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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 큐브릭, 로리타

<로리타>는 큐브릭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그의 커리어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이 영화는 미성년 소녀에 대한 중년 남성의 금지된 사랑이라는 파격적 소재를 다루었는데, 당시 검열이 심했던 할리우드 환경에서 이를 영화로 구현한 것 자체가 큰 도전이었다. 큐브릭은 1958년 소설 판권을 획득한 뒤, 검열 당국의 승인 아래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여러 가지 영리한 각색을 시도했다. 1960년대 초반까지 유효했던 헤이스 검열 규약은 성적 표현을 엄격히 제한했기 때문에, 큐브릭은 노골적인 묘사 대신 암시와 상징, 재치 있는 대사를 통해 우회적으로 주제를 전달했다. 그는 블랙 코미디의 어조를 활용하여 불편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관객이 완전히 등을 돌리지 않도록 균형을 잡았다. 훗날 큐브릭 본인도 “만일 검열의 제약이 그렇게 심할 줄 알았다면 <로리타>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회고했을 만큼 이 작품은 많은 타협과 제한 속에서 완성된 영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큐브릭은 자신의 개성을 잃지 않고, 이 불편한 이야기를 냉정하면서도 아이러니한 시선으로 그려냄으로써 일반적인 멜로 드라마나 선정적인 스캔들극과는 다른 차원의 영화적 성취를 이루어냈다.

<로리타>는 유럽 출신 중년 교수 험버트 험버트가 미국으로 이주해 한적한 마을에서 여름을 보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는 미망인 샬롯 헤이즈의 집에 하숙하게 되고, 그곳에서 그녀의 딸인 10대 소녀 로리타를 처음 만난다. 햇살 가득한 정원에서 미소 짓던 로리타의 모습은 험버트에게 금기된 욕망의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로리타와 가까워지기 위해 샬롯의 하숙 제안을 받아들이고, 겉으로는 점잖은 손님처럼 굴면서 내심으로는 로리타에게 집착하기 시작한다. 샬롯은 험버트에게 호감을 표현하고 결국 결혼을 제안한다. 험버트는 로리타와의 법적 관계를 확보하기 위해 마지못해 이를 수락하지만, 샬롯은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린다. 그는 감정을 일기장에 적어두고 있었고, 어느 날 샬롯이 그 일기를 읽으며 진실을 알게 된 것이다. 충격에 휩싸인 샬롯은 험버트를 내쫓겠다고 결심하지만, 그 직후 교통사고로 돌연 사망한다. 샬롯의 죽음으로 험버트는 로리타의 후견인이 되고, 그녀를 데리고 둘만의 긴 여행을 떠난다. 모텔과 호텔을 전전하며 마침내 로리타와 육체적 관계를 맺지만, 영화는 이를 직접 묘사하지 않고 암시적으로 처리한다. 두 사람은 한 교외 마을에 정착하고, 겉으로는 평범한 부녀처럼 살며 험버트는 대학 강사로 일하지만, 실제로는 로리타를 연인처럼 대하며 지나치게 통제하고 질투심을 보인다. 로리타는 또래 친구들과의 생활을 원하고 점차 험버트에게서 벗어나려 한다. 이들의 뒤에는 의문의 인물 클레어 퀼티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그는 학교 심리상담사로 위장하거나 연극 작가로 접근하면서 로리타를 유인한다. 험버트는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어느 날 로리타가 고열로 입원한 병원에서 퇴원한 뒤 실종되자 절망에 빠진다. 퀼티가 로리타를 데려갔음을 모른 채 그는 수년간 그녀를 찾아 헤맨다. 몇 년 후, 험버트는 결혼해 임신 중이라는 로리타의 편지를 받고 찾아간다. 그는 그녀에게 여전히 집착하지만, 로리타는 이제 자신만의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며 그의 제안을 거절한다. 실연과 후회의 감정에 휩싸인 험버트는 로리타를 데려간 이가 퀼티였다는 사실을 듣고 분노하며, 복수를 결심한다. 영화는 사실 퀼티의 저택에서 험버트가 그를 살해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마지막에 이 장면이 다시 나오며 이야기는 원점에 도달한다. 험버트는 결국 살인죄로 체포되어 옥중에서 생을 마감한다.

