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의 랑슬롯>은 프랑스 거장 로베르 브레송의 만년기에 속하는 작품으로, 중세 아서왕 전설을 브레송 특유의 미니멀리즘 영화 언어로 재해석한 영화이다. 브레송은 1950~60년대에 이미 <시골 사제의 일기>, <소매치기>, <무셰트> 등으로 독자적인 영화 미학을 확립한 인물이며, 절제된 형식주의와 영적 주제를 결합한 작가로 유명하다. 1970년대 중반 브레송은 70대의 나이로 이 영화를 만들었는데, 사실 그는 1950년대 후반부터 아서왕의 성배 전설을 영화화하고자 오랫동안 구상해왔다고 한다. 자금 문제로 미뤄오던 이 프로젝트는 마침내 실현되었고, 브레송은 촬영 당시 제목을 ‘성배’로 정했으나, 제작사의 권유로 최종 제목이 <호수의 랑슬롯>으로 변경되었다고 전해진다. 제목이 암시하듯 이 영화는 원탁의 기사 랑슬롯과 여왕 귀느비르의 관계를 중심으로, 성배 원정 실패 후 몰락해가는 카멜롯의 마지막 모습을 그린다. 브레송은 아마추어 배우들로 캐스팅하고 마법사 멀린이나 호수의 요정 같은 판타지 요소를 모두 배제함으로써, 중세 로맨스를 철저히 탈신화화하였다. 실제로 영화적 글쓰기를 추구한 브레송의 완숙한 기법은 이 작품에서 정점에 달하는데, 이는 30여 년간 연마해온 영화 언어의 완성으로 평가되며, 화면의 모든 요소—인물의 얼굴부터 말 울음소리나 갑옷의 쇠소리까지—가 치밀하게 기능하는 일종의 언어로서 활용된다. 그만큼 형식에 있어 타협이 없는 이 영화는 “미학적 순수성”이 두드러져 시간을 초월한 작품성을 지녔지만, 한편으로는 일반 관객의 취향에는 맞지 않을 수도 있는 비타협적 비전으로 묘사되곤 했다. 실제로 1974년 칸 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인 후 평단 반응은 엇갈렸는데, 뉴욕타임스의 빈센트 캔비는 겉으로 보이는 디테일에 정신이 팔려 정작 내적 의미가 부재하다고 혹평하며 브레송 자신의 스타일을 자기 패러디한 것 같다는 반응을 보였다. 반면 타임아웃 런던은 “눈부시게 아름답고 매혹적이며 소진될 만큼 고양되고 놀라운, 걸작에서 기대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 극찬했고, 영국 사이트앤사운드의 평론가 크리스 다크는 이 영화가 “브레송은 결코 나빠질 수 없음을 증명하는 독보적 비전”이라며, 고다르의 말을 빌려 ‘세계에 대한 하나의 관념을 영화에 적용한 것, 혹은 영화에 대한 하나의 관념을 세계에 적용한 것의 전형적 구현’이라고 평했다. 이렇게 상반된 평가에도 불구하고, <호수의 랑슬롯>은 시간이 흐를수록 재조명되어 오늘날에는 브레송 영화 세계의 정수를 보여주는 걸작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영화의 이야기는 성배 탐색이 좌절된 직후부터 시작된다. 카멜롯의 기사들은 성배를 찾아 떠났다가 대부분 전멸하고, 아서 왕과 얼마 남지 않은 기사들만 돌아온다. 브레송은 이 신화의 끝자락을 배경으로 삼아, 고귀한 기사도 로망스의 환상이 무너진 뒤의 황폐한 풍경을 그린다. 오프닝 시퀀스부터 관객은 충격적인 전쟁의 참상과 맞닥뜨린다. 어두운 숲 속에서 철갑에 가려 신원을 알 수 없는 기사 둘이 칼을 맞대고 처절하게 싸우고, 곧 한 기사의 목이 검에 잘려나가면서 붉은 피가 뿜어져 나온다. 이 장면은 브레송 영화치고는 이례적일 만큼 노골적인 유혈 묘사로 악명높은데, 피투성이 시체들과 잘려나간 사지를 여과 없이 포착함으로써 기사도 세계의 폭력성과 무명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카메라는 곧 이어 시체가 된 기사들의 더미 위로 쓰러지는 랑슬롯을 비추는데, 쇠사슬 갑옷에 가려 얼굴조차 뚜렷이 보이지 않는 그의 모습에서 인간이라기보다 부품처럼 흩어진 철붙이의 소리만이 울려 퍼진다. 그 순간 랑슬롯의 입에서 가까스로 흘러나온 “귀느비르…”라는 마지막 한 마디와 잘려나간 목에서 흐르는 피만이, 이들이 기계가 아닌 살아있는 인간이었음을 상기시켜준다. 브레송은 이렇게 영화의 처음과 끝을 피비린내 나는 전투 장면으로 감싸면서, “전쟁이란 익명으로 벌어지는 무의미한 학살”임을 강조한다. 사실상 호수의 랑슬롯에서 기사들의 싸움은 명예도 영광도 없는 철갑 유령들의 싸움이며, 갑옷을 두른 순간 그들은 이미 얼굴 없는 죽음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이야기의 중심은 랑슬롯과 귀느비르의 은밀한 사랑과 그로 인한 왕국의 파국이다. 성배 원정을 떠났던 랑슬롯 경은 원정 실패 후 부상 입은 채 카멜롯으로 돌아오지만, 자신이 자리를 비운 동안 연인 귀느비르에 대한 죄책감과 왕에 대한 충성심 사이에서 갈등한다. 랑슬롯은 더 이상 관계를 지속할 수 없다며 귀느비르에게 파국을 예감한 이별을 통보하지만, 귀느비르는 완강히 거부한다. 귀느비르는 랑슬롯에게 “당신들이 원했던 것은 성배가 아니라 하느님이었어. 하느님은 집에 가져올 트로피가 아니야”라고 일갈하며, 기사들이 신의 뜻이 아닌 자신들의 욕망을 추구했음을 꼬집는다. 실제로 브레송은 영화 도입부에 노파의 예언 장면을 배치하여 이러한 운명을 암시한다. 숲 속 오두막에서 노파가 어린 소녀에게 “눈에 보이기 전에 발소리가 들리는 이는 1년 안에 죽게 되지”라는 섬뜩한 예언을 들려주고, 이 대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온다. 