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거장 잉마르 베리만의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 <겨울빛>, <침묵>은 흔히 ‘신의 침묵 3부작’ 또는 ‘신앙 3부작’으로 불리며, 베리만 영화 중 종교적 주제의 정점으로 평가된다. 이 세 작품은 각각 확고했던 신앙의 “확실성의 확인”, 그 가면이 벗겨지는 “확실성의 실체”, 그리고 마침내 신의 부재로서 “신의 침묵”, 곧 부정적 인식에 이르는 과정을 3단계로 선명히 묘사한다 . 실제로 베리만 자신도 각본 서문에서 “이 세 편의 영화는 형이상학적 의미의 ‘감소’를 보여준다”고 썼다. 즉, 1부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에서 한 순간 “신은 사랑”이라는 확신이 제시되지만, 2부 <겨울빛>에서는 그 확신이 산산이 무너지고, 3부 <침묵>에서는 종국에 아무 말씀 없는 신, 부재하는 신만이 남는다. 이러한 주제 의식은 20세기 중반 현대인의 신앙 위기, 즉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세계에 대한 예술적 탐구라 할 수 있다. 베리만은 엄격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서 성장했지만, 성인이 된 후 “인간의 시야를 가리는 형편없는 신에 대한 믿음에서 벗어났다”고 고백했는데, 이 3부작은 바로 그런 ‘믿음의 상실’ 과정을 예리하게 영상화한 것이다. 동시에 베리만은 이 작품들을 통해 자신의 영화 미학을 한층 정제된 형태로 확립했는데, 이는 촬영감독 스벤 뉘크비스트와의 협업으로 가능해진 금욕적이고도 세밀한 영상 언어의 발전과도 맞물려 있다
베리만의 3부작은 제목이 암시하듯 기독교 신학 전통의 큰 물음, 곧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는가?”에 대한 예술적 응답이다. 20세기 신학에서는 전통적 신 관념이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 철학자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며 기존의 신앙과 도덕 체계가 붕괴할 것을 예언한 지 한 세기가 지난 시점에, 실제로 유럽 사회에서는 교회의 권위와 초월적 진리에 대한 믿음이 급속히 약화되었다. 니체가 말한 바대로 “더 이상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을 수 없게” 된 시대, 하나님과 절대적 도덕에 의지해 세워졌던 가치들은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이러한 ‘신의 부재’ 상황 속에서,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침묵과 부재를 새롭게 사유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칼 바르트는 전통 신학을 근본부터 재고하며 하나님을 “전적으로 타자”로 파악했다. 인간 스스로는 하나님을 알 길이 없으며, 오직 하나님 편의 자기계시가 있을 때만 부분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바르트는 자연신학에 철저히 ‘아니오’라고 답함으로써, 인간의 경험 세계에서는 하나님의 목소리가 원천적으로 들리지 않을 수밖에 없음을 강조했다. 이는 하나님과 세계의 간극을 절대화한 관점으로, 계시가 없다면 신은 침묵하실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현대 세계에서 신앙인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도록 부름받았다고 역설했다. 그는 옥중에서 쓴 편지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신다.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없이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세상에서 스스로 무력하고 약해지신다. 하나님은 세상 한복판에서 밀려나 십자가에 못박히신다”라고 썼다. 