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산업은 최근 정체기에 접어들었다, 아니 심각한 위기에 접어들었다라는 소식이 심심치 않게 들리고 있다. 이창동, 홍상수, 김기덕, 박찬욱, 봉준호 등 그간 해외영화제에서 각광받는 스타 감독이 등장하였지만, 정작 이들 모두는 50-60대 이상의 연령대이며, 이들을 뒤로하면 최근에는 새롭게 떠오르는 젊은 신인감독의 이름을 찾기 어렵다. 그간 한국 영화계가 엄청난 블록버스터급 성공을 하고 예술적으로도 인정을 받으며 영화산업에 대한 자본유입이 심화되었다. 영화는 더더욱 거대화되었고 그사이 영화 제작은 대형 자본에 의존하는 상업화 구조가 굳어져 제작, 배급, 상영 까지 모든 것이 다 자본의 영향하에 세트로 이루어졌다. 때문에, 젊은 신예들은 자신만의 작은 영화를 찍으며 영화판에 진입할 틈을 찾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게다가 넷플릭스를 필두로한 OTT 플랫폼과 인터넷 기반 영화 시청의 대중화로 극장 관객 수가 급감하며 한국 영화계는 더욱 위기를 맞았다. 극장들은 소위 팔릴만한 영화만 걸고싶어하는 경향이 더욱 두드러졌으며 스크린은 많은데 정작 볼만한 영화의 편수는 더욱 줄어드는 기현상이 벌여진 것이다. 이러한 양상을 보며 과거 1960년대 일본 영화산업의 침체가 문뜩 떠올랐다.
1960년대에 접어든 일본 영화계는 텔레비전의 급속한 보급으로 심각한 침체를 겪었다. 가정마다 TV가 주요 오락 수단이 되자 극장 관객이 급감했고, 영화 관람은 급속히 대중의 일상에서 밀려났다 . 실제로 1960년 12억 명 수준이던 연간 관객 수는 20년 만에 2억 명 수준으로 줄었을 만큼 타격이 컸다 . 또한 고도경제성장기 젊은 층은 영화보다 텔레비전, 만화, 음악 등 다른 매체에 더 큰 관심을 두게 되어 영화산업의 기반이 약화되었다. 한편 전통적인 영화 스튜디오 시스템의 붕괴도 진행되었다. 관객 감소로 수입이 급감하자, 대형 영화사들은 연쇄적인 경영 위기에 처했다. 한때 갱스터물과 청춘영화로 명성을 날리던 닛카츠마저 1970년대 초 영화 제작을 중단해야 할 처지에 몰렸고, 쇼치쿠, 토호 등의 메이저사들도 규모 축소와 외주 제작 전환 등을 모색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1970년대 일본 영화계는 3/4 이상의 관객이 사라지고 스튜디오 절반이 문을 닫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심각한 불황에 빠졌다 . 이 같은 위기 속에서 일본 영화사들은 생존을 위한 다양한 모색을 시작했다. 일부는 대작 블록버스터를 통해 관객을 끌어모으려 했고, 또 다른 전략으로 텔레비전에서는 보여줄 수 없는 성인 지향의 폭력과 성적 콘텐츠를 과감히 도입하기 시작했다 . 그 결과 등장한 것이 이른바 핑크 영화 산업이다. 핑크 영화란 성인 관객을 겨냥해 노출과 성적 소재를 담은 저예산 영화를 가리키는 일본 특유의 장르로, 1960년대 중반부터 독립 프로덕션을 중심으로 유행했다 . 1971년에는 대형 영화사 토에이가 일부 작품을 ‘포르노’로 광고하고, 닛카츠가 극단적인 결단으로 아예 성인영화 제작으로 전면 전환하면서 메이저까지 성인물 경쟁에 뛰어들었다 . 즉, 성인 지향 영화로 관객을 붙잡고 젊은 감독들을 발굴하려는 시도가 산업 전반에서 나타난 것이다 . 이러한 흐름의 핵심에 선 것이 바로 닛카츠의 “로망 포르노”였다.
