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반 일본은 버블 경제의 붕괴 후 사회 전반에 불안과 변화의 여진이 이어지는 시기였다. 경제적 충격 속에서 가치관이 재편되던 이때, 가족 제도에도 균열이 생겨나 이혼율이 높아지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이혼은 일본 사회에서 터부시되었지만, 90년대에 들어와서는 ‘부부 중 한쪽이라도 불행하면 헤어질 수 있다’는 현실론이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소마이 신지의 영화 <이사>는 바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부모의 이혼을 겪는 한 소녀의 심리를 섬세하게 포착하고 있다. 영화 속 주인공 렌코의 부모는 그 변화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아버지 켄이치는 재택근무를 하며 살림을 도맡았고, 어머니 나즈나는 높은 수입을 올리는 커리어우먼이다. 전통적 성역할이 뒤바뀐 이 가정에서, 아버지는 아내의 성공에 남성으로서 자존심이 상하고, 어머니는 경제적 독립을 이루었지만 미묘한 불만이 쌓여간다. 나즈나는 술에 취해 ‘결혼은 강자만이 살아남는 게임’이라고 토로하는데, 이는 자신도 모르게 남편과 경쟁하며 상처받아 온 내면을 드러낸 대목이다. 이러한 권력 균형 변화와 성별 역할 충돌이 결국 두 사람의 불화를 낳았음을 영화는 암시한다. 즉, <이사>의 부모 이혼은 개인의 문제이면서 시대적 변화의 반영인 셈이다.
영화 속 12살 렌코는 부모의 불화를 명확히 이해하지 못한 채 그 속에서 정서적 혼란을 겪는다. 영화는 철저히 아이의 시선에서 이야기를 전개하기에, 부모 세대의 사정은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관객은 렌코와 함께 어른들의 대화를 온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상황의 파편들만 접하게 된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아이의 관점에서 본 세계의 불투명함을 체험하게 한다. 부모의 불화 원인이 끝내 명시되지 않는 것은, 현실에서도 이혼을 겪는 아이들은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상처받기 쉽다는 점을 반영한다. 대신 영화는 렌코의 감정에 초점을 맞추어, 아이가 받는 충격과 불안을 섬세히 포착한다. 가족이 해체된 뒤 렌코는 학교에서 기존의 친구 무리와 소원해지고 오히려 소외당하던 친구들에게 연민을 느끼는데, 이것은 자신의 가정도 정상이 아니라는 깨달음이 가져온 변화다. 예전에는 부모가 이혼한 전학생을 따돌겼던 렌코였지만, 이제는 스스로도 낙인을 공유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설정은 가족 해체가 청소년기 정체성에 미치는 파장을 보여준다. <이사>라는 제목은 단순한 거처의 이동만이 아니라, 렌코가 정신적으로도 낯선 세계로 옮겨가는 과정을 함축한다. 렌코는 부모의 이혼으로 안락했던 정신적 ‘집’을 잃고, 불안정한 심리 공간으로 옮겨간다. 그녀의 이야기는 곧 안정된 유년의 종언이자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으로 읽힌다.
감독 소마이 신지는 1980-90년대 일본영화의 숨은 거장으로, 긴 시간 미학과 청춘 서사를 결합한 독자적 세계를 구축했다. 그는 일본 스튜디오 시스템이 퇴조하고 인디 영화가 부상하던 과도기에 등장해, 독창적 연출로 많은 후배 감독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실제로 하스미 시게히코 같은 평론가는 소마이 신지를 다음 세대 일본 영화의 연결고리로 지목했고, 고레에다 히로카즈, 쿠로사와 기요시, 하마구치 류스케 등도 그의 작품을 중요한 영감의 원천으로 언급한바 있다. 그러나 정작 서구에는 소개가 더뎌, 2010년대에 들어서야 회고전과 복원판 상영을 통해 뒤늦게 주목받았다. 실제 이 작품도 4K 리마스터링을 통하여 뒤늦게 다시 복원된 작품이다.
소마이 신지 영화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롱테이크 기법과 유려한 카메라 워크다. 그는 마치 미조구치 겐지를 떠올리게 할 만큼 한 쇼트의 길이를 길게 잡아 감정과 공간을 담아냈다. 실제 그의 필모그래피 전체에서 평균 숏 길이는 1분에 달하며, 이는 미조구치 겐지보다도 길다고 할 정도다. 특히 1980년대 작품들에서 롱테이크를 대담하게 탐구했는데, <이사>가 제작된 1993년에도 이러한 경향은 이어졌다. 소마이 신지는 인물과 공간을 롱테이크 안에서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연출을 선보이며, 이를 통해 관객이 장면에 더 깊이 몰입하도록 만들었다. 롱테이크는 배우들의 즉흥적이고 생생한 연기를 포착하기에도 유리한데, 조감독 에노키도 코지는 ‘감독이 긴 촬영으로 배우의 감정을 끌어올렸다’고 증언한다. 실제로 소마이 신지는 아역, 청소년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에너지를 롱테이크 속에서 포착하기를 즐겼다. 카메라는 때로 정지했다가도, 배우의 동작에 맞춰 부드럽게 팬이나 트래킹, 크레인 움직임을 섞어가며 일상 공간을 역동적 무대로 변주한다. 이러한 촬영 방식은 화면 구석구석에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긴장감을 부여하고, 관객이 인물들과 함께 한 호흡으로 시간과 공간을 경험하게 만든다.