본회퍼에게 이 진술은 하나님이 세상을 버리셨다는 절망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세속 세계의 고통 속에 함께 침묵으로 고난당하신다는 역설적인 위로였다. 그의 말처럼 “오직 고난 당하시는 하나님만이 우리를 도우실 수 있다”는 통찰은, <겨울빛>의 목사 토마스가 결국 고통당하신 예수의 침묵에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실존적 돌파구를 찾는 결말과 상응한다. 한편 폴 틸리히는 근본주의적 유신론이 무너진 시대에 “하나님은 존재자들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라고 재정의하며, 전통신의 상실을 신앙 갱신의 기회로 보았다. 틸리히는 특히 의심의 역할을 강조했는데, “의심은 신앙의 적이 아니라 그 한 요소”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는 내적 침묵의 경험까지도 신앙의 여정에 포함시켰다. 실제로 <겨울빛>에서 주인공 토마스 목사는 극심한 회의와 신앙적 공허를 겪지만, 틸리히의 지적대로 이러한 의심은 신앙의 반대가 아니라 새로운 신앙으로 나아가기 위한 통과의례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틸리히는 또 “신앙의 용기”란 무의미와 절망을 껴안고도 삶의 궁극적 의미를 확인하는 태도라고 보았는데, <침묵>에서 에스테르가 죽음 직전 조카 요한에게 남긴 한 단어 “Hadjek(영혼이라는 뜻)”는, 비록 그녀 자신은 신의 부재 속에 절망했을지라도 영혼에 대한 마지막 직관을 아이에게 전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이는 여전히 신의 침묵 속에서도 완전한 허무로 기울지 않고 의미의 끈을 잇는 몸짓이라 할 만하다. 요컨대 베리만 3부작에 투영된 신학적 문제의식은, 하나님이 부재하거나 침묵하시는 세계에서 신앙의 의미를 묻는 것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응답을 듣지 못해 절망하지만, 그 절망 한복판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모색한다. 이는 1960년대 유럽 신학에 나타난 이른바 ‘하나님 죽음’ 신학과도 맥을 같이한다. 급진적 신학자들은 신 없는 시대의 영성을 논의했는데, 베리만은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신의 침묵을 직시하면서도 그 적막을 뚫고 나오는 작은 목소리들을 포착했다. 실제로 베리만은 나중에 이 3부작의 주제가 “신의 부재보다는 사랑의 부재에 관한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는 곧, 하나님이 침묵한 빈자리를 대신 채울 수 있는 것이 인간 사이의 사랑임을 시사한다. 1부에서 아버지와 딸의 대화 끝에 “신은 사랑이야”라는 깨달음에 도달하고, 2부에서 무신론자 마르타가 헌신적 사랑으로 목사를 끝까지 돌보며, 3부에서 에스테르가 죽음 앞에서 조카에게 영혼이라는 단어를 남기는 장면까지 —이는 모두 침묵하시는 하나님 대신 인간적 사랑과 소통이 거룩함을 매개할 수 있다는 희미한 희망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 사랑조차도 완전치 않아 결국 균열과 한계를 드러내기에, 베리만은 냉혹한 솔직함으로 믿음과 의심의 투쟁을 영화적 신학으로 펼쳐 보이고 있다.
베리만의 3부작은 또한 실존주의 철학의 관점에서 인간 실존의 어두운 밤을 탐구한다. 앞선 신학적 고찰과 맞물려, 여기서는 신 없는 세계에 내던져진 개인의 고독과 불안이 주요 화두가 된다. 소렌 키르케고르 이래 실존주의 전통은 신앙을 단독자의 결단으로 보았는데, 만약 결단의 대상인 하나님이 침묵한다면 개인은 끝없는 절망에 직면하게 된다. 키르케고르는 불안을 “죄와 구원의 문제를 깨닫게 하는 실존적 어지러움”이라 하여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았지만, 베리만 영화의 인물들에게 불안은 일차적으로 구원 없는 공포로 나타난다. <겨울빛>에서 자살 충동에 사로잡힌 교인 요나스는 핵전쟁의 가능성에 극도의 불안을 느끼다 끝내 삶을 포기한다. 이는 프랑스 실존주의 작가 알베르 카뮈가 “진정으로 철학적인 유일한 문제는 자살”이라고 했던 명제를 떠올리게 한다. 