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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 새의 선물

은희경(1959년생)은 1990년대 중반 등장하여 한국 문학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킨 소설가이다. 전북 고창 출신으로, 숙명여대와 연세대에서 문학을 공부한 그는 한동안 교사와 기자로 일하다가 서른 중반에 본격적으로 글쓰기에 나섰다. 1995년 단편소설 <이중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하며 문단에 등단한 후, 같은 해 첫 장편소설 <새의 선물>로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하면서 화려하게 데뷔했다. 은희경의 작품 세계는 도회적 감수성, 냉철한 시선, 그리고 절제된 유머와 아이러니로 대표된다. 그는 인간 내면의 숨겨진 모습, 특히 여성의 심리를 섬세하게 포착하여 현대적 삶의 진실을 드러낸다는 평가를 받는다. 작품마다 일상의 사소한 풍경과 관계를 예리하게 포착하면서도, 감상에 치우치지 않는 건조하고 지적인 문체를 구사한다. 은희경 소설의 인물들은 자기 삶을 한 발짝 떨어져 관찰하고, 세태의 모순을 비웃거나 냉소함으로써 자신을 지키려는 경향이 강하다. 이러한 냉소와 자기보호의 정서는 90년대 이후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들의 의식 변화를 반영한 것으로, 은희경은 이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대표적인 작가로 손꼽힌다.  은희경이 <새의 선물>을 집필한 1990년대 중반은 한국 사회와 문단에 여러 변화의 물결이 있던 시기다. 1980년대까지 문학은 민주화 투쟁과 사회 비판적 리얼리즘이 강세였지만, 90년대에 들어 민주화가 실현되고 사회가 다원화되면서 문학의 흐름도 변화했다. 1990년대의 한국문학은 거대담론이나 이념보다는 개인의 내면, 일상의 문제, 새로운 세대의 감수성을 다루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특히 여성 작가들의 약진이 두드러져, 여성의 시각에서 일상과 인간관계를 탐색하는 작품들이 주목받았다. 은희경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등장한 작가로서, <새의 선물>을 통해 여성 성장서사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작가 개인의 상황으로 보면, 은희경은 등단을 준비하며 오랫동안 써온 일기와 기억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구상했다. 실제로 그는 등단 직전 직장을 그만두고 한적한 절로 들어가 집필에 몰두했다고 알려져 있다. 어린 시절부터 책 읽기를 좋아하고 글쓰기를 꿈꿔왔던 그는 데뷔작에 자기 세대의 유년 경험과 정서를 진솔하게 녹여냈다. 1959년생인 은희경은 <새의 선물>의 주인공 진희와 마찬가지로 1960년대 후반을 어린 시절로 보낸 세대다. 따라서 작가의 자전적 체험과 시대 인식이 진희의 시선과 목소리에 투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작가는 유년기의 기억을 통해 당시의 사회 분위기와 어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하면서도, 90년대의 성찰적인 관점으로 이를 해부하듯 들여다본다. 시대적 배경으로서 이 소설이 그리는 1960년대 후반의 한국은 산업화와 근대화가 진행되던 시기이지만, 특히 지방 소도시의 삶은 여전히 전통적인 공동체와 가부장적 질서 속에 놓여 있었다. 박정희 정권 아래 경제개발이 한창이던 1969년, 시골 마을 사람들은 한편으로 옛 관습과 가난 속에 살면서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시대의 변화 조짐을 맞이하던 때였다. <새의 선물>은 이러한 격변기 이전의 일상 풍경을 배경으로, 당시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의식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작품이 단순한 향수 어린 회고담에 머무르지 않는 이유는, 집필 시점인 1990년대의 시각으로 과거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기 때문이다. 1990년대 한국은 군부독재를 끝내고 민주화와 세계화 시대를 맞아 가치관이 다원화되던 때였다. 작가는 이러한 현재의 의식으로 과거의 이야기 속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와 권위적인 어른들의 모습을 상대화한다. 다시 말해, 열두 살 소녀의 눈에 비친 60년대의 세계를 통해 한국 사회의 전통적 가치관을 거리 두고 들여다보며 그 모순을 부각시킨다. 