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박적 아내와 ADHD 남편: 왜 관계는 지속되는가?

 

강박적 성격의 아내와 ADHD 성향의 남편은 겉보기에는 극과 극의 성향이지만, 처음 만날 때는 “반대 성향의 매력”을 통해 강하게 서로에게 이끌릴 수 있다. 예를 들어, 강박적 성격을 지닌 여성 A씨는 처음 만난 남성 B씨의 자유분방한 유머 감각과 즉흥적이며 활력 있는 모습에 끌렸다. 평소 원칙과 통제 속에 스스로를 엄격히 묶어두었던 A씨에게 B씨의 자발성와 창의성은 신선한 해방감과 활력의 원천처럼 느껴졌다. 한편 B씨 역시 체계적이고 신뢰감 있게 생활을 꾸리는 A씨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늘 산만함과 충동성 때문에 삶이 혼란스럽던 B씨에게 A씨의 질서 정연함과 책임감은 안정적 기반과도 같아 보였다.

이처럼 상반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없는 부분을 상대에게서 발견하며 보완적인 파트너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강박적 성향의 사람은 상대의 자발성과 유연함을 통해 자신의 억눌린 욕구를 대리 충족하고, ADHD 성향의 사람은 상대의 조직력과 책임감을 통해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메워줄 심리적 보완자를 찾는다. 정신분석적으로 보면, 초기의 강한 이끌림에는 이상화와 투사의 기제가 작용한다. 아내는 남편의 자유로운 모습을 자신이 갖지 못한 해방된 자아의 모습으로 이상화하고, 남편은 아내의 질서정연함을 자신을 이끌어줄 이상적 부모상으로 투사한다. 이러한 긍정적 투사는 연애 초기에는 서로에 대한 강렬한 매력으로 작용한다. 실제로 A씨와 B씨가 교제 초기 가졌던 이미지 — “A씨는 나를 잘 이끌어줄 현명하고 안정적인 사람”, “B씨와 함께 있으면 내 삶도 밝아지고 즐거워질 것” — 같은 환상은 관계 발전의 추진력이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처럼 내재된 성격 차이는 결혼 생활이 진행됨에 따라 갈등의 씨앗이 될 소지를 안고 있었다. 즉, 처음에는 상호보완적으로 보였던 특성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호 충돌을 일으키는 특성으로 변모할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A씨와 B씨의 일상에는 크고 작은 부딪힘이 잦아졌다. B씨는 종종 약속 시간을 잊거나 물건을 제자리에 두지 않는 등 사소한 부주의로 문제를 일으켰고, 그럴 때마다 치밀하고 완벽주의적인 A씨는 불안과 분노를 느끼며 남편을 강하게 질책했다. 예컨대 B씨가 공과금 납부 기한을 잊어버려 연체가 되자, A씨는 감정이 격앙되어 “도대체 왜 이렇게 기본적인 것도 못 챙기냐”고 책망하였다. B씨는 미안한 마음에 사과하지만, 반복되는 비난에 점차 위축감과 반발심이 쌓여 갔다. 그는 때로는 “알겠으니 그만 잔소리해”라며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고, 때로는 아내의 잔소리를 모면하고자 문제를 숨기거나 변명을 늘어놓기도 했다. 이러한 상호작용은 시간이 지날수록 굳어져, 마치 정해진 각본처럼 남편의 부주의 → 아내의 질책 → 남편의 위축 또는 반항 → 다시 부주의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반복적 갈등에는 각자의 심리 역동이 관여한다. 강박적 성향의 A씨에게 규칙과 질서는 자기 통제와 안전감의 핵심이다. 남편의 사소한 실수조차 A씨에게는 자신의 세계가 흔들리는 위협으로 지각되기 때문에, 그녀는 극심한 불안과 함께 분노로 반응하게 된다. A씨 입장에서 B씨의 행동은 “나를 존중하지 않고 문제를 일으키는 태만함”으로 여겨져 용납하기 어려운 것이며, 따라서 비난과 통제를 통해서라도 질서를 바로잡으려 한다. 한편 B씨는 ADHD적 특성으로 인해 실제로 실수를 저지르기 쉽지만, 아내의 지속적인 비판은 그로 하여금 만성적인 열등감을 느끼게 하고 방어적으로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늘 부족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속으로는 위축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지적당하는 상황에 반감과 좌절을 쌓아 갔다. 그 결과 B씨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아내의 통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회피하거나 심지어 더 고집스럽게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는 경우마저 생겼다. 예를 들어 아내가 잔소리를 심하게 할수록 오히려 더욱 말을 듣지 않거나 일부러 늑장을 부리는 식의 행동이다. 이런 그의 태도는 다시 A씨의 불안을 자극하여 통제를 강화하게 만들고, A씨의 잔소리가 거세질수록 B씨는 더욱 마음의 문을 닫고 단절함으로써 둘 사이의 악순환은 공고해졌다.

이 반복되는 갈등의 춤은 심리적으로 “추격자-도피자”의 전형적인 상호작용으로 이해될 수 있다. 불안을 느낀 아내는 남편을 더 다그치고 쫓아다니며 (전화로 확인, 세세한 지시, 감정적 호소), 압력을 느낀 남편은 더욱 도망치듯 정서적 거리를 벌리며 (말없이 회피, 혹은 집을 나가 버리는 등) 서로의 행동을 강화한다. 또한 정신분석적으로 이는 부모-자녀 관계의 재현과도 유사하다. A씨는 엄격한 부모처럼 남편을 꾸짖고 가르치려 들며, B씨는 반항하거나 주눅든 아이의 위치를 취한다. 이런 역할 고착은 사실 두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익숙하게 받아들인 관계 패턴일 수 있다. 즉, A씨와 B씨 각각의 내면에 자리한 과거 부모나 보살핌 경험의 대상 표상이 현재 배우자와의 관계에 투영되어, 서로를 향한 반응 양식으로 반복되는 것이다. 그래서 비논리적이고 비생산적으로 보이는 이 부부 싸움이 끊임없이 반복되며 고착되는 배경에는, 과거로부터 학습된 익숙한 정서 시나리오가 작동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부부의 역동을 겉에서 보면 A씨(아내)만 일방적으로 손해를 보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실제로 A씨는 남편의 실수를 수습하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들이고, 끊임없는 스트레스와 분노로 정서적 소모를 겪는다. 그러나 심층 심리적 수준에서 살펴보면, A씨 역시 이 관계를 통해 일정한 이득을 얻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불균형이 지속되는 측면이 있다. 첫째, A씨는 가정 내에서 우월한 지위와 통제권을 확보한다. 늘 옳고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 남음으로써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긍지를 유지하고 불확실한 상황에서 오는 불안을 통제할 수 있다. 남편이 지속적으로 실수를 저지르는 한, 아내는 도덕적·능력적으로 자신의 우위를 확인하며 심리적 안정감을 얻는다. 둘째, A씨는 “나 없으면 이 사람은 생활이 안 된다“는 신념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한다. 남편의 부족함을 돌보고 챙겨주는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가정에서 필수불가결한 존재라는 느낌을 갖는다. 표면적으로는 “당신 때문에 내가 고생이야”라고 불평하지만, 내면에서는 자신이 헌신적으로 가정을 지탱하고 있다는 은근한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다. 셋째, 이러한 희생적 역할은 A씨로 하여금 일종의 순교자적 자기이미지를 갖게 한다. 본인은 피해자라고 생각하면서도, 사실은 그 역할 수행을 통해 도덕적 우월감과 의무를 다하는 만족감을 얻는다. 요컨대 A씨는 남편을 통제하고 돌보는 데에 몰두함으로써 자신의 내면적 불안(무가치감이나 통제 상실에 대한 두려움 등)을 직면하지 않아도 되는 심리적 회피 이득까지 얻고 있는 셈이다.

마찬가지로 B씨(남편) 역시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이 관계에서 은밀한 이득을 얻는다. 우선 아내가 가정의 많은 부분을 조직하고 관리해주기 때문에, B씨는 자신의 약점으로 인한 현실적 책임을 일부 면제받는다. 예를 들어 시간 관리, 가계부 정리, 자녀 양육의 일정 조율 등에서 아내가 주도권을 쥐면, B씨는 자신의 실행 기능 부족이나 책임감 결여가 초래할 심각한 결과를 직접 마주하지 않고도 일상을 유지할 수 있다. 이는 편의뿐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안도감을 준다. 둘째, B씨는 아내의 잔소리를 들으면서 어느 정도 죄책감의 해소와 보호받는 느낌을 동시에 경험한다. 만약 그가 어린 시절 부모에게 꾸중을 들으면서도 동시에 보살핌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면, 아내의 질책은 그에게 익숙한 애정의 표현으로 무의식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즉 “나를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니 잔소리도 한다”는 식의 왜곡된 위안이다. 실제로 B씨는 아내에게 혼난 후 스스로를 크게 변화시키지는 못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잘못에 대한 속죄를 하고 관계를 수복한 듯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셋째, 아내의 비판적 태도는 B씨에게 외부화된 초자아 역할을 한다. 아내가 끊임없이 지적해주기 때문에 B씨는 자신의 실수에 대해 스스로 자책하거나 반성할 필요가 적어지는 역설적 상황이 생긴다. 다시 말해, 그의 내면에서는 “내 잘못을 아내가 벌써 꾸짖었으니 나는 그걸로 됐다”는 식의 무의식적 면죄부가 작동할 수 있다. 이는 오히려 그가 내적 긴장이나 죄책감을 덜 느끼게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다. 결과적으로 B씨는 표면적으로는 아내의 잔소리를 피하고 싶어 하지만, 동시에 그 잔소리가 주는 구조와 안정감에 심리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아내라는 감독자가 있음으로써 생활이 유지되고 있다는 안도, 그리고 자신은 아이처럼 돌봄을 받고 있다는 은밀한 편안함이 그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두 사람은 갈등 속에서도 서로에게 깊이 의존하고 있으며, 이러한 상호의존적 관계는 일종의 무의식적 계약으로 굳어져 있다. 아내는 남편의 보호자이자 통제자의 위치를 굳건히 하고, 남편은 아내의 피보호자이자 피지배자의 위치를 받아들임으로써, 각자 자기 내면의 불안과 욕구를 상대를 통해 충족시키는 심리적 공생에 이르렀다. 따라서 표면적으로는 불만과 다툼이 끊이지 않더라도 이들은 쉽게 관계를 끊지 못하고 지속하게 된다. 갈등 자체가 두 사람을 이어주는 유대의 한 형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서로가 상대방 없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할 것이라는 암묵적 믿음, 그리고 갈등을 통해서라도 지속적으로 연결되고자 하는 애착의 고리가 이 관계를 지탱하는 숨은 힘이라고 볼 수 있다.

정신분석 관점에서 A씨와 B씨의 관계를 보면, 두 사람은 각자 어린 시절의 정서적 경험과 내면 갈등을 현재의 부부관계에서 재연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프로이트의 개념인 반복 강박에 따르면,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과거의 해결되지 않은 갈등을 현재의 대인관계에서 반복하며 통제 가능하게 재현하려는 경향이 있다. A씨가 끊임없이 남편을 통제하고 비판하는 모습은 어린 시절 경험과 연관지어 해석할 수 있다. 가령 A씨 자신이 성장 과정에서 과도하게 통제적이거나 혹은 정반대로 매우 혼란스러운 부모 밑에서 불안과 무력감을 느꼈다면, 이제 성인이 된 A씨는 남편이라는 대상으로 그 과거 상황을 다시 무대에 올려 자신의 방식으로 다루려 하고 있을 수 있다. 당시 어린 아이였던 그는 부모의 행동을 바꾸거나 가정을 안정시킬 힘이 없었지만, 현재는 아내로서 남편을 교정함으로써 과거의 무력감을 만회하려는 심리가 작동하는 것이다. 이는 남편 B씨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B씨가 반복해서 실수를 저지르고 아내에게 꾸중을 들으며 위축되는 모습은, 혹여 그가 어린 시절 매우 엄격한 부모 밑에서 잦은 꾸중과 질책을 받으며 자랐다면 그때의 익숙한 자기 역할을 현재 아내와의 관계에서 무의식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어린 시절 내내 부모에게 혼나던 아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자신을 꾸짖는 파트너 곁에 머무름으로써 묘한 익숙함과 안정감을 느끼는 역설적 현상이 생길 수 있다. 이러한 반복은 비록 고통스럽지만 한편으로는 친숙하기 때문에 변화를 회피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또한 정신분석에서는 부부를 하나의 심리 체계로 보아, 두 사람이 마치 한 마음을 공유하듯이 서로의 방어에 참여하는 현상을 설명하기도 한다. 이 경우 한 배우자가 다른 배우자의 무의식적 갈등을 맡아 연기해주는 양상이 나타나는데, A씨와 B씨의 관계에서 그러한 상호 보완적 방어를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이 부부에서는 “초자아-이드의 분업화”가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A씨는 둘의 삶에서 초자아 역할을 담당하여 규율과 비판을 전담하고, B씨는 이드 역할을 맡아 충동과 방임을 행한다. 이는 마치 한 사람의 마음 속에서 벌어지는 자아 갈등을 두 사람이 분담하여 외연화한 듯한 모습이다. 이러한 무의식적 공모 덕분에 A씨는 자신의 강박적 불안을 남편을 비난하고 교정하는 행위로 해소하고, B씨는 자신의 죄책감과 불안을 아내의 꾸지람을 통해 해소함으로써 각자의 심리적 균형을 유지한다. 즉, 둘은 한 쪽이 불안해하면 다른 쪽이 대신 분노를 표출해주고, 한 쪽이 죄책감을 느끼면 다른 쪽이 벌을 줌으로써, 서로의 내면 갈등을 대리 처리해주는 무의식적 협력을 하는 셈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부부관계는 두 사람 모두에게 심리내적 갈등을 완화하는 기능을 제공하기 때문에 쉽게 붕괴되지 않고 지속되는 것이다.

애착 이론의 측면에서 A씨와 B씨의 관계를 보면, 각자의 애착 유형의 상호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애착 이론에 따르면, 어린 시절 주 양육자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된 내적 작동모델이 성인기의 친밀한 관계에서 애착 유형으로 나타난다. A씨(아내)의 행동 패턴 — 지나친 통제와 상대방에 대한 예민한 반응 — 에는 불안-집착형 애착의 특성이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불안정 애착 중에서도 집착형에 속하는 사람은 상대가 자신을 실망시키거나 떠날지 모른다는 불안을 크게 느껴, 이를 막기 위해 지나치게 통제하거나 집요하게 간섭하는 경향이 있다. A씨가 남편의 작은 실수에도 크게 동요하여 즉각적으로 비난하고 바로잡으려 드는 것은,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버려짐에 대한 불안 혹은 통제 상실에 대한 두려움에 대한 과잉 보상적 반응일 수 있다. 즉, “내가 이렇게까지 강하게 붙들고 바로잡지 않으면 이 사람이 나를 떠나거나 우리 삶이 엉망이 될지도 몰라“라는 무의식적 불안이 그녀를 강박적 행동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반면 B씨(남편)는 반복되는 갈등 상황에서 아내에게 정서적으로 철수하고 자신의 세계로 도피하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이는 B씨가 회피형 애착의 경향을 지녔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회피형 애착 성향의 사람은 가까운 관계에서 자율성과 거리를 중시하며, 타인이 자신에게 감정적으로 과도한 요구나 압박을 가하면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려는 성향을 보인다. B씨는 아내의 비난이 거세질수록 마음의 문을 닫고 무반응으로 일관하거나, 아예 신체적으로 자리를 피하는 식으로 대응한다. 이는 어린 시절 그가 정서적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양육자 아래에서 자라면서 터득한 자기보호 방식일 수 있다. 즉, “상대가 나를 비난하거나 요구가 커질 때는 차라리 정을 떼고 물러서는 것이 상처를 덜 받는다”는 내적 규칙이 형성되었고, 성인이 된 지금도 스트레스 상황에서 자동적으로 그 패턴이 재현되는 것이다. 이렇듯 불안-집착형 배우자와 회피형 배우자가 만나면, 여러 문헌에서 잘 알려진 “불안-회피 악순환”이 관계에 나타나기 쉽다. 불안형인 쪽은 상대가 자신에게 충분히 맞춰주지 않으면 더욱 불안해져 추격하고 통제하지만, 회피형인 쪽은 그런 압력이 강해질수록 더욱 도피하여 거리를 벌린다. 그 결과 추격하는 쪽은 더욱 좌절하고 불안해져 통제를 강화하고, 도피하는 쪽은 더 질식감을 느껴 멀어지는 순환고리가 형성된다. A씨와 B씨의 갈등 패턴이 바로 이러한 애착적 악순환의 사례라 볼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이 악순환 자체가 두 사람 사이의 애착 유대를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불안형 파트너는 상대를 쫓아가며 절대 놓지 않으려 하고, 회피형 파트너는 거리 두기를 하면서도 완전히 관계를 끊지는 않는 양가적 태도를 보인다. 결국 끊임없는 다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모두 관계를 포기하지 않고 붙들고 있는 상태가 이어진다. A씨의 입장에서 갈등은 고통스럽지만 그 갈등을 통해서라도 남편과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을 얻으며, B씨의 입장에서도 아내의 간섭과 잔소리는 번거롭지만 그것이 자신이 여전히 관계 속에 있음을 의미하기에 완전히 떠나버리지는 않는다. 이러한 애착적 관점에서 보면, 이 부부관계의 심층에는 애증이 교차하는 애착의 고리가 자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쪽은 통제를 통해서라도 안정된 연결을 원하고, 다른 한쪽은 거리를 원하면서도 완전한 단절은 두려워하여 최소한의 연결을 유지하는 모순된 욕구가 공존한다. 이 모순적 애착 욕구가 두 사람을 갈등 속에서도 묶어두며 관계를 지속시키는 심리적 배경이라 볼 수 있다.