카뮈에게 삶의 부조리를 견딜 수 없다면 자살로 도피할 수도 있다고 보았지만, 장폴 사르트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이 없다면 인간은 철저히 자유롭지만 그만큼 철저히 버려져 있다”고 갈파했다. 사르트르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허용되기에, 인간은 내면에도 외부에도 어떤 붙잡을 근거도 찾지 못한 채 절대적 고독 속에 남겨진다”고 말했다. 실제로 <겨울빛>의 토마스 목사는 신의 부재 앞에서 값싼 위안을 거부하고 그 고독을 끝까지 견디는 자유를 택한다. 그는 자기 연민에 빠지거나 속임수로 회중을 기만하지 않고, 자신의 믿음 상실을 정직하게 마주한다. 이러한 태도는 사르트르가 말한 “인간은 자유롭게 저주받았다”는 모순적 상황을 잘 보여준다. 그는 신을 잃고 아무런 절대 가치도 없기에 오히려 자기 행동과 선택에 무한한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로 남겨진 것이다.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이러한 실존적 상황을 이해하는 또 다른 틀을 준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본래 ‘세계-내-존재’로서 일상에 몰입해 살아가지만, 어떤 계기에 근원적 불안을 경험하면 세계 전체가 낯설고 무의미하게 드러난다고 보았다. 불안은 공포와 달리 어떤 특정 대상 때문이 아니라 “아무 것도 아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다. 그 순간 일상에서 친숙하던 세계는 한발 물러나 기이하고 부자연스러운 무대로 보이며, 집이라고 느꼈던 삶이 더 이상 안온한 곳이 아니게 된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세계의 비주변화, 탈주술화로 설명했는데, <침묵>의 공간이 정확히 그런 분위기를 구현한다. 영화 속 에스트와 안나 자매가 머무는 낯선 도시와 호텔은 언어도 통하지 않고 모든 것이 불안스럽게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아이의 눈을 통해 보이는 이 세계는 마치 초현실주의 화폭처럼 기괴하고 쓸쓸하다. 사람들은 많지만 진정한 소통은 부재하고, 간간이 들려오는 전쟁 탱크 소리나 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시간의 흐름을 알려줄 뿐이다. 이러한 현존재의 불안 상황에서 인물들은 하나같이 언어의 무력함과 타자와의 단절을 겪는다. <침묵>에서 통역가 에스테르는 정작 현지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동생 안나와도 정서적 소통이 끊긴 채 각자 육체의 방식으로 고독을 달랜다.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에서 정신질환을 앓는 카린은 남편이나 아버지와 소통하지 못하고 자기 내면의 환청에만 사로잡히다가, 급기야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붕괴되어 가족에게 상처를 입힌다. 이렇듯 언어와 이성이 해체되는 지점에서, 베리만은 인물들의 몸짓과 표정에 주목함으로써 실존적 진실을 포착하려 한다. 이는 구조주의/탈구조주의적 시각에서 볼 때, 기존의 의미 질서가 와해되고 의미의 공백이 드러나는 상황이다. 자크 데리다에 따르면 중심이 부재할 때 주변의 차이와 흔적 속에서 새로운 의미가 생겨난다. <침묵>에서 하나님이라는 궁극의 의미중심이 사라진 세계에서, 베리만은 침묵 그 자체를 하나의 언어로 제시한다. 말 없는 표정, 정물 같은 공간, 끊긴 대화의 여백 등이 오히려 언어 이상의 진실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데리다가 말한 “부재를 통한 현존”의 역설—무언의 침묵 속에 오히려 의미의 울림이 생성되는 현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또한 미셸 푸코는 사회가 침묵을 통해서도 담론을 구성한다고 보았는데, <겨울빛>에서 교회 공동체의 침묵은 단순한 부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 당시 신앙의 공동체적 공백을 나타내는 담론이라 할 수 있다. 즉 말해지지 않은 것들, 응답 없는 기도들이 쌓여 종교 언어의 공허화를 증언하는 셈이다. 