<이사> 역시 이러한 롱테이크 미학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클라이맥스의 격렬한 다툼 장면이다. 렌코가 부모의 관심을 끌기 위해 집 화장실에 스스로 몸을 숨그며 벌어지는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좁은 복도를 하나의 무대로 삼아 3분 간의 롱테이크를 선보인다. 어둑해진 저녁 마법의 시간을 비추는 빛 속에, 화면 앞쪽에서 뒤쪽까지 이어진 복도를 따라 네 명의 어른들이 뒤엉킨다. 문 안에 틀어박혀 보이지 않는 렌코를 두고 부모가 언성을 높이고, 이를 말리려는 젊은 부부 친구가 가세하면서 복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촬영감독의 카메라는 이들을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지켜보며, 네 인물이 문간을 사이에 두고 밀치고 지나치는 모습을 광대극같이 좁은 프레임에 담는다. 아이는 화면에 나오지도 않은 채 어른들만 우왕좌왕하는 이 장면은, 말 그대로 폐쇄공포증적 긴장감으로 가득차있다. 공간의 비좁음과 인물 사이의 틈은 곧 이 가족의 균열을 상징하며, 한 쇼트 안에 펼쳐진 이러한 군상극은 편집을 거부한 채 날 것의 에너지로 관객을 압도한다. 결과적으로 영화 속 렌코의 의도와 달리 부모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고, 아이는 문 안에서 울음을 터뜨리는데, 카메라는 그 순간까지도 컷을 나누지 않고 폭발하는 감정을 고스란히 받아낸다. 이처럼 <이사>는 소마이 신지 감독 특유의 롱테이크 연출을 통해 갈등의 리얼리티와 감정의 진폭을 극대화한다. 그러면서도 적재적소에 클로즈업과 정지된 구도를 배치하여 인물 내면에 다가서는 시선도 잃지 않는다. 이러한 균형 잡힌 미학은 <이사>가 흔한 가족 멜로드라마와 선을 긋고, 한 편의 영화적 체험으로 승화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소마이 신지는 커리어 전반에 걸쳐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한 통과의례 서사를 즐겨 다루었다. 그의 13편 영화 중 대부분이 10대의 성장과 일탈, 자아 발견을 그리고 있으며, 이는 1980년대 일본 영화계에서 독보적이었다. 예를 들어 <세일러복과 기관총>에서는 여고생이 야쿠자 두목을 승계받는 기발한 설정 속에서도 십대 소녀의 내적 성장이 핵심을 이룬다. 또한 <태풍클럽>은 어른 없는 학교에 고립된 중학생들이 폭풍우 속에서 겪는 하룻밤의 방황을 통해 청춘의 혼란과 해방 욕구를 그린다. 이 작품들에서 소마이는 늘 아이들의 시각에서 세계를 관찰하며, 어른들을 부차적이거나 심지어 부정적으로 그리는 경향이 있다. 실제 <태풍클럽> 속 십대들은 억압적인 어른 세계에서 벗어나 춤추고 알몸으로 비를 만끽하며, 폭우는 그들의 억눌린 감정을 씻어내는 상징으로 작용한다.
<이사>는 이러한 소마이 청소년 영화들 중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앞선 작품들이 주로 또래 집단 내부에서의 자발적 연대와 성장에 초점을 맞춘 반면, <이사>의 주인공 렌코는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고립된 채 성장통을 겪는 인물이다. <태풍클럽>에서 아이들은 친구 무리와 함께 모험을 통해 세대만의 공동체를 형성하지만, 렌코는 또래들과의 관계에서조차 소외되어 혼자의 힘으로 어둠을 돌파해야 한다. 어른들은 여전히 신뢰하기 어려운 존재로 그려지지만, 아이들 세계가 대안으로 부상하지도 않는 점에서 <이사>는 보다 내밀하고 개인적인 성장 서사로 나아간다. 특히 렌코는 극 초반부터 부모를 돌봄의 대상이 아닌 돌봐줘야 할 존재처럼 대한다. 식탁 장면에서 그녀는 아빠의 식사 예절을 지적하고, 술에 취한 엄마에게 이웃들 보기에 창피하다며 타이르는 등 마치 부모 노릇을 대신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부모의 역할이 무너진 가정에서 아이가 조숙하게 행동하는 단면이자, 렌코가 정상적 유년기를 빼앗기고 있음을 시사한다. 반면 <태풍클럽>의 아이들은 부모 부재 상황에서 놀이와 난동으로 일시적 자유를 만끽하지만, 렌코는 가장의 부재를 메꾸려 애쓰는 어린 어른이 되어버린다. 이처럼 <이사>는 동시대 일본 청소년 영화들이 보여준 반항과 해방의 에너지 대신, 내향적 고독과 조기 성숙의 슬픔을 탁월하게 형상화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 점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아무도 모른다>나 니시카와 미와의 <유레카>, 혹은 쿠로사와 기요시의 <도쿄 소나타> 같은 후대 작품들과 정서적으로 통하는 부분이 많다. 실제로 일본 평단은 <이사>가 소마이의 경력에서 미학적 완성도가 가장 높은 작품으로, 이후 수십 년간 일본 영화인들에게 길잡이가 되었다고 평한다.
12살 소녀 렌코에게 부모의 이혼은 심리 구조를 뿌리째 흔드는 거대한 상실이다.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을 빌리자면, 아이는 부모를 통해 욕망과 동일시의 대상을 형성하지만 렌코는 그 기반이 갑작스레 해체되며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영화는 이러한 렌코의 혼란을 분열된 시선과 특이한 프레이밍으로 암시한다. 이를 가장 예리하게 포착한 것이 오프닝 식사 장면이다. 폭우가 쏟아지는 어두운 저녁, 렌코네 가족은 마지막으로 한 식탁에 둘러앉아 있다. 녹색 빛깔의 날카로운 삼각형 식탁은 가족 사이의 불협화음을 시각화하듯 배치되어 있는데, 특히 식탁의 뾰족한 꼭짓점이 화면 정중앙에서 관객을 향해 튀어나와 마치 칼끝처럼 보인다. 이 삼각 구도 속에서 렌코는 모서리 끝 혼자 앉아 있고, 부모는 그 반대편 좌우에서 마주 보고 앉아 있다. 가족 구성원들이 물리적으로 한 자리에 있지만, 세 사람 사이의 거리는 이상할 만큼 멀게 느껴진다. 카메라는 이들을 정면이 아닌 약간 비스듬한 각도로 포착하기에, 한쪽 부모의 얼굴을 잡을 때 다른 쪽 부모의 모습은 프레임 밖으로 잘려 나가거나 흐릿하게 처리된다. 한 프레임 안에 부모의 온전한 결합된 모습이 드러나지 않음으로써, 화목해야 할 식사 자리에서조차 부모 사이 소통이 단절되었음을 은연중에 보여주는 미장센이다.