이내 탈진한 말 한 필이 화면에 나타나고, 마침내 성배 원정의 실패를 알리듯 지친 기사들이 등장한다. 이 짧은 시퀀스는 영화 전체의 운명론적 분위기를 설정한다. “들을 귀 있는 자”에게 벌써 파멸의 예고가 울린 셈이며, 실제로 랑슬롯 이하 기사들은 결국 예언대로 하나씩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또한 이 장면은 소리가 이미지에 선행하는 브레송의 독특한 편집 미학을 보여주는데, 인물보다 말의 등장과 울음이 먼저 강조되면서 말과 인간의 운명이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이후 영화 곳곳에서 말의 울음소리나 말의 모습이 기사들의 대화와 교차하며 등장하는데, 특히 랑슬롯의 말이 죽는 순간 랑슬롯 본인도 최후를 맞이하는 등 인간과 말의 생사가 연결되어 나타난다. 이는 브레송이 “인간과 자연이 함께 심판받는다”는 일종의 형이상학적 심판의 이미지를 표현한 것으로 해석되며, 전설적 영웅담이 아니라 생명들의 파괴가 이 영화의 숨은 주제임을 시사한다. 한편, 카멜롯 궁전 내부에서는 음모와 불신이 깔끔하게 생략된 대사 속에 묘사된다. 원정을 실패한 기사들은 신의 가호를 잃은 것에 절망하며 “하느님이 우리를 버리셨다”는 탄식을 내뱉지만, 정작 자신들이 먼저 신앙을 저버린 자들임은 깨닫지 못한다. 왕 아서 역시 하느님의 침묵 속에 우왕좌왕하며, 원탁 회의는 유명무실해진 상태다. 그런 가운데 모드레드는 랑슬롯과 귀느비르의 밀회를 의심하여 뒤를 캐고, 결국 둘의 비밀 만남 장소에서 증거를 찾아낸다. 브레송은 이 은밀한 사랑 장면조차도 겉으로는 절제하여 묘사하면서 미세한 디테일로 감정을 드러낸다. 예컨대 랑슬롯과 귀느비르가 몰래 만나는 헛간 다락 신에서, 먼지 쌓인 건초더미 틈으로 들어오는 한 줄기 빛과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교차 편집되어 나온다. 브레송은 뜨겁게 포옹하거나 격정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대신, 까마귀라는 불길한 자연의 소리를 삽입함으로써 두 사람의 애정 뒤편에 도사리는 파국의 그림자를 암시한다. 또한 귀느비르의 창문에 비치는 불빛, 랑슬롯이 그 빛을 올려다보는 숏 등의 반복 모티프를 통해 두 사람의 연결을 암호처럼 제시한다. 이러한 연출은 마치 현대시의 반복법처럼 이미지와 소리를 반복·변주하여 하나의 정서적 태피스트리를 짜 나가는 효과를 낳는다. 실제로 평론가 조너선 로즌봄은 브레송이 커밍스의 시에 비유되는 반복과 응시의 기법으로 영화 전체를 짰다고 분석한다. 영화의 백미로 꼽히는 중반부의 마상 토너먼트 시퀀스는 브레송의 형식미가 극대화된 장면이다. 줄거리상 랑슬롯은 귀느비르와 밀회를 위해 이 토너먼트에 불참하려 하나, 의무를 저버릴 수 없어 변장하고 대회에 출전한다. 하얀 방패를 든 정체불명의 기사로 나타난 랑슬롯은 연전연승하지만, 끝내 부상을 입고 사라진다. 이 간단한 사건을 브레송은 놀랍도록 독창적인 몽타주로 표현했다. 일반 영화라면 화려한 군중, 말 달리는 전경, 창이 부딪치는 클로즈업 등으로 박진감을 높였겠지만, 브레송은 의도적으로 직접적인 쾌감을 제거한다. 대신 깃발이 흔들리는 모습, 군중의 함성 소리, 나팔 부는 악사들의 손, 말굽의 질주하는 다리, 떨어지는 기사의 하반신 등 단편적 이미지들을 리듬감 있게 배열하여, 마치 추상 영화 같은 인상을 준다. 창과 방패가 부딪치는 순간의 임팩트조차 브레송은 일부러 몇 차례 보여주지 않고 소리만 들려주다가, 관객이 거의 포기할 즈음에서야 한 번 짧게 보여준다. 이러한 지연과 생략 덕분에 충돌의 순간은 오히려 예상치 못한 폭발력을 얻는다. 사운드 디자인 역시 이 시퀀스의 핵심인데, 북소리와 백파이프가 간간이 울려 퍼지고, 창날이 방패를 강타하는 소리와 군중의 함성이 교직되어 실제 화면 이상의 긴장감을 자아낸다. 시각적 정보가 제한되니 관객은 청각을 총동원하게 되고, 소리로 먼저 결과를 예감한 뒤 이미지로 확인하는 독특한 시간차 긴장감을 맛보게 된다. 평론가 크리스 다크는 이 장면을 가리켜 “기사들의 무릎 아래만 보이는 이 토너먼트 몽타주는 브레송 영화 세계의 정수를 보여주는 순간”이라 평하며, 시각과 청각이 진정으로 상호작용하는 영화적 체험이라고 극찬했다. 결과적으로 브레송은 이 토너먼트 시퀀스를 통해 액션의 클라이맥스조차 비가시적인 것으로 치환하는 실험에 성공했고, 관객은 사운드와 편집의 리듬을 통해 전통적 활극과는 차원이 다른 매혹을 경험하게 된다. 토너먼트 이후 랑슬롯은 부상의 여파로 자취를 감춘다. 친구 가벤 등의 수색에도 그는 발견되지 않고, 모두 랑슬롯이 죽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랑슬롯은 멀리 에스칼롯 마을의 노파에게 구조되어 상처를 치료한다. 브레송은 이 탈출과 은신 과정도 거의 보여주지 않고 생략으로 처리한다. 관객은 그저 노파의 오두막에 누워있는 랑슬롯의 모습을 보고서야 그가 살아있음을 알게 된다. 이처럼 핵심 사건을 화면 밖에 둔 채 결과만 제시하는 방식은 브레송 영화의 전형적인 내러티브 전략이다. 중요한 일이 벌어져도 화면에 직접 비추지 않고, 파편적 단서와 여운만 남겨두어 관객이 상상으로 메우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이후 전개될 구출과 전쟁 장면에서도 일관된다. 