실존철학의 관점에서 3부작에 등장하는 핵심 주제들을 꼽자면 고독, 불안, 타자성, 그리고 언어와 침묵이 있다. 우선 고독은 신의 부재와 맞물려 모든 인물을 지배한다. 카뮈는 “인생의 유일한 심각한 문제는 삶이 과연 살아갈 가치가 있는지 여부”라고 했는데, 베리만의 인물들은 그 답을 신에게서 찾지 못한 채 철저히 혼자가 되는 실존을 감내한다. <겨울빛> 토마스는 아내를 잃고 교인들도 떠나가 버린 빈 교회에 홀로 서서 예배를 계속한다. 그 모습은 얼핏 무의미해 보이지만, 동시에 부조리한 삶을 끝까지 살아내는 인간의 결의를 보여준다. 이는 마치 시시포스가 신 없이도 바위를 밀어올리는 노동을 멈추지 않는 모습과도 통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토마스 목사는 단 한 명의 청중 만을 두고도 미사를 집전하는데, 이는 그가 완전히 신앙을 회복했다기보다 부재 속에서도 자기 역할을 수행하기로 한 선택으로 해석된다. 실존주의적으로 보면 이것은 반항적 결단이다. 아무 답도 들려오지 않아도 자기 존재를 스스로 규정짓겠다는 자유의지의 행사가 된다. 타자성과 소통의 문제 역시 이 3부작을 관통하는 철학적 주제다. <침묵>에서 에스테르와 안나 두 자매는 서로를 사랑하면서도 증오하고, 끊임없이 엇갈린다. 둘은 육체적으로는 가까이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서로에게 타자일 뿐이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인간이 타자의 얼굴을 통해 윤리적 부름을 듣는다고 했지만, 여기서 안나는 병든 언니 에스테르의 고통을 직시하기보다 자신의 욕망과 분노에 갇혀버린다. 에스테르 역시 동생의 욕정을 “역겨워”하며 이해하지 못한다. 결국 두 사람은 끝내 화해하지 못한 채 에스테르는 생을 마감하고, 안나는 언니의 죽음에도 냉담하다. 남겨진 어린 요한만이 순수한 시선으로 둘을 바라보지만, 그는 아직 언어도 능숙하지 않고 성인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요한은 호텔에서 만난 난쟁이 서커스 단원들과 몸짓으로 교감하고, 현지 역무원과도 웃음이나 손짓으로 소통한다. 이렇듯 아이의 세계에서는 언어 이전의 순수한 만남이 가능하지만, 어른들의 세계에서는 언어마저 오해와 침묵을 낳는다. 이러한 커뮤니케이션 부재는 포스트구조주의가 말하는 언어의 한계와 의미의 미끄러짐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언어학자 소쉬르는 기호는 자의적인 것이며, 데리다는 그 기호가 가리키는 의미가 항상 늦춰진다고 했는데, <침묵>에서 번역가 에스테르조차 번역해줄 수 없는 외국어 앞에서 인물들은 무력하다. 의미는 눈앞에 있으되 닿을 수 없이 미끄러지고, 남는 것은 침묵과 신체적 제스처뿐이다. 역설적으로, 베리만은 이러한 침묵과 몸짓을 통해 언어로는 포착 못할 심연의 진실을 전달하려 한다. 이것은 메를로 퐁티와 같은 현상학자가 말한 바와 통한다. 메를로 퐁티는 인간의 지각과 몸의 경험이 진리를 드러내는 창이라고 했는데, 베리만 영화에서 긴 침묵 속에 클로즈업된 인물의 얼굴, 공허한 공간의 눈부신 밝음, 손과 손이 닿는 미세한 떨림 등은 언어 이전의 차원에서 존재의 의미를 체험하게 한다. 결국 철학적 시각에서 볼 때, 신의 침묵 3부작은 부조리하고 불안한 세계에 내던져진 인간이 어떻게 타자와 관계 맺고 의미를 생성할 것인가라는 근본 물음을 던지고 있다. 베리만은 확실한 해답을 주기보다 그 질문 자체를 생생히 느끼도록 함으로써, 관객이 스스로 자신의 존재 조건과 마주하게 만든다.
베리만의 3부작은 그 내용만큼이나 형식 면에서도 주제 의식을 정교하게 전달한다. 우선 촬영과 조명부터 살펴보면, 세 영화 모두 흑백 필름의 명암 대비와 자연광 활용을 통해 인물 내면의 영적 상태를 시각화한다. 촬영감독 스벤 뉘크비스트는 <겨울빛>에서 한겨울의 창백한 자연 채광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로써 교회 창문으로 들이치는 차가운 햇빛 속에 주인공의 얼굴을 종종 역광 실루엣으로 표현했는데, 이는 “밝은 배경 앞에 어둡게 잠긴 얼굴”이라는 모티프로 영화 전반에 반복된다. 예컨대, 토마스 목사가 제단 뒤편 사제실에서 홀로 앉아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속삭이는 장면은 이 3부작의 미장센을 상징적으로 압축한다. 