이는 당시 새롭게 대두되던 페미니즘적 문제의식이나 개인의 권리에 대한 감수성과도 맞닿아 있다. 그런 점에서 <새의 선물>은 90년대 신세대 문학의 감수성이 60년대 배경과 충돌하며 빚어낸 독특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새의 선물>의 주요 무대는 1960년대 말 전라북도 고창의 한 작은 마을이다. 이야기는 강진희라는 여성 화자가 현재 30대 중반의 시점에서 자신의 12살 때를 회고하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소설의 도입부에서 성인 진희는 이렇게 선언한다.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 이 인상적인 첫 문장을 시작으로, 독자는 1969년 진희가 살던 마을과 가족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된다. 당시 열두 살의 진희는 부모 없이 외할머니와 이모, 그리고 외삼촌과 함께 살아간다. 그들은 마을에서 작은 가겟방을 운영하는 집에 세 들어 살고 있으며, 같은 마당을 공유하는 이웃으로는 장군이라는 아이와 그의 어머니가 있다. 겉보기에는 할머니를 중심으로 한 단란한 대가족처럼 보이지만, 진희의 눈에 비친 어른들의 세계는 결코 평온하거나 아름답기만 하지 않다. 어린 진희는 가족과 주변 어른들의 삶을 날카로운 눈으로 관찰하며, 그들의 허위와 위선을 감지한다. 소설의 줄거리는 진희의 일상적 시선 속에 펼쳐지는 여러 사건과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져 있다. 예를 들어, 외삼촌의 방황은 진희에게 어른이라 해서 모두 다 어찌할 바를 아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삼촌은 무언가 하고 싶은 일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며 정착하지 못하는 젊은 남성으로, 당시 변화하는 시대 속 청년 세대의 혼란을 대변한다. 이모 영옥의 사랑 이야기도 전개되는데, 이모는 한때 사랑에 빠져 집안을 떠들썩하게 하지만 결국 현실과 타협하게 된다. 진희는 이모를 통해 어른들의 사랑과 결혼이 동화처럼 행복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상처와 실망을 안긴다는 것을 엿본다. 외할머니의 지난 삶과 현재의 고단함 역시 진희의 내면에 많은 것을 시사한다. 할머니는 가부장제 시대를 살아온 여성이자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어른으로서, 겉으로는 굳건해 보이나 마음속에 눌러둔 한과 슬픔이 있다. 이런 가족들의 모습을 통해 진희는 세상이 정직하고 정의롭게만 돌아가지 않는다는 현실을 알아간다. 특별한 큰 사건 없이 흘러가는 듯한 마을의 일상 속에서도, 진희는 날마다 크고 작은 충격과 깨달음을 경험한다. 가까운 이웃들의 부조리한 행태나 비밀, 예를 들어 마당을 함께 쓰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 마을에서 떠도는 소문 등도 진희의 관찰 대상이다. 아이의 눈에 비친 어른들은 종종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체면이나 권위에 집착하거나, 말과 속마음이 다른 모습으로 비춰진다. 진희는 그런 모습을 보며 어른들의 세계가 자신이 알던 동화나 교훈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다. 소설 후반부로 갈수록 진희는 이러한 깨달음들로 인해 마음의 혼란을 겪지만, 동시에 자신만의 세계관을 형성해 나간다. 결국 진희는 세상에 물들면서도 완전히 닮지는 않는 법, 즉 현실을 받아들이되 자기만의 거리를 유지하는 삶의 태도를 배우게 된다. 한편, 작품의 제목 ‘새의 선물’은 이야기의 상징성을 잘 드러낸다. 작중에 실제 새가 무언가 선물을 주는 장면이 나타나지는 않지만, 제목은 은유적으로 해석된다. 새라는 존재는 하늘을 자유롭게 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의 상징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 목적 없이 떠돌아다니는 이미지로 혼란과 방황을 떠올리게도 한다. 이 이중적인 상징은 곧 주인공 진희가 받은 삶의 깨달음, 즉 자유로움과 고독함이 공존하는 성장의 결과물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진희가 12살에 겪은 충격적 진실들과 감정들은 그녀에게 일종의 선물처럼 남아 앞으로의 삶을 좌우한다. 그 선물은 순수함의 상실과 함께 얻은 통찰력이고, 어찌 보면 어린 시절이 끝나며 받은 뼈아픈 현실 인식이다. 진희는 그 선물을 가슴에 품고 이후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데, 성인이 된 화자가 과거를 회상하는 틀을 통해 볼 때 그 선물은 그녀를 성숙하게도 하지만 마음 한켠에 영원한 거리감과 외로움을 남긴 것이기도 하다.