귀느비르와 랑슬롯의 밀회를 폭로한 모드레드는 아서 왕에게 두 사람을 고발하고, 격노한 왕은 귀느비르를 화형에 처하기로 한다. 그러나 처형 직전, 랑슬롯과 그에게 충성하는 기사들이 들이닥쳐 귀느비르를 탈출시키는 데 성공한다. 정작 구출의 클라이맥스도 브레송은 최소한의 묘사로 처리한다. 횃불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병사들의 다급한 발소리가 들리다가, 곧장 랑슬롯 일행이 귀느비르를 데리고 탈출한 후의 장면으로 넘어가는 식이다. 여기서도 액션의 생략과 결과의 제시라는 브레송의 원칙이 확인된다. 영화는 곧바로 랑슬롯이 자신이 지닌 성인 즐거운 호수의 성채로 귀느비르를 모시고 도피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이로써 카멜롯 대 랑슬롯 진영 간의 최후 내전이 벌어지게 된다. 클라이맥스로 향하는 후반부 전투 장면들은 앞서의 오프닝처럼 비극과 허무의 색채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아서 왕은 모드레드의 참언에 휘둘려 직접 군대를 이끌고 랑슬롯의 성을 포위한다. 쌍방의 전투 과정에서 유능한 기사들도 하나둘씩 쓰러지는데, 특히 가벤은 중상을 입고 랑슬롯에 대한 우정을 고백하며 눈을 감는다. 브레송은 가벤과 랑슬롯의 마지막 대면조차 담담히 그리는데, 가벤은 “우리는 구하려 했지만 오직 랑슬롯 당신만이 귀느비르를 구했소”라는 말을 남기고 죽어간다. 이는 랑슬롯의 사랑이 정당했다는 늙은 기사도의 자기 위안처럼 들리지만, 이미 귀느비르 본인은 너무 많은 피가 희생되었음을 통탄하며 자신을 다시 왕에게 돌려보내 달라 랑슬롯에게 요청한다. 결국 랑슬롯은 사랑의 포기를 결심하고 귀느비르를 아서에게 돌려주는데, 이때 귀느비르는 랑슬롯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며 둘의 사랑이 가져온 비극에 오열한다. 브레송은 이 이별 장면에서조차 격한 감정을 절제하며, 두 사람이 말을 타고 헤어지는 먼 숏으로 처리한다. 화면 바깥에서 울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멀어지는 귀느비르의 흰 장식이 마치 상여처럼 보이는 쇼트는 사랑의 종말을 암시하며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영화의 대미는 랑슬롯 일행과 모드레드 일당의 최후 전투로 장식된다. 이 전투는 이야기상 원탁의 기사 시대의 완전한 종언을 의미하는데, 브레송은 이를 더욱 암울하고 아이러니하게 묘사한다. 밤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녘 어두운 숲에서 양 진영의 기사들이 마지막 결전을 벌이는 장면에서, 브레송은 또다시 보이지 않는 것들로 긴박함을 표현한다. 활시위 당기는 소리와 함께 화살 비 내리는 음향이 들리지만, 실제 화면에는 화살이 사람이 아닌 나무를 꿰뚫는 모습이 반복해서 나타난다. 이는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상징적 이미지로, 인간이 나무를 깎아 만든 무기로 서로를 파괴하는 자기파멸의 행위를 암시한다. 브레송은 반복적으로 나무에 꽂힌 화살을 비추며, 기사들의 폭력이 결국 자연과 자신을 함께 파괴하고 있음을 시각화한 것이다. 그 와중에 랑슬롯은 적의 화살에 말이 죽고 자신도 치명상을 입는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투구 속에서 신음하던 랑슬롯은 비틀거리며 나무에 기대더니 마지막 힘으로 투구를 벗고는, 피투성이 얼굴로 “귀느비르!”를 외치며 쓰러진다. 그가 숨이 끊어지는 순간, 머리 위로 시커먼 까마귀 한 마리가 싸아 하니 날아오르고, 멀리 여명이 밝아오는 하늘이 보인다. 까마귀는 영화에서 여러 차례 등장한 불길한 징조로, 이 마지막 장면에서도 어김없이 죽음의 전령 역할을 한다. 랑슬롯의 시선이 따라가는 하늘 위의 까마귀는 전쟁터 위를 맴도는 죽음의 그림자이자, 왕국의 종언을 목도하는 증인처럼 보인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한 줄기 새벽빛이 비추며 화면이 서서히 밝아오는 가운데, <호수의 랑슬롯>은 쓸쓸하게 막을 내린다. 이렇듯 영화는 고결한 기사 랑슬롯의 로맨스조차 피로 얼룩진 파국으로 귀결지으며, 중세 로망스의 신화를 산산조각 낸다. 브레송은 엔딩 크레딧조차 절제된 흑백 자막으로 처리하면서, 이 이야기가 전설이 아니라 하나의 숙명적 기록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호수의 랑슬롯>은 형식의 철저한 통제를 통해 주제를 표현하는 브레송의 기법이 총망라된 작품이다. 우선 시각적 연출 면에서, 브레송은 전통적인 서사영화의 문법을 의도적으로 거부한다. 카메라는 화려한 전경이나 스펙터클 대신 부분과 단서에 집착한다. 인물 전신을 비추기보다는 손과 발, 갑옷의 일부분, 말의 움직임 등 단편적 이미지의 나열을 통해 장면을 구성하는데, 이러한 프레이밍은 관객으로 하여금 전체를 유추하도록 만드는 브레송 특유의 “여백의 미학”이다. 