카메라는 침묵 속에 그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다가가는데, 앞에서 받쳐주던 조명은 서서히 사그라들고 뒤편 창문으로 쏟아지는 눈부신 겨울 햇빛만 남는다. 얼굴은 암흑에 잠기고 후광만 빛나는 이 이미지에서, 우리는 신의 부재로 영혼이 어두워진 인간과 여전히 세상을 비추는 하나님의 흔적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이는 베리만이 빛의 대비로 신앙의 빛과 그림자를 형상화한 탁월한 예라 할 것이다. 이러한 얼굴-후광의 대비 연출은 영화 곳곳에 등장해 영적 위기의 상태를 시각화한다. 반면 같은 <겨울빛>에서 요나스의 시신을 수습하는 장면은 인물을 아주 먼 롱 쇼트로 잡고 눈보라 치는 벌판에 놓아두는데, 이때 인물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있고 배경의 자연만 광활하게 나타난다. 이는 인간이 한낱 하찮은 고깃덩이로서 자연의 폭력 앞에 노출된 모습을 냉혹하게 보여준다. 이렇게 쇼트의 거리와 구도를 바꾸어가며, 베리만은 인물의 주관적 고립감과 세계의 객관적 냉혹함을 교차적으로 표현한다. 카메라의 움직임과 숏 구성도 주목할 만하다. 베리만은 3부작에서 전반적으로 절제된 카메라를 사용하지만, 결정적 순간에는 미세한 이동으로 강렬한 효과를 준다. 앞서 언급한 토마스의 독백 장면에서 아주 서서히 전진하던 카메라는, 그의 내면 고백에 관객을 끌어들이듯 다가간다. 반대로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에서는 카린이 환청을 좇아 폐선박 내부로 들어갈 때 카메라는 거리를 유지한 채 그녀를 따라가며, 관객이 한걸음 물러서 그녀의 광기를 관찰하게 연출한다. 클라이맥스에서 카린이 “신이 나타난다”고 외치며 빈방 문을 열고 비명을 지를 때, 베리만은 주관숏을 회피하고 대신 카린의 일그러진 얼굴을 응시한다. 그녀가 본 것은 거미 형상의 괴물이 자신을 덮쳐오는 환영이지만, 관객은 오직 그녀의 공포에 질린 얼굴과 절규 소리만 접한다. 이때 핸드헬드 카메라의 불안정한 흔들림과 클로즈업 구도가 겹쳐져, 공포의 체험을 간접적으로 주입한다. 이는 호러 장르에서 종종 쓰이는 기법이지만, 베리만은 그것을 신학적 의미로 전환한다. 즉, 하나님을 갈망하던 인간 앞에 나타난 것이 사랑의 신이 아니라 괴물 같은 침묵의 신이었음을 시각적으로 암시한 것이다. 실제로 베리만은 노트에 이 장면 구상을 적으면서 “내가 창조한 신의 형상은 매우 가혹한 모습”이라고 했다. 그의 구상에 따르면, ‘한 신이 한 인간 속에 내려와 내면의 목소리로 시작해 점차 그를 완전히 지배하고, 결국 모든 것을 소진시킨 뒤 텅 빈 껍데기만 남기고 떠나버린다’고 한다. 그리고 그 순간 신의 실체가 드러나는데, 그것이 곧 카린에게 나타난 거미형 하나님이었다. 이렇듯 카메라의 응시와 미장센은 관객으로 하여금 신의 침묵이 빚어낸 공포와 황홀을 간접 체험하게 한다. 편집과 시간 구성은 베리만 3부작에서 비교적 인과적이고 연속적이지만, 그 리듬 역시 주제에 맞게 조율된다. 세 영화 모두 짧은 시간 안에 벌어지는 밀도 높은 심리극으로, <거울>은 24시간 남짓, <겨울빛>은 반나절, <침묵>도 이틀 남짓의 시간을 다룬다. 편집은 정교하게 이 현실 시간을 따라가되, 불필요한 설명이나 사건을 배제하여 응축된 드라마를 만들었다. 특히 <겨울빛>은 81분의 짧은 러닝타임 동안 예배-면담-편지낭독-자살-알곗말-예배로 이어지는 구조를 갖는데, 마치 한 편의 희곡처럼 삼일장 구조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편집은 극적으로 절정이나 반전을 부각하지 않고 밋밋한 톤을 유지하는데, 이는 의도적으로 삶의 권태와 무의미감을 느끼게 한다. 한 예로, 요나스의 자살 후에도 베리만은 충격적인 음악이나 급박한 편집 대신, 토마스 목사가 시신을 보는 장면을 먼 거리에서 한참 지켜보게 한다. 관객은 신음도 눈물도 없는 냉랭한 공기를 체험하며, 실존의 부조리함을 정지된 시간 속에서 곱씹게 된다. <침묵>에서도 유사한 기법이 쓰인다. 안나가 낯선 남자와 성행위를 할 때조차 카메라는 멀리서 천장 거울에 비친 두 육체를 담담히 비출 뿐, 어떠한 관능적 편집이나 음악 효과도 넣지 않는다. 이런 차가운 거리감은 인물들의 내면 공허를 강조하고, 관객으로 하여금 감정이입보다 성찰을 하게끔 유도한다. 