특히 렌코의 시선 처리가 인상적이다. 렌코는 부모 사이에 끼어 눈치만 살피며 분위기를 띄우려 애쓴다. 그녀는 외운 듯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가족 식사는 즐겁게 나누는 시간이지’라고 말해보지만, 그 말은 공허하게 흩어질 뿐이다. 부모는 딸의 노력에 형식적으로 응답할 뿐 정작 서로는 쳐다보지 않는다. 아버지 켄이치는 한숨을 쉬며 수저를 내려놓고 자리를 뜬다. 그는 거실 쪽 창가로 가서 휴대용 플라스크에 담긴 술을 따라 마시며 창밖의 비를 바라볼 뿐이다. 어머니 나즈나는 식탁에 남아 말없이 술잔만 기울인다. 말없는 어른들과 일부러 명랑한 척하는 아이의 대비는, 이미 이 가족의 정서적 유대가 끊어졌음을 웅변한다. 몇 개의 숏들만으로도 긴장과 불안을 전달하는데, 식탁 아래를 비추는 장면에서 렌코의 작은 발이 불안하게 흔들리고, 어른들의 손은 식기 주변에서 허둥댄다. 창밖에서는 폭우 소리가 계속 들려오고, 결국 그 날 밤 잠자리에 든 렌코는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장마가 너무 싫다…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 이 대사는 표면적으로는 지겹게 내리는 비를 가리키지만, 사실 끝나지 않는 부모의 싸움과 냉랭한 분위기에 지친 마음을 투영한 것이다. 소마이 신지 감독은 이렇게 가족 붕괴의 전조를 시각적 배치와 음향으로 섬세하게 엮어내며, 관객에게 앞으로 닥칠 이야기의 정조를 각인시킨다.
그 후 아버지 켄이치가 결국 집을 나가면서 부모의 별거는 현실이 된다. 한때 추억이 깃든 교토의 가정집은 이제 짐이 꾸려지고 낯선 침묵만 감도는 공간적 균열의 현장이 되어버렸다. 렌코는 아직 이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처음 부모의 별거 사실이 드러났을 때만 해도 그녀는 그 심각성을 애써 부인하며 명랑한 척 가장한다. 부모 앞에서는 아무 일 없는 듯 굴고, 친구들 앞에서는 허세를 부리며 웃어 보인다. 자신이 불안하고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렌코는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부모의 이혼이 남긴 여파는 서서히 렌코의 일상과 피부에 와닿기 시작한다. 부정으로 일관하던 그녀의 내면에는 점차 분노와 슬픔이 뒤섞인 거센 감정의 폭풍이 일어난다. 이 단계에서 렌코는 주로 공격적인 행동으로 좌절감을 표출하기 시작한다. 엄마와 사소한 말다툼을 벌이고 학교 수업을 빼먹는 정도로 시작했던 반항은 걷잡을 수 없이 과격해진다. 마침내 그녀는 학교에서 충격적인 일탈 행동을 저지르는데, 교실의 커튼에 불을 지르는 것이다. 순진하고 밝기만 하던 소녀 렌코가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행동을 벌이는 장면은, 그녀 내면의 고통이 얼마나 절박하고 격렬한지 관객에게 각인시킨다. 치솟는 불길은 렌코의 통제불능의 분노를 상징한다. 동시에 자신의 세계가 무너지는 것을 막지 못하는 무기력감에 대한 반작용으로도 읽힌다. 불길을 보고 달려온 교사들과 아이들이 아수라장을 이루는 동안, 렌코의 내면 역시 산산조각나고 있었다.
불을 낸 후 곧바로, 렌코는 교실을 뛰쳐나간다. 그녀는 빗물이 흥건한 운동장을 가로질러 집으로 향한다. 마침 세찬 비가 퍼붓는 날이었다. 렌코는 체육복이 흠뻑 젖은 것도 모른 채 비 내리는 거리를 내달리며 오열한다. 이때 쏟아지는 장대비는 마치 그녀의 분노와 절망을 대신 토해내는 자연의 눈물 같다. 실제로 소마이 감독의 영화에서 물과 비는 종종 인물들의 압도적인 감정이 분출되는 통로로 활용된다. <태풍클럽>에서 폭우 속 아이들이 금기에 얽매이지 않고 춤을 추며 해방감을 만끽할 때, 그 빗물은 억눌린 청춘의 울음을 대신해주는 장치였다. 마찬가지로 <이사>에서도 갑작스런 폭우는 렌코가 평소 꾹 참고 눌러왔던 슬픔과 분노를 한꺼번에 쏟아내게 하는 계기가 된다. 한편 렌코가 밤마다 “장마가 빨리 끝났으면” 하고 중얼거렸던 것은 단순한 날씨 이야기가 아니다. 부모의 불화로 이어지는 이 질척한 시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별의 계절이 하루빨리 지나가버리길 바라는 그녀의 마음인 것이다.
극단적인 분노의 불꽃을 한바탕 태워버린 후, 렌코는 심신이 탈진한 상태에 이른다. 더 이상 화를 내기도 싸울 대상도 남지 않자, 그녀는 집을 뛰쳐나가기로 한다. 부모와의 갈등에서 도망치고 싶은 충동은 원초적 본능처럼 렌코를 이끈다. 이렇게 해서 렌코는 가출을 감행한다. 하지만 집을 등지고 거리로 나온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렌코의 앞에는 낯선 바깥세상이 펼쳐진다. 교토 시내의 밤거리는 화려한 네온사인과 자동차 불빛으로 번쩍이지만, 정작 그녀에게 갈 곳은 없다. 인파로 붐비는 번화가를 어린 소녀 혼자서 목적 없이 떠돌기 시작한다. 렌코가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서 있는 숏에서는, 수많은 어른들 다리 사이에 조그만 아이 하나가 덩그러니 서 있는 모습이 포착된다. 파란 불이 켜지자 사람들은 일제히 건너기 시작하지만, 렌코는 한 박자 늦게 휩쓸리듯 그들을 따라 건넌다.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가는 장면에서는, 렌코를 뒤쫓던 카메라가 도중에 멈춰 서서 위로 올라가 버린다. 화면 안에서 렌코의 모습은 사라지고 분주히 오가는 군중들만 남는다. 한 쇼트 안에서 카메라 시선이 렌코를 놓쳐버리는 이탈은, 세상은 여전히 굴러가지만 정작 자신은 그 흐름에서 탈락되어 버린 듯한 렌코의 심정을 대변한다.