닛카츠 로망 포르노는 일본 최고의 영화사 닛카츠가 1971년 11월부터 전면 도입한 극장용 성인영화 브랜드다 . 당시 닛카츠는 지속된 적자로 사실상 도산 직전이었고 직원들 사이에서도 위기감이 팽배했다. 정상 영업이 어려울 정도로 제작 여건이 악화되자 닛카츠 경영진은 “회사를 살리자”는 절박한 목표 아래 대규모 인력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남은 인력으로 새로운 수익 모델을 모색하게 된다. 그 결과 탄생한 전략이 매달 일정 편수의 성인 영화를 공장 제품 찍어내듯이 빠르게 만들어내는 로망 포르노 시리즈였다 . “로망 포르노”라는 명칭에서 ‘로망’은 프랑스어로 이야기 혹은 낭만을 뜻하는 말로, 단순한 포르노가 아닌 “줄거리와 미학이 있는 에로 영화”임을 표방한 이름이었다 . 다시 말해 노골적인 하드코어가 아닌, 서사가 있는 연성 포르노 장르로서 사회적 수용도를 높이려 한 것이다. 닛카츠의 새 전략 하에서 제작 시스템은 철저히 상업적 효율을 쫓도록 재편되었다. 로망 포르노 영화들은 러닝타임이 약 60~70분 내외로 비교적 짧았고, “10분마다 1번씩 성애 장면을 넣는다”는 엄격한 제작 원칙이 부과되었다 . 이를 위해 시나리오 단계부터 일정 간격으로 베드신이나 노출신을 배치하는 것이 규칙이었으며, 촬영 현장에서도 이 원칙 준수를 철저히 요구받았다. 대신 이 원칙만 지킨다면 내용과 연출에는 최대한 자유를 보장하는 파격적인 방침을 내세웠다 . 닛카츠 경영진은 감독들에게 “노출 장면 최소 4개 이상만 넣으면 무엇이든 찍어도 좋다”는 식의 자유를 허용했고 , 이러한 조건부 자유화는 당시 보수적인 일본 영화계에서 이례적인 것이었다. 실제 닛카츠 로망 포르노의 대표 감독이었던 코누마 마사루는 “로망 포르노 제작 과정은 일반 핑크영화와 동일하되 예산만 더 많았다”고 회상하며, 그만큼 기술적 완성도나 표현의 폭이 기존 독립 에로영화보다 넓었다고 증언한다 . 이러한 “자유 속의 규율” 전략은 흥행을 위한 성적 자극과 예술성을 절묘히 양립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예컨대 당시 로망 포르노 작품들에는 명시적 정사 장면과 노출이 반드시 등장하지만, 일본 영화윤리위원회의 검열 기준에 따라 노골적인 성기 노출이나 실제 성행위는 피하고 카메라 앵글, 소품 배치, 모자이크 등으로 우회하였다 . 이는 일본의 법적 한계 안에서 최대한 수위를 높인 것이었으며, 동시에 검열이 강요한 제약이 오히려 독특한 미학을 낳았다는 평가도 있다 . 한 편 한 편의 예산은 대폭 삭감되어 소품과 세트도 최소화되었지만, 그 대신 감독의 창의성과 실험정신으로 승부하는 풍토가 조성되었다. 즉 “몇 분마다 관객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라”는 상업 공식을 지키는 한편, 그 사이사이에는 신진 감독들의 개성적인 아이디어를 비교적 자유롭게 녹여낼 공간이 마련된 셈이다 . 닛카츠 로망 포르노는 출범 이후 매월 2~3편씩 꾸준히 신작을 개봉하는 체제로 운영되었다. “한 달에 3편”은 닛카츠가 내건 생산 목표였고, 실제 1970년대 중반엔 연간 30편 이상, 많게는 50편에 육박하는 작품이 발표되었다. 1971년 첫 작품인 <아파트와이프>를 시작으로 1988년까지 17년 동안 약 1,100편의 로망 포르노 작품이 쏟아졌다 . 작품들은 대개 저예산으로 빠르게 제작되었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완성도를 유지하도록 전문 스태프와 필름 촬영을 고수했다 . 또한 대부분 성인 전용극장에서 3편씩 묶어 세트 상영되는 형태로 유통되어, 관객들은 한 장의 티켓으로 연달아 세 편의 성인영화를 즐길 수 있었다. 이러한 공장제 시스템은 “영화를 찍어내듯 만들어낸다”는 비판도 받았지만 , 오히려 정기적인 신작 공급으로 매니아 관객층의 충성도를 유지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다. 