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몇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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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일본 영화를 여럿 돌려 보았다. 먼저 미조구치 겐지의 1953년작 우게츠 이야기. 이상하게도 다른 50-60년대 일본영화 감독 작품은 다 봐도 그의 작품은 계속 보지 않고 있었다. 뭔가 꺼내놓고 오래되어 눅눅해진 식빵의 느낌이랄까. 아무튼 제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본 건 처음인데 역시나 보지 말걸 그랬다. 물론 몇몇 인상적이 숏들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여전히 전설의 고향에서 얼마나 더 나아갔는지 잘 모르겠다. 두 번째는 역시나 미조구치 겐지의 1954년작 산쇼다유. 이건 우게츠 이야기와 달리 매우 좋았다. 영화는 전국시대 배경인데 힘든 백성을 돕기 위해 세금을 면해주는 등 조정의 명령을 어긴 관리 히라마사가 유배를 가며 남겨진 아내와 자식들의 고난을 다룬 영화이다. 특히 수용소에서 탈출하는 오빠를 위해 동생이 바다에 몸을 던지는 장면은 너무나도 인상적이었다. 브레송의 무셰트가 연상되었는데 브레송이 그것이 중력과 은총을 시각화한 것이라면 겐지의 장면은 그러한 왈가왈부마저 삼켜버리게 하는 참으로 동양적인 슬픔이 있었다. 세번째로 본 것은 도에이에서 산쇼다유 원작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안주와 주시오. 원작에서의 어린 남매의 이름을 제목으로 하였다. 디즈니의 영향을 물씬 받은 이 작품은 그냥 평면적으로 서사를 나열하는데 그치고 있어 지루하기 이를데 없었다. 네섯번째로 본 건 이마무라 쇼헤이의 1961년작 군함과 돼지.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는 제법 보았는데 한번도 맘에 든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1950-60년대였기에 볼 수 있는 기이한 몇몇 장면이 있긴 하지만 뭐 그것 빼고는 그냥 그랬던 영화. 역시나 오즈와 쇼헤이를 동시에 좋아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게 아닌가 싶다. 다섯 번째로 본 것은 이치가와 곤의 1959년작 열쇠. 소문대로 걸작이었다. 1960년에 칸느영화제 황금종려상을 탄 건 페데리코 펠리니의 달콤한 인생이었고 같이 그랑프리를 동반 수상한 건 안토니오니의 정사이니 이 영화가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해볼 수 있다. 영화는 아내의 육체에 탐닉하지만 늙어가는 육체에 불안감을 가진 한 남자와 자신의 딸과 결혼할 사위와 사랑에 빠진 한 여자. 그리고 그 사이의 사위 이렇게 3명의 삼각관계를 다루고 있다. 이상하리만큼 딸의 존재감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려진다. 제목 열쇠에서 연상 할 수 있듯이 영화는 인간의 욕망을 매우 탐미적인 시선으로 다루고 있다. 프레임안에 인물들을 정말로 구겨서 집어넣고 마음이 향하는 곳을 적나라하게 클로즈업 한뒤 다시 패닝을 하는데 역시 영화는 카메라의 움직임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해준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요시다 기주의 1962년작 아키츠 온천. 누군가는 이 작품을 안토니오니에 비교하던데 지나친 과찬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냥 여배우인 오카다 마리코의 매력에 기댄 영화란 생각.

산책하는 침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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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일본영화 3편을 보았다. 먼저 일본에서 만비키가족(어느 가족)을 보았다. 물론 말을 완전히 못알아들어서도 있겠지만 이상하게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는 보고나면 쓸말이 없다. 어떤 결말을 향해가든 그 장르안에서 예상가능한 끝맺음. 그의 영화에서 개인적으로 흥미로운것은 집안의 미장센 정도다.
