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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희, 휴일

1960년대 후반 한국사회는 경제개발과 냉전 이데올로기가 교차하는 엄혹한 시기였다. 박정희 군사정권 하의 영화 검열은 극심하여, 사회 비판이나 어두운 주제를 다룬 영화는 개봉조차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만희 감독은 상업성과 예술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들로 독자적 입지를 굳혔다. 그는 1961년 데뷔 이후 15년간 50편이 넘는 영화를 만들며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이끈 주요 감독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특히 그는 “끊임없이 실험을 시도”하는 혁신적 감각으로, 당대의 여타 감독들과 차별화된 영화미학을 구축했다. <휴일>은 이만희의 필모그래피에서도 가장 실험적이고 대담한 작품으로 꼽힌다. 1968년 제작된 이 영화는 검열을 통과하지 못해 당시엔 상영이 보류되었고, 필름마저 창고에 묻혀 오랫동안 잊혀졌다. 실제로 검열 당국은 이 영화의 비관적 결말을 문제 삼아, 주인공 남성이 머리를 깎고 군대에 입대하는 내용으로 끝부분을 수정할 것을 요구했으나, 감독과 작가, 제작자는 이에 타협하지 않았다. 결국 영화는 공개되지 못한 채 봉인되었고, 37년이 지난 2005년에야 영상자료원에서 필름이 기적처럼 발견되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이 복원 공개를 계기로 이만희 감독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고, <휴일>은 한국 영화사에 숨겨져 있던 걸작으로 자리매김했다.

<휴일>의 이야기는 일요일 단 하루 동안 벌어지는 사건을 담담히 따라간다. 실직 중이라 “매일이 휴일”이나 다름없는 남자 허욱(신성일 분)은 추운 겨울날 애인 지연(전지연 분)을 만나러 나선다. 두 사람은 가난 탓에 다방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거리에서 마주 서서 서로의 처지를 확인한다. 지연은 자신이 임신했음을 고백하고, 둘은 경제적 형편상 낙태를 결심한다. 수중에 돈 한 푼 없는 허욱은 수술비를 마련하고자 여기저기 친구들을 찾아다니지만 번번이 거절당한다. 궁지에 몰린 그는 마침내 형편이 그나마 나은 한 친구의 지갑에서 돈을 훔쳐 달아나는 극단적 선택을 한다. 허욱은 훔친 돈으로 지연을 데리고 병원을 찾지만, 휴일이라 병원마다 문이 닫혀 수술을 받지 못한다. 간신히 찾아간 산부인과에서 마침내 지연은 수술대에 눕게 되고, 허욱은 수술이 끝나길 기다리며 불안에 사로잡힌다. 기다림의 긴장 속에서 허욱은 병원을 뛰쳐나와 거리로 향한다. 그는 근처 술집에 들어가 양주를 들이키며 현실도피를 하고, 우연히 만난 낯선 여자와 함께 방탕한 시간을 보낸다. 둘은 연신 술을 마시고 거리를 방황하다, 공사장 한구석에서 충동적으로 육체적 관계를 맺으려 한다. 바로 그때 울려 퍼지는 교회의 종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허욱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각하고 황급히 병원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 지연은 수술 중 과다출혈로 사망하고 만다. 허욱은 싸늘한 연인의 시신 앞에서 절망에 빠지고, 죄책감과 허무함을 안은 채 병원을 나온다. 어둑해진 일요일 밤, 허욱은 추운 거리를 정처 없이 헤매다 끊겨버린 전차 철로 앞에 멈춰 선다. 그는 삶의 막다른 골목에 선 듯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서울, 남산, 전차, 술집 주인 아저씨, 하숙집 아줌마, 일요일… 내가 사랑하지 않는 건 아무것도 없어… 이제 곧 날이 밝겠지. 거리로 나갈까. 사람들을 만날까. 커피를 마실까. 머리부터 깎아야지. 머리부터 깎아야지.” 이렇게 허욱의 독백과 함께 필름은 끝을 맺는다. 내일을 기약하지 못한 채 일요일 밤에 끝나버리는 이야기 – 이것이 <휴일>이 남긴 씁쓸한 여운이다.

