때이다.

근거 기반의 전망을 종합하면, 미래의 정신과 전문의는 △약물·심리·뇌자극을 아우르는 통합치료사, △난해한 정신질환에 도전하는 난치병의 전문치료사, △기술과 인간을 연결하는 디지털 시대의 임상 조정자, △지역사회와 정책에 참여하는 정신건강 옹호자, △끊임없이 배우고 창조하는 의사-과학자의 면모를 모두 지닌 전방위 전문가로 진화해야 할 것이다. 물론 한 개인이 이 모든 역할을 완벽히 수행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각 전문의는 자신의 관심 분야에 따라 세부전문 분야를 더 갈고닦되, 동시에 전체적 관점을 유지하며 팀의 일원으로 협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신과 전문의들은 다른 직역과 중복되지 않는 고유한 가치를 제공하고, 급변하는 의료환경 속에서도 정신건강 분야의 핵심 전문가로서 중심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변화에는 정책적 뒷받침과 사회적 인식 제고도 필수적이다. 전문의 수련과정의 개선, 보험수가 체계의 개편, 타 직종과의 역할 조정, 연구지원 확대 등 여러 과제가 뒤따르겠지만, 이는 정신건강의학의 발전과 공중의 이익을 위한 투자라 할 수 있다. 미래를 준비하는 학회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성찰하고 자기혁신하는 노력이 전문의 개개인뿐 아니라 관련 학회와 제도권에서도 이어져야 할 것이다. 변화의 한가운데 서 있는 지금, 정신과 전문의들은 과거의 성찰과 현재의 통찰을 바탕으로 미래를 선도할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정신과 전문의 본연의 사명은 인간의 정신적 고통을 치유하고 마음의 안녕을 지키는 일이며, 시대와 도구가 변해도 그 궁극의 목표는 변하지 않는다. 미래에는 그 사명을 실현하는 방법과 모습이 달라질 뿐이다. 결국 인간에 대한 깊은 공감과 과학에 대한 진지한 탐구심을 겸비한 정신과 전문의의 모습이야말로, 어느 시대에나 필요한 귀중한 전문성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이러한 핵심 가치를 지키면서 혁신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정신과 전문의들은 다가오는 미래에도 자신의 고유한 전문영역을 공고히 하고 사회에 더욱 큰 공헌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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