또한 사운드 디자인 면에서 베리만은 이 3부작에서 배경 음악을 거의 배제하고 침묵 자체를 소리로 활용했다. <거울>에서는 바흐의 곡 등 배경음악이 거의 들리지 않으며, <겨울빛>은 영화 시작에 예배장에서 요한수난곡 일부가 흐른 뒤로는 완전히 음악이 사라진다. 남는 것은 대사와 풍경음 뿐이라서, 정적이 유독 크게 느껴진다. 예컨대 토마스가 사제실에서 기도드릴 때 들리는 것은 그의 속삭임과 시계 초침 소리뿐이며, 나머지는 깊은 무음으로 채워진다. <침묵>에서도 클로크성의 시계 소리, 도시의 기계 소음, 그리고 인물들의 신음이나 한숨만이 간헐적으로 울린다. 이러한 거의 무음에 가까운 음향 연출은 제목 그대로 ‘침묵’을 청각적으로 체험케 한다. 또한 언어가 난무하지 않는 덕분에, 배우들의 표정과 제스처, 미세한 한숨까지도 관객의 주의를 끌어 영상 언어의 강도를 높인다. 베리만은 얼굴 클로즈업을 통해 인간의 영혼을 찍어내는 데 일가견이 있는데,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절제된 사운드스케이프 덕분이었다. 실제로 평론가 레오 브로디는 “베리만의 천재성은 아이디어를 시각으로 표현하면서, 극단적인 클로즈업으로 우리를 사람들의 신비 속에 초대하는 데 있다”고 평했다. <침묵>에서 인물의 얼굴과 침대 머리맡 조명이 어둠 속에 놓인 채 숨소리만 들리는 장면, <겨울빛>에서 마르타가 편지 읽을 때 하나하나 표정을 조명으로 스쳐가는 장면 등은 이러한 시청각의 조화로 심리와 주제를 전달한 명장면들이다. 정리하면, 베리만 신의 침묵 3부작의 영화미학은 형식과 내용의 완벽한 합치를 보여준다. 클로즈업, 롱테이크, 침묵의 사운드 등 모든 영화적 장치가 인물들의 신앙 위기와 존재 불안을 느끼게끔 설계되었다. 카메라의 응시와 조명은 때로 성화의 엄숙한 아이코노그래피를 떠올리게 하며, 편집의 리듬과 소리의 부재는 우리를 침묵의 미로 속으로 데려간다. 이러한 형식 분석을 통해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베리만이 이 작품들을 단순한 드라마가 아니라 철학적 시청각 교향곡으로 빚어냈다는 사실이다.
베리만의 신의 침묵 3부작은 표면상으로는 종교적 의례나 기적이 거의 등장하지 않지만, 심층에서는 다수의 종교적 이미지와 은유가 작동하고 있다. 그는 전통적인 신앙심을 직접적으로 옹호하거나 선전하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부재와 침묵으로서의 신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독특한 종교미학을 구축했다. 우선 세 작품의 제목부터가 성서나 신학과 연관된다.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는 신약성서 고린도전서 13장 12절의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에서 따온 것이다. 이 구절은 현세에서 하나님을 명확히 알 수 없음을 뜻하는데, 영화에서 카린이 결국 본 것이 왜곡된 모습의 신임을 생각하면 깊은 여운을 준다. 마치 거울에 비친 일그러진 상처럼, 그녀의 정신병적 비전은 하나님의 왜곡된 이미지였던 셈이다. <겨울빛>의 원제는 직역하면 “한낮의 빛”이지만, 역설적으로 영화 속 교회는 한기 어린 겨울 대낮의 빛에 쓸쓸히 비춰진다. 이는 신앙의 혹독한 한겨울을 상징한다. <침묵>의 제목은 애초에 “신의 침묵”을 의미했고, 베리만도 이 영화까지 종교를 직접 다룬 후 이후로는 점차 인간 내면 심리로 관심을 이동시켰다. 각 영화 속에 숨어있는 종교적 모티프들을 보면, <거울>에는 신을 찾아 나선 현대의 요브와도 같은 카린의 이야기가 있다. 그녀는 사랑받고 싶어 애타게 하나님을 부르짖지만 돌아온 것은 침묵의 신, 거미 신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데이비드는 마지막에 딸을 정신병원으로 보내며 아들 앞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고 말한다. 그는 “가장 바보 같은 사랑부터 가장 고귀한 사랑까지, 모든 사랑은 실제로 존재하며 그것이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그래서 내 빈 마음을 이 생각에 맡겨본다”고 한다. 그러자 아들 미누스는 “아버지가 내게 말씀해주셨어!”