영화 <휴일>의 핵심 정서는 철저한 고립감과 무력감이다. 등장인물들은 가족도 공동체도 없이 도시에 내던져진 고립된 개인들로 그려진다. 남녀 주인공은 가난과 절망으로 인해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고, 영화는 일요일이라는 시간을 통해 이러한 정서를 극대화한다. 많은 인물들이 “일요일을 견딜 수 없어” 빨리 지나가길 바라며, 관객 역시 영화가 끝날 즈음 그 일요일로부터 아무도 벗어날 수 없었음을 깨닫게 된다. 영화 속 일요일이라는 휴일은 더 이상 휴식이나 희망의 날이 아니라, 출구 없이 정지된 시간의 은유다. 허욱과 지연에게 주어진 하루는 곧 그들의 전 생애를 압축한 것이며, 그 속에는 어떠한 미래도 약속되지 않는다. 이처럼 <휴일>은 한 남녀의 비극적 사랑을 넘어, 1960년대 후반 한국 청년세대의 허무와 좌절을 상징적으로 대변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영화는 당대 현실을 직접 언급하거나 정치적 구호를 외치지 않지만, “체제가 약속하는 미래의 허구성과 불가피한 인간적 허무함”을 정면으로 드러냄으로써 당시 검열에 저항했다. 가난한 연인이 겪는 절망은 당시 많은 젊은이들의 처지와도 맞물려 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은커녕 오늘을 버티기도 벅찬 세대의 고통이 이 영화에 응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멜랑콜리와 무기력의 묘사는 오히려 강력한 정치적 잠재력을 지닌다. 체제가 강요하는 장밋빛 미래 서사를 믿지 못하는 침묵의 항의이자, 현실 그 자체의 어둠을 응시하는 정직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휴일>은 형식 면에서 네오리얼리즘의 영향과 모더니즘 영화의 실험정신을 모두 품고 있다. 감독 이만희는 실제 서울 거리와 공원 등 로케이션 촬영을 통해 도시 공간의 리얼리티를 획득했다. 북청계설의 겨울 거리, 한강 다리, 남산 공원의 삭막한 모습 등은 당대 서울의 현실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전문 배우인 신성일과 전지연이 주연을 맡았지만, 주변 인물들은 인상적인 초상화처럼 스쳐 지나가는 군상들로 묘사되어 다큐멘터리적인 느낌을 준다. 이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들이 비전문 배우와 실재 배경으로 현실감을 살린 것과 상통한다. 그러나 <휴일>은 단순한 사회고발이나 사실주의에 머물지 않고, 도시적 삶의 정서를 시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주력한다. 영화 전반에 흐르는 분위기는 한편으로 극사실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몽환적이고 초현실적인 정조를 띤다. 예컨대 인물들은 서울 한복판을 떠돌지만, 거리에는 유난히 사람들이 보이지 않고, 시간은 멈춘 듯 늘어져 있다. 대사나 사건의 밀도보다 침묵과 여백이 크게 자리하여, 관객은 마치 텅 빈 도시를 배회하는 두 사람의 내면을 엿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러한 정지된 공간과 시간은 주인공들의 내면적 불안과 공명하며, 영화에 특유의 서정성을 부여한다. 흑백 화면에 담긴 한겨울의 서울 풍경은 처연할 만큼 아름답지만, 동시에 뼛속까지 스며드는 쓸쓸함을 자아낸다. 이만희 감독은 절망의 한복판에서도 일말의 미적 감흥을 포착해내며, 어두운 현실을 냉정한 서정성으로 승화시키는 연출을 선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 속 절망이 멜로드라마적 신파로 표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만희는 감정의 과잉을 절제하고 차가운 거리감을 유지함으로써, 오히려 더욱 깊은 슬픔을 자아낸다. 인물들은 울부짖거나 극적으로 항거하지 않고, 체념에 가까운 담담함으로 일관한다. 이러한 정조는 일본 오시마 나기사의 <청춘잔혹 이야기>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오시마 영화가 부분적으로 정치적 배경을 개입시키는 데 반해 <휴일>은 배경 서사 없이도 순수하게 청춘의 절망만을 시각화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허무와 불안 자체를 응시하는 강도 면에서 <휴일>의 숏들은 더욱 강렬하다는 평이며, 이로써 이만희는 1960년대 후반 청년 멜로드라마의 통속적 문법을 완전히 뒤흔들어 버렸다.

이만희 감독은 “다른 감독들의 영화에서 본 적 없는 각도”를 찾아낼 정도로 창의적인 카메라 앵글을 추구한 것으로 유명하다. <휴일>에서도 그는 당시 한국영화 문법으로는 파격적인 숏 구성과 카메라 움직임을 선보인다. 먼저, 프레이밍을 통해 인물의 고립감을 시각화하는 기법이 두드러진다. 좁은 골목길이나 다리 위, 공원의 벤치 등에서 인물을 화면 한구석에 작게 배치하거나, 창문이나 문틀 너머로 인물을 보여주는 구도를 자주 사용함으로써 환경에 압도된 개인의 모습을 부각한다. 예를 들어 허욱과 지연이 함께 서 있는 숏에서도 두 사람은 화면 가득 펼쳐진 삭막한 도시 풍경 속에 작게 자리하며, 주변의 빈 공간이 그들의 소외감을 대변한다. 이러한 구도는 인물의 내면에 깔린 고독과 단절을 미장센 차원에서 표현하는 효과를 거둔다. 카메라의 움직임 또한 섬세하게 계산되어 있다. 이만희는 흔들리는 핸드헬드보다는 삼각대와 트래킹 쇼트를 즐겨 사용하여, 부드럽지만 냉정한 시선으로 인물을 따라간다. 영화 초반부에 허욱과 지연이 서울 거리를 함께 걸을 때, 카메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들의 뒷모습을 트래킹한다. 멀리서 따라가는 이 시선은 마치 관찰자처럼 두 사람을 응시하며, 그들 곁에 있지만 결코 개입하지 않는 냉철함을 유지한다. 또한 일부 장면에서는 카메라가 인물을 등지고 풍경만 응시하기도 한다. 예컨대 허욱이 친구의 돈을 훔쳐 달아난 뒤 한강변에 서성이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허욱의 표정보다는 그의 등 뒤로 펼쳐진 흐린 강과 하늘을 오래 보여준다. 이는 인물의 심리를 직접 드러내기보다는, 환경의 표정으로 우회하여 그의 심경을 암시하는 시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카메라 워크는 관객으로 하여금 인물과 거리를 유지한 채, 더 깊은 공감과 해석의 여지를 갖도록 만드는 이만희만의 미학적 전략이다.