대상관계 이론의 관점에서 A씨와 B씨의 관계를 이해하면, 두 사람은 서로를 자신의 내적 대상의 투영물로 대하면서 무의식중에 유년기에 형성된 대상관계를 부부 사이에서 재현하고 있다. 즉, 각자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과거 중요 대상(부모 혹은 자기 자신)의 이미지를 상대 배우자에게 투사하고, 상대가 그에 부합하는 역할을 실제로 해 주기를 (무의식적으로) 기대하는 복잡한 심리극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먼저 A씨(아내)는 자신 내면의 받아들이기 힘든 측면을 남편에게 투사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강박적 성향의 사람은 자기 내부에 존재하는 혼란, 충동성, 무질서한 면을 인정하지 못하고 억압하는 경우가 많다. A씨 역시 자신의 나약함이나 실수할 가능성, 통제를 잃을 수도 있는 인간적인 면을 깊숙이 억눌러두고 있는데, 이러한 그림자 부분이 남편 B씨의 모습을 통해 외부로 나타나 보이는 것이다. 예컨대 A씨는 B씨를 “믿을 수 없고 충동적이며 미성숙한 사람”으로 지속적으로 지적하는데, 이는 거울을 보듯 사실 자신 속에 있는 미성숙성과 혼돈에 대한 두려움을 남편에게서 발견해 공격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멜라니 클라인이 설명한 투사적 동일시 개념처럼, A씨는 자신의 불안과 분노를 B씨에게 투사한 뒤, 그 투사한 부분(남편의 결함)에 집요하게 반응함으로써 내면의 갈등을 외부에서 처리하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B씨도 영향받지 않을 수 없다. 아내가 지속적으로 자신을 문제투성이로 대하다 보면, B씨는 점차 아내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동일시하게 된다. 다시 말해 “나는 원래 덤벙대고 믿음직스럽지 못한 사람인가 보다”라는 식의 자기개념이 강화되고, 실제 행동에서도 점점 아내의 기대(?)대로 더 부주의하고 무책임한 모습이 나오기 쉽다. 이렇게 되면 A씨의 입장에서는 “내가 맞았어, 이 사람은 원래 저래”라는 확신이 또 생겨서 더욱 남편을 통제하게 되는 악순환의 동일시가 완성된다. 부부 사이의 투사적 동일시를 통해 한 사람의 결함이 다른 한 사람에 의해 과장되고 고정되며, 다시 그것이 원투사자에게 확인되는 연쇄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B씨도 자신의 내면 일부를 아내에게 투사하고 있다. B씨 내면에도 성숙하고 질서 있는 자아의 측면이나, 혹은 그가 어린 시절 내면화한 비판적 부모상의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그는 그것을 자신의 것이 아닌 아내의 것으로 보고, 아내를 지나치게 엄격하고 통제적인 사람으로 지각한다. 실제로 A씨가 매우 통제적인 면이 있지만, B씨의 지각에는 그의 투사가 반영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예컨대 B씨는 마음속으로 “저 사람은 왜 그렇게까지 완벽하려 드는 거지? 왜 나를 부모처럼 혼내는 거지?”라고 느끼며 아내를 거부하지만, 그 이면에는 자신의 초자아적인 면모를 아내에게 떠넘긴 심리가 있다. 이로써 B씨는 자기 스스로는 게으르고 충동적인 역할에 머물 수 있게 되고, 아내가 대신 규율과 비난을 담당해주기를 바라는 무의식적 기대가 생긴다. 결국 B씨는 아내에게서 자신이 거부하는 내면의 부모상을 외부화하여 보고 있는 셈이며, A씨는 남편에게서 자신이 거부하는 내면의 어린아이상을 보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상호 투사 과정에서 두 사람은 각각 상대방이 자신의 내면 세계를 연기해주기를 요구하면서, 동시에 그로 인해 고통을 받는 모순적 상황에 놓인다. 대상관계 이론에 따르면, 이같은 부부 갈등 속에도 완전히 긍정적인 대상에 대한 기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A씨와 B씨의 상호작용을 면밀히 살펴보면, 파괴적인 순간들 사이사이에 서로에 대한 애정과 의존의 흔적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B씨에게 아내 A씨는 때때로 따뜻하고 믿음직한 보호자로 경험된다. B씨가 큰 실수를 했을 때 A씨는 결국 그 문제를 해결하고 가정을 안정시키는데, 이 순간 B씨의 무의식 속에서는 어린 시절 자신을 돌봐주던 “좋은 어머니”의 이미지와 아내의 모습이 겹쳐진다. 그래서 비록 잔소리를 들었지만 일이 수습되고 나면 B씨는 안심하며 아내에게 고마움과 애정을 느끼는 순간이 온다. 반대로 A씨에게 남편은 가끔 해맑고 순수한 “사랑스러운 아이”의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예컨대 B씨가 엉뚱한 실수 끝에 미안해하며 건네는 순진한 웃음이나, 즉흥적으로 가족을 즐겁게 해주려고 한 행동들은 A씨의 마음에 따뜻함과 연민, 그리고 활기를 불러일으킨다. 이는 A씨 내면의 이상적 아동상 또는 과거 자신이 돌보았던 동생이나 아이에 대한 애정과 연결되어, 남편을 미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돌봐주고 싶은 대상으로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한 사람 안에서 좋은 대상과 나쁜 대상의 이미지가 공존하며 갈등하는 모습은 대상관계 이론의 핵심 개념인 분열과 통합 과정과 닮아 있다. A씨와 B씨는 서로를 향한 사랑과 증오의 감정을 오가면서도, 완전히 관계를 끊지 못하고 내면의 좋은 대상에 대한 희망을 붙들고 있다. A씨는 “언젠가 이 사람이 철들고 나를 이해해주겠지”라는 희망을, B씨는 “언젠가 아내가 나를 인정해주고 믿어주겠지”라는 바람을 내심 갖고 관계에 임한다. 이러한 양가감정의 공존이 오히려 관계를 지속시키는 힘이 된다. 대상관계 이론의 시각에서 정리하면, 이 부부는 서로가 상대의 내면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자 유년기의 중요 대상과의 관계 패턴을 재현하는 무대가 되고 있으며, 그 무대 위에서 분열된 자아와 대상의 부분들(이상화된 좋은 면과 혐오스러운 나쁜 면)을 서로 교환하면서 복잡한 유대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강박성 성격을 지닌 아내와 ADHD 성향의 남편으로 이루어진 부부관계는 겉보기에는 끊임없는 충돌과 불균형으로 힘겨워 보인다. 그러나 살펴본 바와 같이, 그 심층에는 복잡하면서도 견고한 심리적 접착제가 존재한다. 이들은 각자의 내면 갈등과 욕구를 부부간 상호작용에 투사하고 재현함으로써, 역설적이게도 관계를 지속시키는 무의식적 이득을 공유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서로의 상반된 면에 이끌려 연을 맺었고, 이후 갈등의 반복 속에서도 무의식적 상호 보완과 애착의 고리가 형성되어 쉽게 분리되지 않는 연결이 만들어졌다. 이는 단순히 한쪽의 희생으로 유지되는 관계가 아니라, 심층 심리적 수준에서 균형을 이룬 하나의 체계로서 작동하는 관계임을 시사한다. 이러한 통찰은 임상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유사한 문제를 지닌 부부를 상담하거나 치료할 때, 표면에 드러난 행동 교정이나 의사소통 기술의 향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그보다는 관계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심리역동—각자가 상대를 통해 충족하는 무의식적 욕구와 두려움—을 이해하고 다루는 작업이 병행되어야 한다. 예컨대 이 부부가 건강한 변화를 이루려면, A씨는 남편을 통제함으로써 얻는 자기안심의 기제가 자신과 남편에게 미치는 영향을 통찰할 필요가 있고, B씨는 아내의 보호에 안주함으로써 회피해온 책임의 문제를 직면할 용기를 가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자기洞察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두 사람은 지금까지 무의식적으로 맺은 심리적 계약을 재협상하고, 보다 평등하고 성숙한 파트너십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요약하면, 강박적 성격의 아내와 ADHD 성향의 남편 관계는 겉보기에 부조화로 가득한 부부관계일지라도 그 지속의 배경에는 그래야할 이유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를 이해함으로써 전문가들은 이러한 부부를 돕기 위한 개입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으며, 당사자들 역시 자기관계에 대한 통찰과 공감을 얻어 변화의 방향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급속한 체중 감량이 삶과 관계에 미치는 영향

 

최근 뉴욕타임스 매거진은 급격한 체중 감량이 부부 관계를 뒤흔드는 예기치 않은 부작용을 조명하는 기사를 발표했다. 의사들은 GLP-1 유사체 계열의 비만 치료제의 신체 부작용에 대해 경고해왔지만, 정작 이러한 약물이 부부 친밀감과 관계에 미치는 예상치 못한 영향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이다. 실제로 한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8명 중 1명이 체중 감량 약물을 시도해보았을 만큼 이러한 약물의 사용은 보편화되고 있는데, 이에 반해 이 약물이 가져올 심리사회적 변화에 대해서는 의료 현장에서 충분한 안내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된다. 그 결과 많은 이들이 급격한 체중 변화로 인한 자신의 심리 변화와 대인관계의 갈등을 미처 예상하지 못하고 있어, 현재 이를 둘러싼 담론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급격한 체중 감량의 시대

과거의 비만 치료는 식이요법과 운동, 그리고 일부 식욕억제제(암페타민 유사 약물 등)나 위절제술과 같은 침습적 방법에 의존했다. 하지만 이런 방법들은 효과가 더디거나 부작용이 크고, 무엇보다도 환자의 장기적인 생활습관 변화 없이는 성공하기 어려웠다. 최근 등장한 GLP-1 수용체 작용제들은 이러한 판도를 바꾸어 놓았다. 예컨대 위고비나 마운자로 등은 주 1회 주사만으로도 평균 15% 내외의 체중감량을 달성하여 “게임체인저”로 불린다. 약물의 뛰어난 효과로 인해 전세계 수백만 명이 이 신약을 사용 중이며, 신체 건강상의 이점도 분명하게 보고되고 있다. 실제로 “비만 주사”로 불리는 이 신약들은 당초 기대한 대로 신체적 건강을 개선할 뿐 아니라, 우리의 감정생활에도 엄청난 효과를 미치고 있다고 언급된다. 하지만 “쉽고 빠른” 살빼기의이면에는 간과할 수 없는 함정이 있다. 짧은 기간 내의 급격한 체중감소는 우리 몸에 물리적으로 근육량 감소를 동반하며, 체중 감소분 중 약 25~40%가 근육 등 체지방량일 수 있다는 보고가 있다. 그 결과 기초대사량 저하나 신체 활력 감소 등의 부작용이 우려되며, 일부에서는 성욕 저하 등의 가능성도 거론된다. 흥미롭게도, 체중이 줄면서 남성의 테스토스테론 증가 등 호르몬 균형이 개선되어 성기능이 향상될 수 있다는 보고가 있는 반면, GLP-1 약물이 뇌 보상계와 세로토닌 경로에 영향을 주어 성욕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상반된 보고도 존재한다. 결국 이러한 신체적 효과는 개인별로 다르게 나타날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은 이 약물들이 식욕과 포만감뿐 아니라 다양한 행동과 생리 현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신체에 즉각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치료제가 그 사람의 심리와 사회적 삶에도 급격한 변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이다. 기존 치료법에서는 수년간에 걸쳐 점진적 체중감량과 습관 형성이 이루어졌다면, 이제는 몇 달 내로 수십 킬로그램이 감량된다. 이는 마치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자기 이미지와 생활방식이 순식간에 바뀌는 것과 같다. 적절한 대비 없이 이러한 급변을 겪게 되면, 예상치 못한 심리적 충격과 갈등을 초래할 수 있다.

체중과 자아상

체중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오랫동안 비만이었던 사람들에게 체중은 자신의 정체성 일부이자,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영향을 준다. 사회에 만연한 체중에 대한 낙인과 미적 기준 탓에, 많은 비만인들은 낮은 자기존중감과 외모 열등감을 겪으며 살아간다. 일례로, 뉴욕타임스 기사에서 소개된 한 여성은 평생 비만이었던 자신의 체형 때문에 타인의 비위를 맞추고 밝은 성격의 “예스맨”으로 살아왔다고 한다. 이는 주변의 사랑과 인정을 얻기 위한 그녀만의 방어기제였을 것이다. 하지만 급격한 체중 감량 후 그녀의 자기 인식은 크게 변했다. 신체가 날씬해지면서 자존감이 회복되었고, 더 이상 타인에게 억지로 맞출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되었다. 그 결과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진짜 감정과 욕구를 직면하며 배우자에게 “싫다”는 의사 표현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마치 오랫동안 입고 지낸 무거운 옷을 벗어던지고 진짜 자신을 드러낸 셈이다. 실제 연구에서도 체중 및 신체 이미지가 정체성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으며, 특히 여성의 경우 외모와 자기 가치감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강해 체형 변화가 대인 관계 역학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고 보고된다. 급격한 체중 감소는 기존의 자기상 (self image)의 붕괴와 재구성을 요구하며, 이는 다른 중요한 삶의 전환 못지않게 당사자에게 심리적 부담을 줄 수 있다. 체중을 감량한다는 것은 단순히 살만 빼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일부 모습을 잃는 과정이다. 오랜 시간 비만 상태로 지내며 형성된 습관, 대인관계에서의 역할, 그리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둘러쳤던 심리적 장벽들이 한꺼번에 변화한다. 일부 정신분석학자들은 비만 자체가 외부 세계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막’ 역할을 하기도 한다고 해석한다. 그렇다면 급속한 체중 감량은 이러한 방어막을 순식간에 제거하는 셈이고, 이는 심리적으로 큰 노출감과 불안을 유발할 수 있다. 과거에 음식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체중을 이유로 사회적 도전을 피했던 사람이라면, 이제 새로운 방식으로 정서적 어려움을 다뤄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충분한 준비 없이 이러한 변화를 맞이하면, 체중이 줄어든 후에도 심리적 만족감은커녕 공허함이나 우울감을 겪을 수도 있다. 실제로 대부분의 비만 환자에서 체중 감량 후 우울증상과 불안은 전반적으로 개선되는 경향을 보이지만, 일부 환자에서는 오히려 악화되기도 한다는 보고가 있다. 이는 체중 감량이 정신 건강의 만병통치약이 아니며, 감량 후에도 심리적 문제들이 남아있거나 새로운 양상으로 표출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약물을 통한 식욕 억제로 식생활 패턴이 급변하면, 그동안 음식에 부여했던 심리적 의미도 재검토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흔히 기쁨은 맛있는 디저트로, 위안은 따뜻한 식사로 얻곤 한다. 그런데 갑자기 식욕이 줄어들고 소량으로 배가 부르게 되면, 음식이 차지하던 정서적 지위가 사라진다. 어떤 이들은 이를 긍정적인 해방으로 받아들이지만, 다른 이들은 잃어버린 즐거움에 허탈감을 느끼기도 한다. GLP-1 약물은 음식뿐 아니라 알코올등 다른 보상 자극에 대한 갈망도 낮추는 경향이 있는데, 부부나 친구 관계에서 함께 즐기던 음식과 술자리가 줄어드는 것은 그 자체로 관계의 변화를 야기한다. 한 영국인 환자는 약물 치료 후 수면이 개선되고 건강이 좋아졌지만, 더 이상 파티에서 마지막까지 남지 않게 되니 남편이 우리가 너무 심심한 부부가 되어버린 것 아니냐고 걱정했다고 한다. 이처럼 라이프스타일의 동반 변화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가까운 인간관계의 문화를 바꾸는 일이 된다.

관계의 역학 변화

한 개인의 극적인 체중 변화는 가장 가까운 인간관계, 특히 부부나 연인 관계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킨다. 앞서 언급된 뉴욕타임스 기사에서는 15년간 결혼 생활을 해온 한 부부의 사례를 소개한다. 아내는 새로운 비만치료제의 도움으로 급격히 체중을 감량했고, 남편은 처음에는 그녀의 다이어트를 지지했다. 그러나 체중 감량 후 아내의 태도가 달라지자 남편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아내는 더 이상 배우자의 요구에 무조건 맞춰주지 않고, 오랫동안 꺼려왔던 성관계에 대해 처음으로 분명한 거부 의사를 밝혔다. 남편은 이를 두고 “혹시 약물이 아내의 성욕을 떨어뜨린 것 아닐까” 추측했지만, 정작 아내에게는 5년 만에 자신의 경계를 주장할 용기가 생긴 것뿐이었다고 한다. 이 일화는 체중 감량이 부부 간 성생활과 친밀감에도 중대한 영향을 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GLP-1 기반 체중감량자의 일부는 성욕이나 성기능이 향상되었다고 보고하는 반면, 다른 일각에서는 배우자의 급격한 체중감소 이후 성생활의 변화를 겪었다는 이야기가 빈번하다. 이는 단순히 호르몬 변화나 약물 영향이라기보다, 몸이 변함에 따라 나타나는 부부 사이의 심리적 역학 변화로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체중 감량으로 자신감이 붙은 배우자는 이전보다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고 주도권을 행사하려 할 수 있고, 반대로 배우자는 이러한 변화를 당혹감이나 위협으로 느낄 수 있다. 배우자 간의 힘의 균형도 변모한다. 과거 한쪽(비만인이었던 배우자)이 열등감으로 관계에 종속되어 있었다면, 이제는 대등하거나 주도적인 입장으로 바뀔 수 있다. 이는 기존의 관계 구조를 흔들어 놓으며 갈등을 빚을 위험이 있다. 실제 연구에 따르면 결혼한 상태에서 비만수술 등으로 큰 폭의 체중감량을 한 경우 이혼이나 별거에 이를 확률이 일반인 대비 2배 이상 높아졌다고 한다. 미국에서 비만수술을 받은 1,441명을 5년 추적한 대규모 연구에서, 체중을 많이 감량한 사람일수록 이혼/별거할 가능성이 높았고, 수술 후 성욕이 증가했다고 보고한 이들도 배우자와의 관계 해체율이 높았다는 흥미로운 결과가 있었다. 연구진은 한쪽의 생활방식 변화(식사 및 활동 패턴 변화와 증가된 성적 욕구 등)가 배우자와의 불균형을 초래한 것이 한 요인일 수 있다고 해석한다. 함께 먹고 마시는 일상이 중요했던 부부라면, 한쪽이 식단을 바꾸고 금주를 하게 되었을 때 상대방은 소외감과 상실감을 느낄 수 있다. 음식은 단순한 영양섭취를 넘어 부부 간 애정과 추억의 표현 방식인 만큼, 그 공유의 상실은 생각보다 큰 파장을 미친다. 또한 감량한 배우자가 날씬해진 후 이성들에게 받는 관심이 부쩍 늘어날 경우, 상대 배우자는 불안과 질투심에 시달릴 수 있다. 실제로 “갑자기 날씬한 ‘인싸’가 된” 파트너를 지켜보는 일은 우리 사회의 외모지상주의 풍조 속에서 상대에게 심각한 심리적 위협으로 다가올 수 있다. 상대는 “혹시 배우자가 변심하지 않을까”, “나보다 더 매력적인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닐까” 하는 근원적 불안에 직면하게 되고, 관계에서는 이전에 없던 의심과 불신이 싹틀 수 있다. 모든 부부가 이런 부정적 경로를 걷는 것은 아니다. 어떤 커플들은 함께 약물치료를 시작하여 동반 감량의 길을 택하기도 한다. 흥미로운 한 사례에서는, 50대 부부가 나란히 마운자로 주사를 맞고 모두 건강을 회복하자 결혼 생활이 오히려 더 돈독해졌다고 한다. 두 사람 모두 자신감이 붙고 서로를 칭찬하게 되면서 정서적 친밀감이 향상되었고, 함께 건강한 라이프스타일을 즐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부부가 열린 마음으로 함께 변화를 수용할 때에는 긍정적인 결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배우자 중 한 명만 치료를 받는 경우가 많고, 심리적 준비 정도나 가치관의 차이로 인해 갈등이 발생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특히 약물치료를 둘러싼 낙인과 비밀주의도 관계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 어떤 이들은 배우자나 주변의 시선 때문에 약물 사용 사실을 숨기기도 한다. 실제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는 “몰래 주사 맞는 사람들”의 경험담이 다수 올라오는데, 약물을 냉장 보관해야 하므로 냉장고 음식 더미 뒤에 숨겨 놓는다든지 남편에게는 고양이가 당뇨병이 생겨 인슐린을 놓는 거라고 거짓말했다는 웃픈 사연까지 공유된다. 이러한 비밀 유지로 인한 스트레스와 들켰을 때 신뢰 손상 가능성 역시 관계에 부담이 된다. 한편으로, 배우자가 약물 사용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경우에는 윤리적 판단 차이가 부부간 갈등으로 번질 수 있다. 실제 사례에서 남편은 “노력으로 살을 빼야지 약에 의존한다”며 내심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고, 이것이 아내와의 감정 충돌의 한 배경이 되기도 했다. 요컨대, 체중감량으로 인한 관계 변화는 다양한 양상으로 표출된다. 긍정적으로는 건강한 생활을 함께 즐기는 동반자 관계로의 발전이 있지만, 부정적으로는 질투와 소외, 그리고 가치관의 충돌로 인한 관계 악화까지 스펙트럼이 넓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변화가 상당히 흔하게 일어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환자나 배우자 모두 사전에 충분히 대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누구도 우리에게 이런 변화에 대해 이야기해주지 않았다”는 것이 많은 부부들의 공통된 호소다. 이는 의료진이 체중감량의 사회심리적 영향에 대해 간과해온 측면이 있음을 반성하게 한다.