이후에도 렌코가 거리를 배회하는 장면들은 비슷한 패턴으로 반복된다. 같은 거리를 몇 번이나 맴도는 듯한 동선, 이미 지나친 적 있는 간판 앞을 다시 지나치는 모습 등은, 그녀의 방황이 단순한 물리적 배회가 아니라 제자리걸음치는 심리 상태임을 암시한다. 카메라는 대부분 렌코의 뒷모습이나 먼 거리에서 그녀를 지켜볼 뿐이다. 관객은 렌코의 얼굴 표정을 똑똑히 읽을 수 없고, 오히려 멀찍이서 보이는 그녀의 작고 초라한 등짝과 터벅터벅한 발걸음을 통해 그 처지를 짐작할 뿐이다. 이러한 정서적 거리두기 연출은 오히려 관객의 애상을 자극한다. 마치 손 내밀면 닿을 듯하지만 결국 닿지 않는 거리에서, 우리는 이 작고 외로운 존재의 쓸쓸함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다. 특히 렌코가 어둑한 골목길에 들어서는 장면은 상징적인 강렬함을 남긴다. 가로등 불빛마저 닿지 않는 협소하고 어두운 골목, 그 한복판에 렌코의 가냘픈 실루엣이 한동안 멈춰 서 있다. 그리고 렌코 앞바닥에는 녹슨 철로 조각 하나가 길게 놓여 있다. 오래 전에 쓰이다 만 전차 선로인지, 한쪽 끝이 끊겨 더 이상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는 레일이었다. 렌코는 그 선로가 뚝 끊어진 지점에 멍하니 서 있다. 말 한마디 없이도 이 이미지는 엄청난 것을 암시한다. 막막한 막다른 길에 홀로 선 소녀, 그리고 앞으로는 길이 없다. 렌코가 처한 절망감이 이 짧은 숏 하나에 응축되어 있다. 비록 렌코는 극단적인 선택까지 내몰리지는 않지만, 이 장면은 그녀가 느끼는 삶의 밑바닥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흥미롭게도 이후 숲속 장면에서 들려오는 기차 종소리는, 이 끊어진 철로에 대한 하나의 응답처럼 울려 퍼진다. 한때 삶의 선로가 끊겼던 렌코가 마침내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설 것임을 예고하는 섬세한 연결 장치다.)
렌코의 이 도시 속 방황 장면들은 영화에서 가장 긴박하면서도 쓸쓸한 대목이다. 소마이 신지 특유의 현실 밀착적이면서도 몽환적인 영상미는 이 부분에서 절정을 이룬다. 눈부신 도시의 조명과 깊게 드리운 그림자의 대비, 군중 속에서의 고독 등은 근대 도시의 멜랑콜리를 자아낸다. 안토니오니의 영화들이 도심 속 개인의 소외를 묘사한 감수성과도 통하는 면이 있지만, 소마이는 여기에 일본적 정서와 아동의 시선을 덧붙여 한층 독자적인 색채로 승화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도회적 방황은 서사적으로도 의미를 지닌다. 심리학적으로 애도의 과정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실도피적 방황인 것이다. 렌코는 집을 뛰쳐나오면 문제를 피해 달아날 수 있으리라 믿었지만, 막상 세상은 그녀를 따뜻하게 받아주지 않는다. 거리는 낯설고 도시는 냉랭하며, 주위 어디에도 손 내밀어 도와줄 어른이 없다. 이렇게 철저히 고립된 상황에서, 렌코는 비로소 자신의 슬픔의 본질과 마주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렌코의 방황이 극에 달해갈 즈음, 영화는 분위기를 다시 반전시켜 우리를 한여름 축제의 한복판으로 데려간다. 우연일까 필연일까, 렌코는 정처 없이 헤매다가 마침 한 전통 축제가 벌어지는 시골 마을 광장으로 흘러들어간다. 이는 렌코가 가족과 함께 여행 갔던 추억이 있는 비와호 인근 마을이기도 하다. 앞서 집을 나온 렌코는 마지막 희망을 걸고 이곳 불꽃놀이 축제에 부모와 같이 오기로 약속을 잡았었다. 행복했던 장소에 다시 가면 엄마 아빠도 예전처럼 웃을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렌코는 엄마의 신용카드를 몰래 가져와 열차표와 호텔방까지 혼자 예매하며 철저히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축제 당일, 부모는 함께 여행을 왔음에도 또다시 사소한 말다툼을 벌였고 쌓였던 불신이 튀어나와 언성을 높였다. 렌코가 그토록 공들인 가족 재결합의 시도는 시작부터 어긋나 버린 것이다. 절망한 렌코는 울고 있는 엄마를 뒤로 한 채 그 자리를 박차고 달아났다. 그렇게 뛰쳐나온 렌코가 불빛 가득한 축제 거리를 헤매고 있을 때, 한 노인이 그녀를 발견한다. 그 노인은 마치 동화 속 등장인물처럼 다가와 길 잃은 소녀를 이끌어준다. 처음 보는 어린 아이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건네는 이 노인은 어딘지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긴다. 그는 렌코를 ‘사치코’라고 부르며 다정하게 자기 집으로 데려간다. 노인의 허름한 집에서 렌코는 모처럼 따뜻한 환대를 받는다. 둘은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않지만 마주 앉아 온기를 나눈다. 카메라는 이 장면을 종적인 구도로 잡아, 바닥에 앉은 렌코와 그보다 높은 의자에 걸터앉은 노인을 한 프레임에 담는다.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렌코의 시선에는 오랜만에 어른에게 의지하는 아이의 모습이 비친다. 실제로 영화 전반을 통틀어 렌코가 어른에게 이렇게 몸을 기대고 순종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부모에게조차 반항적이던 렌코가, 이 낯선 노인 앞에서는 얌전하고 순한 어린아이처럼 굴기 시작하는 것이다. 노인의 존재는 렌코에게 부모를 대신할 보호자, 다정한 할아버지 같은 상징으로 다가온다. 현실의 아버지는 자신의 상처에 묶여 딸을 돌볼 여력이 없었지만, 이 환상 속의 노인은 딸 또래 소녀에게 자상한 조언과 도움을 건네는 이상화된 부성이다. 소마이 감독은 이 만남을 통해 렌코가 간절히 필요로 했던 어른에 대한 신뢰와 위안을 잠시나마 충족시킨다.