라고 감격한다는 결말 대사가 있다. 여기에서 부녀의 관계 회복은 단순 가족 드라마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 사랑 안에서 현현한 순간처럼 그려진다. 즉, 계시의 대체물로서 인간의 사랑이 성사화된 것이다. 이 장면에서 데이비드와 미누스가 둘만의 조촐한 “예배”를 드리는 듯한 구도가 인상적이다. 이는 신의 침묵 중에도 두 사람이 서로를 통해 신성을 느끼는 순간을 암시한다. <겨울빛>은 종교적 상징이 가장 직접적으로 등장한다. 영화의 도입과 종결이 모두 교회 예배 장면이며, 토마스 목사의 이야기는 명백히 그리스도 수난의 메타포로 짜여 있다. 토마스는 이름부터 성경의 의심 많은 제자 도마를 떠올리게 하고, 부인 사후 냉담해진 그에게 헌신적으로 사랑을 바치는 마르타의 이름 역시 성경의 마르다와 유사하다. 특히 클라이맥스에서 교회 관리인 알되트가 제기하는 신학적 질문은 영화 전체의 의미를 함축한다. 그는 목사에게 예수의 고난에서 진정한 핵심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느냐고 묻는다. 사람들은 예수의 육체적 고통에만 집중하지만, 사실 예수가 겪은 최악의 고통은 제자들에게 버림받고 하나님에게까지 버림받았다고 느낀 순간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알되트는 십자가 위 예수가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친 그 하나님의 침묵이야말로 예수의 절정 고통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통찰은 토마스 자신에게도 적용된다. 토마스는 아내와 교인들에게 외면받고 신에게서도 아무 응답을 듣지 못하자 깊은 절망에 빠졌지만, 문득 예수도 똑같이 절망을 느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즉, 하나님의 침묵이 신앙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핵심 경험일 수도 있다는 역설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이 깨달음 이후 토마스는 비록 신앙을 되찾은 것은 아니지만, 침묵 속에서라도 자기 직분을 다 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래서 마지막에 교회에 마르타 한 사람밖에 없는데도 그는 미사를 시작한다. “거룩 거룩 거룩 만군의 여호와여, 온 땅에 주의 영광이 충만하도다…”라는 그의 낭송은 여전히 공허하게 울리지만, 동시에 이전보다 조금은 의미 있게 다가온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의 침묵을 공유함으로써 신성과 인간성의 연대를 체험했기때문이다. 요컨대 <겨울빛>은 십자가상의 예수를 거울삼아, 현대의 목회자가 신 없는 고통의 자리에서도 하나님과 연대할 길을 모색하는 종교적 드라마로 읽힌다. 이는 신학자 본회퍼가 말한 “하나님 없이 하나님과 함께”라는 모토와도 통하는 부분이다. <침묵>은 겉보기에 종교적 소재가 전혀 없다. 성직자나 교회 장면도 없고, 노골적인 신학 토론도 없다. 그러나 이 작품이 전하는 종교적 이미지는 가장 심오할 수 있다. 영화 내내 대사는 적고 몸의 욕구와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깔리지만, 결말에서 에스테르가 조카에게 써준 편지가 이를 환기한다. 에스테르는 죽기 직전 요한에게 자신이 번역한 현지어 단어 목록을 건네준다. 뒤늦게 요한이 기차 안에서 그 쪽지를 읽으며 중얼거리는 마지막 단어는 “Hadjek”인데, 이는 현지 가상의 언어로 영혼을 뜻한다고 알려져 있다. 앞서 에스테르는 신에게 “제발 고향에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지금부터 영원이다”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떠올리는 등, 마음속 갈망을 내비쳤다. 그녀의 기도는 끝내 응답받지 못했고 그녀는 타향 객실에서 쓸쓸히 숨을 거둔다. 그러나 그 직후 요한에게 전해진 “영혼”이라는 단어는, 마치 침묵 중에 전해진 마지막 메시지처럼 울린다. 하나님은 끝내 침묵하셨지만, 그녀는 조카에게 보이지 않는 영혼의 실재를 암시하고 간 것이다. 