사회생활과 심리적 함정

체중 감량의 파장은 부부 사이뿐 아니라 사회생활 전반에 미친다. 오랫동안 솔로였던 사람이 큰 폭의 체중을 줄이면 새로운 연애나 사회 활동에 나서는 경우가 늘어난다. 앞서 언급한 비만수술 코호트 연구에서도, 싱글이던 사람들의 18%가 5년 내 결혼하거나 연인을 찾았는데 이는 일반인 대비 2배 이상 높은 비율이었다. 이렇듯 체중 감량은 자신감 회복과 외모 변화를 통해 사회적 매력도를 높여주고, 그동안 망설였던 활동에 뛰어들게 하는 긍정적 효과를 낳는다. 그러나 새로 시작한 연애나 대인관계 역시 당사자의 심리적 적응이 필요하다. 급격히 늘어난 관심과 호감을 처음 겪는 사람은 상대의 호의에 대한 의심이나 자신의 진정한 가치에 대한 혼란을 느낄 수 있다. “이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건 내 현재 날씬한 모습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나, 반대로 과거 자신을 알아주지 않았던 사람들에 대한 냉소와 경계심이 생길 수도 있다. 이러한 감정들은 새로운 관계 형성에 장애물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체중을 감량한 싱글들이 건강한 자아존중감과 현실 검증을 가지고 새로운 만남에 임하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 친구 및 가족과의 관계에서도 변화가 보고된다. 가까운 친구 사이에서는 한 사람이 살을 빼면 미묘한 경쟁 의식이나 질투가 생길 수 있다. 함께 다이어트를 시작했는데 한쪽만 약물 도움으로 성공할 경우, 약물을 쓴 쪽은 얍삽한 짓을 했다는 눈총을 받을 수 있다. 반대로, 날씬해진 사람이 오히려 주변 친구들의 과도한 관심과 견제를 받아 불편함을 느끼기도 한다. “예전에는 아무도 내 몸에 대해 참견하지 않았는데, 살을 빼니 다들 내 식사량과 옷 사이즈에 집착한다”는 경험담이 그런 예다. 가족의 반응도 다양해서, 어떤 부모는 자녀의 체중감량을 기뻐하면서도 약물 사용에 대해 죄책감을 심어주거나 “그렇게 뺀 건 의미가 없다”는 식으로 평가절하할 수 있다. 이러한 부정적 반응들은 체중을 감량한 당사자에게 좌절감을 줄 뿐 아니라, 다시 과거의 생활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키우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실제 한 여성은 남들이 자신을 질투하고 불편해하는 것 같아 차라리 살쪘을 때가 대인관계가 편했다는 극단적인 심정을 털어놓기도 했다. 이는 새로운 몸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주변의 심리적 지지와 수용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한편, 체중감량의 심리적 함정 중 하나로 ‘대체 중독’ 현상이 거론된다. 이는 음식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다른 행동이나 물질에 대한 중독으로 옮겨가는 현상을 뜻한다. 특히 위우회술 같은 급격한 체중감량 수술 후에 종종 보고되는데, 한 연구에서는 비만 수술 환자의 최대 30%에서 도박, 쇼핑, 알코올, 약물남용 등 새로운 중독 행동이 나타났다고 한다. 음식이 더 이상 스트레스 해소나 위안의 수단이 되지 못하자, 도박이나 음주 등이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어릴 적 트라우마나 우울증을 가진 환자에서 두드러졌는데, 이는 심리적 문제를 충분히 다루지 않고 신체만 바꿀 경우 위험이 있음을 시사한다. GLP-1 약물 치료의 경우, 수술만큼 극단적인 신체 변화나 흡수율 변화는 없지만, 식욕이 억제됨으로써 기존의 폭식이나 음식중독 행태가 억눌리면 다른 형태의 충동이 부상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다행히 GLP-1 제제는 앞서 언급했듯이 보상 회로 자체를 조절하여 알코올 등의 욕구를 줄여줄 가능성이 있지만, 이러한 정신건강 모니터링은 필수적이다. 특히 우울증이나 불안 장애 이력이 있는 비만 환자라면, 체중 감량 과정에서 정기적인 심리 평가와 지원을 병행하여 감정 조절의 어려움이나 새로운 중독 징후를 조기에 발견하고 대처해야 한다.

체중 감량 치료에 대한 통합적 접근의 필요성

의학적으로 체중을 감량시키는 방법은 날로 발전하고 있지만, 체중 감량을 성공으로 이끄는 열쇠는 결국 생활습관 변화와 심리적 적응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체중 감량 자체보다 감량 이후의 유지가 더 어렵다는 것은 비만 치료 분야의 정설이다. 연구에 따르면 일반적인 다이어트로 체중을 뺀 사람들 대부분이 오래지 않아 원래 체중으로 돌아가는데, 이는 체중 감량에 작용하는 심리적 요인이 막강하기 때문이다. 단기간에 살을 빼는 것은 비교적 쉬워도, 평생의 잘못된 식습관과 행동 패턴을 바꾸는 것은 어렵고도 지난한 작업이다. GLP-1 주사와 같은 강력한 도구는 이 과정에서 큰 도움을 주지만, 약물이 생활습관 그 자체를 영구적으로 바꿔주지는 못한다. 약을 끊으면 식욕과 체중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기 쉽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체중 감량을 다루는 데 있어 신체와 정신을 아우르는 통합적 접근을 권고한다. 비만 클리닉의 핵심은 결국 정신과적 관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환자의 행동 변화, 동기 부여, 스트레스 대처, 자기효능감 향상 등이 치료의 성패를 좌우한다. 이상적인 체중 감량 치료는 의사, 영양사, 운동 전문가, 그리고 정신건강 전문가가 팀을 이루어 환자를 지원하는 형태다. 의사는 약물이나 수술로 신체적 감량을 촉진하고, 영양사와 운동 전문가는 건강한 식생활과 활동량 증진을 지도한다. 동시에 정신건강 전문가는 환자의 심리적 준비상태와 감정 변화를 살피고, 필요한 상담이나 치료 개입을 제공해야 한다. 예컨대, 정서적 허기를 음식이 아닌 다른 건강한 방식으로 해소하는 법을 가르치거나, 왜 자신이 살이 찔 수밖에 없었는지 개인사의 근원을 탐색하여 재발을 막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가족이나 배우자가 치료 과정에 참여하여, 함께 생활습관을 개선하고 심리적 지지를 하는 것이 도움된다. 급격한 체중감량을 앞둔 환자에게 배우자나 가까운 가족에게 미칠 심리사회적 영향까지 상담해주는 것은 매우 유용하다. 이를 통해 주변인들이 변화에 대비하고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세우도록 도울 수 있다. “직업 변경이든 체중 감량이든, 어떤 삶의 변화에도 서로의 감정을 터놓고 소통하는 것이 핵심”이다. 또한 의료진은 환자에게 현실적인 기대치와 자기인식을 심어줄 필요가 있다. 체중이 줄면 인생의 여러 측면이 나아질 수 있지만, 모든 문제가 마법처럼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문제들이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알려 심리적 대비를 하게 해야 한다. 예를 들어 “몸이 가벼워지면 하고 싶었던 일을 다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막상 살이 빠지고 나서도 대인공포나 우울감이 남아있다면, 큰 상실감에 빠질 수 있다. 이런 경우 적절한 심리치료를 병행하면서, 체중감량과 별개로 존재하는 내면의 문제를 다루어줘야 한다. 마지막으로, 사회 전반의 인식 개선도 중요하다. 체중 감량 약물에 대한 막연한 편견과 비난을 걷어내고, 정당한 치료의 한 형태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만 환자들도 죄책감 없이 치료에 임할 수 있고, 주변의 지지도 기대할 수 있다. 동시에, 급격한 체중 감량이 일상의 인간관계에 미칠 수 있는 파장에 대해 열린 대화가 필요하다. 이러한 담론이 활발해질 때, 비로소 체중 감량은 숫자의 변화 그 이상으로 삶의 변화임을 모두가 이해하게 될 것이다. 나의 전공의 시절 의국 선배님께서 초청강의를 오셔서 정신과의 비만에 대해 강의를 해주신 일이 있었다. 당시 드물게 압구정동에서 비만클리닉을 하던 분이었는데 다른건 다 기억에 남지 않는데 “체중감량의 핵심은 life style modification 이다. 그걸 잘 다루지 못하면 결국 실패한다. 그러니 이 분야에서 가장 잘 할수 있는 것이 정신과의사다.” 라고 말씀하셨던게 기억이 난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참 선견지명이 있으셨던 듯 하다.