<휴일>의 서사 구조는 겉보기에는 시간 순서대로 흘러가는 일자 구조를 취한다. 영화는 일요일 아침부터 밤까지 사건을 순차적으로 전개하며, 관객은 허욱과 지연의 동선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쫓아가게 된다. 그러나 내러티브의 인과관계나 정보 제공 면에서는 상당한 여백과 비약이 존재한다. 인물들의 과거나 배경은 철저히 생략되어 있으며, 두 사람이 왜 이 지경까지 가난에 몰렸는지, 혹은 이들이 이전에 어떤 행복한 순간을 가졌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대신 영화는 거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두 사람의 행복했던 한때를 암시하는 짧은 몽타주를 삽입한다. 수술 후 지연이 죽고 난 직후, 허욱의 머릿속을 스쳐가는 듯한 회상 몽타주가 등장하는데, 여기에 두 사람이 환하게 웃던 과거의 순간들이 몇 초간 번쩍인다. 이 희미한 행복의 잔상은 영화 내내 이어진 냉혹한 현실과 대비되며, 관객으로 하여금 더욱 깊은 비애를 느끼게 한다. 이처럼 거의 대사 없이 이미지의 연결만으로 과거와 현재를 교차시키는 편집 기법은 당시 한국 영화 문법으로는 상당히 전위적인 시도였다. 또한 편집 리듬 면에서 <휴일>은 극적인 가속이나 긴장 고조를 의도적으로 회피한다. 사건과 사건 사이의 시간적 공백이나 지연이 두드러지는데, 예를 들어 허욱이 돈을 구하러 간 사이 지연이 홀로 공원에서 그를 기다리는 장면은 느린 호흡으로 길게 이어진다. 관객은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채로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지연의 모습을 오래 지켜보게 된다. 쓸쓸한 바람 소리만이 화면을 채운 이 정지된 시간 동안, 우리는 인물의 초조와 불안을 체험적으로 공유하게 된다. 이러한 시간 늘이기 편집은 현대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법이지만, 당시로서는 파격에 가까웠다. 이만희는 이를 통해 실시간성의 환상을 깨뜨리고, 관객이 영화적 시간의 두께를 인식하도록 만든다. 그 결과 <휴일>의 72분은 결코 짧게 느껴지지 않으며, 오히려 그 하루가 견딜 수 없이 길고 지루하게 체험되도록 연출된다. 이는 주인공 허욱의 주관적 체험 –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절망의 하루” – 를 관객도 함께 겪게 만드는 장치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영화의 결말부 구성은 특기할 만한 형식 실험이다. 앞서 서술했듯, 원래 각본 단계에서는 주인공의 죽음을 프롤로그에 배치하고 회상 형식으로 이야기를 꾸리는 구상이 있었다. 그러나 최종 영화에서 이만희는 인과적 결말(자살)을 직접 보여주지 않고, 암시적 독백으로 마무리함으로써 여운을 남겼다. 허욱이 “머리부터 깎아야지”라고 되뇌는 라스트 신은 표면적으로는 별 의미 없는 말처럼 들리지만, 검열 맥락상 이는 군 입대를 암시하는 말로도 해석된다. 하지만 정작 영화는 허욱이 머리를 깎는 장면도, 다음 날을 맞이하는 모습도 보여주지 않는다. 이 열린 결말 속에서 관객은 그의 운명을 스스로 상상해야 하며, 그 상상은 결코 밝지 않은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이렇듯 <휴일>은 결말마저도 명확한 폐쇄 대신 영화 밖으로 질문을 연장시키며 끝을 맺는다. 이러한 결말 처리 방식은 훗날 홍상수 감독의 <극장전>(2005)에서 주인공이 극중 영화를 끝맺고 관객에게 말을 거는 메타적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고 지적된 바 있는데, <휴일>의 당시로서는 이례적이었던 독특한 결말 연출이 이후 한국 영화감독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음을 시사한다.

이만희 감독의 영화언어는 특정 장면들에서 특히 빛을 발한다. 몇가지 쇼트를 통해 영화를 더욱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한강 다리 위에 멈춰 서 있는 두 남녀의 롱숏으로 시작한다. 희뿌연 겨울 하늘 아래, 끝없이 이어진 다리 위에 작은 실루엣으로 서 있는 허욱과 지연의 모습은 첫 프레임부터 고립과 불안을 암시한다. 다리는 공간적으로는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통로이지만, 이 장면에서는 삶과 죽음, 과거와 미래의 경계에 선 공간처럼 보인다. 롱숏 구도에서 인물들은 얼굴 표정조차 식별하기 어려울 만큼 멀리 잡혀 있는데, 화면을 가득 채운 주변의 적막한 풍경이 오히려 그들의 내면 풍경을 대변한다. 강물은 느릿하게 흐르고, 도시의 스카이라인은 희미하게 펼쳐져 있으며, 인물의 등 뒤로는 텅 빈 하늘이 광막하다. 이 정지된 한 폭의 풍경화 같은 숏은 휴일의 시작을 알리는 동시에,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의 정서를 응축해서 전달한다. 두 사람이 서 있는 다리는 마치 앞으로 맞닥뜨릴 비극으로 가는 문지방처럼 보이고, 다리 아래 흐르는 차가운 강물은 그들의 운명이 향할 파국을 암시하듯 음산한 인상을 준다. 이 오프닝 숏에서 카메라는 하이앵글로 두 사람을 내려다보듯 잡고 있어, 인물들이 세상으로부터 압도당한 미물처럼 느껴진다. 또한 롱숏에서 시작한 프레임은 천천히 줌인하여 둘의 뒷모습에 조금 가까워지는데, 이 움직임은 마치 관객을 그들 곁으로 서서히 인도하는 듯하다. 그러나 끝내 인물들의 얼굴은 완전히 드러나지 않고, 다리 위 그들의 거리감은 좁혀지지 않는다. 이만희는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관객이 이 인물들을 외부 관찰자의 위치에서 지켜보게 할 것인지, 아니면 감정이입하여 따라가게 할 것인지 미묘한 균형을 설정한다. 결과적으로 관객은 다리 위 인물들에게 아직 완전히 감정이입하지 않은 채, 일정한 거리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는 시선을 갖게 된다. 이는 영화 전체에 깔린 냉정한 정조를 미리 체험하게 만드는 장치이며, 동시에 “이들의 운명을 지켜보라”는 암묵적 초대처럼 기능한다. 폐허 같은 도시 속 두 연인의 실루엣 – 이 인상적인 오프닝은 <휴일>의 비극적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다.