갑옷과 투구로 중무장한 기사들은 화면에서 종종 얼굴이 생략되는데, 이는 그들의 개성과 심리를 배제하고 몸짓과 행위 자체만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실제로 브레송은 “가능한 한 이미지 대신 소리로 대체하라”는 원칙을 가졌고, “이미지는 평평하고 비표현적일수록 서로 결합될 때 더 큰 의미를 낳는다”고 강조했다. <호수의 랑슬롯>에서 이러한 원칙은 극단까지 밀고 나가져, 화면에 담긴 이미지 하나하나가 필요 최소한의 정보만을 전달한다. 가령 어두운 숲에서 기사들이 대치하는 장면이라면, 검과 검이 부딪치는 스파크와 금속음, 땅에 떨어지는 발소리 정도만 보여주고 나머지 맥락은 소리와 관객의 상상에 맡기는 식이다. 지극히 낯선 앵글과 생략된 동작으로 점철된 이러한 영상들은 자칫 난해해 보일 수 있으나, 그것들이 엮여 빚어내는 관계 속에서 의미가 발생한다는 점에서 몽타주의 순수한 형태라 할 수 있다. 브레송은 개별 이미지보다는 이미지들 사이의 연결에 주목하였고, 이를 통해 관객이 직접 의미를 생성하게 유도한다. 이는 에이젠슈테인의 지적 몽타주와도 통하지만, 브레송의 방식은 보다 은밀하고 절제된 형태다. 그는 “회화에서처럼 겉표면을 생각하라”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말을 인용하며, 영화의 표면(이미지와 소리) 자체를 정직하게 배열하면 그 이면의 진실은 저절로 드러난다는 내재성의 미학을 주장했다. 그런 의미에서 브레송의 영화는 종종 신비에 대해 말하지만, 그 도달 방식은 어디까지나 구체적 현실(표면)에 충실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촬영과 미장센 측면에서, 브레송은 극단적으로 사실적인 질감과 추상적인 구성을 병행한다. <호수의 랑슬롯>의 촬영감독은 이탈리아의 파스퀄리노 데 산티스로, 비스콘티의 영화를 촬영한 거장이다. 하지만 브레송은 그의 화려한 스타일을 최대한 절제하여, 일부 장면을 거의 암흑에 가깝게 찍을 정도로 자연광과 어둠을 활용했다. 예를 들어 숲 속 전투 장면들은 짙은 어둠 속에서 갑옷의 미세한 빛반사와 불꽃 튀는 금속광만이 보일 뿐인데, 이러한 극단적 명암 대비는 이미지를 단순화하여 소리와 움직임에 집중하게 한다. 반대로 햇빛 아래 벌어진 장면에서도 브레송은 의외로 평면적이고 밋밋한 구도를 선호한다. 그는 “이미지가 평평할수록 다른 이미지와 맞닿을 때 잘 변형된다”고 말한 바 있는데, 이를 위해 깊이감이나 원근을 약화시킨 평면적 숏들을 즐겨 사용한다. 또한 앵글의 선택도 매우 독특하다. 인물을 정면에서 보여주는 법이 거의 없고, 무릎 아래만 보이게 찍거나, 갑옷 너머로 어슴푸레 보이는 실루엣 등 비정형적 구도가 많다. 이러한 미장센은 관객의 감정 이입을 방해하고 관찰자적 시선을 유지시키는데, 그 결과 영화는 일종의 인류학적 기록이나 의식의 관찰처럼 느껴지게 된다. 가령 투구의 면갑을 내리는 동작을 클로즈업할 때, 브레송은 이를 관객의 쾌감을 위해 제시하지 않고 의례적 제스처로 보여준다. 최후의 출전에 나서는 기사들이 하나씩 투구의 면갑을 닫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연달아 얼굴이 사라지는 순간을 포착한다. 이는 전투에 임하며 개인을 지우는 의식이자, 곧 모든 기사들이 죽음으로 획일화될 것임을 암시한다. 실제로 이 면갑 닫는 장면 이후 브레송은 어느 누구의 얼굴도 다시 보여주지 않은 채 집단 전멸의 결말로 돌진한다. 이렇듯 의미를 담은 동작 하나하나를 미장센으로 부각시키는 솜씨는 브레송의 트레이드마크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대조의 미학이다. 브레송은 끊임없이 살과 철, 유기체와 무기물의 대비를 화면에 심어놓는다. 예컨대 반짝이는 갑옷의 메탈릭한 질감과 귀느비르의 나신에 가까운 피부가 교차되도록 배치함으로써, 딱딱한 갑옷에 둘러싸인 기사들 사이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살결이 한층 더 연약하고 우아해 보이게 만든다. 귀느비르가 욕조에서 목욕하는 장면에서 그녀의 나신이 한순간 등장하는데, 이는 성적으로 노골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갑옷들과 시각적으로 극명한 대조를 이뤄 인간 육체의 덧없음과 고귀함을 동시에 환기시킨다. 그 순간 귀느비르의 살갗을 스치는 빛과, 이어지는 장면에서 투구 너머로 보이는 흐릿한 눈동자 등의 이미지는, 살과 쇠 사이의 긴장과 아이러니를 잘 보여준다. 전장에서 울려 퍼지는 갑옷의 요란한 소음은 이러한 대비 효과를 더욱 강화하는데, 쇳소리가 클수록 인물들의 작고 여린 숨소리나 말소리가 도리어 선명하게 떠오르는 역설적 효과를 낳는다. 결국 이러한 시각적 연출을 통해 브레송은 살육의 세계에서 인간다움은 어떻게 포착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브레송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사운드 디자인과 편집 리듬이다. <호수의 랑슬롯>은 소리의 활용에 있어 특히 혁신적이다. 감독 본인이 “이미지를 소리로 대체하라”고 말했듯이, 이 영화는 중요한 순간에 화면 대신 소리를 먼저 들려준다. 