결론

“살을 뺀다”는 것은 흔히 외형적 개선이나 건강 증진으로 인식되지만, 그 과정과 결과에는 심리적·사회적 함의가 깊게 자리하고 있다. 최첨단 비만치료제로 인한 급격한 체중 감량은 환자의 자아상과 인간관계에 지대한 변화를 촉발하며, 이는 때로 긍정적으로, 때로 부정적으로 표출된다. 급속 감량의 시대를 맞아 의료진과 환자 모두 체중 감량의 ‘심리적 무게’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과학적 연구와 임상 사례들은 체중 감량은 그 사람의 삶의 방식을 바꾸는 일이며, 신체만이 아니라 마음과 관계의 준비가 함께 이루어져야 지속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살과 함께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내되, 삶에 반드시 필요한 정신적 자원들은 오히려 채워나가야 한다. 신체·정신·사회가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건강한 체중 감량이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온라인에서 타인의 자랑을 볼 때 느끼는 불쾌감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오늘날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의 소셜 미디어에서는 지인들의 성취나 행복을 담은 게시물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누군가 여행 사진과 함께 “작년보다 더 성장한 나😊”라는 글을 올리거나, 자녀의 상장 사진을 공유하며 “우리 아이가 해냈어요!”라고 자랑할 때, 이를 본 다른 사람들은 미묘한 불편함이나 질투를 느끼곤 합니다. 흔히 볼 수 있는 이러한 “슬쩍 자랑”이나 은근한 자기과시 게시물은 보는 이로 하여금 불쾌감, 거슬림, 열등감, 심지어 분노까지 유발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감정 반응은 드문 예외가 아니라 보편적인 현상으로 보고됩니다. 예컨대 한 연구에서는 페이스북 사용자의 3분의 1 이상이 친구들의 소식을 접한 뒤 주로 좌절감이나 불만족 등의 부정적 감정을 느꼈으며, 그 주된 이유가 “친구에 대한 부러움”, “설치는게 꼴보기 싫음”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다른 사람의 행복한 소식에 접촉할 기회가 늘어난 소셜미디어 환경은 이러한 사회적 비교와 시기심을 쉽게 촉발하여, 사용자들의 정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칩니다. 실제로 소셜미디어 상에서 타인의 성공담이나 행복한 순간들을 관찰하는 행위 자체가 시기심의 핵심 역동을 불러일으키며, 사회관계망 서비스 경험의 일부로 자리잡았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고전적 정신분석에 따르면, 타인의 자랑을 보고 느끼는 불쾌감은 개인의 원초적 욕망, 자아의 현실 인식, 그리고 초자아의 이상과 도덕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됩니다. 우선, 이드적 차원에서 무의식적 충동은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고 싶은 욕망이나 남이 가진 것을 갖고자 하는 질투심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는 프로이트가 말한 공격적 충동과도 맞물려, 타인이 누리는 즐거움을 보며 무의식적으로 불쾌하거나 파괴적인 욕구가 솟아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의 자아는 타인의 성취를 당장 획득할 수 없고, 공개적으로 적개심을 드러낼 수도 없으므로 내적 긴장을 느낍니다. 이때 개인은 이러한 불편한 감정을 방어기제를 통해 처리하려 노력합니다. 예를 들어, 상대의 자랑거리를 애써 평가절하하거나 “별것 아니다”라고 합리화하기, 오히려 과장되게 칭찬하면서 속마음의 질투를 감추는 반동형성, 혹은 그 사람을 거만한 사람이라고 폄하하며 자신의 부정적 감정을 그에게 투사하기 등이 흔한 방어반응입니다. 이러한 투사적 방어기제 작용으로, 시기하는 사람은 자신의 불안과 결핍을 마주하지 않고 “저 사람이 잘난 척을 해서 기분 나쁜 것”이라며 책임을 바깥으로 돌리게 됩니다. 프로이트는 특히 질투라는 감정을 분석하며 그 안에 여러 심리가 얽혀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질투에는 상실에 대한 슬픔, 자아에 대한 상처, 성공한 경쟁자에 대한 적개심, 그리고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자기비난의 요소가 복합적으로 들어 있습니다. 실제로 친구의 성공 소식을 접할 때 느끼는 불쾌감 속에는 “나는 그만큼 이루지 못했다”는 열패감과 이에 따른 자기애적 상처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 성공을 이룬 라이벌에 대한 무의식적 적대감도 피어날 수 있으며, “왜 나는 그러지 못했는가” 하는 자기비난이나 열등감이 뒤따르기도 합니다. 이러한 감정들은 우리의 초자아—내면화된 이상과 도덕적 양심—가 작용한 결과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초자아는 “너도 저 사람처럼 성공해야 했어” 혹은 “남을 질투하는 너는 나쁜 사람이야”라는 두 가지 메시지로 자아를 질책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자아 이상과 현실 자기 사이의 괴리가 부각되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거나, 동시에 질투심을 품는 죄책감이 들기도 합니다. 이처럼 자기애에 상처를 입는 경험은 분노와 수치심을 동반합니다. 정신분석적 논의에 의하면, 자기애적 성향이 강할수록 외부로부터 사소한 비교나 실패도 자아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실제로 “질투와 시기는 우리의 지위나 성취를 위협하고, 욕망하던 것을 좌절시킬 때 우리의 자기애에 대한 정면 공격으로 다가온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자존심에 타격을 입은 자아는 불쾌와 분노를 느끼며, 동시에 초자아의 가혹한 목소리로 인해 열등감과 수치심에 시달립니다. 요컨대, 고전적 관점에서 소셜미디어 속 타인 자랑을 보고 느끼는 불편함은 무의식적 질투심과 자기애적 상처로 인한 감정적 혼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의식적 자제만으로 통제되지 않으며, 방어기제를 동원해 자아를 보호하려는 심리가 작동합니다. 예컨대 상대의 성취를 깎아내리거나, 상대를 비난하면서 자신의 분노를 정당화하는 행동 등은 시기심의 파괴적 표현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자아는 당장의 열등감과 불쾌감을 누그러뜨리지만, 근본적인 질투의 원인은 무의식 속에 남아 계속하여 갈등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반면, 대상관계이론에서는 개인의 초기 대인관계 경험과 내면화된 대상이 정서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봅니다. 특히 멜라니 클라인은 시기심의 기제를 깊이 탐구하여, 타인의 좋은 것을 보고 불쾌해하는 심리의 근원을 설명했습니다. 클라인에 따르면 시기심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원초적 정서로서, 가장 파괴적인 원시적 감정 중 하나입니다. 그녀는 시기심을 “다른 사람이 가지고 누리는 바람직한 무엇인가에 대해 느끼는 분노 어린 감정으로, 시기하는 사람의 충동은 그것을 빼앗거나 망쳐버리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예컨대 소셜미디어에서 친구가 행복한 결혼생활이나 훌륭한 직업 성취를 자랑할 때, 이를 본 사람이 느끼는 불편한 감정은 단순한 부러움을 넘어 “그 행복을 없애버리고 싶다”는 무의식적 충동까지 내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클라인은 이러한 시기심의 원형을 영아기 모유수유 장면에서 찾았습니다. 아기는 엄마의 젖(좋은 대상)을 통해 욕구가 충족되지만, 충분히 얻지 못하면 좌절과 분노를 느낍니다. 이때 아기는 좌절의 고통을 견디지 못해, 엄마의 젖가슴이라는 좋은 대상을 공격하고 파괴하고 싶어하는 충동을 품게 되는데, 이것이 시기심의 원형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좋은 엄마의 젖”에 대한 부러움과 분노가 뒤섞인 감정이 초기 경험에 존재하며, 아기는 그 분노를 투사하여 “나를 좌절시킨 나쁜 젖”이라는 환상적 분열을 일으킵니다. 이렇게 대상을 “좋은 부분”과 “나쁜 부분”으로 이분화하는 심리를 클라인은 분열(splitting)이라 불렀습니다. 분열의 기제에 따르면, 소셜미디어에서 누군가 자랑을 하면 보는 이는 그 사람을 양가적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부러운 좋은 대상”이지만, 시기심이 강해지면 그 대상을 전적으로 악의적이고 거만한 존재로 인식해버리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마음속 모순적 감정을 해결하기 위해 대상 이미지를 극단으로 나누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원래는 친한 친구였던 사람이 소셜미디어에 행복한 소식을 올리면, 시기하는 입장에서는 무의식 중에 그 친구를 미워하게 되고, “잘난 척 하는 밉상”으로 대상 표상을 왜곡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본래 친구에게 느끼던 호의마저 사라지고 온통 부정적 정서로 덮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시기심에 의해 좋았던 대상이 ‘나쁜 대상’으로 변질되는 분열의 현상입니다. 동시에 클라인은 투사적 동일시라는 개념으로 시기심의 역동을 설명했습니다. 이는 자신의 부정적 감정이나 속성을 타인에게 투사하고, 그 투사된 부분과 자신이 동일시되는 과정을 말합니다. 시기하는 사람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열등감, 분노와 같은 견디기 힘든 감정을 상대방에게 밀어넣습니다. 예를 들어, 타인이 자랑하는 모습을 보고 “저 사람은 남을 불편하게 만들 정도로 잘난 척을 해대는구나”라고 느낀다면, 사실 그 불편함과 적의는 시기하는 자신의 마음에서 나온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투사적 동일시를 통해 시기하는 사람은 상대방을 질투심 유발자이자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가해자로 여기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시기하는 자신은 피해자처럼 느껴져 오히려 도덕적 우위에 서게 되고, 상대를 비난하거나 미워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일종의 무의식적 방어로서, 자기 자신의 부정성을 인정하지 않고 타인에게 넘겨버림으로써 자아를 보호하려는 심리입니다. 하지만 그 대가로 대인관계는 왜곡되고, 실제로는 친구의 성공을 축하해주고 기뻐해야 할 상황에서 오히려 적개심과 고립감을 느끼게 되니 심리적 고통이 수반됩니다. 클라인은 이러한 시기심의 작동 배후에 흥미로운 메커니즘을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즉, “좋은 대상”을 시기하여 공격하려는 동시에, 무의식 깊은 곳에서는 그 대상을 자신의 일부로 동일시하고 동경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시기하는 대상과 무의식적으로 동일시하고자 하기 때문에, 더욱더 그 대상을 파괴하고 싶은 양가감정에 시달린다는 것입니다. 소셜미디어에서 누군가 눈부신 성취를 보일 때, 그를 미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동경이 공존하기에 갈등이 심화됩니다. 이렇듯 대상관계이론 관점에서 보면, 온라인상의 질투와 불쾌감은 단순히 개인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와 대상 간의 관계적 산물입니다. 초기부터 형성된 시기ㅇ ㅘ 감사의 역동이 어른이 되어서도 재현되어, 타인의 자랑 앞에서 감사의 마음 대신 시기와 공격으로 반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클라인은 건강한 발달의 징표로 감사의 능력을 들었는데, 이는 곧 타인의 좋은 점을 시기하지 않고 인정하고 기뻐해줄 수 있는 능력입니다. 만약 이러한 감사의 능력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하면, 성인은 계속해서 타인의 행복을 자신의 박탈로 인식하며 불행해질 수 있습니다. 소셜미디어에서 유독 남의 자랑에 예민하게 상처받는 사람은, 이러한 원초적 시기심과 분열의 심리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하인즈 코헛의 자기심리학은 인간의 자기가 타인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안정되고 발전한다고 봅니다. 코헛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타인을 자기대상으로 사용하면서 살아갑니다. 즉, 중요한 타인은 우리의 자기를 비춰주는 거울이 되거나, 우리가 이상화하여 따르는 이상적 대상이 되거나, 혹은 공통의 경험을 나누는 쌍둥이 자기대상이 되어 우리의 자기애적 안정감을 지지해줍니다. 건강한 자기 발전에는 적절한 외부의 인정과 공감이 필요한데, 소셜미디어 환경에서는 이러한 인정 욕구와 시기심이 복잡하게 교차합니다. 타인의 자랑을 보고 불편함이나 분노를 느끼는 사람들의 심리를 자기심리학적으로 해석하면, 그것은 곧 자기의 균형이 흔들리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소에는 유지되던 자기애적 안정감이, 남의 성취 소식으로 인해 비교와 함께 균열이 생기는 것입니다. 코헛의 이론에서 자기애적 분노라는 개념이 있는데, 이는 자기가 기대던 자기대상이 충분히 자기를 인정해주지 않거나, 자기의 가치를 손상시킬 때 나타나는 분노입니다. 소셜미디어에서 친구들의 자랑 글은 일종의 자기대상의 역할 역전을 일으킵니다. 원래 친구나 지인은 서로의 소소한 성취를 공감해주며 자기애를 지지해주는 거울 자기대상이 되어줄 수도 있는데, 정작 그 친구가 일방적으로 자신의 성공을 과시하면, 보는 입장에선 자신이 인정받기는커녕 오히려 비교당하는 입장이 되어버립니다. 이는 자기대상이 나를 비춰주기는커녕 나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나게 만드는 거울로 변한 셈입니다. 그 결과 자기에 대한 자존감이 흔들리며, 자기애적 균형이 깨지게 됩니다. 자기 심리학 관점에서 이러한 순간은 심리적으로 자기애적 상처를 입은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수치심과 분노를 유발합니다. “저 사람의 성공이 곧 나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 같다”거나 “왜 나는 저런 인정을 받지 못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무력감이 찾아오지요. 코헛 이후의 연구자들도 자기애적 취약성이 큰 사람일수록 타인의 성공에 대한 질투와 상처를 심하게 경험한다고 지적합니다. 이는 그들의 자기 구조가 외부의 칭찬, 인정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어, 남이 주목받는 것을 보면 마치 자기에게 돌아와야 할 애정이 뺏긴 것처럼 느끼기 때문입니다. 코헛은 건강한 자기애는 어느 정도 자기 대상에의 의존을 필요로 하지만, 결국 자기 대상과의 동일시를 통해 자기 내부에 건강한 자존감의 원천을 구축해나가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충분히 안정된 자기구조를 확립하지 못한 사람의 경우, 타인의 성취를 접하면 그것이 곧 자신의 자기 가치에 대한 위협으로 작용합니다. 마치 자기에게 필수적인 정서적 영양 공급원(타인의 인정)을 누군가 가로채는 듯한 느낌, 또는 자기와 타인을 구분하지 못한 융합적 상태에서 타인의 성공을 자기의 실패로 받아들이는 왜곡이 일어납니다. 결국 이들은 남의 자랑을 “내가 거울을 통해 보게 된 나의 결핍”으로 인식하여 심한 불쾌감에 빠집니다. 자기애적 균형이 깨진 상태에서 사람들은 보통 두 가지 극단적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울과 위축입니다. 자기대상이 주는 좌절을 견디지 못하고, “역시 나는 형편없어”라는 무력감에 빠지는 것이죠. 다른 하나는 분노와 공격성입니다. 코헛이 말한 자기애적 분노로, 자신에게 수치감을 준 대상을 미워하고 깎아내리며 공격하는 태도입니다. 소셜미디어 상에서 인기 있는 친구를 몰래 험담하거나, 그 사람의 성취를 깎아내리는 댓글을 다는 행위 등이 이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반응은 앞서 논의한 클라인의 시기적 공격성과도 일맥상통하지만, 자기심리학에서는 그 원인을 취약한 자기구조와 외부 자기대상에 대한 과도한 의존으로 설명한다는 점이 다릅니다. 즉, 자신의 내적 자원이 부족하니 남의 성취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일종의 정서적 기생 관계가 성립되어 있는 셈입니다. 또한 자기심리학은 발달적 관점에서, 왜 어떤 사람들은 특히 타인의 자랑에 민감하게 상처받는지를 설명합니다.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충분한 공감과 인정을 받지 못한 경우, 성장이 되어도 자기애적 욕구가 충족되지 않아 늘 굶주린 상태로 남습니다. 이런 사람은 친구들의 작은 성공이나 행복에도 과민하게 반응하여 “왜 나는 저런 사랑을 못 받지?” 하는 부족감에 쉽게 사로잡힙니다. 반대로 어린 시절 과도하게 칭찬만 받고 자라 자기애가 비대해진 경우에도 문제입니다. 이들은 자신이 늘 특별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무의식적) 전제를 가지는 데, 현실에서 타인이 주목받으면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질투심에 휩싸입니다. 즉, 온 세상이 나의 이상화된 부모여야 한다는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분노하는 것입니다. 소셜미디어는 이러한 자기애적 욕구를 자극하는 무대가 됩니다. “좋아요” 숫자나 팔로워 수가 일종의 사랑의 지표처럼 느껴져서, 누군가 그것을 많이 받고 있으면 상대적으로 자신의 가치가 떨어진 듯한 박탈감을 느끼게 됩니다. 코헛의 관점에서 치유 혹은 대처는 결국 새로운 자기대상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예컨대 치료자나 가까운 사람이 지속적으로 공감과 현실 검증을 제공하여, 자신의 가치와 타인의 가치를 보다 분리해서 볼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자기애적 균형이 잡히면, 타인의 성취를 보더라도 그것이 곧 나의 무가치함을 뜻하지 않음을 이해하게 되고, 오히려 건강한 자부심과 동기부여로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면 소셜미디어 속 타인의 자랑도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질투심의 자극제가 아니라 “나도 저런 부분이 있지”, “열심히 하면 저렇게 될 수 있겠어”와 같은 통합적 사고로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타인의 자랑을 보고 느끼는 불쾌감과 질투심이라는 한 현상에 대해서도 정신분석의 여러 학파는 각기 다른 층위에서 설명을 제공합니다. 고전적 프로이트의 관점은 개인의 내적 갈등과 무의식적 방어에 초점을 맞추어, 질투가 이드와 초자아 사이에서 벌어지는 싸움의 산물임을 보여줍니다. 이 입장에서는 자기애적 상처와 열등감, 그리고 이를 덮기 위한 방어기제들이 강조되며, 개인이 겉으로는 태연해 보여도 속으로는 심한 자존심의 손상을 입고 투사, 합리화 등의 심리 기제를 동원한다는 통찰을 줍니다. 반면 멜라니 클라인을 대표로 하는 대상관계이론은 이러한 감정을 관계적 맥락에서 이해합니다. 어린 시절의 시기심 대 감사 경험, 분열과 투사적 동일시의 메커니즘이 그대로 성인기의 대인관계에 재현되어, 타인의 행복을 보지 못하고 분노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클라인은 시기심이 일차적으로 파괴적 충동이며, 그것이 좋은 대상을 공격하고 관계를 분열시키는 힘임을 일깨워주어, 질투에 휩싸인 개인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선악의 분할 과정을 이해하게 합니다. 자기심리학은 또 다른 시선을 제시하는데, 여기서는 개인의 자기애적 안정감과 외부 인정에 대한 의존을 개념화함으로써, 왜 일부 사람들은 유독 남의 자랑에 취약한지를 설명합니다. 자기심리학적 시각은 발달적 결손이나 자기애의 취약성에 주목하여, 이러한 경우 타인의 성공이 자신의 자기 가치에 대한 위협으로 다가와 심한 수치심과 분노를 유발함을 보여줍니다. 이는 질투심을 가진 사람에 대한 공감적 이해를 높여주며, 단순히 심술로 치부하기 쉬운 반응 뒤에 사실은 상처입기 쉬운 자기가 숨어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이러한 각 이론들은 관점과 언어는 다르지만 상호보완적인 관계로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타인의 자랑에 대한 불쾌감을 느끼는 실제 한 사람을 상상해보면, 그 마음속에서는 원초적인 시기심(클라인)이 꿈틀대고, 자기애적 자존심(프로이트/코헛)이 상처받아 분노하며, 초자아의 꾸짖음(프로이트)이 죄책감을 일으킵니다. 어느 하나의 관점만으로 그 복합적 심리를 모두 설명하기 어렵기에, 이들 이론을 통합적으로 고려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예컨대 치료 현장에서는 우선 표면에 드러난 방어(비난, 냉소 등)를 이해하고(고전적 관점), 그 밑에 깔린 관계적 상처(상대에 대한 분열된 인식와 투사, 대상관계 관점)를 탐색하며, 동시에 그 사람의 자기 구조적 취약성(자기심리학)을 공감해 주는 것 모두 유용할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개인이 자신의 감정을 자각하고 수용함으로써, 더 이상 타인의 자랑이 내 결핍의 증명이 아니라 독립된 타인의 서사로 인정될 수 있어야 합니다.

끝으로, 온라인 시대의 자기애적 균형과 감정 조절에 대해 몇 가지 시사점을 덧붙입니다. 첫째, 남의 자랑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누구나 겪는 인간적 반응임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자기 비난을 줄이고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현대 연구들은 소셜미디어 사용이 보편적으로 시기심을 유발하며 이는 삶의 만족도 저하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부정적 감정을 느낄 때 자신만 나쁘다고 억압하기보다, 그 감정의 보편성과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출발점입니다. 둘째로 자신이 취하는 심리적 방어(예: “저 사람은 잘난 척이 심해”라고 폄하함으로써 느끼는 일시적 우월감)를 인식하고, 그것이 진정한 해결이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대신 승화나 동기부여로 전환하는 건강한 전략을 모색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친구의 성공담을 질투하기만 할 게 아니라 자신의 목표를 재정비하고 노력하는 계기로 삼는 것은 성숙한 방어에 해당합니다. 셋째, 클라인이 강조한 “감사 대 시기”의 태도에서, 의식적으로 감사와 축하의 마음을 표현하는 연습은 시기심의 파괴성을 중화시킵니다. 처음에는 가식처럼 느껴질지라도, 타인의 행복에 대한 긍정적 반응을 실천하면 점차 내적 여유와 관계의 온전함이 회복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넷째, 자기애적 결핍을 메우기 위해 건강한 자기대상을 삶에 확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프라인에서 진정으로 나를 이해해주고 인정해주는 인간관계를 갖추면, 온라인상의 비교 자극에 휘둘릴 가능성이 줄어듭니다. 온라인 공간에서의 자기애적 균형을 유지하고 타인의 자랑에 대한 감정을 조절하는 일은 현대인에게 새로운 과제입니다. 정신분석의 다양한 이론은 각기 유용한 통찰을 제공하며, 이를 종합하면 우리는 질투와 시기심을 더 깊이 이해하고 다룰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타인의 성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나의 부족함을 받아들이면서도 스스로를 존중하는 태도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지만, 자기 이해와 심리적 성찰을 통해 충분히 향상시킬 수 있는 능력입니다. 결국, 타인의 자랑도 내 삶의 서사와 조화롭게 공존시킬 수 있는 건강한 자기를 가꾸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일 것이며, 정신분석학적 통찰들은 그 여정에 든든한 이정표가 되어줄 것입니다.

현대 정신과 전문의의 역할 재정립

Figure adapted from Potash, James B., et al. “The Future of the Psychiatrist.” Psychiatric Research and Clinical Practice (2025).

 

서론: 변화하는 정신과 전문의의 전문영역

정신과 전문의들은 시대에 따라 그 역할과 전문성이 크게 변화해왔다. 한 세기 전만 해도 정신과 의사는 프로이트로 대표되는 정신분석 등 심층 정신치료의 영역을 주도하며, 환자의 내면 탐색과 대화를 치료의 주된 도구로 삼았다. 이후 과학의 발전과 함께 생물학적 정신의학이 급속히 부상하면서, 1950년대 항정신병 약물의 도입은 정신의학에 혁신적 전기를 마련하였다. 예를 들어 1952년 프랑스에서 처음 사용된 클로르프로마진은 기존의 진정제들보다 월등한 효과로 당시 흥분상태의 정신과 입원병동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고, 이를 계기로 다양한 향정신성 의약품 개발의 “황금기”가 열렸다 . 이러한 약물 치료의 등장은 정신질환 치료 패러다임을 입원 중심의 장기치료에서 약물 중심의 외래치료로 전환시켰고, 정신과 전문의들의 주된 역할도 자연스럽게 약물 처방과 생물학적 치료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약물치료의 부상과 더불어 정신과 전문의의 심리치료 역할 약화도 진행되었다. 20세기 후반에는 인지행동치료 등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단기 심리치료 기법들이 발전했으나, 이는 주로 임상심리사 등 비의사 전문가들에 의해 시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의료 시스템의 구조와 수가 체계 등의 영향으로 정신과 의사의 심리치료 제공은 감소해 왔다. 예컨대 미국에서는 1990년대 이후 정신과 전문의가 상담치료를 제공하는 비율이 지속적으로 떨어져, 2016년경 정신과 외래 진료 중 심리치료를 포함한 비율이 5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는 보고가 있다. 이는 정신과 의사가 환자를 직접 오래 면담하며 치료하는 대신, 짧은 시간의 약물 점검과 처방 조정을 하는 역할로 점차 한정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역사적 흐름 속에서 정신과 전문의의 정체성과 전문영역은 약물치료를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정신치료는 심리학자, 상담사 등의 분야로 많이 이양된 실정이다.

현재의 도전: 다학제적 환경과 정신과 의사의 역할 경계

오늘날 정신건강 분야는 의사, 심리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공학자 등 다양한 전문인력이 팀을 이루는 다학제적 환경으로 변화했다. 심리치료나 인지행동치료는 더 이상 정신과 의사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임상심리사나 전문상담사 등 여러 직역이 이러한 치료를 활발히 제공하고 있다. 한편 생물학적 정신의학 연구는 뇌과학, 유전학 등의 기초과학 연구자들이 선도하고 있고, 새로운 뇌자극 치료기기의 개발은 공학자들이 주도하고 있다. 최근 부상한 인공지능(AI) 기술 또한 정신건강 분야에 도입되고 있지만, 이 역시 개발과 혁신의 중심에는 컴퓨터 과학자와 데이터 전문가들이 있다. 이렇듯 정신과 의사를 둘러싼 환경은 여러 전문직과 기술영역이 중첩되어, 정신과 전문의의 고유한 역할에 대한 혼란과 위기감이 대두되고 있다.