허욱과 지연이 낙태 수술을 받기 위해 여러 병원을 찾아다니는 일련의 장면들은, 이들의 사회적 소외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첫 번째 병원 문 앞, 카메라는 간판이 걸린 병원 입구를 비추고 그 앞에 선 허욱의 풀샷을 보여준다. 문은 굳게 닫혀 있고, 허욱은 망설이다 노크도 해보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이때 카메라는 약간 흔들리는 듯한 핸드헬드로 허욱의 불안정한 심리를 반영한다. 허욱의 모습은 프레임 한쪽 구석에 치우쳐 있으며, 화면의 나머지는 높이 치솟은 병원 건물 벽과 냉랭한 하늘이 차지한다. 이 비대칭 구도는 개인 대 사회 체제의 힘 관계를 암시한다. 거대한 제도 앞에서 개인은 한없이 왜소하고, 문턱을 넘지 못한 채 바깥에 머물러야 하는 존재임이 시각화된다. 이어지는 편집에서는 병원 안쪽을 슬쩍 훔쳐보는 시점 숏이 삽입된다. 살짝 열린 문틈이나 창유리 너머로 보이는 희미한 실루엣들, 혹은 병원 내부의 불빛 같은 것이 허욱의 시선을 통해 비춰지지만, 정확히 보이지는 않는다. 이 단절 편집은 관객으로 하여금 허욱과 동일한 결핍을 느끼게 한다 – 내부에 들어갈 수 없고,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 말이다. 이후 빠른 컷으로 “진료 휴무” 팻말, 의자만 놓인 대기실 등 몇 가지 디테일한 이미지를 제시하고 곧장 장면이 전환된다. 이러한 몽타주 기법은 논리적 시간 흐름보다는 인상의 나열을 택한 것으로, 주인공이 느끼는 충격과 좌절의 단편들을 전달한다. 특히 마지막에 병원 간판을 클로즈업으로 잡고 그 앞에 망연자실 서 있는 허욱의 숏은 압권인데, 이는 “사회가 주는 침묵”을 형상화한 상징적 이미지다. 누구도 그들에게 설명하거나 위로하지 않고, 차가운 간판 글자만이 화면을 지배하는 이 장면에서, 관객은 이들이 제도적으로 거부당한 순간의 쓰라림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허욱과 지연은 이렇게 몇 차례 병원을 전전하며 계속 쫓겨난다. 이때 유사한 숏 구성이 반복되는데, 폐쇄된 문, 바깥에서 웅크린 두 사람, 냉랭한 응시의 카메라가 변주를 이룬다. 반복되는 미장센 속에서 지연의 표정은 점점 죽어가고, 허욱의 자세는 한없이 작아진다. 마지막에 겨우 받아준 개인병원에서 지연이 수술대에 오르는 장면에 이르면, 이 반복의 종지부를 찍듯 카메라는 지연의 얼굴 클로즈업을 꽉 채운다. 식은땀 맺힌 창백한 얼굴에 쏟아지는 수술실 조명 아래, 지연의 두 눈은 허공을 향해 뜬 채 미세하게 떨린다. 이 극단적인 클로즈업은 앞서 수차례 바깥 풍경에 머물렀던 카메라와 대조를 이루며, 마침내 드러나는 인간적 고통의 얼굴을 관객에게 들이민다. 한동안 삽입음 없이 지연의 숨소리만 들리다, 곧이어 커팅 – 그리고 허욱이 병원을 뛰쳐나가는 장면으로 전환된다. 이 일련의 편집은 관객에게 충격을 안긴다. 사회의 냉담한 벽 앞에서 좌절하던 인물이, 마침내 가장 내밀한 고통의 순간을 맞이하자 카메라는 정면으로 인간의 상처를 응시한 것이다. 이만희의 편집과 숏 구성은 이렇게 거리 두기와 밀착을 교차시키며, 관객으로 하여금 사회의 풍경과 개인의 얼굴을 번갈아 목도하게 함으로써 <휴일>이 말하고자 하는 바 – “이 절망은 구조적이면서도 철저히 인간적인 것” – 를 실감하게 한다.