다음 오즈의 ‘오차즈케의 맛’을 보았다. 오즈의 영화는 진지할때는 경지의 엄숙함이 있지만 코미디를 찍기 시작하면 수수께끼가 된다. 이 이상한 영화. 안녕하세요도 그랬지만 이 영화도 겉으로 보면 부부의 사소한 갈등과 오해를 오차즈케를 먹으며 화해하는 경쾌한 코미디 영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부부가 화해한후 남편은 다음 씬부터 영화에서 사라지고 여자는 오랜 친구들과의 여성의 연대가 깨지며 프레임에 혼자 남는다. 눈물로 화해한 후 혼자 남게되는 영화. 오즈는 모두가 하나가 되는 영화를 찍어면서 모두가 혼자가 되는 영화를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구로자와 기요시의 ‘산책하는 침략자’를 보았다. 난 기요시의 영화하면 큐어를 잊을수가 없다. 그 시절 모든 영화들이 ‘나는 누구지?”라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할때 기요시는 “너는 누구지?”라고 질문을 했다. 그래서인가 기요시를 사람들은 호러물 감독으로 많이 인식하고 있지만 난 이상하게 그런 기억이 없다. 순간 순간 섬뜩함을 아무렇지 않게 표현하는것이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목적일뿐 관객을 자극하기 위해서라고는 느낀적이 없다. 산책하는 침략자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영화. 그래도 굳이 말하라면 뒤죽박죽 장르가 섞이고 B급영화에 철학적 질문이 농담처럼 들어있다. 게다가 우주인이 지구를 침략한다는데 방어하는 군대의 모습은 이상하게 전범국가의 어떤 이미지가 있다. 우주인들은 지구를 침략하기전에 인간에게서 개념을 가져간다. 나, 타인, 소유, 직장, 가족 이런 개념들을 인간에게 이미지로 떠올리게 하고 손가락을 인간의 이마에 대면 우주인은 개념을 흡수하고 인간은 개념을 상실한다. 나루미는 어느날 돌아온 남편 신지에게 당혹감을 느낀다. 이 부부는 이미 남편이 불륜을 하고 있는사랑따윈 존재하지 않는 부부였지만 돌아온 남편은 예전의 모습이 아니고 어딘가 이상하다. 나루미를 가이드라고 부르며 자신이 우주인이라고 한다. 우주인은 인류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이땅에 왔다. 그리고 인간들에게서 단어의 개념을 흡수하기 위해 산책하는 우주인 신지. 그는 부부와 가족이라는 개념을 배우며 나루미에게 부부의 정의처럼 성실하게 대해준다. 그러자 나루미는 우주인 남편을 사랑하기 시작한다. 필사적으로 우주인이라도 사랑하고 싶었던 외로운 세계. 마치 호수의 이방인의 끝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르는 살인자 미셸을 찾기 시작하는 프랑크처럼 지구를 침략하고 자신을 죽이러온 우주인에게 끝내 사랑을 다하는 나루미. 그녀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사랑의 개념을 신지에게 준다. 그 정의할수 없는 거대한 개념을 받은 신지는 자신들의 계획이던 인류종말에서 나루미를 보호하고 어쩐일인지 우주인들은 인류를 말살하지 않는다. 자 ,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이 영화는 어쩌면 사랑만이 인류를 구원한다는 SF 신파극. 그런데 중간에 우주인이 흡수된 사쿠라이가 영화를 찍고 있는 카메라에 손가락을 대고 관객의 개념을 가져가는 장면이 있다. 우주인은 개념을 가져갈때마다 이미지를 떠올리라고 말한다. 영화는 무엇입니까? 질문에 떠오르는 첫번째 대답. 그 유명한 들뢰즈의 시네마 운동-이미지. 사쿠라이가 관객으로 부터 가져간 것은 그러니까 산책하는 침략자라는 영화. 지금까지 보고있는 이미지를 가져간다. 그리고 남는 장면은 우주인의 지구침략과 살아남은 사람들. 그 마지막 장면에 우주인 신지가 병원에 있는 나루미에게 온다. 사랑이라는 개념을 빼앗긴 멍한 나루미를 바라보며 신지는 평생곁에 있을꺼라고 혼잣말을 한다. 그런데 이 씬이 이상하게 감정을 흔든다. 평범한 이야기 마지막에 달빛소나타가 우리를 흔들어대던 기요시의 도쿄소나타의 한 장면처럼 산책하는 침략자에서 영화가 송두리째 사라져도 이 장면은 잊혀지지 않는다. 분명 영화의 이야기는 아무렇게나 흘러가고 장면들은 되는대로 대충대충 찍은것 같은데 사랑에 관한 기요시의 고백만은 필사적으로 진심으로 들린다. 그것이 구로자와 기요시의 매력. 아무도 흉내낼수 없는 그만의 세계. 나는 그 세계를 사랑한다.