특히 정신과 의사의 핵심 업무 중 하나였던 진단과 치료 계획 수립 영역에서도 이러한 도전이 나타난다. 전통적으로 정신과 전문의는 면밀한 면담과 관찰을 통해 정신질환을 임상적으로 진단해왔으나, 최근 뇌영상 데이터와 AI를 활용하여 진단을 보조하려는 시도가 활발하다. 예를 들어 뇌 MRI 영상을 인공지능으로 분석해 조현병이나 치매 환자를 감별하는 연구들이 진행되어, 일부 연구에선 80% 이상의 정확도로 환자와 정상인을 구분할 수 있었다는 보고도 있다. 다만 이런 성과는 작은 규모의 연구에 국한되며 실제 임상에 적용하기에는 한계가 명확하므로, 아직 AI 진단 보조는 연구 단계에 머물러 있다. 치료 측면에서도, 치료 동맹과 의사-환자 관계는 정신과 임상에서 매우 중요한데, 고도로 발달한 AI가 등장하더라도 환자들이 기계와 마음을 나눌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2015년 옥스퍼드대와 BBC의 공동 연구에서도 수백 개 직업의 자동화 위험도를 분석한 결과, 정신과 의사나 상담사의 직업은 AI로 대체될 가능성이 가장 낮은 직종 중 하나로 평가되었다. 이는 인간만이 제공할 수 있는 공감과 소통의 가치가 정신건강 진료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방증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정신과 전문의들은 지속적으로 업무 범위의 중첩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오늘날 미국의 경우 처방권을 가진 전문인력으로 정신과 전문의 외에도 정신건강 임상간호사나 정신과 의사보조인력 등이 등장하여, 약물관리 업무를 분담하고 있다. 특히 경증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등 일부 정신건강 문제는 1차 진료의나 간호사 등이 관리하고, 정신과 의사는 자문역할을 수행하는 통합진료 모델도 확산되는 추세다. 이러한 팀 기반 진료에서 정신과 의사는 다학제 팀을 총괄하거나 자문하는 리더십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현대 정신건강체계에서 정신과 전문의는 가장 복잡하고 난치성인 환자군에 집중하고, 일상적인 추적 관리나 경미한 상담 등은 다른 전문인력이 맡는 형태로 업무 재분배가 이뤄지고 있다. 정신과 의사가 전체 정신건강 인력의 불과 5%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통계도 있어, 한정된 전문의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려면 이들의 고급 전문성을 난치 환자에 집중시키는 전략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다행히 정신과 의사는 전통적으로 신체의학 교육과 정신치료 수련을 모두 갖춘 폭넓은 양쪽 분야의 전문가로 훈련받아 왔으며, 뇌자극술 등 새로운 치료에도 대한 지식을 습득하고 있기 때문에 심신을 아우르는 통합적 치료에 기여할 수 있는 독자적 강점이 있다. 문제는 이러한 강점을 실제 임상현장에서 발휘할 수 있도록 역할을 재정립하고 전문성을 더욱 특화시키는 일이다.

최신 치료의 부상: 뇌자극과 기타 생물학적 개입

21세기에 들어 약물치료만으로 한계가 있는 일부 난치정신질환에 대해 뇌자극 및 첨단 생물학적 치료법들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전기경련치료는 오랜 역사를 지닌 치료이지만 현대에 와서 기술적으로 개선되고 안전하게 시행되면서 재평가되고 있고, 경두개 자기자극술은 2000년대 이후 우울증 치료에 유효성이 입증되어 비교적 표준 치료로 자리잡았다. 더 나아가 경두개 직류자극, 심부뇌자극, 고주파 초음파 자극 등 다양한 신경조절 기법들이 연구 및 임상에 적용되고 있다. 이러한 중재 정신의학의 등장은 정신과 전문의들에게 새로운 전문역량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 등 일부 국가에서는 이미 간질환치료나 통증치료 영역에 인터벤션 개념이 정착된 바 있는데, 정신의학에서도 “인터벤션 정신과”라는 이름의 세부 분야가 생겨나 뇌자극이나 케타민 주입치료 등의 시술을 전문으로 수행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흥미로운 것은, 많은 전문가들이 머지않아 이러한 구분이 불필요해질 것으로 전망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한 전문가는 “TMS나 케타민 치료 같은 기술을 포함하는 인터벤션 정신과라는 용어 자체가 곧 사라지고 이들이 표준적인 정신과 진료의 일부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만큼 신경조절 기법의 보편화가 예상되며, 미래의 정신과 전문의들은 약물 처방에 더해 이러한 첨단 뇌기술을 직접 활용하여 치료 스펙트럼을 넓혀야 할 것이다.

나아가 바이오마커 기반의 정밀정신의학도 미래 유망 분야로 거론된다. 유전학, 혈액검사, 뇌영상 등의 발전으로 향후에는 환자 개개인의 생물학적 특성을 반영한 맞춤 치료가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 정신과 전문의는 이러한 기초과학 발견을 임상에 적용하는 교량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어떤 환자에게 어떤 약물이나 자극치료가 최선일지 예측하고 선택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최근 연구들은 딥러닝 AI를 활용하여 환자의 진단과 증상 심각도를 예측하거나, 방대한 의료 데이터를 분석해 최적의 치료결정을 도와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일례로 한 연구에서는 임상 상황을 요약한 시나리오를 놓고 ChatGPT 같은 거대 언어모델이 최종 진단의 77% 정도를 정확히 맞혔다고 하지만, 이는 제한된 실험 맥락의 결과로 실제 환자 진료에 바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럼에도 이러한 기술들은 임상의사 결정지원 도구로서 잠재력이 크므로, 정신과 의사가 적극 활용한다면 치료의 효율과 정확도를 높이고 환자 맞춤형 접근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또 한편으로 주목받는 분야는 정신과적 질환에 대한 새로운 약물/생물학적 치료제의 등장이다. 최근 난치성 우울증 등에 케타민 주입치료가 도입되고, 향정신성 물질인 사이키델릭스(환각제)를 활용한 치료 연구도 부활하고 있다. 예컨대 실로시빈(psilocybin)이나 MDMA를 기존의 심리치료와 병행하는 임상시험들이 긍정적 결과를 보이며, 향후 일정 조건 하에 의료용으로 승인될 가능성이 논의된다. 이러한 신규 치료제의 통합 과정에서도 정신과 전문의의 역할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약리학적 지식과 신체에 대한 이해를 갖춘 의사만이 이러한 물질의 안전한 사용을 관리하고, 치료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의학적 부작용을 모니터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들 치료는 기존의 심리치료 기법과 결합되어야 최대 효과를 발휘하므로, 약물치료와 심리치료를 아우르는 정신과 전문의의 지식이 필수적이다. 실제로 전문가들은 미래의 정신과가 첨단 신경과학과 고전적 심리치료 전통을 통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하루는 뇌의 해부학적 표적을 자극할 방법을 고민하고 다음 날은 케타민이나 사이키델릭 치료에서 심리적 의미와 세팅을 논의하는” 식으로, 뇌와 마음 양 측면을 모두 다루는 진료가 새 시대의 정신과 의사가 지향해야 할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의 정신과 수련과정 역시 변화가 필요하다. 오랜 생물의학적 모델 교육에 더해 정신역동적 이해 등 고전적 심리학 지식도 재무장하고, 나아가 최신 기술에 대한 숙련도를 높이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제언이 나오고 있다. 결국 미래의 정신과 전문의는 생물학적 치료, 심리사회적 접근, 기술 활용 능력을 고루 갖춘 융합형 전문가로 거듭나야 한다.

인공지능 시대의 도래와 정신과 전문의의 대응

오늘날 의료 전반에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의 물결이 일고 있으며, 정신건강의학 분야도 예외가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 AI는 진단 보조나 치료 매칭 등에 활용 가능성이 있지만, 그 외에도 행정업무 경감, 임상 의사결정 지원, 환자의 자가관리와 교육 측면에서 폭넓은 활용을 기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전자의무기록 데이터에서 패턴을 학습하는 AI는 진료노트 자동 작성이나 처방 제안 등의 방식으로 의사의 업무 부담을 줄여줄 수 있고, 환자들에게는 챗봇을 통해 정신건강 교육자료를 제공하거나 간단한 자가 보고설문을 도와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기술 산업계에서는 우울증을 감지하는 스마트폰 앱, 대화 내용을 분석해 자살 위험을 예측하는 알고리즘, 가상현실을 이용한 불안장애 노출치료 등 다양한 디지털 정신건강 솔루션을 속속 선보이고 있다.

그러나 기술에 대한 기대만큼이나 우려도 큰 것이 현실이다. 정신과 영역에서 AI를 도입할 때 가장 큰 위험으로 지적되는 것은 오류와 윤리 문제이다. 예컨대 LLM 기반 챗봇이 환자 상담을 모방하더라도 부정확한 정보를 주거나 현실과 동떨어진 환각 답변을 할 가능성이 있고, 의료 데이터에 내재한 편향으로 인해 취약계층에 불리한 결정을 내릴 우려도 있다. 실제로 한 익명의 정신건강 앱에서는 환자 모르게 인간 상담자의 답변을 AI로 대체했다가 부적절한 대응으로 물의를 빚은 사례도 있었다. 이러한 사례들은 신속히 발전하는 기술에 비해 임상 활용 지침과 윤리적 논의가 뒤따르지 못하는 현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전문가 집단은 AI를 성급히 임상에 적용하기보다, 충분한 검증과 안전장치 마련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신과 전문의들은 AI 시대에 두 가지 태도를 모두 견지해야 한다. 하나는 혁신 기술의 잠재력을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하려는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기술의 한계를 분별하며 핵심 가치를 지키는 태도다. 미국정신의학회 신임 회장은 “AI가 정신의학에 큰 영향을 미치겠지만, 인간 대면을 통한 치유적 관계를 대체할 수는 없다”고 전제하면서, “의사들이 AI 개발에 주도적으로 관여하여 임상에 유용한 방향으로 발전하도록 이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정신과 의사가 단순히 기술의 소비자가 아니라, 기술이 임상현장에서 올바르게 쓰이도록 가이드하는 역할을 해야 함을 시사한다. 예를 들어 알고리즘이 제시하는 진단이나 치료 추천이 있더라도, 그것을 해석하고 환자 특수성에 비추어 최종 판단을 내리는 것은 인간 의사의 몫으로 남을 것이다. 또한 기술 개발자들과 협력하여 정신과 임상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AI 모델을 만들 때, 윤리적 원칙과 환자 프라이버시를 수호하는 데에도 의사들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 요컨대 AI 시대에도 정신과 전문의의 통찰력과 인간적 교감 능력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며, 기술을 도구로 삼아 임상 지평을 넓히되 인간 중심의 치료라는 본령은 지켜나가는 균형 잡힌 접근이 필요하다.

미래를 향한 제언: 정신과 전문의 전문성의 재특화 전략

이처럼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정신과 전문의들은 자신의 전문성을 재정의하고 특화해나가야 할 필요성이 크다. 앞으로 정신과 전문의가 집중해야 할 핵심 분야와 역량에 대해 몇 가지 방향을 제언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정신과 전문의는 통합적 치료의 전문가로서 입지를 굳혀야 한다. 이는 단순히 약물만 잘 쓰는 의사가 아니라, 약물치료와 정신치료를 결합하고 거기에 필요한 경우 뇌자극술이나 디지털 기법까지 아우르는 포괄적 치료 계획을 수립할 수 있는 전문성을 의미한다. 현재 많은 정신질환 환자들이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고, 동반질환이나 심리사회적 스트레스 요인이 얽혀 있는 경우가 많다. 정신과 의사는 의학적 지식과 심리적 이해를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복합적 문제에 대한 총체적 접근을 주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약물로 생물학적 증상을 안정시키는 동시에, 심리치료로 환자의 사고패턴을 교정하고, 필요시 가족 상담이나 사회복지 자원 연결까지 조율하는 등 종합적 관리를 제공함으로써 환자 예후를 극대화할 수 있다. 이런 역할은 다른 어느 단일 직역도 단독으로 수행하기 어렵기 때문에, 정신과 전문의만이 제공할 수 있는 고유한 가치로 남을 것이다.

둘째, 정신과 전문의는 가장 어려운 환자군의 치료를 책임지는 고난도 전문인력으로서 자리매김해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정신과 의사는 절대 수가 부족하며 정신질환 유병률에 비해 인력이 제한적이다. 따라서 모든 환자를 일대일로 다 볼 수 없기에, 경증이거나 비교적 표준화된 치료가 가능한 경우에는 일부 업무를 다른 전문가에게 위임하고, 정신과 의사는 난치성 우울증, 치료저항성 조현병, 중증 자살위험 환자 등 고위험·고난도 케이스에 집중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이는 의료자원의 효율적 분배 측면에서도 합리적일 뿐 아니라, 정신과 의사의 전문성 유지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가장 어려운 사례들을 다루면서 축적한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정신과 전문의는 해당 분야의 임상 리더로 인정받게 된다. 나아가 이러한 고난도 치료 경험은 표준치료로 잘 낫지 않는 환자들을 위한 새로운 치료법 개발이나 연구의 영감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정책결정자들은 이러한 역할 분담이 원활히 이뤄지도록 적절한 보상체계와 협업 모델(예: 일차진료-정신과 협진 모델, 원격 정신과 자문 등)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셋째, 커뮤니티와 공중정신건강 분야에서의 리더십을 강화해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정신건강 문제는 개인 진료실을 넘어 지역사회와 국가적 차원의 대응이 요구된다. 정신과 전문의는 자신의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자살 예방, 중독 문제, 노인 정신건강, 아동·청소년 정신건강 정책 등에 전문적 조언자로 참여할 수 있다. 과거 대한신경정신의학회에서도 미래 발전 전략으로 사회 및 지역 기반 프로젝트에 대한 리더십 강화를 제언한 바 있는데, 이는 정신과 의사가 정신건강 옹호자로서의 역할을 적극 수행하라는 의미다. 예를 들어 지역사회 정신건강센터와 협력하여 퇴원 환자의 지역사회 복귀를 돕거나, 학교 정신건강 프로그램 개발에 참여하고, 미디어를 통해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 해소와 올바른 정보 전달에 힘쓰는 것이 그러한 역할에 해당할 것이다. 정신과 전문의가 정책결정자들과 소통하며 공공 정신건강 향상에 기여할 때, 사회 전반의 정신건강 증진과 더불어 전문의로서의 사회적 위상과 보람도 함께 높아질 것이다.

넷째, 평생교육과 연구역량 강화가 필요하다. 정신의학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약물, 뇌과학, 심리학, AI 등 매우 폭넓은 분야와 연결되어 있다. 새로운 치료 기술과 근거들이 쏟아지는 만큼, 정신과 전문의는 졸업 이후에도 끊임없이 배우고 업데이트해야 한다. 특히 빠르게 발전하는 뇌과학 지식과 데이터 과학을 이해하고 임상에 번역하는 능력이 중요해질 것이다. 또한 임상 현장의 문제를 과학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연구 마인드도 겸비한다면 금상첨화다. 모든 임상의가 직접 연구를 할 수는 없겠지만, 환자를 보면서 얻은 의문을 연구자들과 공유하거나 임상시험에 참여하는 등 근거 창출 과정에 기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는 결국 정신과 전문의 자신이 미래 의료의 방향 설정에 목소리를 내고 주도권을 잡는 데도 중요하다. 기술과 치료법의 개발을 다른 분야 전문가들에게만 맡겨둘 경우, 임상 현실과 동떨어진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 따라서 정신과 의사가 현장감 있는 질문과 통찰을 던지고, 다학제 연구팀에 참여하며, 최신 지견을 환자 치료에 적용하는 학습자이자 창조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윤리의식과 인간 중심 철학의 옹호자로 남는 것도 중요하다. AI 시대, 기술 지배의 시대일수록 인간의 존엄과 개별 환자의 가치를 지키는 일이 소홀해질 수 있다. 정신과 전문의는 전통적으로 전인적 인간이해를 추구해온 전문가로서, 어떠한 첨단 기술이 도입되더라도 치료의 목표는 인간의 마음과 삶의 질 향상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예를 들어 편의성만 앞세운 디지털 치료제가 환자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거나 인간적 접촉을 떨어뜨리는 부작용이 있다면,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균형 잡힌 시각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윤리적 딜레마에 대한 고찰과 환자 옹호는 정신과 의사의 전통적 책무이며, 미래에도 그 중요성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결론

정신과 전문의의 전문영역은 심리치료의 시대에서 약물치료의 시대를 거쳐, 이제 다학제 융합과 기술혁신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과거 정신과 의사들은 인간 정신의 심연을 탐구하는 치료자로서 활약했고, 이후 뇌와 약물의 힘을 빌어 의학적 치료자로 변모했다. 현재 우리는 심리사회적 치료는 심리전문가들에게 상당 부분 맡겨져 있고, 생물학적 연구는 기초과학자들이 이끌며, 새로운 디지털 도구는 공학자들이 개발하는 현실을 마주한다. 이러한 환경에서 정신과 전문의가 고유한 전문성을 유지·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역할을 재점검하고 혁신하는 노력이 요구된다. 다행히 정신과 전문의는 인간의 마음과 뇌를 잇는 독특한 교차점에 서 있는 전문가 집단이며, 의학적 지식과 심리학적 통찰을 겸비한 폭넓은 역량을 갖추고 있다. 이제 이 역량을 미래지향적으로 재포지셔닝할 때이다.