허욱이 돈을 구하러 다니는 동안 지연이 홀로 기다리는 남산 공원 장면은 <휴일>에서 시각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시퀀스 중 하나다. 이 장면은 강한 초겨울의 바람을 통해 보이지 않는 정서를 시각화한 교과서적인 예이다. 지연이 벤치 옆에 서서 허욱을 기다리는 숏은 눈에 띄게 긴 원테이크로 촬영되어 있다. 카메라는 멀리서부터 그녀를 잡은 후, 한동안 컷을 나누지 않고 지연의 주변을 둘러싼 공원의 풍경을 천천히 이동한다. 앙상한 겨울 나무들, 잎 하나 없이 드러난 가지들이 화면을 가로지르고, 지연의 뒤로는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의 풍경이 펼쳐진다. 무엇보다도, 화면 전체에 모래먼지를 날리는 거센 바람의 움직임이 가득하다. 지연의 코트 자락과 머리카락이 바람에 거칠게 날리고, 벤치 주변의 낙엽과 먼지가 회오리치듯 흩날린다. 이때 지연은 그저 묵묵히 서 있기만 할 뿐인데, 주변 자연이 마치 그녀의 내면 풍경처럼 요동치는 것이다. 큐브릭 영화의 한 장면처럼 회화적인 흑백 구도를 자랑하는 이 숏은 몹시 아름답지만 동시에 슬프고 불안하다. 인물의 감정을 직접 드러내지 않고 자연환경의 변화로 암시하는 이만희의 연출은, 서정성과 초현실성이 어우러진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지연 곁에서 쉬지 않고 휘몰아치는 바람은 마치 지옥의 입구 앞에 선 자의 심경처럼 혼란스럽고 위태롭다 – 이 공원은 더 이상 평온한 쉼터가 아니라, 두 연인의 운명이 갈라지는 분기점처럼 느껴진다. 허욱이 돈을 구하지 못한 채 공원으로 돌아와 지연과 재회하는 순간, 이만희는 탁월한 부감숏으로 두 사람을 내려다본다. 화면 위쪽에서 본 지연의 가녀린 몸은 커다란 나무 옆에 조그맣게 서 있고, 허욱이 멀리서 그녀에게 다가온다. 이때 허욱은 자신의 외투를 벗어 들고 오는데, 바로 지연에게 그것을 건네기 위해서다. 흥미로운 것은 허욱의 동작이다. 그는 지연 가까이 다가가서 옷을 입혀주는 대신, 몇 미터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그 코트를 땅바닥에 내려놓는다. 그리고 말 한마디 없이 다시 뒤돌아 떠날 채비를 한다. 지연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한참 뒤에야 다가가 외투를 집어들지만, 끝끝내 그것을 걸치지 못한다. 이 일련의 행동은 대수롭지 않은 것 같지만, 영화의 맥락에서 보면 대단히 상징적이다. 허욱은 애인을 추위에 떨게 했다는 미안함에 외투를 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죄책감과 무력감 탓에 직접 전해줄 용기조차 내지 못한 채 거리를 둔 것이다. 지연은 그런 그의 마음을 알기에 외투를 집어들지만, 이미 마음이 식어버린 것인지 끝내 입지 않는다. 이 좁혀지지 않는 거리와 옷을 입지 않음의 선택에는 두 사람 사이 벌어진 균열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이 장면은 대사 한 마디 없이 행동과 숏의 이미지만으로 깊은 정서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돋보인다. 모래바람, 머뭇거림, 땅에 내려진 외투, 입혀지지 못한 옷… 이 연쇄되는 이미지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무력감을 뼛속까지 전달한다. 관객은 그저 “왜 저렇게까지…” 하는 탄식을 삼키며 이들의 상황을 체감할 뿐이다. 이 숏 하나로 이만희는 두 연인의 관계에 돌이킬 수 없는 금이 갔음을, 그리고 허욱이라는 인물이 결국 구원자가 되지 못할 것임을 예고한다. 이후 허욱은 다시 돈을 구하러 지연을 남겨두고 떠나고, 지연은 황량한 공원에 혼자 남아 추위와 슬픔을 견딘다. 카메라는 멀리서 그녀의 뒷모습을 잡으며 이 씬을 마무리하는데, 이때 들리는 것은 오직 몰아치는 바람 소리뿐이다. 대화도 음악도 없이, 자연의 소음만 가득한 이 장면은 영화 전체에서 가장 고요하고도 폭력적인 순간으로 기억된다.

