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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 브레송, 시네마토그래프에 대한 노트

로베르 브레송은 20세기 프랑스 영화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영화감독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영화계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거장으로, 총 열세 편의 작품을 통해 자신만의 미학적 스타일을 구축했다. 극도의 절제와 미니멀리즘, 비전문 배우(그가 일컫는 ‘모델’)의 활용, 독창적인 편집과 사운드 운용 등을 통하여 브레송은 영화 매체만의 순수한 표현 방식을 탐구했다. 특히 그의 유일한 저서인 <시네마토그래프에 대한 노트>는 이러한 브레송의 영화 철학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어 영화사적 의미가 크다. 이 책에서 브레송은 단문들로 이루어진 단상들을 통해 자신의 연출 원칙과 영화에 대한 사유를 제시하는데, 그 한 줄 한 줄이 영화 예술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로 가득하다.

브레송은 영화가 다른 예술과 구별되는 고유한 표현 양식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영화감독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너의 관객은 책의 독자도, 공연극의 관객도, 전시회의 관람객도, 콘서트의 청중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문학적 안목이나 연극적 취향, 회화적 기호나 음악적 센스에 부응할 필요가 없다. 즉, 영화는 문학이나 연극, 회화, 음악의 연장선이 아니라 독자적인 감상자를 상대하는 별개의 예술이라는 것이다. 브레송의 이 언급은 영화가 흔히 문학적 스토리텔링이나 연극적 연기, 회화적 미장센, 음악적 효과 등에 기대곤 하는 경향을 경계한다. 그는 이러한 다른 예술의 관습에서 벗어나 영화만의 시네마토그래프를 추구해야 한다고 믿었다. 시네마토그래프란 움직이는 이미지들과 소리들로 새로운 언어를 쓰는 작업으로, 브레송은 영화를 “움직이는 이미지와 소리로 글쓰기”라고 정의하며 영화가 자기만의 문법과 관객을 가져야 함을 강조한다. 이는 영화 연출자가 문학적 감성이나 무대극의 흥행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카메라와 마이크로포니를 통해 오직 영화적으로 사고하고 표현해야 한다는 뜻이다. 브레송의 영화 창작론에서 특히 유명한 것은 영화가 거치는 두 번의 죽음과 세 번의 탄생에 대한 비유이다. 그는 자신의 영화 제작 과정을 이렇게 서술한다. 내 영화 작품은 처음에는 내 머릿속에서 태어나고, 시나리오 위에서 죽는다; 그리고 내가 사용하는 생생한 모델들과 실제 사물들에 의해서 부활한다. 그리고 다시 이것들은 촬영된 필름 위에서 죽는다. 그러나 편집이라는 어떤 순서 속에 자리 잡아 배열되어 스크린 위에서 투사되면 물속의 꽃들처럼 다시 소생한다. 브레송은 한 편의 영화가 구상 단계에서 태어났다가 대본 단계에서 잠시 죽고, 촬영 현장에서 현실의 인물과 사물을 통해 다시 살아나지만, 촬영된 필름 자체에서는 아직 죽어 있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진정한 영화 예술 작품으로서의 최종 탄생은 편집을 통해 비로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편집 과정에서 각각의 장면과 소리가 특정한 리듬과 배열로 결합될 때, 마치 물에 담긴 꽃이 생기를 되찾듯이 영화는 관객의 눈앞에서 생명을 얻는다. 이러한 비유는 브레송이 특히 편집의 중요성을 강조했음을 보여준다. 그에게 영화 편집은 단순한 기술적 과정이 아니라 영화적 생명력을 불어넣는 예술적 행위이며, 필름 조각들이 연결되는 순간 비로소 영화는 하나의 살아 있는 존재처럼 관객에게 다가온다. 브레송의 창조관 역시 독특하다. 그는 예술에서의 창조를 전통적인 의미와는 다르게 정의한다. ‘창조한다는 것은 사람과 사실들을 변형하거나 발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하는 사람들과 사실들 사이에, 그리고 존재하는 모습 그대로 새로운 관계들을 엮는 것이다.’ 브레송은 영화를 창조한다는 것이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작업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현실에 이미 존재하는 인물과 사물, 사건들을 있는 그대로 포착하여 새로운 맥락 속에 재배열함으로써 의미를 창출하는 것이 영화 예술의 창조라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그는 영화감독을 현실의 ‘포착자’이자 ‘배열자’로 간주한다. 브레송이 전문 배우 대신 일반인을 ‘모델’로 기용하고, 세트보다는 실제 장소를 선호하며, 과장된 연기나 줄거리를 배제한 채 날것의 현실 조각들을 담아내려 한 것도 이러한 철학과 닿아 있다. 