서부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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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개척시대는 보통 1850년에서 1890년이라고 정의하곤 하는데 정작 할리우드에서 서부극이 나온 것은 1903년 대열차강도를 시초로 해서 1930~1960년대이다. 그러니깐 서부극은 19세기 중반 미국 서부를 배경으로 사실은 20세기 초중반의 이야기를 그린 셈이다. 1, 2차 대전을 치르면서 세계의 무게중심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오던 시대 말이다. 물론 영화평론가 허문영씨 같은 경우에는 이미 서부극의 초기부터. 그러니깐, ‘철마’, ‘역마차’, ‘닷지시티’ 같은 작품에서부터 이미 수정주의 서부극이라고 불릴 수 있는 특성들이 드러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실 그런 예를 흔하게 보이는 흐름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고, 서부극이 한참 붐이던 그 당시는 대부분 전형적인 프론티어 정신에 부합하는 영화들 그러니깐 선과 악의 구도가 명확한 영화들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봐야 한다. ‘수색자’, ‘붉은 강’, ‘리버티 발랜스를 쏜 사나이’와 같이 시대가 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들이 있기는 하지만 전형성에서 혁명적으로 많이 나아간 영화는 사실 흔치 않다. 1990년대 초반 ‘늑대와 함께 춤을’ 또는 ‘라스트 모히칸’ 같은 작품에 이르러서야 또는 좀 더 뒤의 ‘용서받지 못한 자’ 정도에 이르러야 진정한 의미의 수정주의 서부극이 주류 할리우드에 등장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암튼.. 재미난게 과거 그 시절의 서부극은 대부분 별다른 스트레스가 없이 그저 즐겁게 영화를 볼 수 있다는거다. 오늘날 많은 영화들처럼 가슴을 졸이고 두근두근하면서 뒤의 이야기에 마음 졸이거나 반전에 뒤통수를 맞는 영화들이 별로 없다. 그냥 광활한 황무지가 펼쳐져 있고, 외부의 위협이 존재하며 인물들은 모두 실존적으로 또는 즉물적으로 행동할 뿐이다. 거기에 복잡한 서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고 구질구질한 설명도 필요하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선과 악이 거의 대부분 명확히 정해져 있기 때문에 영화는 복잡한 심리적 갈등이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의 번민을 다룰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후기로 오면서 나쁜 백인과 좋은 원주민들이 혼재될 때, 사연이 있는 악당들과 돈에 눈먼 보안관들이 뒤섞일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이 최선인지 헷갈리게 되고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더 많은 스트레스 (또는 긴장감)와 함께 영화를 보게 되는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경계성 인격장애를 가진 환자들이 가지는 분리(splitting)라는 방어기제를 쉽게 이해할 법도 하다. 그들은 자신이 애정을 품은 대상이 가지는 여러가지 색깔을 받아들일 충분한 용량이 안되기 때문에.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을 분리하고 색깔을 뚜렷이 구분해 놓을 때 비로소 안정을 찾을 수 있는게 아닐까?

레스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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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스 반 산트 감독의 2011년 작 레스트리스를 다시 보았다. 다음의 영화소개를 살펴보니 ‘세상 밖으로 발을 디딘 소년 세상과 이별을 해야만 하는 소녀 그들이 함께한 생애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라고 나온다. 네이버 블로그들의 감상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감성 충만 가을 로맨스라나.. 내가 맨날 글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다 보니 예전에 이 영화에 관해서 쓴 글이 남아있질 않은데 사실 엘리펀트 이후 라스트데이, 파라노이드파크, 밀크 그리고 이 레스트리스 까지 이어지는 거스 반 산트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정말 이상할 지경이다. 젊은 시절 게이감독으로서 말라노체, 약방의 카우보이 그리고 아이다호에서 보여주었던 세상에 대한 반항의 기조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죽어서 영혼이 외계인에게 갔다가 다시 부활해서 돌아온 것인지 기이한 시선들을 보여주곤 한다. 그의 영화 속 세상은 모두 죽음으로 가득 차 있고 인물들은 모두 유령으로 보인다. 예전에 정성일 평론가가 서편제를 유령들의 저세상 이야기로 해석을 한 바 있는데 사실 거스 반 산트 감독의 영화도 비슷한 느낌을 곧잘 받게 되는거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이미 다들 죽었고 이 세상을 떠나지 못하는 혼령들이 바라보는 세상이라는 가정을 하지 않으면 이해가 되지 않는 쇼트들이 너무나도 많다. 예를들어 시점 쇼트를 보여주고 다시 리버스 쇼트를 보여주는데 거기에는 아무도 없는거다. 어 그럼 누가 보고 있는거지? 바로 전 밀크에서도 주인공이 혼란을 겪는 어느 장면에서인가 정확하게 동일한 쇼트가 나온 기억이 있다. 또 다른 쇼트에서는 제 삼자의 시선으로 인물들과 배경들을 보여주다 시점쇼트로 시작되는데 거기에는 지금까지 바로 앞에 있던 인물의 턱 아래만 보여주며 몸은 보이지만 얼굴을 보이지 않게 배치한다. 그럼 너는 누구지? 이런 쇼트들을 연달아 보면서 문득 나는 귀신들과의 대화를 보고 있었나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게 재미난 것이 거스 반 산트는 아나몰픽 와이드스크린 포맷으로 이 영화를 촬영했다는 사실이다. 아시다시피 이 포맷은 1.85:1의 비율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인 퍼스팩티브로 시점쇼트를 촬영하면 인물의 머리는 잘려서 나올 수 없게 되어있다. 그런 관점으로 영화를 보다 보면 이 영화를 아름다운 로맨스로만 보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기까지 하다. 감독이 로맨스 영화로 포장해서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정작 무엇이었을까? 어떤 감독들은 등장인물의 대사를 빌어서 또는 배경음악을 빌어서 창작 의도를 설명하려고 하는데 또 어떤 감독들은 쇼트와 쇼트의 배치를 통해서 카메라의 시선과 포맷을 통해서 이야기를 하므로 그걸 대놓고 설명해주지 않으면 사람들은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들이 알아듣건 말건 그냥 그런 식으로 작업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 뭐 그게 자신들의 말하는 방식이니깐.