허욱이 지연을 만나러 가기 전, 길거리에서 겪는 작은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바로 담배와 성냥에 얽힌 장면이다. 이 장면은 짧지만 <휴일>에서 유일하게 따스한 온기가 스며드는 순간으로, 영화의 어둡고 냉혹한 흐름 속 한 줄기 빛 같은 역할을 한다. 돈 한 푼 없는 허욱은 처음 지연을 만나러 가는 길에 우연히 한 남자를 속여 담배 한 갑을 손에 넣는다. 그러나 막상 담배는 얻었는데 불을 붙일 성냥이 없다. 추운 길가에 인부들이 모여 불을 쬐고 있는 모닥불이 눈에 띄자, 허욱은 머뭇거리며 다가가 담배에 불을 붙인다. 이때 카메라는 허리를 약간 굽혀 모닥불에 입을 갖다대는 허욱의 옆모습을 미디엄 숏으로 담는다. 인부들의 거친 손과 불길이 함께 화면에 잡혀, 일종의 연대의 순간을 암시한다. 불을 붙인 허욱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한숨 돌리는데, 그때 옆의 인부들이 “담배 하나 주시겠소” 하고 조심스레 말을 건넨다. 허욱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곧 미소를 띠며 자기 담배 갑을 내밀어 담배를 나눠준다. 인부들은 고맙다며 담배를 받아들고, 잠깐의 침묵 끝에 서로 한두 마디 따뜻한 농담을 나눈다. 이 순간 카메라는 허욱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잡는다. 모닥불의 불빛이 그의 옆을 붉게 물들이고, 허욱의 표정은 영화 내내 보지 못했던 평온하고 온화한 표정으로 바뀐다. 살짝 웃음기까지 도는 그 얼굴은, 마치 이 어두운 영화 속 다른 사람인 듯 낯설 만큼 아름답다. 사실 허욱은 영화 내내 담배에 불을 붙일 때마다 번번이 성냥이 없어 애를 먹는다. 부도덕하게 손에 넣은 담배와 언제나 부족한 불 – 이 지속되는 결여와 불안이, 바로 이 모닥불 장면에서 완벽하게 해소되는 것이다. 허욱은 성냥 없이도 불을 얻었고, 또 자신이 얻은 것을 남들과 함께 나누는 나눔을 실천함으로써 잠시나마 인간다운 연대의 따뜻함을 맛본다. 노동자들과 함께 연기를 내뿜는 이 순간만큼은 그도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 감독은 이 장면을 통해 허욱이라는 인물에게도 인간적인 면모와 구원의 가능성이 잠시나마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행복한 순간은 곧 지나갈 일장춘몽임을 알고 있다. 다시 길을 떠나는 허욱의 뒷모습을 먼 거리 숏으로 비추며, 카메라는 모닥불을 중심으로 남은 인부들의 무리를 잠깐 잡아준다. 그리고 불꽃이 바람에 일렁이며 화면이 페이드 아웃된다. 이 찰나의 에피소드는 영화의 주제의식과도 맞닿아 있다. 결핍과 충돌로 가득 찬 세계에서도 한 줌의 인간적 온기는 분명 존재한다는 것, 그러나 그마저 붙잡지 못하면 다시 끝없는 고독 속에 던져진다는 것 말이다. 모닥불 옆 허욱의 환한 얼굴은 <휴일>의 음울한 여정 속 유일한 휴식처였고, 동시에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이었다.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장면은 허욱이 낯선 여자와 방황하다 파국을 맞는 대목과, 이어지는 결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이 부분에서 이만희는 영상과 음향을 통해 사랑의 파멸과 죽음의 그림자를 강렬하게 묘사한다. 허욱과 뜻밖의 하룻밤을 보내게 되는 술집 여인의 에피소드는, 주인공의 도덕적 추락이자 감정적 절정이다. 비 내린 밤거리의 일련의 쇼트들 끝에, 두 사람은 한적한 공사장 빈 건물로 숨어든다. 여기서 두 인물이 어둠 속에서 애욕에 탐닉하려 할 때, 카메라는 멀찍이서 그들을 잡아 실루엣으로만 표현한다. 콘크리트 기둥들 사이로 포개진 두 형체가 희미하게 보이는 이 숏은, 에로틱함이라기보다는 황량하고 공허한 인상을 준다. 그 순간 울려 퍼지는 교회의 종소리가 정적을 깨우며 허욱을 멈춰 세운다. 이 장면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한 컷에 잡힌 배경의 이미지다. 두 사람이 몸을 움켜안고 있는 바로 뒤편에 세워진 전신주가 화면에 비치는데, 그 모양이 마치 거대한 십자가처럼 보인다. 그리고 허욱이 고개를 들자 멀리서 들려오는 교회 종소리 – 이 이미지와 음향의 결합은 마치 죄와 죽음의 전조처럼 느껴진다. 종소리는 흔히 위안을 상징하지만, 여기서는 사랑의 몰락을 알리는 장송곡처럼 울려 퍼진다. 허욱은 흠칫 놀라며 제정신을 차리고, 급히 공사장을 빠져나가 병원으로 달려간다. 이 순간 카메라는 허둥대며 도망치듯 달려가는 그의 모습을 불안정한 핸드헬드로 따라가며, 화면 곳곳에 삐뚤어진 빛과 그림자를 교차시킨다. 이는 주인공 내면에 찾아온 죄책감과 공포를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공사장에 홀로 남겨진 여자의 모습은 거의 비치지 않는데, 이는 허욱의 인생에서 마지막 한 가닥 연정마저 실패로 끝났음을 암시한다. 이 장면은 단지 불륜의 현장이 아니라, 허욱이라는 인물이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을 시각화한 것이다. 마침내 결말부, 허욱은 병원에서 연인의 죽음을 확인하고 완전히 무너진다. 영화는 직접적인 통곡이나 눈물을 배제한 채, 허욱이 병원을 나와 밤거리로 터벅터벅 걸어나오는 모습을 담담히 묘사한다. 그는 다시 한강 다리 근처로 향하거나, 혹은 전차가 다니지 않는 끊긴 선로 위에 올라선다(해석에 따라 장소가 달리 느껴질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독백 장면이 찾아온다. 이때 카메라는 허욱의 전신을 롱숏으로 잡고, 서울의 야경과 함께 프레임에 담는다. 멀리 보이는 도시의 불빛들은 차갑고, 허욱의 그림자는 가로등 아래 길게 드리워져 있다. 그는 관객을 등진 채 혼잣말을 시작한다: 앞서 요약했듯이 “서울, 남산, 전차… 내가 사랑하지 않는 건 아무것도 없어… 이제 곧 날이 밝겠지… 머리부터 깎아야지” 등의 말들이다. 