큐브릭의 <로리타>는 영화적 기법을 통해 소설이 지닌 심리와 풍자를 독자적인 영상 언어로 구현한다. 특히 쇼트 구성, 카메라 움직임, 편집, 음향 등의 영화 언어를 활용하여 드러낼 수 없는 것을 암시하고, 금기된 욕망의 본질을 시각화한 점이 돋보인다. 이러한 영화적 연출은 몇몇 인상적인 장면에서 두드러지는데, 그중에서도 험버트가 처음 로리타를 마주하는 장면은 큐브릭의 미장센과 카메라 워크가 영화의 주제와 밀접하게 결합된 대표적인 예다. 이 장면은 햇볕이 가득한 여름날, 험버트가 샬롯의 집을 둘러보는 시퀀스로 시작된다. 큐브릭은 여기서 긴 롱테이크를 활용하여 험버트와 샬롯이 집안을 오가며 대화하는 모습을 따라간다. 거실에서 계단, 복도와 욕실까지 이어지는 이 롱테이크는 험버트의 시점에서 새 하숙집 환경을 탐색하는 동시에, 관객을 그의 일상적 세계로 자연스럽게 이끈다. 카메라는 등장인물들의 동선을 부드럽게 쫓아다니며 편안하고 현실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지만, 이 일상적 안정감은 곧 깨진다. 롱테이크가 한창 진행되던 중, 큐브릭은 갑작스럽게 컷 전환을 줌으로써 험버트의 시선을 따라 뜰로 향하게 한다. 그리고 이때 화면에 나타나는 것이 바로 로리타의 첫 등장 쇼트다. 정원 한복판에 놓인 안락의자 위에 로리타가 드러누워 선글라스를 낀 채 선탠을 즐기고 있는 풀샷이 험버트의 눈에 들어온다. 밝은 햇살 아래 드러난 로리타의 젖빛 피부, 꽃무늬 비키니 수영복 차림, 커다란 밀짚모자와 고양이 같은 선글라스… 큐브릭은 이 한 쇼트로 소녀의 천진함과 관능미를 동시에 포착하며 관객의 시선마저도 험버트처럼 사로잡히도록 만든다. 이 첫 대면 장면에서 카메라의 움직임과 구도는 곧바로 험버트의 주관적 충격을 반영한다. 험버트는 로리타의 모습에 넋을 잃고 바라보는데, 카메라는 그녀의 전신을 담은 풀샷에서 시작해 클로즈업으로 다가간다. 클로즈업 화면에는 로리타의 붉게 빛나는 입술, 살짝 미소짓는 표정, 선글라스 너머 어른거리는 눈동자가 잡힌다. 이는 험버트의 시선이 로리타에게로 급격히 접근했음을 시각적으로 표현함과 동시에, 관객으로 하여금 로리타의 매혹적인 이미지에 압도되게 만드는 장치다. 특히 로리타가 쓰고 있는 하트 모양의 선글라스와 입에 문 막대사탕(영화의 홍보 포스터에도 활용된 상징적 소품)은, 순수한 소녀의 이미지가 성적 아이콘으로 겹쳐지는 양면성을 보여준다. 큐브릭은 검열을 피해가면서도 이러한 시각적 은유를 통해 ‘로리타’라는 존재가 험버트에게 얼마나 강렬하고 치명적인 욕망의 대상인지를 효과적으로 각인시킨다. 이 장면의 음향 디자인 또한 주목할 만하다. 로리타가 등장하는 순간 배경에는 부드럽고 달콤한 연주곡이 흐른다. 이 멜로디는 마치 험버트의 귀에 천상의 소리가 울리는 듯한 효과를 내면서도, 어딘가 몽환적이고 위험한 정서를 깔고 있어 이후 전개될 사건들을 예감하게 한다. 큐브릭은 이렇게 음악을 활용해 험버트의 심경 변화를 암시하고, 순간적으로 시간을 멈춘 듯한 마법의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 순간만큼은 주변에서 재잘대던 샬롯의 목소리조차 잦아들고, 오직 험버트의 눈과 귀에는 로리타라는 존재만이 부각된다. 이처럼 시각과 청각의 집중적인 묘사를 통해 관객은 험버트의 심리적 경험에 동참하게 되고, 동시에 이 만남이 단순한 호감 이상의 위험천만한 집착의 시작임을 직감하게 된다. 큐브릭은 이러한 영화적 기법을 통해 험버트와 로리타의 관계를 묘사하며, 금기된 욕망이라는 주제를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말로 설명하지 않더라도, 긴 롱테이크 뒤에 등장한 파격적인 쇼트 전환, 관능적인 이미지, 음악의 반전 효과만으로도 관객은 “이 남자의 세계에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이 생겼다”는 사실을 감지하게 된다. 