노인은 렌코의 등을 토닥이며 조곤조곤 말한다. ‘괜찮다, 다 괜찮을 거야…’ 마치 힘내라는 주문처럼 소녀를 달랜다. 렌코는 지친 나머지 노인의 집에서 잠깐 눈을 붙인다. 어둑한 방 안, 창문 너머로 달빛이 렌코의 얼굴에 희미하게 내려앉는다. 폭풍 같은 감정의 밤을 보낸 그녀는 모처럼 평온한 숨결을 내쉬며 깊은 잠에 빠진다. 이 고요한 휴식의 순간은 앞서 쉴 새 없이 분출되던 감정 장면들과 뚜렷이 대비된다. 한바탕 폭풍우가 지나간 후의 적막처럼, 렌코의 방황에도 일시적인 숨 고르기가 찾아온 것이다. 노인의 존재 덕분에 렌코는 잠깐이나마 정신적인 보호막을 얻고, 최종적으로 자신과 대면할 용기를 충전하게 된다.
잠시 후 렌코와 노인은 함께 마을의 축제 구경에 나선다. 밤이 되자 산등성이마다 거대한 불꽃 글자가 타올라 여름 하늘을 수놓는다. 사람들은 호숫가에 모여 폭죽을 터뜨리고 환호성을 지른다. 렌코는 노인을 따라 인파 속을 천천히 거닌다. 도심에서의 불안정하고 빠른 걸음과는 달리, 이곳에서의 카메라는 몽환적일 정도로 느릿하고 유유자적이다. 군중 사이를 떠도는 렌코를 잡은 롱테이크 숏에서, 화면은 사람들의 움직임을 따라 서서히 패닝하며 불꽃놀이로 가득한 밤하늘을 훑는다. 시간이 흐르는 감각마저 달라진 듯하다. 렌코 역시 분주함을 잃고, 몰려드는 사람들 사이를 둥둥 떠다니듯 나아간다. 현실의 중력에서 풀려난 꿈결 같은 시간이 그녀를 감싼다. 호숫가 한쪽에 축제의 클라이맥스로 준비된 불꽃배가 떠 있다. 노인은 렌코에게 저것을 구경하자며 사람들 속을 헤치고 앞으로 데려간다. 불꽃배에 불이 붙고, 밤하늘을 향해 수없이 많은 불꽃들이 쏘아 올려진다. 그 폭죽 소리가 온 동네에 울려 퍼지고 사람들은 일제히 탄성을 지른다. 그런데 바로 그때, 렌코는 갑자기 배가 아픈 듯 웅크리고 앉는다. 순간 주변의 함성과 폭죽 소리가 멀어지더니, 대신 그녀의 거친 숨소리와 쿵쾅거리는 심장 박동이 크게 들리는 것만 같다. 눈앞에 번쩍거리던 불꽃의 잔상은 뭉개져 시야를 가득 메운다. 마치 현기증에 휘청이는 사람처럼, 렌코의 지각이 혼미해지기 시작한다. 이 감각적인 연출은 관객을 렌코의 내면으로 끌어들여, 지금 이 순간 그녀의 현실 인식이 무너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허물어지며, 렌코는 무의식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 렌코의 눈에 익숙한 얼굴 하나가 들어온다. 축제 인파 속에서 렌코를 찾아 헤매던 엄마 나즈나와 마주친 것이다. 갈라섰던 모녀는 불꽃놀이의 불빛 아래 얼떨결에 재회한다. 나즈나는 딸을 끌어안지는 못하고 두 팔로 그녀의 어깨를 붙잡은 채 절박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눈물이 범벅이 된 엄마는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라며 자책한다. 그러자 렌코가 오히려 엄마를 다독이듯 말한다. ‘이제 다 괜찮아요… 금방 제가 어른이 될게요.’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법한 이 대사는 보는 이의 가슴을 찌른다. 불과 열두 살에 불과한 딸이 엄마를 위로하며 자신이 빨리 철들겠다고 약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묘한 순간, 부모와 자녀의 역할은 완전히 뒤바뀐다. 렌코는 엄마를 안심시키려 애쓰지만, 그 목소리에는 슬픔과 체념이 서려 있다. 자신도 어쩔 수 없이 빨리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씁쓸한 다짐이기 때문이다. 나즈나는 그런 딸을 부둥켜안고 흐느끼지만, 잠시 후 렌코는 한 발 물러서더니 다시 몸을 돌려 뛰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엄마마저 뒤로 하고, 자신의 여정을 끝까지 완수하기 위해 달려나가는 것이다. 짧은 이 만남과 이별은 축제 장면을 렌코 개인의 커다란 카타르시스로 변모시킨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존재인 엄마에게조차 이제 기대지 않고 스스로 나아가겠다고 결심한 그 순간, 렌코의 얼굴에는 눈물이 흘러내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소 같은 표정이 스치고 지나간다. 그리고 그녀는 깊은 어둠이 드리운 숲속을 향해 내달린다.
축제의 북적임과 불빛을 뒤로 한 채, 렌코는 홀로 깊은 산속으로 들어간다. 달빛 아래의 숲은 푸른 안개가 자욱하고 나뭇가지들의 그림자가 길게 뻗쳐 있다. 현실성은 희미해지고 동화 같은 몽환적 분위기가 짙게 깔린다. 렌코는 밤새도록 숲을 헤매며 정처 없이 걸음을 옮긴다. 그동안 그녀의 내면에서는 한바탕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현실에서 해답을 찾지 못한 소녀의 마음이 마침내 무의식의 영역으로 뛰어든 것이다. 이 숲은 렌코의 무의식 그 자체처럼 보인다.