은희경의 <새의 선물>은 성장소설의 전형을 따르면서도 그것을 비틀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작품이다. 일반적인 성장서사는 주인공이 어린 시절의 시행착오와 깨달음을 통해 내적 성숙과 희망을 얻는 과정을 그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성장은 결코 낭만적이거나 밝게 그려지지 않는다. 진희가 경험하는 성장의 순간들은 따뜻함보다는 차가움, 기대보다는 실망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녀에게 열두 살까지의 성장은 더 이상 자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일찍 끝나버린 것처럼 느껴진다. 이는 진희가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의 민낯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성장이라 쓰고 생존이라 읽는 가혹한 통과의례가 그녀에게 닥친 것이다. 진희는 주변 어른들을 관찰하며 어쩔 수 없이 삶의 불편한 진실들과 마주하게 된다. 예컨대, 외삼촌의 좌절에서 그는 꿈과 현실이 어긋나는 어른의 세계를 본다. 이모의 사랑 실패에서 진희는 사랑이 항상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음을 배운다. 또 할머니와 이웃 어른들의 모습을 통해 권위적인 가장이 없어도 여전히 가족 내에 갈등과 외로움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이러한 경험들은 진희에게 성장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아이였을 때 막연히 동경했던 어른이 됨은 더 이상 순수한 희망이 아니라 어쩌면 잃어버림의 과정, 버텨내야 하는 과정으로 다가온다. 이처럼 <새의 선물>의 성장서사는 비판적 현실 인식과 맞닿아 있다. 진희는 성장과 생존이라는 공식을 체득하면서,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한 방법을 모색한다. 소설 속 진희의 독백 중에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내용이 있다. 누구도 나를 구해주지 않으니, 나는 내가 나를 구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라는 깨달음이 그것이다. 이 대사는 진희의 심정을 대변하는 핵심 문장으로 종종 회자된다. 결국 진희는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다스리고, 기대 대신 냉소와 관조로 무장한 채 세상을 견뎌내는 법을 배운다. 이것이 그녀가 받아든 성장의 결과이다. 흥미로운 것은, 작가 은희경이 이 작품을 통해 성장의 새로운 정의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통적 관점에서 성장한다는 것은 어른이 되어 사회에 적응하고 한 사람의 역할을 해나가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진희에게 성장의 의미는 자신이 선 자리의 좌표를 깨닫는 것에 가깝다. 다시 말해, 거창한 포부를 실현하거나 훌륭한 인격체로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 냉혹한 현실 속에서 자기 위치와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 곧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다소 염세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소설은 이를 통해 오히려 진실한 성장의 모습을 보여준다. 환상이나 자기기만 없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자기만의 생존방식을 찾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성숙이 아니겠느냐는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 질문은 단순히 진희 개인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독자인 우리에게도 확장된다. 누구나 한때는 진희와 같이 순수했지만 결국 어른이 되며 현실과 타협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성장하고, 어떻게 적응하며, 무엇을 잃고 얻는가. <새의 선물>은 이 보편적인 물음을 조용하지만 예리하게 제기한다. 요컨대, 이 작품의 성장서사는 빌둥스로만의 한국적 변주라 할 만하다. 은희경은 성장 과정을 미화하지 않고, 존재론적 생존투쟁으로 그려냄으로써 성장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는 90년대 이후 개인의 내면과 존재 의미를 고민하던 한국문학의 흐름과도 맥을 같이 한다. 진희의 이야기는 성장의 어두운 측면, 불안과 회의, 상처를 드러내지만, 그럼에도 자신만의 시선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는 잔잔한 희망 또한 내포하고 있다. 현실을 직시하되 완전히 냉소에 잠식되지 않고, 작은 거리두기를 통해 자기를 지켜내는 진희의 태도는 삶을 견디는 한 방식으로 제시된다. 이러한 메시지는 성장에 대한 철학적 통찰을 담고 있어 독자를 깊은 여운에 젖게 한다.