험버트의 일상적 질서는 로리타라는 한 이미지의 침입으로 산산조각났고, 이것이 이후의 비극을 예고하는 씨앗이 된다. 이러한 연출은 영화 언어가 곧 내용이 되는 지점이며, 큐브릭 영화의 교과서적인 순간이다. <로리타>에서 발견되는 다른 영화 언어적 특성들 역시 주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예컨대 편집과 서사 구조를 보면, 큐브릭은 영화의 첫 장면을 이야기의 끝(험버트가 퀼티를 살해하는 장면)으로 배치해 순환 구조를 만든다. 이런 비선형 편집은 관객에게 결말을 미리 보여줌으로써, 험버트와 로리타의 초기 모습에도 일종의 운명적 불길함을 덧입힌다. 관객은 이미 파국을 알고 있기에 이후 장면들을 하나의 추적처럼 바라보게 되며, 그 속에서 작은 징후들을 끊임없이 포착하려 한다. 이는 험버트의 욕망이 처음부터 파국을 내포하고 있었음을 편집적으로 구조화한 셈이다. 또 다른 흥미로운 기법은 시점 쇼트와 관찰자 시선의 활용이다. 원작 소설은 험버트의 1인칭 고백 형식이지만, 큐브릭은 영화에서 전지적 시점의 카메라를 섞어 험버트가 인지하지 못하는 세계를 관객이 볼 수 있게 한다. 퀼티가 변장하고 나타나는 장면들은 험버트의 등 뒤에서 벌어지지만, 카메라는 이를 명확히 포착하여 관객에게 보여준다. 호텔 현관에서 신문으로 얼굴을 가린 남자가 말을 거는 장면, 공연장 뒷문에서 로리타를 지켜보는 실루엣 등이 그 예다. 이러한 연출은 관객이 험버트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갖게 하고, 그 결과 극적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한편으로는 긴장감이 고조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험버트가 몰락해 가는 과정이 희화화되며 블랙 코미디적 효과를 낳는다. 큐브릭은 이처럼 카메라의 시선을 교묘히 조절함으로써 관객을 이야기의 공범이자 외부 관찰자의 위치에 동시에 놓고, 그로 인해 도덕적 판단마저 유예하게 만든다.  사운드와 대사의 측면에서도 큐브릭의 전략은 두드러진다. 특히 퀼티 역을 맡은 피터 셀러즈는 영화 전체에서 기이하고 우스꽝스러운 유머를 구사하는데, 그의 대사 하나하나에는 험버트의 욕망을 풍자하거나 거울처럼 반사하는 기능이 있다. 예컨대 퀼티가 총구 앞에서 “당신 총은 정말 예술 작품 같군요”라고 말하는 장면은, 죽음의 문턱 앞에서도 상황을 희화화하는 블랙 코미디의 정점을 보여준다. 이는 웃음과 섬뜩함이 공존하는 기묘한 정조를 만들어낸다. 음악적으로도 큐브릭은 로리타의 테마를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한다. 때로는 달콤한 사랑노래처럼, 때로는 삐에로가 등장하는 서커스 음악처럼 왜곡된 방식으로 사용된다. 이는 로리타라는 존재가 때로는 천사처럼, 때로는 파멸의 화신처럼 보이는 양가적 정체성을 반영하며, 관객에게 혼란과 불편함을 동시에 안긴다. 이러한 음향 연출 덕분에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우스운 장면 속에서도 끊임없는 불안이 깔리게 된다. 결국 <로리타>의 세계는 시종일관 웃음과 섬뜩함이 교차하는 독특한 톤으로 구성된다. 이는 큐브릭이 선택한 영화 언어적 장치들이 이야기의 주제, 인물의 심리, 관객의 위치와 복합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이며, 그 결과 이 작품은 단순한 스캔들극이 아닌 욕망, 금기, 통제 불가능성에 대한 시청각적 탐구로 완성된다.