근거 기반의 전망을 종합하면, 미래의 정신과 전문의는 △약물·심리·뇌자극을 아우르는 통합치료사, △난해한 정신질환에 도전하는 난치병의 전문치료사, △기술과 인간을 연결하는 디지털 시대의 임상 조정자, △지역사회와 정책에 참여하는 정신건강 옹호자, △끊임없이 배우고 창조하는 의사-과학자의 면모를 모두 지닌 전방위 전문가로 진화해야 할 것이다. 물론 한 개인이 이 모든 역할을 완벽히 수행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각 전문의는 자신의 관심 분야에 따라 세부전문 분야를 더 갈고닦되, 동시에 전체적 관점을 유지하며 팀의 일원으로 협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신과 전문의들은 다른 직역과 중복되지 않는 고유한 가치를 제공하고, 급변하는 의료환경 속에서도 정신건강 분야의 핵심 전문가로서 중심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변화에는 정책적 뒷받침과 사회적 인식 제고도 필수적이다. 전문의 수련과정의 개선, 보험수가 체계의 개편, 타 직종과의 역할 조정, 연구지원 확대 등 여러 과제가 뒤따르겠지만, 이는 정신건강의학의 발전과 공중의 이익을 위한 투자라 할 수 있다. 미래를 준비하는 학회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성찰하고 자기혁신하는 노력이 전문의 개개인뿐 아니라 관련 학회와 제도권에서도 이어져야 할 것이다. 변화의 한가운데 서 있는 지금, 정신과 전문의들은 과거의 성찰과 현재의 통찰을 바탕으로 미래를 선도할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정신과 전문의 본연의 사명은 인간의 정신적 고통을 치유하고 마음의 안녕을 지키는 일이며, 시대와 도구가 변해도 그 궁극의 목표는 변하지 않는다. 미래에는 그 사명을 실현하는 방법과 모습이 달라질 뿐이다. 결국 인간에 대한 깊은 공감과 과학에 대한 진지한 탐구심을 겸비한 정신과 전문의의 모습이야말로, 어느 시대에나 필요한 귀중한 전문성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이러한 핵심 가치를 지키면서 혁신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정신과 전문의들은 다가오는 미래에도 자신의 고유한 전문영역을 공고히 하고 사회에 더욱 큰 공헌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조현병, 우생학, 그리고 낙인

 

서론

1930~40년대 나치 독일에서는 의료인이 자신의 환자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한, 역사상 유례없는 비극이 발생하였다(Luty, 2014). 나치 정권은 우생학적 인종위생 이념에 따라, 정신질환자 특히 조현병 환자들을 유전적으로 열등하며 생존 가치가 없는 존재로 낙인 찍고, 이들을 대상으로 한 강제 불임 및 살해 정책을 국가 주도로 실행하였다(Strous, 2007; Torrey & Yolken, 2010). 이 사건은 인류 의학사에서 가장 암울한 사례 중 하나로 평가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대학살에 가려져 대중에게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Haefner, 2010), 정신의학계 내부에서도 오랜 기간 충분한 반성과 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Strous, 2007). 그러나 나치 정신과 의사들의 적극적 가담과 이로 인한 수십만 명의 희생은, 의학이 어떻게 전체주의적 이념에 의해 악용될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참사는 현대 정신의학에 중대한 윤리적 교훈을 남기며, 유사한 사태가 반복되지 않도록 철저한 성찰이 요구된다. 본 논문은 나치 정권하 정신질환자 대상 우생학 정책의 전개, 정신의학계의 역할과 책임, 정책의 집행 구조 및 사회적 배경, 생존자 증언과 윤리적 쟁점을 종합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또한 이 정책이 조현병 유병률에 미친 영향을 둘러싼 학술적 논쟁을 고찰하고, 생물학적 환원주의와 낙인의 상호작용을 살펴볼 것이다. 끝으로 전후 독일 및 국제사회의 반성과 사법적 청산, 현대 정신의학의 윤리 및 제도 변화, 나아가 오늘날 유사한 낙인 메커니즘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통해 정신의학의 미래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나치 독일의 우생학 정책과 정신질환자 말살의 전개

나치 독일의 정신질환자 말살 정책은 20세기 초 우생학 사조와 사회진화론의 영향 아래 형성되었다 (Haefner, 2010). 1920년대 독일 의학자들은 이미 “살 가치 없는 생명” 이라는 개념을 논하며 불치 정신질환자의 안락사를 정당화하려 하였고, 이 사상은 나치 정권에 의해 수용되고 극단화 되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유전적으로 열등한 집단을 제거하여 우월한 인종의 순수성을 유지하려 했으며, 정신질환자는 그 주요 표적이었다 (Haefner, 2010). 1933년 7월, 나치 정권은 ‘유전병 자손 예방법’을 제정하고 광범위한 강제 불임 정책을 공식적으로 시행하였다 (Government, 1933). 해당 법은 선천성 정신박약, 조현병, 조울병, 간질, 헌팅턴병, 유전성 시각·청각장애, 중증 기형 및 알코올중독 등 9가지 유전 질환을 가진 자에 대한 강제 불임 시술을 허용하였다. 이 법의 시행을 위해 설치된 유전건강법정은 형식적인 절차만을 거친 채, 대부분의 신청자에게 불임 시술을 승인하였다. 그 결과, 나치 시기 독일과 점령지에서는 약 40만 명이 불임 시술을 받았고, 이들 중 다수는 조현병 등 정신질환을 가진 환자들이었다. 정신과 의사 에른스트 뤼딘(Ernst Rüdin)은 해당 법의 입안과 해설서 작성에 핵심적으로 참여했으며, 조현병 환자는 예외 없이 불임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Torrey & Yolken, 2010). 뤼딘과 나치 보건 당국자들은 조현병이 유전성이 강하고 생산적 노동이 어렵다는 이유로, 모든 환자를 예외 없이 불임시켜야 한다고 믿었다 (Torrey & Yolken, 2010). 뮐러-힐(Müller-Hill)의 연구에 따르면, 나치 치하 독일에서 조현병 진단을 받은 환자들은 대부분 강제 불임 대상이 되었고, 5년 이상 장기 입원한 환자들은 거의 모두 안락사 위험에 처했다 (Brace, 2001; Torrey & Yolken, 2010). 이처럼 초기 불임 정책부터 이미 정신질환자는 배제와 제거의 표적이 되었던 것이다.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히틀러는 “쓸모없는 생명을 제거하라”는 성경 구절을 인용한 비밀 지령을 내려 성인 환자에 대한 ‘자비로운 죽음’을 허용했으며, 이 조치는 전쟁 개전일인 9월 1일자로 소급 적용되었다 (Strous, 2007). 이 지침에 따라 즉시 실행된 것이 성인 정신질환자와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살해 계획, 즉 ‘T4 작전’이었다(명칭은 베를린 티어가르텐슈트라세 4번지에 위치한 실행본부 주소에서 유래함). Aktion T4 계획에 따라, 독일 전역의 정신병원 및 요양소에 입원한 환자들의 정보가 수집되었으며, 대부분 정신과 의사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이 서류만으로 생사를 결정하였다 (Strous, 2007). 환자들은 특수 제작된 회색 버스를 통해 6개 비밀 안락사 시설로 이송되었으며, 도착 즉시 일산화탄소 가스로 살해되었다(Müller, 2018). 시신은 즉시 화장되었고, 유가족에게는 병사로 가장된 허위 사망진단서가 발송되었다 (Strous, 2007). 1940~41년 사이 약 7만 명의 정신질환자 및 장애인이 T4 프로그램에 따라 살해된 것으로 추산된다 (Müller, 2018). 나치 정권은 이 과정을 극비리에 진행했으나, 대규모 환자 이송과 갑작스러운 사망 통보로 인해 독일 사회 내에 소문이 확산되었고 일부에서는 항의와 저항이 발생하였다. 1941년 8월, 가톨릭교회의 갈렌 주교(Clemens von Galen)는 설교를 통해 안락사 프로그램을 공개적으로 비판했고, 이에 따른 사회적 반발이 커지자 히틀러는 T4 작전의 공식 중단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는 단지 일시적인 전술적 중단이었으며, 실제로는 살해가 비밀리에 계속되었다. T4 작전 중단 이후, ‘야생 안락사(wild euthanasia)’로 불리는 분산적 학살 단계가 전개되어, 지방 정신의료기관에서도 환자 살해가 계속되었다. 종전이 이루어진 1945년까지, 안락사 희생자는 총 20만에서 3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나치 독일의 학살과 정신의학계의 반응

나치 정권은 장애인과 정신질환자 학살에 의료 체계를 조직적으로 활용하였다. 안락사 작전에는 약 45~50명의 의사들이 선발되어 참여하였으며, 이들은 환자 선별, 이송, 살해, 사후 처리 등 모든 과정에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Strous, 2007). 당시 독일 정신의학계는 세계적 권위를 가졌지만, 그 전문성은 윤리적 제어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오히려 나치 정책 실행의 수단이 되었다. 많은 정신과 의사들은 우생학과 인종위생 이념에 적극 동조하며 환자 말살 정책에 협력하였다. 예를 들어 에른스트 뤼딘(Ernst Rüdin)은 국제 우생학 단체 회장을 역임하며, “정신병자의 강제 불임은 종족 보호를 위한 필수 조치”라고 주장하였고, 1933년 불임법 제정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Torrey & Yolken, 2010). 그의 연구와 이념은 나치의 보건정책을 과학적으로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고, 나치는 그가 소속된 독일정신의학연구소에 재정과 인력을 지원하며 협력을 유도하였다 (Torrey & Yolken, 2010). 또한 오이겐 피셔(Eugen Fischer), 오트마르 폰 페어쇼어(Otmar von Verschuer) 등 인종유전학자와 저명한 정신과 교수들 역시 정책 자문에 참여하였고, “무가치한 생명(Ballastexistenzen)”, “열등 유전자 보유자” 등의 용어를 통해 환자 제거를 학술적으로 정당화하였다 (Torrey & Yolken, 2010). 직접적으로 학살에 가담한 정신과 의사는 소수였지만, 침묵하거나 방조한 다수의 의사들도 체제 유지에 기여하였다. 예를 들어 정신과 의사 베르너 하이데(Werner Heyde)와 파울 니체(Paul Nitsche)는 T4 작전의 의료 책임자로서 환자 선별과 실행을 감독하였고, 이르므프리트 에베를(Irmfried Eberl)은 안락사 시설 책임자를 거쳐 트레블링카 수용소의 초대 소장으로 발탁되었다 (Strous, 2007). 에베를은 환자 학살 경험을 바탕으로 트레블링카에서 효율적 대량 학살을 수행한 인물로 평가된다. 안락사 시설에서는 정신과 의사들이 환자 진료를 가장하여 가스실로 인도하고, 살해 후 부검 및 허위 사망진단서를 작성하는 일까지 맡았다 (Strous, 2007). 살해 과정에서 환자의 사인은 심장마비나 폐렴 등으로 조작되었고, 유가족에게는 병사로 위장된 편지가 전달되었다(Strous, 2007). 일부 의사들은 희생자의 뇌를 수집하여 연구 자료나 해부 실습 교재로 활용하기도 했다. 하다마르(Hadamar)와 괴팅겐(Göttingen) 등의 정신병원은 안락사 피해자의 뇌 조직을 병리 표본으로 보관하였으며, 일부는 전후까지 남아 있었다. 학살에 직접 가담한 의사들 뿐 아니라, 대학의 정신과 교수들도 학문적 차원에서 이 정책을 지지하거나 방조하였다. 많은 교수들은 학술 논문과 강연을 통해 “열등 유전자의 제거는 인류 진보에 기여한다” 는 주장을 펼치며, 정책의 이론적 정당성을 제공하였다. 이는 전쟁 기간 동안 독일 정신의학계가 집단적으로 수행한 가장 어두운 실천이었으며, 그 결과 수십만 명의 정신질환자가 동료 의료인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Strous, 2007) 나치 정권하 정신의학계 내부의 조직적 저항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일부 양심적 의사들이 개별적으로 환자를 보호하려 했다는 사례가 있으나, 공개적이고 조직적인 반대는 사실상 없었다(Strous, 2007). 이는 정치적 공포와 동료 집단의 압력 때문이기도 했지만, 많은 의사들이 우생학 이념을 신념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도 설명된다(Haefner, 2010). 1941년 갈렌 주교의 공개 비판 이후 일부 의사들은 작전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관여를 피하고자 했으나, 체제에 저항하기보다는 조용히 물러나는 데 그쳤다. 결국 나치 하의 독일 정신의학계는 윤리적으로 거의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환자 학살은 동료 전문가들에 의해 실행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윤리적 붕괴는 오늘날까지도 독일 정신의학계의 부채의식으로 남아 있으며, 전후 오랜 기간 금기시되었던 자기반성과 청산은 최근에야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나치 정권 하에서 독일 정신과 의사들이 조현병 환자 학살에 침묵하거나 적극 가담한 행위는 표면적 개인의 동기만으론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이를 이해하려면 개인이 전체주의 집단에 포함될 때 벌어지는 무의식적 집단 역동과 정신적 퇴행을 고찰해야 한다. 영국 정신분석가 비온(Wilfred Bion)의 이론은 이러한 집단 수준의 심리를 분석하는 데 유용한 틀을 제공한다. 특히 비온은 집단이 스트레스 하에서 합리적이고 현실 지향적인 ‘과업 집단(work group)’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원초적 가정에 따라 움직이는 ‘기본 가정 집단’(basic assumption group)으로 퇴행할 수 있다고 보았다 (Bion, 1961). 나치 체제는 정신과 의사들을 바로 이러한 기본 가정 집단 상태로 끌어들였고, 그 결과 그들의 비판적 사고능력과 윤리적 판단력은 마비되었다고 볼 수 있다. 비온의 이론에 기대어 당시 나치 체제하에서 침묵적 동조를 한 이들의 행동을 다음과 같이 가정해볼 수 있다. 첫째, 의존 기본 가정에 따른 집단 동조 현상을 들 수 있다. 비온에 따르면 집단은 때때로 전능한 리더에게 의존하며 자기 생각을 포기하는 퇴행을 보인다 (Bion, 1961). 나치 정권 하에서 많은 의사들은 히틀러와 나치 이데올로기를 절대시하고 거기에 의존함으로써, 자신들의 초자아 기능을 지도자에게 양도해 버렸다. 다시 말해, 윤리적 판단을 스스로 내리는 대신 “지도자가 옳다고 하는 것은 모두 옳다”는 식의 무의식적 신념이 자리 잡았다 (Roth, 2013). 집단이 권위주의적 리더를 이상화 하면, 그 리더의 명령과 이념은 의심 없이 “진리”로 수용되고, 개인은 더 이상 자기 판단을 실행하지 않게 된다. 실제로 전체주의 집단에서 지도자는 일종의 “전지전능한 메시아”로 떠받들어지며(Bion, 1961의 지적), 개인들은 그 메시아적 지도자가 제시하는 미래 유토피아 환상에 몰입한다. 이러한 맹목적 의존 속에서 독일 정신과 의사들 역시 히틀러를 절대선으로 동일시하고(공격자와의 동일시), 그의 자아이상을 내면화함으로써 자신의 윤리적 의문을 유예시켰다. 집단적 이상화와 동일시를 통해 이들은 마치 “새로운 정체성”을 얻은 듯한 심리에 빠졌고, 그로 인해 오만감과 현실에 대한 왜곡이 발생했다. 한나 아렌트가 지적했듯이, 이러한 무사유의 상태야말로 악의 평범성의 토양이다 (Arendt, 2018). 다시 말해, 각 개인이 아무런 생각이 없는 상태에 빠져들면서 비판적 양심은 흐려지고, 상부로부터 주입된 관념을 그대로 실행하는 도구적 자아로 기능하게 된다 (Bion & Hinshelwood, 2023). 둘째, 집단 방어기제로서의 투사와 분열 메커니즘을 들 수 있다. 비온을 비롯한 대상관계론적 관점에서는 전체주의 사회에서 집단적 투사가 광범위하게 일어난다고 본다 (Roth, 2013). 나치 이데올로기는 정신질환자를 “민족 공동체의 삶에 부정적인 요소”로 낙인찍었는데, 이는 집단이 자기내부의 불안과 부정성을 환자들에게 투사적 동일시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독일 사회와 의료진은 자신들의 무의식적 열등감이나 취약성을 조현병 환자들에게 뒤집어씌우고, 그들을 사회로부터 격리·제거함으로써 스스로를 순수하고 건강한 집단으로 보존하고자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편집-분열적 심리가 두드러지는데, 세상을 철저히 선/악의 이분법으로 바라보는 절대적 도덕관이 형성되고, 환자들은 악이나 불결함의 화신으로 탈인간화되었다. 실제로 나치는 정신장애인을 “살 가치가 없는 생명”(Lebensunwertes Leben)으로 규정했는데, 이는 환자를 인간 공동체의 일부로 보지 않는 극단적 분열의 사례다 (Chalmers, 2011). 집단적 분열과 투사의 결과로 공감의 급속한 철회가 일어나고 환자에 대한 감정적 둔마가 진행된다. 무의식적으로 환자들은 집단이 제거해야 할 악을 담는 그릇(container)으로 취급되었고, 그들에게 향하는 잔혹한 폭력조차도 대의명분으로 미화되었다 (Roth, 2013). 요컨대 환자들은 집단의 부정적 감정과 공격성을 떠맡는 희생양이 되었고, 그들을 제거하는 행위는 집단 내부의 불안과 죄책감을 해소하는 의식화되지 않은 의례가 되었던 것이다. 셋째, 이러한 집단 상황에서 개인들은 심리적 퇴행을 일으켜 원시적 공격성에 동원되기 쉬워진다. 비온은 집단에서 공격-도피 기본 가정(attack-flight assumption)이 지배적이 될 경우, 구성원들이 마치 위협에 맞서 싸우거나 도망치는 원시 부대처럼 행동하게 된다고 보았다 (Bion, 1961). 나치 정권은 의사들을 “민족의 건강을 위협하는 유전적 열등집단에 맞서 싸우는 전사”로 호명함으로써, 이 기본 가정에 불을 붙였다. 집단적으로 볼 때 이는 공격적 동일시의 한 형태로 나타났는데, 많은 정신과 의사들이 자신들을 가해자(권력자)와 동일시하여 공격자의 시각으로 세계를 보게 된 것이다. 안나 프로이트가 논한 “가해자와의 동일시”는 원래 불안에 대한 방어기제지만, 나치 체제하 의사들의 경우에도 유사한 심리가 관찰된다 (Freud, 2018). 즉, 이들은 체제에 순응하고 적극 가담함으로써 자신이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의 편에 서 있다는 환상을 유지했고, 이를 통해 오히려 심리적 안정과 우월감을 얻었다. 그 결과 개인의 도덕적 판단은 집단의 병리적 논리에 합류하게 되었고, 윤리적 죄책감은 부인되거나 합리화되었다. 예컨대 많은 의사들은 학살을 생물학적 정화 작업이나 환자들을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자비로운 죽음으로 미화하며 스스로를 속였는데, 이는 현실과 진실을 연결하는 사고 과정에 대한 공격으로 해석할 수 있다 (Bion, 2013). 학살 행위의 잔혹한 실체와 자기 역할에 대한 인식을 연결 짓는 고리를 파괴함으로써, 의사들은 인지적 부조화와 양심의 가책을 차단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의미 있는 사고와 감정의 연결고리가 끊어지면, 사람은 끔찍한 행위를 하면서도 그것을 제대로 생각하거나 느끼지 않게 된다. 이러한 상태에서 잔인한 행동이 일상적 업무로 둔갑하고, 행위자는 자기 행위의 파괴성을 자각하지 못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된다. 결론적으로, 나치 체제하에서 독일 정신과 의사들이 저지른 집단 살해 가담은 개인적 악의나 사이코패스적 특성 때문이 아니라, 집단 무의식의 소용돌이 속에서 야기된 심리적 동조와 퇴행의 산물로 이해될 수 있다. 비온 이론에 비추어보면, 이들은 정상적인 치료자로서의 “과업 수행 집단” 기능을 상실하고 전체주의 이념에 몰입한 “기본 가정 집단”의 일원으로 변모하였다. 그 결과 초자아적 판단 능력은 지도자에게 위탁되고, 공감과 개별적 사고는 마비되었으며, 원시적 분열-투사적 환상이 지배하는 심리적 공간에서 잔혹한 행동도 당연시될 수 있었다. 집단이 제공하는 유토피아 환상과 병적인 도덕 이분법 속에서, 개별 의사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악이 아닌 선으로 느꼈을 것이다. 이러한 분석은 인류 역사상 유사한 집단 범죄가 어떻게 가능해지는지에 대한 하나의 심층적 설명을 제시하며, 집단 상황에서 전문가조차도 무의식적 동조와 퇴행을 통해 잔혹한 행위의 공모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볼 때, 전체주의 체제는 하나의 거대한 병리적 정신구조처럼 기능하여 개인들을 동화시키고, 결국 아무 생각 없는 동조가 난무하는 구조를 만들어낸 것이다 (Roth, 2013). 이는 곧 인간 개개인의 양심과 사고를 마비시키는 집단 광기로 이어지며, 그 속에서 윤리적 판단은 끝없이 유예되다가 끝내 실종되고 만 것이다.