머니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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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드 피트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또 다른 영화는 바로 베넷 밀러 감독의 머니볼. 이천년대 초반 가난한 메이저리그 구단이었던 오클랜드 어슬래틱스를 데리고 데이터분석의 일종인 세이버매트릭스를 도입하여 승승장구했던 빌리 빈 단장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마이클루이스의 동명의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사실 많은 영화평들이 이 머니볼을 감동적인 스포츠 드라마로 묘사하던데 사실 이 영화는 트라우마라는 좁은 우물에 갖힌 한 주인공 빌리 빈의 비극을 다룬 영화로 보여진다. 영화의 설명대로라면 인간미라곤 하나도 없고 모든 선수를 오로지 데이터로만 보는 빌리는 보스턴으로부터 거액의 스카웃제의가 왔을 때 떠났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실제 영화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가난한 구단이 만들어내는 드라마와 어린시절 5툴의 야구선수로 촉망받던 빌이 모두를 실망시키고 선수생활을 마친 뒤 그의 삶마저 엉망이 되어버린 빌리 빈의 이야기가 병렬적으로 흘러간다. 드라마의 구조상 구단이 드라마를 만들어나가면 빌리는 그와 함께 점차 카메라의 안쪽으로 들어와야 말이 된다. 하지만 감독은 시작부터 끝까지 빌리를 화면의 안쪽으로 들이지 않는다. 그는 모든 장면에서 사람들과 유리되어있다. 그의 대부분의 대화 씬에서 카메라는 그들을 수평으로 배치하지 않고 수직으로 배치한다. 건널 수 없는 깊은 강을 감독은 만들어놓은 것이다. 물론 20승을 하는 마지막 순간 그는 차를 돌려 구장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뒤이어 연결되는 쇼트는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여 거짓말처럼 구단이 패배하는 장면이다. 그러니깐 그는 영화의 마지막 쇼트 속 모니터에 비친 모습처럼 무저갱 같은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갇혀있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느닷없이 한밤중 구장의 한복판에 홀로 걸어가 바닥에 누워 괴로워하는 장면을 설명할 수가 없다. 더 의미심장한 부분은 영화의 엔딩쇼트. 사실 영화는 빌리가 모니터 속에 갇혀서 괴로워하는 장면으로 끝나야 말이 된다. 그런데 왜 이런 군더더기 같은 쇼트를 굳이 감독은 삽입했을까? 물론 Lenka가 부른 The show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곡임은 틀림없으며 이 음악과 이 쇼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좋아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쇼트 때문에 영화의 모든 균형이 무너져버린다. 제작사의 압박 때문이었을까? 재미난 건 빌리는 차 속에서 시디를 꺼내 딸이 녹음한 노래를 듣는데 영화에서는 그가 딸에게 이 음반을 받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정상적이라면 딸과 헤어지는 이전 장면에서 딸이 음악을 들어보라고 시디를 전달해주었어야만 한다. 이게 당연한 헐리우드의 문법이고 그래야 마지막 장면에서 감독이 의도한 것이 정확하게 사람이 이해한 감동의 장면과 일치한다. 하지만 감독은 그러한 묘사를 생략함으로써 이 마지막 쇼트를 생뚱맞게 만들었다. 그러니깐 아마도 감독은 지옥에 갇혀서 고통받는 한 인간의 이야기로 헐리우드 영화를 마무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말이 되지 않는 상상 속의 쇼트를 삽입한게 아니었을까 싶다. 빌리는 모두의 환호를 받을 수 있는 영광의 자리를 필사적으로 피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건 어린시절 야구선수로서의 상처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그보다 훨씬 더 이전의 트라우마 때문에 어린시절 야구선수로서의 성공도 피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플레이오프에서 패배한뒤 마주한 동료와의 자료실 장면에서 그는 홈런을 치고도 1루타인줄 알고 2루를 향하다 자빠진 선수의 자료화면을 본다. 그 장면의 의미는 너는 이미 홈런을 쳤어 힘을내! 따위가 아니라 비록 홈런을 쳤을지라도 영원히 1루에 갖혀있을 수 밖에 없는 불쌍한 영혼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이런 해석이 더 말이 되는 건 베넷 밀러의 다음 작품 폭스캐처를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