영화 <로리타>는 겉보기에는 한 남자의 도착적 사랑 이야기를 그린 스캔들 드라마처럼 보이지만, 그 심층에는 인간 심리의 인지 불가능한 영역, 즉 불가해한 세계에 대한 통찰이 숨어 있다. 이는 철학적·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접근할 때 더욱 뚜렷해진다. 특히 자크 라캉의 이론을 원용하면, 험버트라는 인물이 겪는 내적 분열과 욕망의 구조, 그리고 그가 발 딛고 있는 세계의 기묘함을 해석할 수 있다. 우선, 라캉이 말하는 주체의 분열 개념을 험버트에게 적용해볼 수 있다. 라캉에 따르면, 인간 주체는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균열, 즉 자기 자신조차 완전히 인식하지 못하는 내적 간극을 지닌다. 험버트는 겉으로는 교양 있고 합리적인 교수라는 상징적 자아를 가지고 있지만, 내면으로는 미성년 소녀에 대한 금기된 욕망이라는 무의식적 충동에 사로잡혀 있다. 그는 점잖은 가장이자 학자의 역할을 연기하면서, 동시에 사회 규범을 심하게 위반하는 욕망에 이끌린다. 이 둘 사이에서 험버트는 끊임없이 요동하며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그는 로리타와의 관계를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거나 “로리타가 먼저 유혹했다”는 식으로 미화하고 합리화한다. 하지만 그의 깊은 내면에는 죄책감과 불안이 깔려 있으며, 그것이 바로 그가 자신의 욕망을 진심으로 믿지 못하는 증거다. 이러한 모습은 분열된 주체의 전형으로, 욕망 앞에서 이성이 무력해지고 자아의 동일성이 흔들리는 인간 심리를 극단적으로 드러낸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욕망과 타자의 관계다. 라캉의 유명한 명제 중 하나는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라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자기 안에서 자발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 사회가 금지하고 허용하는 질서, 즉 큰 타자라 불리는 상징계 속에서 형성된다. 이 관점에서 보면, 험버트의 로리타에 대한 집착은 로리타라는 실존적 인물에 대한 사랑이라기보다, 금지된 것을 욕망함으로써 더 강렬해지는 심리 구조에 가깝다. 사회와 법, 도덕은 로리타와의 관계를 절대적으로 금지하지만, 오히려 그 금지의 장막은 험버트의 욕망을 더욱 자극하고 비틀린 형태로 분출하게 만든다. 그는 금기 너머의 쾌락을 탐닉하며, 사회가 “안 된다”고 말하는 대상을 더 갈망하게 된다. 이것은 일종의 ‘금지된 사과’의 역설이다. 큐브릭은 이 심리를 블랙 코미디라는 양식으로 표현한다. 겉보기에는 우스꽝스럽고 가벼운 장면이 이어지지만, 그 속에는 금기의 쾌락이 기묘하게 부풀어오르는 욕망의 구조가 자리하고 있다. 또한 라캉이 말한 “타자의 욕망”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선 타자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살펴야 한다”는 의미도 내포한다. 험버트의 경우, 그는 로리타를 향한 자기 욕망에만 몰두한 나머지 정작 로리타가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는 로리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로리타의 존재를 자기 욕망의 스크린으로 삼는다. 로리타는 그에게 실존하는 타자라기보다는, 이상화된 소녀 이미지, 즉 상상의 대상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로리타가 성숙한 여성으로 변화하고, 자신의 욕망과 선택을 갖게 되었을 때, 험버트는 더 이상 그녀를 감당하지 못한다. 그는 로리타를 통제하고 소유하려 했지만, 결국 남은 것은 상실감과 공허함뿐이다. 이 장면에서 영화는 인간 욕망의 근원적인 한계를 보여준다. 어떤 대상도 주체의 결핍을 완전히 채워줄 수 없으며, 그 대상이 왜곡된 환상에 의해 만들어졌을 경우, 그 환상이 붕괴될 때 주체는 심연과 마주하게 된다. 라캉의 이론 중 상징계와 실재계의 구분도 이 영화에 응용해볼 수 있다. 