은희경의 <새의 선물>은 문체적 개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이다. 이 소설은 1인칭 어린이 화자의 시점으로 서술되는데, 흥미롭게도 그 언어 스타일은 겉보기에는 아이의 말투 같으면서도 내포된 의미나 통찰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작품은 진희의 일기 형식을 띠고 있어, 어린 소녀의 내밀한 생각과 감정이 솔직하게 드러난다. 진희의 목소리는 아이 특유의 순진함과 솔직함을 가지고 있지만, 그가 내뱉는 문장들은 때때로 어른도 깜짝 놀랄 만큼 날카로운 통찰과 관조를 담고 있다. 전체적인 문체는 건조하고 담담한 톤을 유지한다. 과장된 수사나 감정적인 표현을 절제하고, 마치 관찰 일지를 쓰듯 담백하게 사건과 심리를 적어나가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작가가 추구한 ‘건조하게 쓰되 감상적이지 않게’라는 원칙과도 맞닿아 있다. 진희는 자신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차분히 기록하지만, 그 기록의 행간에서는 어른들을 향한 조용한 비판의식과 아이만이 지닌 투명한 슬픔이 배어 나온다. 문장이 잔잔하게 흘러가다가도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예리한 한마디들은 독자의 가슴을 찌르곤 한다. 예를 들어,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독백 속에 ‘세상은 왜 이렇게 불공평할까’, ‘어른들은 왜 정직하지 않을까’ 하는 식의 근원적인 질문이나 촌철살인의 평들이 숨어 있다. 이러한 대목들은 특별히 감정을 격앙시키거나 호소하지 않는데도, 읽는 이로 하여금 묵직한 울림을 느끼게 한다. 또 한 가지 두드러지는 점은 진희의 서술에는 묘한 거리감이 있다는 것이다. 보통 아이의 시점이라 하면 순수한 동화체나 귀여운 말투를 떠올리기 쉽지만, 진희의 말투는 어딘가 어른스럽고 시니컬하다. 그렇다고 완전히 냉소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상황에 따라 어린아이처럼 감정이 솟구치기도 하고 상처받기도 한다. 이 냉소와 연민이 교차하는 목소리가 소설 전반에 흐르는 정서다. 진희는 어른들의 위선을 비웃고 냉정하게 평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을 완전히 미워하거나 저버리지 못하는 연민을 지니고 있다. 예컨대, 허세 부리는 이웃을 비꼬는 듯한 서술 뒤에 그 인물의 외로운 처지를 이해하는 듯한 묘사가 이어지는 식이다. 이러한 이중적 어조는 작가 은희경의 뛰어난 균형 감각을 보여준다. 독자는 진희의 말에서 한 발짝 물러서 세상을 보는 냉철함과, 동시에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애정과 이해심을 함께 느끼게 된다. 은희경의 유머 감각도 문체 곳곳에서 발견된다. 물론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진지하고 쓸쓸한 분위기가 강하지만, 중간중간 삽입된 냉소적인 유머나 아이러니한 묘사는 이야기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예를 들면 진희가 어른들의 부조리함을 속으로 비꼬거나, 순진한 척하면서 날리는 한마디에 독자는 피식 웃음을 짓게 된다. 이렇듯 웃음과 쓸쓸함이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는 표현 방식은 은희경 문체의 큰 매력이다. 그것은 현실의 부조리를 희화화하면서 동시에 그 이면의 슬픔을 느끼게 하는, 일종의 세련된 풍자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새의 선물>의 언어가 특별한 이유는 독자로 하여금 공감과 거리두기를 동시에 경험하게 하기 때문이다. 독자는 진희의 솔직한 목소리에 깊이 이입하면서도, 그 목소리가 너무 감정적이지 않기에 한 걸음 떨어져 전체 상황을 조망하게 된다. 이러한 기법은 독자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여지를 준다. 작가는 독자를 눈물짓게 만들거나 강요된 동정심에 호소하지 않고, 객관적인 슬픔을 제시한다. 그 결과 오히려 독자의 가슴에는 오래 남는 여운과 사유의 공간이 생겨난다. 진희의 담담한 한마디가 던져진 후의 묵직한 침묵이 독자의 몫으로 남겨지는 셈이다. 이런 언어 스타일은 문학비평적으로 볼 때 아이러니의 미학이자 모더니즘적 기법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은희경은 이를 통해 인간 삶의 아이러니와 소통의 불가능성을 세련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어려운 이론을 몰라도, 독자들은 그저 이 독특한 문체가 주는 감각, 쓸쓸하면서도 담담한, 예리하면서도 따뜻한 그 느낌을 통해 작품의 정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새의 선물>은 한 소녀의 성장담을 넘어, 인간이 어떻게 상처를 겪고도 적응하며 살아가는지를 성찰하는 작품이다. 은희경은 데뷔작에서부터 사회의 고정관념과 이데올로기를 날카롭게 의심하며, 이를 어린 진희의 투명한 시선에 담아냈다.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는 말처럼, 진희는 성장 대신 냉소와 방어기제를 통해 어른이 되는 법을 체득한다. 이 소설은 성장소설의 새로운 이정표이자 1990년대 포스트민주화 시대의 세태를 반영한 작품으로 평가받으며, 독자들에게는 유년의 상실과 어른됨의 모순을 되짚게 하는 보편적 감정을 일깨운다. 개인적으로는 내가 대학에 입학하던 때 문학상을 받으며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작품이라 그 해 서점에서 가장 많이 보였던 책이기도 하다. 어렵지 않은 언어로 깊은 문제의식을 전달하며 대중성과 작품성을 모두 갖춘 이 소설은, 진희의 눈을 통해 우리 내면의 어린 자아를 다시 마주하게 하고, 성장의 의미를 되묻게 만든다. 결국 은희경은 성장이란 상처를 껴안고도 살아남는 법을 배우는 일임을 조용히 일러주며, 그 통찰을 독자 모두에게 선물처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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