유병율과 유전적 제거 효과에 대한 논쟁

나치의 환자 제거 정책은 “열등 유전자”를 제거하면 조현병과 같은 질환의 유병률이 감소할 것이라는 과학적 전제에 기초하고 있었다(Torrey & Yolken, 2010). 에른스트 뤼딘을 포함한 나치 정신과 의사들은 조현병을 멘델 유전법칙에 따른 단일유전병으로 간주하며, 이를 근절하기 위한 대규모 불임 및 살해 정책을 과학적 실험처럼 시행하였다(Burleigh, 1997; Torrey & Yolken, 2010). 그러나 현대 유전학에 따르면 조현병은 단일 유전자가 아닌 다유전자성과 환경 요인의 상호작용에 의해 발현되는 복합질환이며, 나치 시대에는 이러한 과학적 통찰이 결여되어 있었다. 뤼딘의 연구조차 유전 양상이 단순하지 않다는 결과를 보였으나, 그는 기대에 어긋난 결과를 묵살하거나 왜곡하고 표본을 확대해 의도한 결론을 도출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Yudell, 2015). 이처럼 과학이 아닌 이념이 우선되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잘못된 유전론은 조현병 환자에 대한 폭력적 제거 정책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었다. 나치의 조현병 제거 시도는 근본적으로 과학적 근거가 결여된 채 시행되었으며, 오히려 현대 유전학의 관점에서 볼 때 큰 오류였다. 실제로 나치는 1934년부터 1945년 사이 약 13만 명의 조현병 환자가 불임 시술을 받았고, 10만 명이 살해되었으며, 중복을 감안하더라도 총 22~26만 명에 달하는 환자가 제거된 것으로 추산된다 (Haefner, 2010; Torrey & Yolken, 2010). 당시 독일 내 조현병 환자 수가 약 30만 명이었음을 고려할 때, 70% 이상이 불임 또는 살해되어 유전자 풀에서 제거된 셈이다 (Haefner, 2010; Torrey & Yolken, 2010). 조현병 유병률 감소라는 나치의 기대와는 달리, 전후 연구들은 유의미한 발병률 감소가 관찰되지 않았다고 보고하였다 (R. D. Strous, 2010). 전쟁 직후 독일에서는 조현병 유병률이 일시적으로 감소한 것으로 보였으나, 이는 대규모 학살로 인해 환자 수가 물리적으로 줄어든 결과였다. 이후 신규 발병률은 오히려 높게 나타났으며, 이는 나치의 유전적 제거 시도가 조현병의 장기적 발생률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음을 시사한다(Torrey & Yolken, 2010). 예컨대 1960년대 중반 만하임 지역의 역학조사에 따르면, 조현병의 연간 발병률은 인구 10만 명당 53.6명으로, 당시 국제 평균의 두 배에 달하는 높은 수치였다 (Haefner, 2010; Torrey & Yolken, 2010). 물론 진단 기준과 조사 방법의 차이를 고려할 필요는 있지만, 최소한 한 세대가 지난 시점에도 조현병은 여전히 높은 발생률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는 ‘열등 유전자 제거’를 통한 질병 박멸이라는 나치의 전제가 과학적으로 잘못되었음을 시사한다. 전후 유전학 연구는 조현병이 유전적 소인과 환경 요인의 복합적 상호작용에 의해 발생한다는 점을 밝혀내며, 나치의 단선적 유전주의가 얼마나 과학적 근거가 부족했는지를 보여주었다. 또한 환자들을 물리적으로 제거하더라도, 해당 유전자는 가족과 혈연 집단 내에 남아 있기 때문에 단기적인 제거 시도로는 유병률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기 어렵다. 또한, 전쟁 트라우마, 영양실조, 피난 등 극심한 환경을 겪은 인구에서 정신증적 장애가 증가했고, 종전 직후 정신의료기관은 환자들로 과밀해졌다는 보고도 있다(McMahon et al., 2023). 이러한 점을 종합할 때, 나치의 대규모 유전 제거 시도는 “궁극의 유전 실험”이었지만, 조현병 발병률 감소라는 목표 달성에는 실패했다(R. D. Strous, 2010).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정신질환의 원인을 오직 생물학적 요인에만 환원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공학적 개입을 시도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보여준다. 정신질환은 복합적인 인간현상임에도 불구하고, 나치는 이를 단순한 유전적 결함으로 간주하며 폭력적 제거 정책을 시행했고, 이는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의도한 목표를 전혀 달성하지 못했다.

생물학적 환원주의와 낙인

나치 정권하 독일의 정신의학계는 극단적 생물학주의와 결정론에 깊이 물들어 있었다. 정신질환자는 고통받는 인간이 아니라, ‘유전자 풀’에 해를 끼치는 생물학적 존재로 간주되었다(Haefner, 2010; Kevles, 1999). 이러한 시각은 환자의 존엄성과 고통을 배제한 채, 그가 사회 전체에 미칠 해악만을 강조하였다. 이는 생물학적 특성만으로 인간의 가치를 판단하려는 사고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낙인 이론에 따르면, 사회적 낙인은 개인의 자기 정체성과 행동에 영향을 주며, 나치 시대 정신질환자들은 ‘살 가치 없는 생명’이라는 낙인으로 인해 보호받지 못한 채 학살당했다. 나치 정신의학은 정신질환을 유전자와 뇌의 문제로만 환원하고, 사회적·환경적 맥락을 철저히 배제하였다. 이러한 일면적 생물학주의는 공감과 이해를 마비시키며, 환자를 ‘문제 유전자 보유자’로 대상화하게 만들었다. 결국 생물학적 결정론은 극단적 낙인으로 이어졌고, 과학의 이름 아래 인간성을 말살하는 결과를 낳았다 (Kevles, 1999; Kvaale et al., 2013). 당시 선전물은 정신병원을 ‘민족의 쓰레기통(Die rassenhygienische Kehrichtschübe)’이라 부르며, 환자를 민족 공동체에 대한 위협으로 묘사하였다 (Strous, 2007). 이러한 선동 속에서 의사들은 환자를 ‘제거되어야 할 해로운 존재’로 간주하며 학살을 실행하였다. 이에 부응하여 의사들은 환자를 “사회에서 제거해야 할 유해생물”로 간주하고 의학적 살인을 집행했다. 과학의 이름으로 자행된 이러한 인간성 말살은 의학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정신질환에 대한 생물학적 설명이 낙인을 줄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낙인을 심화시킬 수도 있다. 최근 메타분석에  메타분석에 따르면, 생물학적 설명은 비난을 줄이지만 동시에 회복 가능성에 대한 비관과 사회적 거리감을 심화 시킨다(Kvaale et al., 2013). 이는 생물학적 환원주의가 낙인의 또 다른 형태—두려움, 격리—를 유발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비판적 정신의학 진영에서는 뇌나 유전자 중심의 접근이 인간의 복합성을 간과하고 편견을 고착 시킬 수 있다고 지적한다 (Thachuk, 2011). 나치 사례는 생물학적 설명이 윤리적 경계 없이 활용될 때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현대 정신의학에서 생물학화(biomedicalization) 경향이 강화됨에 따라, 유전자 결정론이 다시 낙인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주의가 요구된다(Kotsyubinsky & Kotsyubinsky, 2023). 이에 따라 학계는 생물학-심리-사회적 통합 관점의 유지를 강조하고, 생물학적 환원주의에 대한 비판적 경계를 촉구하고 있다

기억과 책임, 그리고 현대 정신의학의 과제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나치 의료 범죄에 대한 재판이 연합군과 독일 법정에서 열렸다. 1945년 10월 미국은 하다마르 재판을 통해 정신병원 내 환자 학살에 가담한 의료진을 기소하였고, 7명 중 3명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어 1946~1947년 뉘른베르크 의사재판에서는 안락사 프로그램에 관여한 카를 브란트(Karl Brandt) 등 4명이 기소되었고, 이 중 3명이 사형되었다. 동시기 소련 점령지 드레스덴에서도 T4 실행 책임자였던 정신과 의사 파울 니체 등이 재판을 통해 처형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가담 의사들은 책임을 회피한 채 의료계로 복귀하였고, 서독 정부는 처벌보다 체제 안정과 의료 재건을 우선시하였다(Strous, 2007; Rael D Strous, 2010). 그 결과, 많은 가해 의사들은 신분을 숨기고 학계 및 병원에서 활동을 이어갔으며, 일부는 교수나 전문가로 재등장하였다 (Lindert et al., 2012). 예를 들어 T4 작전 핵심 인물인 베르너 하이데는 전후 가명을 사용하며 숨어 지내다 1959년 체포되었고, 재판 직전 자살하였다. 이처럼 책임 회피와 은폐로 인해 독일 정신의학계의 자기반성과 개혁은 오랫동안 지연되었다. 1950년대 이후 독일 내에서 관련 사건이 점차 공론화되었고, 1980년대부터 학계와 언론을 통해 나치 의사들의 범죄가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1989년 서독 의사협회장이 처음으로 공식 사과를 표명하였고, 1990년대 이후 일부 의과대학은 관련 역사 교육을 도입하였다. 특히 2010년, 독일정신의학회는 창립 160주년을 맞아 나치 시대의 가담 사실을 인정하며 공식 사죄 성명을 발표하였다(Gale, 2013). 당시 학회장 프랑크 슈나이더는 “독일 정신의학회와 그 의사들이 피해자들에게 끼친 고통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한다”며, 사과가 ‘부끄럽도록 늦었다’는 점도 함께 인정하였다(Müller, 2018). 같은 해 학회는 “기록되고, 박해당하고, 말살되다”라는 제목의 순회 전시회를 개최하며 나치 정신의학 범죄를 대중에 공개하였다(Müller 2018). 해당 전시는 베를린 티어가르텐슈트라세 4번지(과거 T4 본부 자리)에 위치한 추모관을 포함해 독일 각지를 순회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한편 독일 정부는 1980~90년대에 걸쳐 강제 불임 피해자에게 배상을 실시하며 제도적 반성을 병행하였다. 나치 의학의 범죄는 국제 사회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고, 전후 세계 의료윤리 체계의 형성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48년 세계의사협회는 제네바 선언을 통해 “인류에 봉사하고 생명을 최상의 존중으로 다루겠다”는 새로운 윤리 강령을 채택하였다. 1975년 세계정신의학회는 하와이 선언을 통해 정신과 의사의 윤리 원칙을 제시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환자 인권 침해를 허용하지 않아야 함을 명시하였다. 나치 우생학에 대한 반성은 각국의 과거 우생학 정책 재조명으로 이어졌다.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 미국, 일본 등은 20세기 중반까지 강제 불임이나 격리 정책을 시행해왔으며, 1990년대 이후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보상에 나섰다. 스웨덴은 1935~1975년 약 6만 명을 불임시킨 사실이 1997년 공개되자 정부가 공식 사과하고 피해자 배상을 실시하였다(Tydén, 2002). 일본은 1948년 우생보호법 제정 이후 약 1만6천 명이 불임 수술을 받았고, 해당 법은 1996년까지 시행되었다(Hovhannisyan, 2021). 일본 정부는 오랜 기간 책임을 부인하다가, 2019년 피해자들에게 공식 사과하고 1인당 320만 엔의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하였다. 미국에서는 32개 주에서 우생학적 강제 불임법을 시행하였으며, 약 6만 명이 시술을 받았다. 21세기에 들어 일부 주는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보상을 시행하였다(Reilly, 2015). 이처럼 나치의 사례는 우생학적 국가 개입의 위험성을 전 세계에 각인 시켰으며, 각국은 과거를 재조명하고 제도를 개선하는 계기로 삼았다. 나치 정신의학의 교훈은 현대 의료윤리 및 제도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대표적으로 인체실험에 관한 뉘른베르크 강령과 헬싱키 선언, 그리고 강제 불임과 유전학적 차별에 대비한 각국의 법·제도 정비를 들 수 있다. 미국은 2008년 ‘유전정보 비차별법(GINA)’을 제정하여 고용이나 보험에서 유전적 정보로 차별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이는 개인의 유전적 소인이 사회적 불이익으로 연결되지 않게 하려는 안전장치다. 그러나 법과 별개로, 사회적 인식과 윤리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유전정보 활용은 언제든 차별로 이어질 수 있다. 예컨대 일부 보험사는 비공식적으로 고객의 가계력이나 DNA 데이터를 입수해 보험료에 반영하려 한다는 의혹도 있고, 유전자 편집 기술의 발전으로 “맞춤아기” 논쟁도 현실화되고 있다. 이런 흐름에 대해 세계보건기구(WHO) 등은 기술의 진보가 나치식 우생학의 재현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나치 정신의학의 비극에 대한 반성을 토대로, 현대 정신의학은 향후 몇 가지 핵심적인 의료윤리 원칙을 더욱 구체적으로 견지해야 한다. 첫째로, 인간 존엄성의 절대적 존중이다. 환자는 어떤 경우에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받아야 하며, 그 생명과 가치가 어떠한 이념이나 사회적 목적보다 우선한다. 나치 의학은 ‘유전적 열등’이라는 명분 아래 인간을 도구화한 극단적 사례였고, 그 교훈은 모든 치료 행위의 최우선 기준이 환자의 존엄과 권리임을 일깨운다(O’Mathuna, 2006). 둘째로, 환자 인권과 자기결정권의 철저한 보호이다. 환자의 자율성 및 기본 인권은 전쟁이나 사회적 위기 속에서도 결코 유예되어서는 안 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제정된 뉘른베르크 강령, 세계의사협회 제네바 선언, 세계정신의학회 하와이 선언 등 국제 의료윤리 강령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의료인이 환자의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천명하고 있다. 셋째로, 정신의료 정책과 임상에서 당사자 참여를 보장하는 것이다. “우리 없이 우리에 관한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구호처럼, 정신질환 당사자와 가족의 목소리가 의사결정에 실질적으로 반영될 때 정책과 치료과정이 인간 존중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과거 나치 정신의학에서는 환자들이 철저히 배제된 채 객체화 되었기에 극단적 폭력이 가능했음을 돌아볼 때, 앞으로는 정신건강 영역에서 당사자의 참여와 권한 강화를 통해 투명성과 윤리성을 담보해야 한다. 넷째로, 윤리 교육의 내실화와 의료 전문직 문화의 개선이다. 나치 정신과 의사들의 윤리적 붕괴는 궁극적으로 의료인의 가치관 부재와 집단윤리 실패에서 비롯되었다고 평가된다 (Strous, 2007). 따라서 현대의 정신과 의사는 전문적 지식과 기술 뿐 아니라 환자의 인권을 옹호하고 부당한 명령에 저항할 수 있는 도덕적 용기를 함양하도록 체계적인 윤리 교육을 받아야 한다 (McMahon et al., 2023). 이를 위해 의료 현장에서도 지속적인 윤리 토론과 성찰의 장을 마련하고, 윤리 강령을 형식적으로 넘어 실제 행동원칙으로 정착시키는 노력이 요구된다. 궁극적으로 정신의학의 미래는 첨단 기술 발전보다도 이러한 윤리적 문화의 확립에 달려 있으며, 환자에 대한 존중과 인권 수호라는 가치 지향이 확고할 때 과거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Lindert et al., 2012; O’Mathuna, 2006). 위에서 살핀 현상들은 각기 맥락과 정도는 다르지만, 궁극적으로 사회가 얼마나 취약계층을 포용하느냐의 문제로 모아볼 수 있다. 정신질환자와 장애인, 빈곤층에 대한 차별과 낙인은 여전히 잔존하며, 때로는 제도와 과학의 모습으로 위장되기도 한다. 나치 시대의 비극은 극단적 특수성 속에서도 보편적 경고를 담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반성과 교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과학이든 정책이든 인간의 존엄과 연민을 상실할 때, 언제든 폭주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나치 시대는 명백히 보여준다. 현대사회는 공개적인 학살은 용납하지 않지만, 더 은밀하고 제도화된 방식으로 ‘불편한 존재’를 배제하려는 유혹에 직면해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인권 감수성과 윤리교육의 강화, 그리고 당사자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참여적 정책이 필수적이다. “우리 없는 우리의 정책은 없다(Nothing about us without us)”는 구호처럼, 정신질환자에 관한 정책 역시 당사자의 참여와 동의가 핵심 원칙으로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결론