그는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발명”하는 배우보다 카메라에 포착되는 실재 그 자체를 중시했다. 배우의 연기가 두드러지면 관객은 인물보다 연기를 인식하게 되고 영화는 연극이 되고 만다. 브레송은 이를 경계하여 인물들을 극 중 배역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받아들이게 만들고자 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어떤 사람이 영화 속에서 아틸라나 예언자, 은행원이나 나무꾼을 연기한다고 인정하는 순간 그 영화는 연극에 가까워진다. 반대로 영화가 영화로 남기 위해서는 배우의 연기를 느끼게 해서는 안 되며, 관객이 인물 그 자체를 보도록 해야 한다. 이처럼 현실에 대한 엄격한 포착과 새로운 연결을 통해 관객의 마음속에서 의미가 재탄생하도록 하는 것이 브레송이 생각한 영화 창조의 길이었다. 영화 매체에서 소리와 이미지의 관계에 대한 브레송의 통찰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시각과 청각을 철저히 분업시켜 활용하는데, 그 기본 정신은 “소리가 이미지를 대신할 수 있을 때는 과감히 영상을 잘라내라”는 것이다. 눈으로 보이는 이미지와 귀로 들리는 소리가 동일한 정보를 전달하지 않도록 하여, 두 요소가 서로 보완하면서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게 만드는 것이 그의 지향점이었다. 브레송의 한 단상은 이 원칙을 인상적으로 환기시킨다. “드뷔시는 뚜껑이 닫혀 있는 피아노를 연주하곤 했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닫혀 있는 피아노를 연주하던 드뷔시를 잊어버렸다. 심지어 영화 감독들마저도!” 이 일화를 통해 브레송은 예술에서 절제와 생략의 미덕을 역설한다. 피아노의 뚜껑을 닫고 연주하면 소리가 약해지지만 그 미묘한 울림을 통해 새로운 음악적 아름다움이 탄생하듯, 영화에서도 때로는 보여주지 않고 들려주지 않는 절제가 더 큰 효과를 낳는다는 뜻이다. 브레송 영화에서는 중요한 사건을 화면에 직접 드러내지 않고 소리만으로 전달하거나, 등장인물의 감정을 배우의 표정이나 대사로 설명하기보다는 화면 밖의 요소나 관객의 해석에 맡기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청각-시각의 비동시적 사용은 관객으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상상하고 느끼게 하여, 작품의 내면적 깊이를 더해준다. 브레송은 눈은 피상적이고 귀는 심오하다고까지 말하면서, 기차가 들어오는 장면에서 기관차 경적소리 하나만으로 역 전체의 모습을 관객 마음속에 그려 넣을 수 있다고 했다. 이렇듯 소리와 이미지의 최소한의 활용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끌어내는 브레송의 미학은 현대 영화 사운드 디자인의 선구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그의 영화에서 침묵과 여백, 그리고 화면 밖의 소리는 때로 어떤 대사나 장면보다 강렬한 울림을 준다.

브레송은 또한 영화 산업의 상업화와 스타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책에서 분명히 하고 있다. 그는 영화 예술이 점차 돈에 매몰되어 가는 현실을 개탄한다. 영화는 돈 속으로 깊이 빨려들어가, 창조되기도 전에 펀딩 문제로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영화는 예술의 위대한 전통에 먹칠을 하기 시작했으며, 당당하게 자신은 상품이지 예술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자본의 논리가 영화 제작을 지배하면서 예술로서의 순수한 가치는 퇴색해버린 현실을 날카롭게 꼬집은 것이다. 브레송이 활동하던 당시에도 이미 상업 영화가 득세하고 대규모 자본에 의해 영화의 내용과 형식이 규격화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는 투자와 흥행에 급급한 영화계 풍토를 비판하며, 이러한 상황에서 진정한 예술로서의 영화가 설 자리가 좁아지는 것을 우려했다. 이와 관련해 브레송은 영화감독은 젊은 은자처럼 독립적인 자세를 지켜야 한다고 역설한다. 가능한 한 경제적 자율성을 갖고, 기성 산업의 관행에 자신을 예속시키지 않는 ‘1인 게릴라’와 같은 창작자들이야말로 영화의 미래를 이끌 것이라는 그의 전망은, 상업주의 속에서도 예술혼을 지키려는 후대 영화인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브레송이 거부한 상업적 관행의 한 예가 스타-시스템이다. 그는 스타 시스템을 가리켜 새로움과 예측 불허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드넓은 매혹의 힘을 무시하는 시스템이라고 일갈한다. 이 작품이건 저 작품이건, 이 주제건 저 주제건 똑같은 얼굴들을 계속해서 대면해야 하는 현실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유명 배우들이 등장하는 영화를 관객들은 익숙하게 소비하지만, 정작 영화적 신선함과 몰입은 방해받는다는 것이 브레송의 지적이다. 