말발굽 소리, 칼이 빠지는 소리,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소리, 활 시위 당기는 소리 등 청각적 요소들이 관객의 상상 속에서 영상을 만들어낸다. 실제로 브레송은 이 영화의 음향 작업에 남다른 공을 들여, 3주 반에 걸쳐 믹싱을 완료했다고 한다. 그는 사운드를 회화의 색채처럼 팔레트 위에 배치하듯이 정교하게 구성했는데, 북과 백파이프의 간헐적 사용, 깃발이 펄럭이는 소리, 빗물이 떨어지고 모닥불이 타는 소리 등까지 모두 고도로 계산된 오케스트레이션을 이룬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갑옷의 절그럭거리는 금속음이다. 브레송은 기사들의 갑옷 소리를 끊임없이 배경에 깔아 두어, 관객으로 하여금 쇳소리의 리듬 속에서 이야기를 듣게 만든다. 심지어 그는 작업 중에 “말이 재갈을 씹는 소리”가 필요하자, 적당한 녹음이 없어서 직접 자신의 치아로 재갈을 씹는 소리를 내 녹음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이 에피소드는 그의 집요한 섬세함을 잘 보여주며, 평론가들은 이러한 면에서 브레송을 음향의 거장 자크 타티와 비교하기도 한다. 음향 공간의 설계에 있어서 브레송은 2채널 원칙을 고수했는데, 한 순간에 두 종류 이상의 소리가 겹치지 않도록 극도로 절제했다고 한다. 덕분에 이 영화에서는 대사와 배경음, 음악과 효과음이 철저히 분리되어, 언제나 주된 소리와 보조 소리 단 두 가지만이 분명하게 들린다. 그 결과, 관객은 특정 소리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고, 작은 소리의 변화에도 민감해진다. 예컨대 에스칼롯 노파의 오두막 장면에서, 화면에는 보이지 않는 모닥불의 존재를 우리는 타닥이는 불소리로 먼저 알아차린다. 또 토너먼트 장면에서 관중의 함성은 들리나 관중의 모습은 거의 비치지 않고, 창과 갑옷의 충돌음이 들린 뒤에야 말에서 떨어진 기사들을 보여주는 식으로, 소리가 항상 이미지를 앞서 주도한다. 심지어 평소 스릴러적 긴장감을 배제하는 데 능했던 브레송이지만, 이 장면만큼은 사운드 연출을 통해 히치콕 영화 못지않은 서스펜스를 창조해냈다는 평까지 있다. 이렇게 철저히 구성된 음향 세계 속에서 침묵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갑옷 소리가 멎고, 말의 울음이 사라지고, 인물의 대사마저 끊기는 순간이 오면 오히려 강렬한 정적이 관객을 사로잡는다. 이러한 소리와 침묵의 대비는 마치 음악에서 쉼표와 같아서, 앞뒤 소리의 의미를 더욱 부각시킨다. 예를 들어 랑슬롯 최후의 순간, 온통 쇳소리와 비명으로 가득했던 전장 한복판에 랑슬롯이 쓰러지며 잠깐 적막이 흐른다. 그리고 귀를 찢던 소음이 사라진 가운데 랑슬롯의 마지막 숨결로 터져 나온 “귀느비르!”라는 외침이 울려 퍼진다. 이때 그 한 단어는 관객의 가슴에 거의 촉각적으로 와닿는데, 이는 앞선 소음들이 일종의 울림판이 되어 그 말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로즌봄은 이러한 부분을 두고 “격정적 감정의 부재가 오히려 하나의 울림판이 되어 단어들을 울려퍼지게 만든다”고 설명하며, 브레송의 대사 톤이 비록 단조롭고 감정이 배제된 듯 들려도 맥락 속에서 엄청난 울림을 갖게 된다고 분석했다. 브레송은 배우 연기에 있어서도 기존 극영화 문법을 거부하고 독자적 스타일을 구축했다. 그의 배우는 연기자가 아니라 “모델”이라고 불리며, 전문 배우가 아닌 비직업인을 기용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호수의 랑슬롯>에서도 모든 출연진은 당시 거의 무명인 혹은 첫 연기 도전인 아마추어들로 채워졌다. 브레송은 이들에게 여러 차례 반복 촬영을 통해 감정 표현을 완전히 제거한 건조한 발성을 요구했다. 그 결과 배우들은 마치 기계적으로 대사를 낭독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런 무표정한 연기가 처음 접하는 관객에게는 매우 낯설게 다가온다. 그러나 브레송은 이를 통해 배우 개인의 연기 스타일이나 감정과잉을 배제하고, 관객이 인물보다 행위 자체에 집중하도록 의도했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 기사들은 친구의 죽음이나 연인의 배신 앞에서도 격렬하게 울부짖거나 분노하지 않는다. 랑슬롯과 귀느비르의 밀회 장면에서도 둘은 담담히 속삭일 뿐 격정적인 애정 표현을 삼가고, 이별을 결심하는 대목에서도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는다. 대신 귀느비르가 랑슬롯에게 던지는 대사—“당신은 살아 있고, 여기 있어요. 이제 다시는 어떤 것도 우리를 갈라놓지 못할 거예요” 같은 말들—가 차분한 어조로 흘러나올 때, 관객은 그 언어 자체에 집중하게 된다. 브레송의 세계에서 언어는 줄거리 전달보다는 주제 전달의 도구로 기능한다. 앞서 언급했듯 귀느비르가 “하느님은 트로피가 아니다”라는 대사를 통해 영화의 신학적 메시지를 던지듯이, 인물들의 말은 일종의 작가의 화두를 대변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감정이 배제된 평탄한 톤은 그 말들을 격언이나 성서 구절처럼 울려퍼지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브레송은 배우들의 감정을 찍어내기보다는, 그들을 통해 몸짓과 목소리라는 소재를 다루는 장인에 가깝다. 