그렇게 새벽녘에 이르렀을 때, 렌코는 호숫가에 다다른다. 물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호수 위로 희미한 환영이 어른거리기 시작한다. 축제에서 보았던 불꽃배가 아직도 호수 위에 떠 있다. 그리고 그 앞쪽 물가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물장구를 치며 놀고 있다. 렌코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모습을 바라본다. 점차 형체들이 분명해지자, 그녀는 깜짝 놀란다. 물가에서 장난치며 웃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가족이다. 멀지 않은 과거, 행복했던 어느 여름날의 한 장면이 눈앞에 재현된 듯하다. 아빠 켄이치와 엄마 나즈나, 그리고 어린 시절의 꼬마 렌코까지—세 사람이 환하게 웃으며 물속에서 장난을 치고 있다. 현재의 렌코는 풀숲 너머에 몸을 숨긴 채, 숨죽이고 그 광경을 지켜본다.
잠시 후 환영 속의 아빠와 엄마는 물놀이를 멈추고 천천히 몸을 돌린다. 그리고 함께 손을 잡고 호수 쪽으로 걸어들어가기 시작한다. 꼬마 렌코도 그들을 따라 나아간다. 현재의 렌코는 숨을 죽인 채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가족 셋은 허리께까지 물에 잠기더니 이내 온몸을 물속에 담근다. 잔잔한 호수 표면 아래로 세 사람의 형체가 서서히 가라앉아 보이지 않게 되기까지, 렌코는 충격에 질린 얼굴로 그 자리에서 얼어붙는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풀숲 밖으로 뛰쳐나가 물가로 달려간다. ‘어디 가요?! 왜 저를 두고 가요?!’ 렌코가 울부짖으며 외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녀의 목소리는 고요한 새벽 공기를 타고 허공으로 흩어질 뿐이다. 이 기묘하고도 처참한 환상은 렌코의 무의식 깊숙이 억눌려 있던 최악의 두려움을 눈앞에 펼쳐 보인다. 부모와 자신의 어린 시절이 호수 속에 수장되는 모습은, 렌코가 마음 한구석에 품고 있던 가족 재결합의 희망이 완전히 죽어버렸음을 상징한다. 동시에 그것은 렌코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버려짐’과 ‘상실’의 순간을 적나라하게 마주하는 트라우마적 체험이기도 하다.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이 영원히 자신을 떠나 먼 저편으로 가버리는 광경을, 렌코는 고스란히 지켜봐야 했다.
그런데 이 처절한 환상이 지나가고 난 직후, 렌코의 반응은 의외의 방향으로 흘러간다. 물속으로 가족이 자취를 감추자, 렌코는 울부짖던 것을 멈추고 갑자기 조용해진다. 그리고는 눈물을 훔치더니, 멀리 사라져간 불꽃배를 향해 밝은 목소리로 외친다. ‘축하합니다! … 감사합니다!’ 그녀는 마치 저편 어딘가에 있을 부모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듯, 허공에 대고 인사를 올린다. 표정에는 오랜 응어리가 풀린 사람처럼 편안한 미소가 떠오른다. 이는 이별에 대한 일종의 의례적인 작별인사처럼 느껴진다. 그 순간 렌코는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부모는 결국 언젠가 자신을 떠나 저 세상으로 가버릴지도 모르는 존재이며, 자신은 혼자서도 살아가야 한다는 운명을. 그리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은 듯하다. 그래서 그녀는 환상 속 부모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보내고, 마음속으로 그들을 떠나보낸다. 마치 ‘고마웠어요. 이젠 안녕’이라고 말하듯이. 이때 배경에 깔리는 세에구사 시게아키의 음악은 서늘한 비극감과 묘한 안도감이 뒤섞인 정서를 자아낸다. 슬프지만 경쾌한 선율은, 렌코의 어린 시절이 막 장례를 치르고 저물었지만 곧 새롭게 태어날 다음 단계의 자아를 예고하는 진혼곡이자 탄생곡처럼 들린다. 렌코는 이렇게 꿈같은 환상을 통과하면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상실을 애도하고, 현실로 돌아갈 힘을 얻은 셈이다. 정신분석적으로 본다면, 이 일련의 환상 체험은 렌코가 무의식 속 작업을 통해 트라우마를 재현하고 승화함으로써 자아의 안정을 되찾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환영이 사라진 뒤 적막이 찾아온 숲속, 문득 어디선가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렌코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안개 낀 나무들 사이로 빨간 원복을 입은 여자아이 하나가 나타난다. 다름 아닌 꼬마 렌코다. 현재의 렌코는 자기 눈을 의심하며 조심스레 아이에게 다가간다. 꼬마 렌코는 눈물을 글썽이며 묻는다. ‘엄마, 아빠 어디 갔어? 나 혼자 두고 어디 가버린 거야…?’ 현재의 렌코는 아무 말 없이 다가서더니 꼬마 아이를 꼭 끌어안는다. ‘괜찮아… 울지 마’ 그녀는 조용히 속삭이며 어린 자신의 등을 토닥여준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카메라 숏에는, 한붉은 원복을 입은 작은 아이와 하얀 셔츠 차림의 소녀가 포개지듯 껴안고 서 있는 모습이 포착된다. 어둑한 숲 바닥과 회청색의 여명 하늘로 가득한 화면 속에서, 둘이 맞닿은 지점만이 유일하게 생생한 색을 띤다. 두 렌코가 마치 한 몸처럼 껴안고 있는 이 이미지에는 찢어졌던 자아의 재결합이라는 상징이 응축되어 있다. 꼬마 렌코는 그동안 현재의 렌코 내부 깊숙이 숨어 있던 상처받고 두려워하던 내적 아이다. 부모의 사랑을 잃을까 봐 전전긍긍하며 울던 어린아이 자아. 현재의 렌코는 그 내면아이를 외면한 채 분노와 방황으로 현실을 피하려 했지만, 마침내 용기를 내어 눈앞에 나타난 자신의 어린 자아를 따뜻하게 끌어안는다. 두 개로 찢어졌던 자아가 다시 하나로 통합되는 순간이다. 바로 그때, 멀리서 달그락달그락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와 함께 맑은 종소리가 숲속에 울려 퍼진다. 영화의 처음과 끝에 등장하는 이 기차 종소리는 렌코 인생의 변곡점을 알리는 은유적 장치다. 종소리를 들은 현재의 렌코는 희미하게 미소 짓는다. 그리고 꼬마 렌코의 눈물을 손수 닦아준 다음, ‘이젠 정말 괜찮아졌어’라는 듯한 표정으로 아이를 토닥인다. 그러자 놀랍게도 꼬마 렌코의 모습이 스르르 연기처럼 흩어지더니, 어느새 품 안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현재의 렌코 홀로 숲 한가운데에 남겨지고, 어느덧 동이 트기 시작한 새벽 햇살이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들고 있다.