그는 반복해서 얼굴을 비추는 스타의 존재가 영화의 리얼리티를 저해하고 관객의 발견의 기쁨을 빼앗는다고 보았다. 그래서 브레송 자신의 영화에서는 알려진 배우를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대부분 무명인이 등장해 그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뿐 연기하지 않는다. 관객은 특정 배우의 기존 이미지나 연기 패턴 없이 인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고, 이는 영화의 세계에 대한 신비와 신뢰를 높여준다. 브레송에게 영화적 아름다움은 유명한 얼굴이 주는 매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 앞에 선 한 인간의 있는 그대로의 사실성에서 우러나온다. 스타 시스템에 대한 그의 비판은 오늘날의 영화산업에도 유효한 경고처럼 들리며, 동시에 새로운 얼굴을 통해 새로운 감동을 만들어내는 영화의 가능성을 일깨워준다. 이렇듯 <시네마토그래프에 대한 노트>에서 펼쳐지는 브레송의 통찰들은 영화 미학과 철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책의 문장들은 짧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깊고도 풍부하다. 브레송은 군더더기를 일절 배제한 간결한 언어로 영화의 본질을 탐구하는데, 그 엄격하고도 순수한 태도는 읽는 이로 하여금 경건함마저 느끼게 한다.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이 책에 수록된 단상들이 수십 년 전에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독자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깨달음을 준다는 것이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영화 예술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얻게 되고, 이미 읽은 문장도 다시 읽으면 또 다른 울림으로 다가온다. 브레송의 단상들은 그의 영화만큼이나 정제되고 투명하여, 읽는 이의 마음을 맑게 하면서도 동시에 영화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킨다. 로베르 브레송은 스스로 영화를 “현대의 마지막 예술”이라고 불렀다. 그는 영화가 순수 예술로서 지녀야 할 내적 양식과 사유의 깊이를 끝까지 옹호했다. <시네마토그래프에 대한 노트>은 이러한 그의 영화관이 응축된 결정체로서, 영화에 대한 사랑과 신념이 담긴 일종의 예술 선언이다. 브레송의 영화 철학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나 짐 자무쉬, 마틴 스코세이지 등 많은 후대 감독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고, 오늘날에도 영화 미학 담론에서 자주 언급된다. 이 책을 읽는 경험은, 상업주의로 물들고 장르 공식을 답습하는 영화 풍토 속에서 순수한 영화 정신을 다시 마주하는 일과 같다. 브레송의 문장 한 줄 한 줄은 영화가 어떻게 이미지와 소리로 빚어낸 시가 될 수 있는지 일깨워주며, 영화 예술의 가능성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을 환기시킨다. 그리하여 결국 이 책은 영화에 대한 사랑의 고백이자, 영화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한 예술가의 신념 어린 선언으로 읽힌다. 브레송의 단상들을 곱씹다 보면, 영화란 과연 무엇이며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과 마주하게 된다. 이는 영화감독 지망생이나 시네필은 물론, 예술 창작 전반에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도 깊은 영감을 선사하는 귀중한 텍스트이다.

결론적으로, 로베르 브레송의 <시네마토그래프에 대한 노트>은 영화 예술의 언어와 정신에 관한 가장 아름답고도 엄격한 성찰을 담은 책이다. 브레송의 미학적 원칙—영화 고유의 표현 양식 추구, 현실의 포착과 편집을 통한 창조, 소리와 이미지의 경제, 상업주의에 대한 저항 등—은 책 속에 실린 그의 직접적인 어구들로 생생히 드러난다. 이 리뷰를 통해 살펴본 여러 인용문들은 브레송 영화철학의 핵심을 보여주며, 그의 사상이 얼마나 선구적이면서도 보편적인지 증명한다. 영화가 탄생한 지 한 세기가 넘은 오늘날에도, 브레송의 단상들은 영화란 예술이 어떻게 스스로의 길을 걸어야 하는지 일깨워준다. 짧지만 강렬한 이 책의 구절들은 독자로 하여금 영화 예술에 대한 뜨거운 질문을 품게 만들고, 잊혀졌던 영화에 대한 경이를 되찾게 한다. 브레송이 남긴 이 아름다운 영화 철학의 조각들 덕분에, 우리는 다시금 영화의 순수한 가능성과 마주하며, 스크린 위에 펼쳐질 새로운 시네마토그래프의 탄생을 꿈꾸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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