이 내레이션은 다소 뜬금없고 초현실적으로 들린다. 허욱이 이때 실제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내면의 목소리가 내레이션으로 깔리는 것인지는 화면만으로 분명치 않다. 어쩌면 우리는 죽은 이의 독백을 듣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가 이 순간 실존하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게 만드는 연출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곧 새벽이 올 것”이라 말하지만, 영화는 새벽을 보여주지 않은 채 끝나버린다. 그의 말대로라면 머리를 깎고 새로운 삶(혹은 군대)을 시작해야 할 터이지만, 우리는 그 결심이 실행될 거라 믿기 어렵다. 그가 선로 위에서 황망히 중얼거리는 모습은,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인간처럼 공허하다. 조용히 잦아드는 배경음 속에서 허욱의 음성만이 떠돌다가, 화면은 서서히 암전된다. 이 엔딩 숏은 영화의 첫 장면과 은밀한 대구를 이룬다. 처음에 다리 위에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었다면, 이제는 허욱 혼자 남아 폐허 같은 도시를 등지고 선 것이다. 처음에도 끝에도 인물은 작게 잡힌 롱숏의 실루엣일 뿐이며, 세상은 넓고 차갑게 그를 내려다볼 뿐이다. 이로써 영화는 순환 구조를 완성한다. 휴일이라는 시간은 돌고 돌아 원점으로 회귀했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허욱은 영원히 그 일요일에 갇혀버린 듯하며, 관객도 마찬가지로 답답함 속에 영화관을 떠나야 한다. 끝내 새벽은 밝지 않고, 주인공의 결단은 공허한 메아리로 남는다. 이 폐쇄된 결말에서 우리는 삶의 부조리와 운명의 아이러니를 목도하게 된다. 한 남자의 일그러진 사랑과 그로 인한 자기파괴는 이렇게 조용히 막을 내리지만, 그 여운은 화면 밖 관객의 현실에서까지 오래도록 맴돈다.

<휴일>은 한국 사회의 맥락 속에 뿌리내린 영화이지만, 형식과 주제 면에서 동시대 유럽 모더니즘 영화들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많다. 특히 자주 거론되는 비교 대상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와 로베르 브레송이다. 이만희 감독이 직접 이들의 영향을 언급한 바는 없지만, 작품을 분석해보면 흥미로운 공통점들이 드러난다. 먼저 안토니오니와의 비교이다. 안토니오니는 <정사>, <밤>, <일식> 등 이른바 ‘소외 삼부작’을 통해 현대 도시인의 고독과 소통 단절을 탁월하게 그려낸 이탈리아 거장이다. 그의 영화에서 줄거리의 빈약함, 인물 내면의 소외, 도시 풍경의 강조, 느린 호흡의 롱테이크 등은 <휴일>과 놀랍도록 유사한 미학을 공유한다. 실제로 해외 평론가들은 <휴일>의 공간적/심리적 탐구가 안토니오니의 <일식>를 연상시킨다고 평가한다. 두 감독 모두 이야기 전개보다는 인물과 주변 환경의 관계에 천착한다. <휴일>에서 허욱과 지연이 도시라는 거대한 배경 속에 길을 잃고 방황하는 모습은, <일식>에서 비토리아(모니카 비티 분)가 로마의 새벽 거리를 헤매는 이미지와 겹쳐 보인다. 안토니오니는 특히 건축물이나 자연물과 인물을 함께 프레임에 담아 인간의 소외감을 시각화하는데, 이만희 역시 남산 공원, 병원, 다리 등 도시 공간 속에 인물을 작게 위치시킴으로써 비슷한 효과를 낸다. 또한 <휴일>은 대사나 설명을 절제하고 정황을 직접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화면에 적극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도록 유도하는데, 이 또한 안토니오니 영화가 즐겨 사용하는 기법이다. 가령 <휴일>에서 두 주인공의 과거사는 거의 나오지 않지만, 마지막에 잠깐 비치는 행복했던 기억의 몽타주를 통해 그 공백을 관객이 메우게 한다. 이처럼 불친절한 서사와 이미지 중심의 심리 묘사는 안토니오니 영화의 전형적 특징이며, <휴일> 역시 그런 모더니즘적 영화의 계보에 속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 한 해외 리뷰에서는 “<휴일>은 인물과 주변 풍경의 공간관계를 현대적으로 응시함으로써 안토니오니를 떠올리게 한다”고 평했을 정도다. 다음으로 브레송과의 비교를 들 수 있다. 로베르 브레송은 프랑스 영화감독으로, <당나귀 발타자르>, <무쉐뜨> 등의 작품에서 극한의 미니멀리즘과 영혼의 구원 문제를 다룬 바 있다. 브레송 영화의 미학은 비전문 배우 기용, 건조한 연기, 사건의 생략과 반복, 사소한 행위의 부각 등을 특징으로 한다. <휴일>은 겉보기엔 멜로드라마 같지만, 감정의 억제와 행위의 묘사 측면에서 브레송과 상통하는 구석이 있다. 이만희는 배우들에게 절제된 연기를 끌어냈고, 관객의 감정을 고양시키는 음악이나 극적인 대사 대신 동작과 사물의 이미지에 주목한다. 예컨대 허욱이 담배를 얻고 불을 붙이는 일련의 행위, 지연이 벤치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신발을 보고 손을 모으는 사소한 몸짓 등이 클로즈업이나 삽화적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일상 행위의 세부 묘사는 브레송 영화가 사물과 몸짓을 통해 은밀한 정신성을 드러내는 방식과 닮아 있다. 실제로 한 해외 평자는 <휴일>을 두고 “대사나 내러티브보다 구도와 미장센으로 절망과 무기력을 표현한 작품”이라 평했는데, 이는 마치 브레송의 영화철학을 언급한 듯한 말이기도 하다. 다만 결정적으로 <휴일>과 브레송 영화가 갈라지는 지점은 구원의 유무다. 브레송의 주인공들이 비극 속에서도 어떤 영적 구원이나 초월의 순간을 맞이하는 데 비해, 허욱과 지연에게 그런 순간은 찾아오지 않는다. <휴일>은 끝내 아무도 구원받지 못하는 비극의 완결을 보여주며, 어쩌면 브레송이 추구한 은총의 가능성마저 부정하는 듯하다. 