이어지는 장면은 <이사>의 엔딩을 장식하는 백미다. 길고도 우아한 롱테이크 숏으로 촬영된 이 장면은 시간의 흐름과 주인공의 성장을 한 호흡에 담아낸다. 숲속에서 빠져나온 렌코는 새벽빛이 희붐한 숲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나온다. 렌코의 상상 속 미래 장면들일까, 화면 속에서 렌코는 밝게 웃으며 길가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아빠의 어깨를 주물러 주기도 하고, 엄마에게 예쁜 꽃을 건네기도 한다. 이 몽타주 같은 장면들은 실제 현실의 한 장면이라기보다는 렌코의 다짐이 빚어낸 내면의 이미지에 가깝다. 현실에서 부모의 이혼 상태는 변함이 없지만, 렌코는 더 이상 어제처럼 울거나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자기 삶을 끌어안기로 선택했고, 부모와의 관계도 이제는 새로운 지평에서 받아들이려 한다. 카메라는 그녀를 옆에서 따라가며 트래킹하는데,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렌코가 한 그루 나무 뒤로 지나가 잠깐 보이지 않는 순간이 올 때마다, 화면에 다시 등장하는 렌코의 모습이 달라져 있는 것이다. 처음 나뭇그늘에 가리기 전까지는 축제 때 입었던 원피스 차림의 12살 렌코였다. 그러나 첫 번째 나무를 지나 나온 렌코는 중학생 교복을 입고 있다. 그녀는 계속 앞으로 걸어간다. 두 번째 나무 기둥 뒤로 렌코가 사라졌다가 나타났을 때, 이번에는 고등학생 교복 차림의 렌코로 성장해 있다. 마술 같은 이 장면은 롱테이크 기법 속에 숨은 컷을 심어 촬영된 것으로, 나무 기둥을 경계로 시간의 도약을 우아하게 표현해낸다. 렌코가 나무를 한 번 지날 때마다 몇 년씩 시간이 흐른 셈이고, 관객은 그녀의 미래 모습을 연속적으로 목격하게 된다.
그렇다고 영화가 이 결말을 단순한 해피엔딩으로 그리는 것은 아니다. 클로즈업 속 렌코의 웃음에는 어딘지 모를 쓸쓸함이 배어 있고, 미래의 렌코 얼굴에는 강인함과 동시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의 흔적이 남아 있다. 관객은 그녀가 분명 성장했지만 완전히 행복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제 렌코는 더 이상 어제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녀는 자신의 슬픔과 화해했고, 설령 세상이 바뀌지 않더라도 스스로를 바꿀 준비를 마쳤다. 열린 결말로 묘사되는 이 시퀀스는 <이사>가 궁극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응축한다. ‘삶은 계속 움직이고, 우리는 상처 입으면서도 앞으로 나아간다.”’새벽 공기를 가르며 당차게 걸음을 옮기는 렌코의 뒷모습이 바로 그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긴 여운을 남긴다. 부모의 이혼이라는 현실은 끝내 바뀌지 않는다. 켄이치와 나즈나는 결국 갈라섰고, 렌코가 바라던 대로 한집에 다시 모이는 일은 없다. 그러나 <이사>는 그러한 현실의 냉혹함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그 속에서 회복과 성장의 가능성을 발견해낸다. 렌코는 비록 부모를 다시 맺어주진 못했지만, 대신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살아남는 법을 배운다. 이것이 바로 결말이 제시하는 희망의 조각이다. 렌코의 감정 표현 방식 변화를 보면 이러한 회복의 단서를 알 수 있다. 영화 초반의 렌코는 부모를 붙잡기 위해 공격적 행동을 일삼았지만, 정작 자신의 진짜 감정—슬픔과 두려움—은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다. 친구들 앞에서는 허세를 부리고, 부모 앞에서는 씩씩한 척하며 울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그러나 결말에 이르면 렌코는 마침내 울음을 터뜨린다. 그것도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목놓아 통곡함으로써, 그간 가슴에 응어리졌던 슬픔을 모두 쏟아낸다. 또한 축제 밤에 엄마와 재회했을 때 ‘제가 이제 금방 어른이 될게요’라고 고백한 대목은, 렌코가 자신의 아픔과 책임감을 비로소 언어화한 순간이었다. 치료적으로 보자면 이는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단계, 즉 ‘감정의 인정과 표현’에 해당한다. 렌코는 더 이상 분노와 도피 뒤에 숨지 않고, 드러내 울고 말하며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할 것인지 스스로 약속함으로써 자기 마음을 똑바로 들여다보게 된다. 이러한 결심은 이어지는 숲속 독백과 엔딩 댄스 장면에서 행동으로 구현된다. 렌코는 엄마에게 ‘이젠 다 괜찮다’고 말했고, 실제로도 상처를 딛고 미래로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춤추는 발걸음으로 보여준다. 도망치거나 괴로워하는 대신, 기꺼이 세상과 부딪치고 주위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렌코의 감정 조절 능력이 회복되었음을 느낄 수 있다. 한때 파괴적으로만 표출되던 그녀의 감정이 이제는 공유와 소통의 형태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요소는, 영화가 ‘죽음’과 ‘환상’의 경험을 통해 주체의 재구성을 암시한다는 점이다. 렌코는 환상 속에서 부모와 과거의 자기 자신이 죽음처럼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상징적인 장면이지만 렌코에게는 현실만큼이나 큰 충격요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체험을 지나오자 렌코는 마치 한 번 죽었다 다시 태어난 사람처럼 변화한다. 가장 두려워하던 죽음을 받아들이고 나니, 역설적으로 삶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이러한 설정은 소마이 신지의 다른 작품들과도 연결된다. 