한 평론은 브레송의 배우 연기를 두고 “겉으론 무표정하지만, 소리와 침묵의 총체 속에서 강한 의미와 효과를 발산한다”고 평했다. 특히 이 영화에서 투구를 쓰고 면갑을 연 채 대사하는 장면들은 흥미로운데, 기사들이 말을 할 때마다 면갑을 번갈아 들어올리고 내리는 동작이 마치 소극의 막을 올리고 내리는 행위처럼 보인다. 로즌봄은 이를 “마치 대사가 나올 때마다 막이 오르지만, 그 뒤엔 또 다른 빈 표면만 드러날 뿐”이라고 표현하며, 브레송식 연기의 반연극성을 지적했다. 요컨대 브레송은 배우의 얼굴과 몸을 기표로 활용하여, 그 내부의 심리를 직접 보여주지 않고 외부의 표면을 통해 관객 스스로 의미를 해석하게 만든다. 이러한 연기 방식은 관객에게 거리두기 효과를 일으켜, 이야기를 감정적으로 소비하기보다는 성찰적 태도로 바라보게끔 한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 일부 관객에겐 인물들이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느껴져 감정 이입이 어렵다는 반응을 낳기도 했다. 하지만 브레송은 대중적 감정 이입보다는 형이상학적 깨달음을 추구했기에, 이러한 비인습적 연기와 연출이야말로 자신의 영화에서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던 셈이다.
브레송의 <호수의 랑슬롯>은 표면적으로는 중세 기사들의 로맨스와 전쟁 이야기지만, 그 심층에는 도덕적·영적 주제의식이 자리한다. 브레송은 이 영화를 통해 고대 신화에 담긴 가치들을 근본에서부터 재검토하고, 그것이 현대에 주는 의미를 묻는다. 특히 두드러지는 주제는 종교와 폭력의 문제, 그리고 이상주의의 몰락이다. 영화 속 기사들은 성배라는 신성한 목표를 쫓았으나, 정작 그 과정을 통해 신에 대한 겸손을 잃고 오만에 빠졌음을 암시한다. 귀느비르의 대사처럼 그들은 하느님을 트로피 취급했고, 그로 인해 신으로부터 버림받았다. 기사들이 모여 있는 원탁은 이제 텅 빈 의자들과 죽은 이들의 이름만 남은 공허한 껍데기로 제시된다. 영화는 이러한 모습을 통해 이상의 공동체였던 원탁의 기사단이 내부 분열과 인간적 나약함으로 무너져 내리는 과정을 보여준다. 서로 협력해야 할 동료 기사들이 성배 원정 중 서로에게 칼을 겨누고 싸웠다는 귀느비르의 암시는, 외적 적이 아닌 내부의 타락이 가장 큰 파멸의 원인이었음을 시사한다. 이는 브레송이 전통적 영웅 신화를 해체하고 그 이면의 부조리를 폭로하는 부분이다. 브레송의 세계관에는 신학적 뉘앙스가 강하게 드러나는데, 흔히 그를 얀센주의적 작가라고 부르기도 한다. 얀센주의는 인간의 타락과 예정설을 강조하는 가톨릭 사상인데, 이 영화에서도 운명과 은총에 대한 브레송의 냉엄한 시선이 엿보인다. 영화의 도입부 예언처럼, 인물들은 이미 예정된 운명의 궤도를 벗어나지 못한다. 왕은 왕대로, 기사는 기사대로 각자의 역할에 묶여 파국으로 돌진한다. 흥미로운 것은 브레송이 기적이나 구원의 순간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성배도, 성배를 가져올 구세주 기사도 끝내 등장하지 않는다. 한 평론가는 이를 두고 “브레송의 중세는 하느님마저 침묵하는 신의 부재의 시대”라고 평했다. 실제로 영화 속 아서 왕은 “이 텅 빈 성은 신이 우리를 버렸다는 징표인가?”라고 절망하지만, 끝내 그 답을 찾지 못한다. 브레송은 신비한 기적으로 이 난국을 해결하기보다는, 신의 부재가 낳은 인간의 혼돈을 응시한다. 기사들이 신앙을 잃고 폭력에 탐닉하는 모습은 일종의 도덕적 타락으로 묘사되며, 브레송은 이를 철저히 비판적 거리에서 바라본다. 나아가 영화는 폭력 그 자체의 허무함을 정면으로 제시함으로써 반전의 메시지를 내포한다. 얼굴 없는 갑옷들이 난무하는 살육전은, 전쟁이란 것이 결국 인간성을 말소시키는 행위임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마지막에 모두가 죽고 남은 것은 피투성이의 시체들과 까마귀뿐이라는 결말은, 전쟁으로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반전 모럴로 읽힌다. 이는 1970년대 베트남전 등을 겪은 세계사의 분위기와도 맞닿아 있다. 브레송은 중세 이야기를 빌려 전쟁과 폭력의 보편적 부조리를 꼬집은 셈이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 또한 이 작품의 중요한 모티프다. 앞서 언급했듯 브레송은 말, 숲, 나무, 까마귀 등의 자연 요소를 의도적으로 배치하여 인간의 행위를 비춘다. 기사들은 숲을 헤매고, 나무를 깎아 만든 화살로 서로를 죽이며, 죽은 뒤에는 말이 주인 없이 달아나고 까마귀가 시신 위를 맴도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특히 화살과 나무의 이미지가 반복되는 것은, 인간의 폭력이 자연을 파괴하고 결국 자기파멸로 돌아온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말 역시 충직한 동물에서 전쟁의 도구로 쓰이다 끝내 주인과 함께 죽어간다. 