한편 성적 자극과 작가주의의 공존은 로망 포르노를 차별화한 중요한 특징이었다. 로망 포르노 영화들은 노골적인 포르노그라피는 아니었지만 분명히 관객의 성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장르 영화였다. 선정적 제목과 홍보 포스터, 에로틱한 소재들은 관객을 불러모으기 위한 장치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틀 안에서 젊은 감독들은 자신만의 예술적 개성을 실험할 수 있었다. 닛카츠는 “러브신 몇 분 이상” 등의 최소한의 조건만 제시하고, 스토리 전개나 연출 스타일에는 간섭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 당시 조감독으로 현장을 밟았던 나카타 히데오 감독은 “상영 시간 70분 남짓에 러브신이 반드시 나온다는 조건만 지키면 어떤 이야기든 찍을 수 있었다. 그 자유롭고 아방가르드한 분위기가 좋았다”고 회고한다 . 이처럼 기성 상업영화에선 보기 어려운 파격적 주제의식과 실험적 기법이 로망 포르노에선 가능했고, 덕분에 작품들마다 독특한 색채를 띠게 되었다. 예를 들어 공포영화 거장으로 훗날 이름을 날린 구로사와 기요시도 데뷔작 <간다천 음란전쟁>에서부터 괴기와 에로를 결합한 신선한 연출을 시도했는데, 이런 과감한 시도들이 가능했던 배경이 로망 포르노의 상대적 자유로움이었다고 평가된다 . 물론 이러한 환경이 모든 감독에게 매력적으로 보인 것은 아니었다. 오시마 나기사나 와카마츠 코지 등 기존 독립예술영화의 기수들은 닛카츠의 상업적 성인물 제작에 동참하기보다, 각자 독립적인 경로로 자신들의 성인영화를 만들었다. 오시마 나기사는 1976년 <감각의 제국>을 통해 실제 정사 장면을 담은 예술영화를 제작하여 파격을 일으켰는데, 이는 닛카츠 로망 포르노의 수위 제한에 만족하지 못한 거장의 다른 선택이었다. 와카마츠 코지 역시 독자적으로 저예산 핑크영화를 제작하며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추구했다. 즉 로망 포르노는 철저히 상업적 생존전략의 산물이었기에, 일부 리얼한 표현을 지향하는 예술영화 감독들에겐 제약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신진 감독들에겐 로망 포르노가 등용문 역할을 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 보수적인 일본 영화계에서 젊은 연출자가 장편 영화를 맡아 자기 색깔을 보여줄 기회는 매우 드물었는데, 로망 포르노가 바로 그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로망 포르노 시리즈는 개봉 초기부터 뚜렷한 수익 성과를 거두며 닛카츠의 구원투수가 되었다. 1971년 11월 첫 작품 <아파트와이프>은 흥행에 성공해 7년 간 20편이 넘는 후속 시리즈를 낳았고, 주연 시라카와 카즈코는 닛카츠 첫 번째 로망 포르노 퀸으로 떠올랐다 . 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닛카츠는 사실상 본사 제작영화를 로망 포르노로 한정하고 이후 17년간 성인물 제작에 주력했다 . 관객층은 주로 2040대 남성이었지만, 자극적인 제목과 소문에 이끌려 호기심에 극장을 찾는 관객도 많았다. 1970년대 중반까지 로망 포르노와 독립 핑크영화는 일본 영화 전체 생산 편수의 7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시장의 중심이 되었다 . 흥행 측면에서 보면, 1980년대 중반 AV의 부상 전까지 로망 포르노는 꾸준히 일정 수익을 내주며 닛카츠를 떠받쳤다. 로망 포르노 덕분에 닛카츠는 한때의 황금기를 구가했고, 일본 영화산업은 완전 붕괴를 면했다는 평가도 있다 . 특히 197080년대 닛카츠 로고가 붙은 영화들은 매달 정기적으로 개봉되어 “니카츠 로망”이라는 하나의 브랜드로 인식될 만큼 자리잡았다.
