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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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블루레이가 도착했다. 양덕창의 이 영화가 대만 뉴웨이브의 전설인건 알고 있었지만 내가 양덕창을 만난건 ‘하나 그리고 둘’이 처음이었다. 이 말은 허우샤오시엔의 비정성시를 만난 다음 차이밍량의 애정만세를 만난 다음 양덕창을 만났다는 이야기다. 너무 늦게 만난 양덕창의 하나 그리고 둘은 큰 감흥이 없었다. 나는 그렇게 양덕창을 오해했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비정성시와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장제스를 따라 중국본토의 사람들이 대만으로 이주했던 시절, 국민당은 대만의 원주민을 학살하는 2.28사건을 일으킨다. 사회는 반공사상으로 가득했고 독재에 항거하는 시민들의 봉기가 두려워 빨갱이를 잡는다는 명목 아래 중국본토에서 온 지식인들은 색출하여 처단하던 시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 장첸의 아버지는 그런 지식인중 하나였다. 영화는 대만 최초로 미성년자가 같은 학교의 여자동급생을 살해했던 실화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그렇지만 양덕창은 살인사건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살인을 저지른 주인공을 중심으로 10개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 주변의 인물들 탐구하고 관조한다. 하나의 사건을 통해서 그 사회을 투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인물들의 행동에, 지나가는 말 한마디에, 소년들의 관계와 풍경을 거리를 두고있는데 그걸 바라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그 안에 대만이라는 사회의 지옥도가 보인다. 다른 대만 뉴웨이브와 차이가 있다면 허우샤오시엔이나 차이밍량은 카메라가 사건이나 대상에서 멀리 떨어져 우리에게 영화를 바라보게 한 다음 그 거리에서 차갑게 끝맺음 한다. 그래서 그 자리에 깊은 어찌할수 없는 한숨이 남는다. 반면 양덕창의 영화는 멀리서 바라보게 한다는 점은 같지만 영화가 끝나면 끝내 우리가 그 인물들을 감싸안고 있다는걸 깨닫게 한다. 이상하게 그 영화엔 깊은 연민이 남는다. 이 영화에서 장첸이 샤오밍을 죽이기전 만나기 위해 기다리는 순간부터 그녀를 찌르기까지의 시퀀스는 이 영화에서 매우 특별하다. 지금까지 모든 시퀀스가 대상과 카메라가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인물들이 카메라 가까이 걸어 들어오기 시작한다. 너무 가까이 들어온 나머지 장첸이 샤오밍을 찌르는 장면을 감싸안은것처럼 찍었다. 소년은 소녀를 좋아했고 끝까지 지켜주고 싶었으나 결국 그는 믿지 못했다. 자신을 믿지 못했는지 소녀을 믿지 못했는지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 게다가 사랑이라는 단어는 이 영화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이 영화에 관한 글들을 읽으면 모두가 같은 이야기를 한다. 아름답고 슬프고 걸작이다. 그도 그럴것이 영화에는 어떤 영화적장치나 은유적 기법, 트릭이나 발견할만한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저 카메라가 인물과 풍경에 거리를 두고 한없이 바라보고 우리는 그안에서 이상하게 시대를 마주하게 되고 감정을 느끼게 되고 슬픔이 전달되고 인물을 감싸안게 된다. 26년만에 이영화를 보고 왜 지금은 이런방식으로 아무도 영화를 찍지 않을까 생각했다. 양덕창은 세상을 떠났고 차이밍량은 영화를 중단했고 허우샤오시엔은 점점 더 모던해진다. 아시아 영화의 어떤 방식이 사라지자 아시아 영화는 힘을 잃기 시작했다. 지금 아시아엔 누가 남았을까? 아핏차퐁은 태국을 떠나버렸고 홍상수는 한국이 그를 떠나버렸다. 지아장커는 장르화되며 점점 수상해지고 왕빙의 영화는 한국에서 정식개봉한적이(할 가능성도) 없다. 아시아는 점점 우경화되고 영화는 늙어가고 있다. (이 자리에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끼워줄 생각이 없다) 그래서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을 만나건 올해 내가 두번째로 잘한 일이다. 아시아 영화의 시작점에 다시 선 기분이다. 올해 가장 잘못한건 이걸 책장수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보자고 했을때 피곤하다는 핑계로 보지 않은 것이다. 내 나이에 3시간 57분짜리 영화는 견디는건 각오를 단단히 해야한다. 그러나 실제로 블루레이가 돌아가자 이 영화는 단숨에 볼수 있었다. 보고 나서 정성일 쌤의 코멘터리를 한시간정도 더 들으면서 다시 보았다. 아마도 올해의 최고작이 될것이고 평생에 기억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