이처럼 자연의 질서까지 깨트린 인간의 죄악을 보여주는 방식은, 마치 신이 내린 형벌처럼 묘사된다. 브레송은 영화의 마지막에 자연의 새벽을 배경으로 파국을 묘사함으로써, 인간의 역사는 끝나도 자연의 시간은 계속 흐른다는 냉엄한 시선을 남긴다. 이것은 브레송이 줄곧 관심 가져온 영혼의 구원 문제와 연결된다. 예컨대 그의 초기 작품에서는 비록 인간이 고통받아도 신의 은총으로 영혼이 구원되거나 의미를 찾는 순간이 존재했다. 하지만 <호수의 랑슬롯>에서는 구원의 흔적을 찾기 힘들다. 오히려 이 영화는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의 파멸을 그리고 있다. 이는 브레송 말년의 작품들과 일맥상통하는 비관적 세계관으로, 세상의 타락이 극에 달한 시대에선 개인의 구제조차 어려워진다는 일종의 영적 위기를 드러낸다. 흥미롭게도, 이 영적 위기의 서사에서 귀느비르라는 여성 캐릭터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브레송 영화에서 여성은 종종 영적인 매개자 혹은 희생의 화신으로 묘사되곤 하는데, 귀느비르는 그 자체로 죄의 원인이자 동시에 진실의 목소리를 내는 인물이다. 그녀는 랑슬롯과의 사랑으로 인해 전쟁의 빌미를 제공하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비난받는 팜므파탈은 아니다. 오히려 브레송은 귀느비르의 입을 빌려 기사들의 위선을 폭로하고, 마지막에는 그녀에게 양심의 가책과 속죄의 의지를 부여한다. 귀느비르가 랑슬롯에게 자신을 왕에게 돌려보내라고 말하는 대목은, 더 이상의 피를 막기 위한 희생적 결단으로 읽을 수 있다. 이는 원전의 전설에서 귀느비르가 마지막에 수녀원에 들어가 속죄한다는 모티프와도 통한다. 랑슬롯과 귀느비르의 금지된 사랑은 왕국 몰락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지만, 브레송의 연출에서는 그것이 낭만적으로 미화되지도,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규탄받지도 않는다. 둘의 밀애는 건초더미의 허름한 다락방에서 은밀하고 초라하게 이루어지고, 두 사람의 애정 표현은 육체적 욕망과 영적 교감 사이 어딘가 어색한 지점에 놓여 있다. 어떤 평론가는 브레송이 이 전설을 “기사들의 사소한 감정과 육체성에 초점을 맞춰 해석했다”고 평했는데, 이는 사랑조차도 거창한 로맨스가 아닌 인간적 약함의 표출로 그렸다는 의미일 것이다. 결국 귀느비르와 랑슬롯의 비극은 궁극의 사랑 이야기라기보다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 낀 인간들의 고뇌로 다가온다. 이는 브레송이 관념적 주제를 다루면서도 결코 인간에 대한 연민을 잃지 않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두 사람이 헤어질 때 주고받는 짧은 눈맞춤이나, 랑슬롯이 죽어가며 귀느비르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등은, 무미건조한 연출 속에서도 깊은 비극의 정서를 전달한다. 근대적 맥락에서 보면, <호수의 랑슬롯>은 1960년대의 낭만적 이상주의가 1970년대에 좌절된 상황을 은유한 작품으로 해석될 수 있다. 1968년 혁명 이후 냉소와 회의가 팽배했던 프랑스 사회에서, 브레송은 한 세대 이전의 이상의 추구가 어떻게 좌초되었는지를 중세 전설에 투영했다고 볼 수 있다. 성배를 찾겠다는 원탁 기사들의 서사는 혁명적 이상이나 유토피아 추구에 비견될 수 있지만, 그 결말은 서로 간의 불신과 폭력, 그리고 권력 암투로 무너진다. 이는 이상을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한 운동들의 결말과도 상통한다. 영화에 묘사된 기사단의 모습—내부 고발자의 배신, 지도자의 무능, 동지들의 자기모순—은 현대 사회의 축소판처럼 읽히기도 한다. 실제로 평론가 빈센트 캔비는 이 영화를 두고 “기묘할 정도로 서구 문명의 가치를 진지하게 재검토한 작품”이라 평했는데, 여기서 서구 문명의 가치란 곧 기사도 정신으로 대표되는 이상주의일 것이다. 브레송은 그 이상주의의 허상을 폭로함과 동시에, 새로운 가치의 부재라는 공허를 관객에게 응시하도록 한다. 이는 브레송 본인이 2차대전 후 신앙과 구원 문제를 평생 탐구해온 연장선에 있으며, 말년의 이 작품에서는 한층 엄혹한 결론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한편, 브레송의 철저한 형식주의는 단순히 미학적 실험이 아니라 윤리적·철학적 발언과 맞닿아 있다. 그는 영화 형식 자체로 하나의 도덕적 우화를 빚어낸다. 예컨대 보여주지 않는 것을 통해 겸손과 자기성찰을 강조하는 태도는, 관객으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도록 유도한다. 이는 극중 기사들이 잃어버린 덕목—겸양과 자기반성—을 영화 형식으로 구현한 것이라 볼 수도 있다. 또한 자기반영적 유머도 일부 엿볼 수 있다. 브레송은 전작들에서 동물이나 아이의 시선을 통해 인간사를 관조하곤 했는데, 이 영화에서는 까마귀나 말의 존재가 그러한 역할을 부분적으로 대신한다. 그리고 감독 자신도 어딘가 엉뚱한 유머를 동원하는데, 예컨대 엑스트라처럼 등장하는 이름 없는 인물들이 전투 중에 무심히 바닥의 피를 걸레질하거나 멍하니 앉아있는 모습은 기묘한 블랙 유머를 자아낸다. 이러한 장면들은 일부러 극의 비장함을 깨뜨려 거리두기를 발생시키며, 관객이 사건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보도록 만든다. 이는 브레히트의 소격 효과처럼, 브레송이 관객의 지각을 일깨우는 정치적 장치라 할 수 있다.