결론적으로, 나치 정신의학의 비극은 윤리를 상실한 과학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경고하며, 정신의학의 미래는 기술이 아니라 윤리적 문화의 정착에 달려 있음을 일깨운다. 정신의학의 미래는 기술이 아니라 윤리적 문화의 정착에 달려 있으며, 의료인은 환자를 존엄한 인간으로 대하며, 환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인권을 수호하는 실천을 통해 과거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생학적 사고가 재등장하지 않도록, 대중 교육과 언론, 학계는 올바른 인식을 확산시키고, 환자와 회복자의 서사가 사회적 공감대 속에 존중 받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할 것이다. 독일 베를린의 티어가르텐슈트라세 4번지에 위치한 나치 정신질환자 안락사 희생자 추모비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들은 왜 죽어야 했는가?”(Warum mussten sie sterben?)”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하며, 같은 질문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역사를 기억하고 성찰해야 한다. 역사를 잊지 않는 지혜와 인간에 대한 존중—이것이 나치 정신의학이 오늘날 우리에게 남긴 과제이며, 정신의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대규모 언어 모델은 우리의 뇌를 어떻게 망가뜨리는가

발달심리학과 신경과학 연구들은 적당한 수준의 스트레스나 좌절 경험이 오히려 두뇌 발달에 필수적임을 이야기한다. 스트레스는 과도할 경우 해롭지만, 너무 없을 경우 오히려 스트레스 대응 체계의 미성숙을 초래한다. 즉, 어린 시절 전혀 좌절이나 어려움을 겪지 않으면 막상 현실에서 스트레스 상황에 놓였을 때 극복하는 능력이 취약해질 수 있다. 코넬대학의 Gee 박사는 “스트레스 반응의 활성화 실패는 유기체를 취약한 상태에 놓이게 하고, 반대로 스트레스 반응을 억제하지 못하면 성장과 발달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적절한 스트레스는 생물학적으로 필요한 자극이며, 과소자극과 과잉자극 모두 최적의 발달에 방해가 된다. 특히 ‘스트레스 예방접종’ 개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탠포드대학의 Paker 교수가 수행한 원숭이 연구를 보면, 어린 시절 중간 정도의 스트레스에 노출된 개체는 향후 스트레스에 대한 코티솔 분비가 줄고 불안 수준이 낮아지며, 전전두엽의 부피와 기능이 증가하는 등 회복탄력성이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간의 경우도 적당한 역경을 겪은 집단이 너무 순탄하거나 지나치게 힘든 성장 과정을 보낸 집단보다 스트레스 상황에서 생리적 반응이 안정적이라는 보고가 있다. 실제 미국 조지아대 Oshri 박사의 뇌영상 연구에서는 낮거나 중간 수준의 일상적 스트레스를 느끼는 사람이 작업기억 등 인지 기능을 담당하는 뇌 부위 활성도가 높고 과제가 더 잘 수행되는 반면, 만성적 높은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은 해당 뇌 활성도가 저하되어 있었음을 밝혔다. 즉, 가벼운 어려움에 반복적으로 부딪혀 보고 극복해본 경험이 쌓일 때 작업기억과 문제해결에 필요한 전전두엽 회로가 단련되고, 이는 미래의 스트레스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도 키워주는 거다. 그러니 적정 수준의 도전과 스트레스는 뇌의 인지조절 회로를 단련하고 정신적 면역력을 키우지만, 지나치게 없거나 지나치게 많은 스트레스는 모두 바람직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균형 잡힌 어려움의 경험이며, 부모와 교육자는 아이들이 안전한 환경에서 실수하고 실패해볼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다들 아는 이야기지만, 부모의 양육 태도는 아이의 자기조절능력과 뇌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과잉보호나 과도한 통제는 단기적으로는 아이의 상처받을 일을 줄이는 듯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독립성 결여와 실행기능 발달 지연을 낳는다. 스탠포드대 Obradovic 박사가 수행한 종단연구에서 부모가 유아기에 지나치게 개입하여 모든 문제를 대신 해결해주는 경우, 그 아이는 유치원 시기 낮은 자기조절력과 실행기능 저하를 보일 확률이 높았다. 부모의 과도한 개입으로 스스로 충동을 억제하거나 문제를 해결하는 연습 기회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교수는 부모의 과잉 개입과 아이의 자기조절 부족 사이에 유의한 상관을 보고하며, 부모의 이러한 행동이 유아의 실행기능 발달을 저해한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헬리콥터 페어런팅’으로 불리는 과잉보호 양육은 정신건강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부모가 항상 곁에서 맴돌며 아이가 부딪힐 만한 모든 장애물을 제거해줄 때, 아이는 좌절을 통해 성장할 기회를 잃게 된다. 이는 아이에게 “혼자서는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하여 자기효능감을 꺾고, 결과적으로 불안과 우울 증상의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 과잉보호적인 양육방식이 청소년기의 불안 및 우울 증상과 관련이 있다는 연구들은 꽤 많은데, 이러한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하는 경향이 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모가 모든 문제를 대신 해결해주면 아이는 실패 대처 전략을 배울 기회가 없고, 충동 억제나 의사결정과 같은 전전두엽 기능을 활용할 상황도 줄어든다. 그 결과, 청소년기에 접어들어서도 미성숙한 전전두엽 네트워크를 보일 우려가 있다. 반대로 지지적이지만 자율성을 존중하는 양육(권위있는 양육 방식)은 아이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격려하고 필요한 때에만 개입함으로써 자기조절력을 향상시킨다는 보고가 있다. 부모로부터 정서적 지원을 받으면서도 자율성을 부여받은 아이는 전전두엽 기반 실행기능의 발달이 촉진되고, 보다 유연한 대처 능력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난다. 결국, 지나친 통제나 방임이 아닌, 적절한 지원과 자율성의 균형 잡힌 양육이 아이 두뇌의 전전두엽 네트워크를 건강하게 발달시키는 관건이라 할 수 있다.

청소년기는 뇌 발달 측면에서 두 번째 급속 성장기로 불린다. 이 시기 청소년의 뇌에서는 인지 통제와 판단을 관장하는 전전두엽과 감정·보상을 관장하는 변연계의 발달 속도 차이가 존재한다. 구체적으로, 편도체 등 감정 중추는 사춘기 초반에 급격히 발달하는 반면 전전두엽은 20대 중반까지 서서히 성숙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전두엽-편도체 연결성 역시 청소년기에는 아직 미완성 단계이기 때문에, 충동적 감정 반응을 이성적으로 제어하는 능력이 어른보다 부족하다. 그 결과 보상에 대한 민감성이 높아 위험 부담보다 즉각적 즐거움을 좇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실제로 뇌과학자들은 “청소년은 보상 자극에 대한 뇌의 반응이 극대화되어 있어, 또래와 함께일 때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재미를 추구하려는 경향이 강하다”고 설명한다. 이는 청소년기의 전형적인 위험감수 행동의 신경학적 배경으로,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배움을 위한 자연스러운 탐색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청소년기의 뇌 특성이야말로 교육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했듯 청소년은 새로운 경험과 모험에 특히 민감하며, 이는 두뇌가 빠르게 배우고 적응하기 위한 진화적 산물이다. 청소년기의 뇌는 사용하는 회로는 강화하고, 쓰지 않는 회로는 가지치기하는 가소성을 보인다. 따라서 도전적인 과제와 적절한 위험이 수반된 경험을 통해 전전두엽-변연계 회로의 통합적 성숙을 이끌어낼 수 있다. 예컨대, 어떤 프로젝트에서 어려움에 부딪혀 문제 해결책을 모색하거나 사회적 갈등을 조정해 보는 경험은 전전두엽의 인지적 유연성과 의사결정 능력을 발달시키는 자극이 된다. 뉴욕주의 청소년 프로그램에서 제공하는 모의 투자게임이나 모험 스포츠 같은 안전한 한계 내의 위험 경험이 청소년의 판단력과 자기통제력을 향상시켰다는 보고도 있다. 이는 “우리는 도전을 통해 배운다. 실패를 통해 성장한다.”는 격언을 뒷받침한다. 실제로 청소년기는 실패하더라도 회복이 빠르고 새로운 신경 연결을 구축하기 좋은 시기이기 때문에, 안전한 환경에서 실패를 경험하고 재도전하는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코넬대 청년 ACT 센터의 보고서를 살펴보면 “청소년들은 보람 있는 위험(rewarding risk)을 안전하게 시도하고 때로는 실패해보는 기회가 필요하다. 그래야 두뇌가 그 경험을 통해 배우고, 향후 성숙한 판단력으로 이어진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부모와 학교가 청소년을 지나치게 안전한 울타리 안에 가두는 것은 오히려 두뇌 발달의 황금기를 놓치는 일이 될 수 있다. 청소년 스스로 책임을 지고 결정을 내리며, 위험을 평가하는 연습을 해야 비로소 전전두엽 기반의 실행기능과 비판적 사고력이 완성될 수 있다.

디지털 세대의 청소년들은 부모 뿐 아니라 기술적 편의에 의해서도 도전과 노력을 회피할 유혹을 받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인공지능 도구의 남용이다. 예를 들어, 최근 강력한 대규모 언어모델 기반 AI인 ChatGPT 등이 등장하면서 학생들이 에세이나 숙제를 직접 고민하지 않고 AI에 의존해 완성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겉보기에는 AI를 활용해 생산성을 높이는 똑똑한 방법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 뇌 발달에 “인지적 부채”를 지는 것이라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2025년 발표된 “Your Brain on ChatGPT” 연구에서는 대학생들을 세 그룹으로 나누어 에세이 작성 시 AI, 검색엔진, 스스로만의 힘을 각각 사용하게 한 뒤 뇌파와 성과를 비교했다. 그 결과, AI에 의존한 그룹은 스스로 생각하여 쓴 그룹에 비해 뇌 연결성이 현저히 약하고 전반적인 인지적 참여도가 낮았다. 뇌파 상 전전두엽 등 여러 영역을 아우르는 신경 네트워크의 활성도가 가장 저조했던 것이다. 심지어 몇 달 뒤 AI 사용을 중단하고 직접 글쓰기를 시켰을 때도, 이전에 AI에 의존했던 학생들은 여전히 뇌 연결성 저하 및 학습 몰입도 부족 현상을 보였다. 연구진은 AI를 통한 손쉬운 과업 처리에 익숙해지면 두뇌가 게을러져서 나중에 스스로 학습할 때 인지적 노력을 기울이기 어려워지는 현상을 “인지적 부채”에 빗대어 설명했다. 즉, 현재의 편의를 위해 지불하지 않은 인지적 노력은 부채로 남아 미래 학습능력의 저하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경고다. 실제로 해당 연구에서 AI 그룹 학생들은 글의 내용 면에서도 창의성과 비판적 사고가 부족하여 언어적·행동적 성과도 지속적으로 저조했으며, 자신이 쓴 에세이에 대한 기억이나 애착도 가장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AI 남용이 학습 동기와 주도성 감소로 이어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AI 도구의 남용이 위험한 또 다른 이유는 청소년들이 기피하고 싶어하는 ‘어려운 인지적 노력’을 대신해 준다는 점이다. 글을 쓰며 논리를 구성하고 자료를 찾고, 스스로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과정은 비록 힘들지만 인지적 근력을 키워주는 훈련이다. 그러나 AI가 손쉽게 답을 제공하면 이러한 과정을 건너뛰게 되고, 결과적으로 비판적 사고력과 문제해결능력의 근육이 단련되지 못한다. 일부 교육 전문가들은 “창의성이나 비판적 사고처럼 AI가 대체하기 어려운 역량을 학생들이 기르도록, 평가방식과 교육방식을 재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AI는 방대한 지식을 빠르게 제공할 수 있지만, 어떤 지식을 어떻게 활용하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낼지 판단하는 능력은 인간만이 발휘할 수 있는 고차원 기능이다. 따라서 AI 시대일수록 교육 현장에서는 학생들이 주어진 지식을 맹신하지 않고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습관, 스스로 질문하고 창의적으로 탐구하는 활동을 강조해야 한다. 만약 AI를 편법적인 지름길로만 사용한다면, 이는 단기적 성취를 얻는 대신 장기적 사고력의 성장을 빚으로 돌리는 꼴이 될 것이다.

이렇듯, 현대 청소년들의 자기조절력 약화 문제를 해결하려면 가정과 교육환경 전반에 걸쳐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우선 부모 교육을 통해 과잉보호의 함정에 대한 인식을 높여야 한다. 부모들이 아이의 성장을 진정으로 위한다면, 안전망을 완전히 걷어주는 대신 실패해도 좋을 작은 도전들을 허용해야 한다. 아이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좌절을 딛고 일어서는 경험을 할 때 전전두엽 네트워크가 활성화되고 자기조절력이 향상됨을 이해시킬 필요가 있다. 교육 과정 측면에서는 학생들의 뇌 발달 단계에 맞춘 도전적이고도 지지적인 활동이 설계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팀 프로젝트, 서비스 러닝, 실험적 학습 등을 통해 학생들이 현실 세계의 문제에 부딪혀 보고 창의적 해결책을 모색하게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교사는 일방적으로 정답을 알려주는 대신 메타인지적 코칭을 통해 학생 스스로 사고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이때 성장 마인드셋 교육을 병행하면 더욱 효과적이다. 성장 마인드셋이란 지능이나 능력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노력과 경험을 통해 발달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이를 가진 학생은 실수나 실패를 학습의 기회로 받아들여 오류를 교정하고 더 나아지는 데 집중한다. 미시간대 Schroder 박사의 연구에서 성장 마인드셋을 지닌 어린이들은 과제 수행 중 실수를 저질렀을 때 뇌에서 오류를 깊게 처리하는 신호가 크게 나타났고, 이후 해당 오류를 교정하며 더 향상된 수행을 보였다고 한다. 이는 성장 마인드셋이 학생들의 뇌에 실수에 대한 탄력적 대응 패턴을 심어주며, 장기적으로 인지적 회복탄력성을 높여준다는 증거다. 교육 현장에서 고정 마인드셋(실패를 무능함으로 간주하고 피하려는 태도)을 성장 마인드셋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노력—예컨대 노력과 전략에 대한 칭찬, 뇌가 변화한다는 점을 가르치는 수업—은 학생들이 어려운 도전에 직면했을 때 포기하지 않고 유연하게 대처하도록 도울 것이다.

회복탄력성 함양 프로그램도 고려해볼 수 있다. 회복탄력성은 역경을 이겨내고 회복하는 능력으로, 연구에 따르면 회복탄력성이 높은 청소년은 스트레스 상황에서 부정적 감정을 덜 겪고 오히려 긍정적 대응을 보이는 반면, 회복탄력성이 낮으면 사소한 스트레스에도 더 큰 불안이나 충동적 문제행동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다행히 회복탄력성은 후천적으로 길러질 수 있는 역량이다. 최근 메타분석에 따르면 학교 기반의 회복탄력성 증진 프로그램은 학생들의 스트레스 대처능력을 유의미하게 향상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예컨대, 인지행동기법을 응용한 집단 프로그램이나 사회정서학습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들은 감정 조절, 문제 해결, 목표 설정, 긍정적 자기 대화 등의 기술을 연습하고 스트레스 상황을 시뮬레이션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연습은 청소년의 전전두엽 기반 조절능력을 강화하여 실제 어려움에 부딪쳤을 때 과도한 불안에 빠지지 않고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게 해준다. 마지막으로,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을 통해 AI 등의 도구를 올바르게 활용하는 법도 가르쳐야 한다. AI를 사용하더라도 그것을 자기 학습의 보조 수단으로 삼고 핵심적인 사고 과정은 직접 수행하도록 지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ChatGPT를 쓰더라도 자신의 아이디어를 먼저 구상하고, AI가 제안한 정보를 비판적으로 검토 및 수정하여 최종 결과물을 만들게 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인지적 노력을 들이지 않고 얻은 결과물은 일종의 빚으로 남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술을 주체적으로 통제하면서 학습 동기와 창의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현대 청소년들의 자기조절력 저하와 회피 성향 증가는 개인과 주변 환경, 사회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얽힌 문제이다. 본 고에서는 특히 발달 단계에서의 적절한 역경 경험 부족과 과잉보호적인 양육, 그리고 AI 기술 남용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 주목하여 이를 뇌 발달과 연관지어 살펴보았다. 연구들이 시사하는 바는 분명하다: 청소년기의 두뇌는 도전과 자율적 경험을 먹고 자란다.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속담처럼, 적당한 어려움과 실패의 경험이 장기적으로는 전전두엽을 비롯한 인지 조절 능력을 발달시켜 회복탄력성과 비판적 사고력을 키우는 밑거름이 된다. 반대로, 아무리 선의에서 비롯된 것이라 해도 과잉보호와 통제는 아이들의 성장 기회를 빼앗아 뇌 발달을 저해할 수 있으며, 기술의 편의에 기대어 노력을 회피하는 습관은 두뇌를 나태하게 만들어 미래의 더 큰 성장 기회를 잃게 만들 수 있다. 그러므로 교육학적 대응은 균형 잡힌 접근이어야 한다. 한편으로는 청소년들이 안전한 한계 내에서 충분히 위험을 감수하고 자기 주도적으로 학습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을 둘러싼 부모와 교사, 그리고 사회 전체가 실패를 용인하고 배움의 과정으로 격려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뇌 과학에 기반한 교육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다. 성장기 두뇌의 특성을 이해하고, 그에 부합하는 도전적이면서도 지지적인 양육과 교육 전략을 적용할 때 비로소 우리의 청소년들은 미래 사회에 필요한 자기조절력과 창의적 사고력을 갖춘 건강한 성인으로 자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개인의 행복을 넘어 사회 공동체의 회복탄력성을 높이는 길이기도 하다. “훈련된 뇌”는 인위적 울타리가 아닌, 스스로 부딪치고 극복한 경험 속에서 길러진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과도한 보호보다 성장할 수 있는 자유이며,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의 기회다. 이를 뒷받침하는 과학적 근거들은 충분하며, 이제 남은 것은 이러한 통찰을 교육 현장과 가정에서 실천하는 일이다. 우리의 미래 세대가 건강하고 유능한 두뇌를 갖추도록 돕는 것은 교육자와 부모 모두의 책임이자 특권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