이런 점에서 <휴일>은 브레송적 미학을 닮았으되 훨씬 냉혹한 세계관을 담고 있다고 하겠다. 또 다른 흥미로운 비교로, <휴일>은 때때로 프랑스 알랭 레네의 <지난해 마리엔바드에서>나 아녜스 바르다의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 페데리코 펠리니의 몇몇 영화들을 떠올리게 한다는 평도 있다. 이는 <휴일>이 당대 유럽 예술영화들의 몽환적 분위기, 시간 실험, 주관적 심리표현 등을 상당 부분 공유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만희 감독은 이런 요소들을 한국적 현실 토양 위에서 재창조했다. 그는 검열과 상업적 압력 속에서도 외국 영화 흉내 내기에 그치지 않고, 자신만의 언어로 모더니즘 영화의 가능성을 열어 보였다. 이러한 국제적 감수성의 접목은 훗날 <휴일>이 국내뿐 아니라 해외 평단에서 재조명받는 계기가 되었다. 요컨대 <휴일>은 1960년대 한국영화임에도 시대에 앞선 현대성을 보여주며, 세계 영화사의 흐름 속에서도 충분히 대화 가능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만희의 <휴일>은 한 남녀의 암울한 하루를 통해 삶의 부조리와 인간 실존의 어두운 측면을 깊이 파고든 걸작이다. 영화는 당시 한국사회의 가난과 억압이라는 구체적 현실을 배경에 두면서도, 그것을 보편적인 인간 조건의 문제로 승화시킨다. 허욱과 지연의 고통은 60년대 한국 청년들의 좌절인 동시에,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청춘의 비가로 읽힌다. 무엇보다 <휴일>의 위대함은 그 영화언어적 성취에 있다. 검열의 눈을 피해 노골적 사회비판을 삼가야 했던 상황에서, 이만희는 기지 넘치는 우회와 상징, 그리고 과감한 미학적 실험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해냈다. 직접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이미지와 소리, 편집의 리듬 속에 녹여내었고, 그 결과 관객은 말로 설명되지 않은 진실을 심층적 차원에서 느끼게 된다. 이처럼 영화언어가 곧 내용이 되는 지점에서 <휴일>의 진가가 발휘된다. 한편 <휴일>은 한국영화사적으로도 의미심장한 위치를 차지한다. 1960년대 후반, 산업적 영화 시스템과 검열 제도에 맞선 작가주의 영화의 가능성을 보여준 선구적인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만희는 이 영화로 인해 당대 권력과 마찰을 빚었고, 결국 상영 금지라는 처분을 받았으나, 그의 창의적 열망은 후대에 가서 빛을 발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재발견된 <휴일>은 오늘날 많은 영화인과 관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한국 고전영화의 수준을 재인식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2016년의 한 연구에서는 이만희의 <돌아오지 않는 해병>과 <휴일>을 분석하며, 그가 당대에 사회적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기법을 결합하여 인간 조건을 탐구함으로써, 당대의 프로파간다 영화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한다. 이는 곧 <휴일>이 품은 미학적 가치가 시대를 앞선 것임을 뒷받침해준다. 마지막으로, <휴일>이 관객에게 남기는 여운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는 한 편의 스캔들 드라마로 소비되기보다, 보고 난 뒤 오래도록 씁쓸한 질문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작품이다. 우리는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도 자꾸만 자문하게 된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희망은 정말 없는 것인가? 사랑은 구원이 될 수 없는가? 영화는 이에 대해 어떤 단정도 내리지 않는다. 대신 관객이 스스로 현실의 부조리와 마주하게 방치한다. 이는 어찌 보면 잔인하지만, 동시에 진실되다. <휴일>은 완결되지 않은 휴일로 끝나지만, 그 미완의 끝맺음이야말로 우리의 삶 또한 늘 그렇듯 명확한 결말이 없음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면에서 <휴일>은 철학적 성찰의 여지를 남긴 영화적 시라 할 만하다. 결론적으로, 이만희의 <휴일>은 시대의 한계를 정면 돌파한 작품이자, 영화 예술의 가능성을 과감히 확장한 실험이다. 카메라, 편집, 소리, 배우의 몸짓 등 영화의 모든 요소를 동원해 절망이라는 난제를 미적으로 형상화한 이 작품은, 지금 다시 보아도 충분히 현대적이고 세계적이다. 비록 만들어진 지 반세기가 넘었지만, 그 속에 담긴 인간에 대한 통찰과 영화적 아름다움은 조금도 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늘날의 관객에게 더 깊은 울림을 주는 면도 있다. 왜냐하면 영화가 던지는 물음 – “인간은 왜 이렇게 고독한가? 무엇이 우리를 구원할 것인가?” – 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휴일>은 우리에게 답을 주지 않지만, 정직하게 응시하는 법을 가르쳐준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위대한 영화가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역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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