그의 영화에서는 때때로 실제 죽음 이후에 찾아오는 초자연적 재생이 묘사되곤 한다. 예를 들어 <도쿄 하늘 반갑습니다>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소녀는 천계에서 부활해 다시 삶을 즐기고, <여름정원>에서는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아이들 앞에서 수많은 나비 떼로 환원되는 장면이 나온다. <이사>에서도 렌코는 유년의 ‘죽음’을 환상 속에서 경험한 뒤, 성숙한 소녀로 환생하는 모티프를 취하고 있다. 이때 환상은 단순히 현실을 도피하는 장치가 아니다. 오히려 현실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한 심리적 통로 역할을 한다. 죽음의 환상을 통과하면서 렌코는 자신의 내면 지형을 재편하고, 스스로를 다시 구성해낸다. 그 결과 이제 렌코는 더 이상 부모 결정에 일희일비하는 피해자적 아이가 아니다. 오롯이 자기 삶의 방향을 선택하는 능동적 주체로 거듭난 것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어린아이가 처한 상황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의식의 전환 자체가 치유의 핵심임을 영화는 보여준다. 렌코가 ‘나는 나만의 길을 갈 거야’라고 선언하는 순간, 그녀는 더 이상 상황에 휘둘리는 소녀가 아니라 자기 운명의 키를 잡은 주체가 된다.
영화의 마지막 순간, 렌코는 관객에게 등을 보인 채 먼 길을 향해 걸어간다. 결국 렌코는 지난날을 마음속으로나마 흙에 묻고, 머리를 자를 것이며, 동터 오는 새벽과 함께 다시 세상으로 나올 것이다. 그렇게 변화한 모습으로 월요일 아침 학교에 갈 준비를 할 것이다. 인생의 휴일은 끝났지만, 곧 월요일의 종이 울릴 것이고 렌코는 그 소리를 들으며 힘찬 걸음을 내딛을 것이다.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관객의 마음에는 씁쓸함과 함께 희미하지만 분명한 희망이 피어난다. 상처 입으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삶이고 성장임을, 영화 <이사>는 렌코의 눈부신 여정을 통해 가슴 뭉클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사>는 사춘기 소녀의 아픔을 그린 가족영화인 동시에, 영화언어의 실험을 통한 정신분석 드라마다. 소마이 신지는 부모의 이혼이라는 흔한 소재를 택해, 그것을 영화적 모더니즘의 빛깔로 물들였다. 영화 내내 현실과 환상을 오가며 주관적 체험을 형상화한 방식은, 90년대 일본 영화에서는 보기 드문 대담한 시도였다. 특히 아이의 시각에서 세계를 조각내어 보여준 기법은 이 영화만의 독창적 성취로 손꼽힌다. 관객은 렌코와 함께 혼란을 겪고, 함께 성장한다. 이러한 정서적 트라우마의 형상화는 영화 매체가 지닌 치유적 힘을 깨닫게 한다. 마치 꿈을 꾸는 듯한 시청각 경험 속에서 우리는 렌코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내면 아이와 마주할 용기를 얻는다. <이사>는 일본적 정서 – 이를테면 공동체보다 개인에 초점을 맞춘 멜랑콜리, 자연과 전통을 통한 치유 등 – 를 현대적 영화문법에 융합함으로써, 당대 청소년 서사의 지평을 넓혔다. 소마이 신지의 영화문법과 소아,청소년 정신의학적 주제가 절묘하게 교차하는 이 작품은, 영화를 통한 심리 드라마의 가능성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는 롱테이크와 미장센으로 인물의 심리를 말없이 드러냈고, 환상과 리얼리티를 결합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진실을 전달했다. 이러한 접근법은 이후 많은 일본 감독들에게 영감을 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실제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일련의 작품들에서 이혼 가정이나 결손가정 아이들의 시선을 따스하게 그린 데에는 <이사>의 영향이 엿보인다. 또한 쿠로사와 기요시의 <도쿄 소나타>는 경제위기 속 해체되는 가족을 묘사하며 <이사>의 주제의식을 계승했고, 니시카와 미와 등은 상실과 성장을 잇는 테마를 발전시켰다 이처럼 <이사>는 시대를 앞서간 작품으로서 오늘날에도 그 예술적·치유적 가치가 재평가받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사>가 던지는 질문들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언급하고 싶다. ‘부모가 헤어지면 아이는 어떻게 상처를 이겨낼 수 있는가?’, ‘어른들의 세계가 무너질 때 아이는 어디에 기댈 것인가?’, 그리고 ‘결국 우리는 스스로 성장할 수밖에 없는가?’ 같은 문제들이다. 영화는 이러한 물음에 명확한 답을 주진 않는다. 다만 정직하게 응시하고 끝까지 따라간다. 렌코의 하루 – 그 고통스러운 휴일이 끝나고 나서도, 삶은 계속된다. 그녀는 상처를 안고도 웃는 법을 배웠고, 춤추듯 인생을 마주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완벽한 치유도 해피엔딩도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상처를 품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삶의 한 형태임을 영화는 가르쳐준다. <이사>는 한 소녀의 이야기에 국한되지 않고, 상처 입은 모든 청춘들의 성장 서사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렇기에 3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보아도 이 작품은 전혀 낡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깊은 울림을 준다. 우리 모두 마음속에 어린 렌코를 안고 살아가기 때문이 아닐까. 소마이 신지의 이 위대한 영화는, 앞으로도 많은 이들의 가슴에 조용한 위로와 용기의 불꽃을 피워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