<호수의 랑슬롯>은 브레송의 필모그래피에서나 아서왕 전설의 영상화 역사에서 모두 특이한 위치를 차지한다. 영화는 개봉 당시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진 못했으나, 꾸준히 평단의 재평가를 받아왔다. 앞서 언급했듯 빈센트 캔비 같은 일부 평론가는 “내적 의미가 부족하다”거나 “브레송적 금욕이 자기 모순에 빠졌다”고 비판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여러 비평지에서는 이 영화를 걸작 반열에 올렸다. 특히 영국 평단에서의 지지는 강력해서, 사이트앤사운드에서 크리스 다크는 이 영화를 브레송의 전통이 한층 세련된 완성을 본 예로 들며 “다른 어떤 영화와도 닮지 않은 철저히 독자적인 비전”이라고 평했다. 고다르 역시 “브레송 영화의 힘은 세계에 대한 하나의 생각을 영화에 적용한 데 있다”는 언급으로 이 작품을 추켜세웠다. 시간이 흐르면서 <호수의 랑슬롯>은 많은 영화학자들에게 연구 대상이 되었다. 영화 이론가 폴 슈레더는 자신의 책 초월적 스타일에서 브레송을 오즈, 드레이어와 함께 논하면서, 이 영화의 초월적 정조를 분석하기도 했다. 또한 잔 보들레르 등 프랑스 비평가들은 이 작품의 고의적 시대착오적 요소들을 흥미롭게 지적했다. 예컨대 영화에 등장하는 목욕통, 체스판, 천막, 원탁 디자인 등이 실제 중세와 맞지 않는 소품임을 지적하며, 브레송이 역사 고증보다 현대적 주제 부각을 위해 의도적으로 삽입한 것이라 해석했다. 이런 세부까지도 감독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니, 영화를 읽을 때 단순한 시대극으로 접근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존 부어만의 화려한 아서왕 영화 <엑스칼리버>와 비교하면 브레송의 영화는 정반대의 길을 간다. 한 평론은 “브레송의 영화는 엑스칼리버의 뒤에 이어 본다면, 우스꽝스러운 판타지 뒤에 오는 숭고함을 느끼게 한다”고 평하며, 상업적 중세 판타지와 브레송의 실험적 해석을 대조하기도 했다. 재미있게도 브레송과 거의 동시에 몬티 파이썬도 중세풍 코미디 <몬티 파이썬의 성배>를 내놓았는데, 둘 다 전설을 해체하면서도 한쪽은 비극으로, 다른 쪽은 풍자로 풀어낸 것이 흥미롭다. 그러나 영화사적 영향으로 보자면, 브레송의 형식주의는 워낙 독자적인 나머지 직접적인 추종자를 찾기 어렵다. 그럼에도 테렌스 말릭이나 아키 카우리스마키, 브루노 뒤몽 같은 몇몇 감독들이 브레송에게서 영감을 받았다고 공언했고, 특정 장면들의 오마주도 시도되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영화 소리 연구나 미학 연구에서 귀감이 되는 사례로 자주 인용된다. 토너먼트 시퀀스의 사운드 몽타주나, 갑옷을 통한 인물 묘사는 학술적 분석의 단골 주제다. 결국 <호수의 랑슬롯>은 전설을 빌린 철학적 에세이 영화라 할 만하다. 형식과 내용이 완벽히 합치되어, 영화 언어 자체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경지에 이른 작품이기 때문이다. 브레송은 이 영화를 통해 “영화란 스펙터클이 아니라 글쓰기”라는 자신의 신념을 몸소 입증해 보였다. 그의 카메라와 마이크는 펜과 잉크처럼 쓰였고, 그 결과 탄생한 것은 한 편의 시이자 비가였다. 장 뤽 고다르의 말처럼, 브레송의 영화에는 “세계에 대한 관념을 영화로 쓴” 거장의 사유가 깃들어 있다. 관객 각자는 그 관념을 다양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 영화를 지극히 지루하고 난해한 실험이라 여길 수도 있고, 또 다른 이는 최고도로 순화된 숭고미를 경험할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브레송이 타협하지 않고 밀어붙인 이 형식미 덕분에 영화는 시대를 앞질러 시간성을 초월한 예술품이 되었다는 점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까마귀가 나는 새벽 하늘을 바라보던 랑슬롯의 빈 눈동자는, 마치 관객에게 묻는 듯하다. 신화가 사라진 자리, 무엇이 남았는가? 브레송은 그 물음에 직접 답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영화의 표면에 살과 쇠, 소리와 이미지, 사랑과 폭력의 파편들을 정교하게 배치해 우리 스스로 성찰하도록 한다. 그렇기에 <호수의 랑슬롯>은 쉽사리 그 의미를 모두 말해주지 않는 난해한 걸작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이 영화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새로운 해석을 낳고 비평지면을 풍요롭게 만드는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