험버트는 로리타와 함께 도피 생활을 하는 동안, 일종의 사회적 질서로부터 단절된 은폐된 세계를 만들고자 한다. 그는 타인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자신만의 사랑과 질서를 구축하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회적 상징계 바깥의 불완전한 공간일 뿐이다. 라캉이 말하는 실재계는 언어화되지 않고 상징화될 수 없는 세계, 즉 주체가 감당하거나 구조화할 수 없는 불가해한 영역이다. 험버트가 로리타와 만든 공간은 마치 실재계의 한 귀퉁이를 침범한 듯한 구조를 띤다. 처음에는 달콤하고 비밀스러운 공간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질투, 불안, 외부의 침입(퀼티)에 의해 균열이 생기고 결국 붕괴한다. 이때 험버트는 자신의 세계가 환상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과 마주한다. 로리타가 사라진 후의 황폐함, 퀼티를 죽인 뒤에도 채워지지 않는 허무함은 모두 실재계적 충격이며, 라캉이 말하는 주이상스—쾌락과 고통이 뒤섞인 극한의 체험—의 파괴적 국면을 상기시킨다. 금기를 어기며 욕망을 쫓은 험버트는 결국 자기파괴의 경계선에 이르고 만다. 마지막으로, 이중성과 분신의 모티프도 정신분석적으로 흥미로운 지점을 제공한다. 험버트와 퀼티는 겉보기에는 전혀 다른 인물이지만, 로리타를 매개로 한 거울 관계에 있다. 퀼티는 험버트가 내면에서 억누르려 했던 타락성과 냉소를 노골적으로 실현한 인물이며, 험버트는 자신을 사랑의 존재라고 믿고 싶어 하지만, 실은 퀼티와 마찬가지로 로리타를 욕망의 수단으로 삼은 인물이다. 퀼티는 험버트의 어두운 자아이자, 억압된 욕망의 희화화된 형상이다. 험버트가 퀼티를 총으로 살해하는 장면은 겉으로는 복수극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자신의 분신을 제거하고 스스로를 심판하는 행위로 읽힌다. 프로이트가 말한 “외부로 투사된 자아의 죽음” 혹은 라캉의 “주체의 퇴장”과도 연결된다. 큐브릭은 퀼티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그림자, 총성, 쓰러진 물건, 총알 자국 난 벽과 그림 등을 통해 죽음의 장면을 환유적으로 구성한다. 이러한 연출은 외부 인물의 죽음이 아닌, 험버트 내면의 붕괴, 곧 이해 불가능한 세계가 무너지는 순간을 암시한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황량한 저택의 풍경과 무기력한 험버트의 뒷모습뿐이며, 그것은 로리타에 대한 욕망, 이상화된 사랑, 자기 정당화의 모든 세계가 잔해로 남은 장면이기도 하다.

종합하면, 큐브릭의 <로리타>는 단순한 금기 로맨스가 아니라, 인간의 욕망 구조와 무의식, 자기기만, 환상, 불가해성이라는 심층 심리학적 주제를 영상 언어로 정교하게 직조한 작품이다. 험버트는 끝내 자기 욕망의 본질을 직시하지 못한 채 무너졌고, 로리타는 한 남자의 일그러진 욕망의 상으로 소비되었다가 현실로 돌아가는 결정을 스스로 내렸다. 퀼티는 그 욕망의 광기를 조롱하며 연기하다가 결국 희생당한다. 이 세 인물의 궤적은 모두 각기 다른 방식으로 불가해한 세계와 맞부딪친 결과이다.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지 않다. 과연 무엇이 사랑이고, 무엇이 욕망인가? 인간은 스스로의 욕망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으며,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이 과연 가능한가? 큐브릭은 이 영화에서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객이 이 질문들 앞에 서 있도록 만든다. 그래서 <로리타>는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그 여운은 바로 현실 속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어딘가 설명되지 않는 진실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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