이것을 굳이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말씀이 없는데 남겨진 말씀”이라고나 할까. 영화는 바로 이 잔잔한 메아리로 끝난다. 어른들은 서로 상처만 남긴 채 헤어졌지만, 아이는 언어의 조각을 손에 쥐고 있다. 이 이미지에는 절망 너머 어렴풋한 희망의 뉘앙스가 담겨 있다. 에스테르가 적어준 것은 단순한 번역연습이 아니라, 자신이 평생 찾아 헤매던 영혼의 실체를 조카에게 건네준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해석을 뒷받침하듯, 폴란드의 영화 거장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는 <침묵>을 자신의 가장 좋아하는 베리만 영화로 꼽았는데, 키에슬로프스키의 작품들이 흔히 삶의 영혼성과 신비를 탐구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흥미로운 연결이다. 3부작 전체로 볼 때, 베리만의 종교미학은 부재하는 신을 상징과 메타포로 현존하게 만든다는 역설을 보여준다. 거미 이미지, 빈 교회, 낯선 도시, 병든 몸 등 부정적인 형상들 속에서 오히려 성스러움의 흔적이 드러난다. 이러한 기법은 중세 부정신학의 미학적 등가물이라 할 만하다. 즉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격언처럼, 하나님을 직접 묘사하는 대신 침묵과 공허 자체를 화면에 가득 채움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그 너머를 응시하게 하는 것이다. 베리만은 인터뷰에서 “내 영화들은 질문을 던질 뿐 답을 주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는 그의 종교미학적 태도를 잘 보여준다. 성화적 시선이란 보통 거룩한 것, 구원과 환희를 응시하는 눈길이겠지만, 베리만은 피사적 시선, 즉 구원이 보이지 않는 곳을 뚫어져라 응시함으로써 관객 스스로 구원의 부재를 인식하게 만든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체험을 한 관객은 스스로 내면에서 신의 가능성을 재발견할 수도 있다. 실제로 한 평론가는 <겨울빛>을 보고 “비록 암울하지만, 신앙의 뿌리에 있는 무응답의 질문들을 정직하게 드러내어 오히려 내게 신앙을 새롭게 자각하게 했다”고 평했다. 베리만의 종교적 영상미학이 지닌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아름다운 성가나 기적 장면 하나 없이도, 그의 영화는 관객의 영혼을 뒤흔드는 강렬한 의식이 된다.
잉마르 베리만의 ‘신의 침묵’ 3부작은 신학, 철학, 미학이 총체적으로 결합된 걸작으로서, 하나님의 부재 앞에 선 인간 존재의 벌거벗은 진실을 직시한다. 이 세 편의 영화는 각각 독립된 이야기이지만, 함께 놓고 보면 하나의 영적인 여정처럼 이어진다. 첫째 날 저녁에 절망 속에 “신은 사랑”이라는 말을 붙들었다가, 둘째 날 한낮에 그 사랑마저 의심하고 부정하며 신을 잃고, 셋째 날 깊은 침묵의 밤에 이르러 비로소 아무 말 없는 하나님과 대면하게 되는 형국이다. 그 밤은 암흑이지만, 베리만은 그 속에서 완전한 침묵이 아닌 부재의 형태로 현존하는 신의 인상을 포착한다. 마치 사진 필름의 네거티브처럼, 빛의 부재를 통해서만 도리어 어떤 상이 드러나는 원리다. 베리만 자신의 말처럼, 3부작은 형이상학적 의미의 감소와 환원을 통해 궁극에 남는 신의 음각을 보여준다. 그것은 친절하고 위안주는 하나님 모습이 아니라, 침묵과 공허라는 모양으로 새겨진 신의 흔적이다. 그러나 그 흔적을 마주하는 일이야말로 신앙의 새로운 가능성, 혹은 인간 실존의 진실에 다가가는 길임을 베리만은 암시한다.
베리만은 이 영화들을 통해 자신의 신앙적 고민을 철저히 쏟아냈고, 개인적인 영적 투쟁을 보편적인 예술로 승화시켰다. 칼 바르트는 한때 “신학이 예술보다 먼저 이런 질문을 진작 다루었어야 하는데 늦었다”고 탄식했지만, 베리만은 예술이 신학을 앞질러 그 빈 공간을 메웠다고도 볼 수 있다. 그의 카메라는 성서의 연장선에서 욥의 탄식과 예수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현대인의 일상 속에 재현해냈다. 그리고 그 응답없음의 순간에, 기도의 본질과 믿음의 민낯을 찾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