평단의 반응 또한 처음에는 회의적이었으나 점차 호의적인 재평가가 이뤄졌다. 당대 주요 언론인 아사히 신문과 영화잡지 키네마 준보 등은 해마다 올해의 일본영화 베스트10을 선정했는데, 1971년 이후 매년 1~2편 정도의 로망 포르노 작품이 베스트10에 꼽힐 정도로 인정받았다고 전해진다 . 초기작 <이치조 사유리: 젖은 욕정>이나 <빨간 머리의 여자> 등의 작품이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아, 성인물이면서도 예술적으로 완성도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특히 구마시로 타츠미 감독은 여러 작품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일본 영화사에 전례 없는 비평적·상업적 성공을 동시 달성한 감독으로 기록되었다 . 그는 이 성공으로 로망 포르노의 제왕이라는 별칭까지 얻었고, 작품들은 독창적 연출로 호평을 받았다 . 또한 다나카 노보루 감독의 <사다 아베 이야기>는 여러 평론가들이 로망 포르노 사상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을 만큼 작품성과 예술성을 인정받았다 . 이 외에도 SM을 소재로한 코누마 마사루 감독의 <꽃과 뱀>은 SM퀸 배우 타니 나오미의 열연과 파격적 묘사로 관객과 평단 모두에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프랑스 등 해외에 소개되어 주목받는 등 국제적 반향도 있었다 . 이러한 사례들은 로망 포르노가 단순한 에로 영화에 머무르지 않고 대중성과 작품성을 겸비한 독특한 장르로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물론 로망 포르노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긍정적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보수적인 대중 정서는 여전히 포르노 영화에 대한 거부감을 가졌고, 여성 단체 등에서는 여성을 성적 대상화한다는 비판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1970년대 일본 사회 전반에 퍼진 성 문화의 개방 풍조 속에서 로망 포르노는 생각보다 큰 논란 없이 산업의 일부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엄연히 심의 등급 하에 성인만 관람하는 극장용 영화였고, 노골적인 외설물을 배척해온 일본 검열제도 아래에서 어느 정도 선을 지켰기 때문이기도 하다 . 로망 포르노는 “야하되 저속하지 않은 에로”를 표방하며, 관객에게 일정한 판타지적 해방감을 주는 문화상품으로 자리를 잡았다. 일부 영화 평론가는 “미국의 포르노가 노골적 성행위 묘사에만 머물러 영원히 저급한 수준에 머무는 반면, 일본의 에로 영화들은 보여줄 수 없는 제약 덕분에 다른 것을 해야 했고, 그 좌절된 충동이 몇몇 걸작을 만들어냈다”고 평하기도 했다 . 로망 포르노 중 최고작들은 지금까지도 컬트적 지지를 받으며 재평가되고 있다.
로망 포르노의 가장 큰 유산 중 하나는 영화 인재 양성의 통로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했듯 닛카츠는 로망 포르노 제작 당시 젊은 감독들에게 파격적인 기회를 제공했다. 그 결과 1970~80년대에 활약한 수많은 영화감독들이 로망 포르노 혹은 핑크영화 경력을 발판으로 성장하였다. 예컨대 훗날 <탐포포> 등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이타미 주조 감독은 배우 출신으로 1984년 늦은 나이에 상업영화에 데뷔했지만, 그 이전에 영화 현장에서 연출 수업을 받은 곳 중 하나가 저예산 핑크영화 분야였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1983년 로망 포르노 <간다천 음란전쟁>으로 공식 데뷔하여, 이후 공포영화와 예술영화를 넘나드는 거장이 되었다 . 모리타 요시미츠 감독 역시 초기 커리어에서 핑크영화 연출을 경험하며 연출력을 다졌고, 훗날 <가족 게임> 등으로 1980년대 일본영화 뉴웨이브를 이끌었다. 특히 다키타 요지로 감독의 사례는 주목할 만하다. 그는 <치한여교사> 로 데뷔해 <치안전차> 등 20 편 이상의 애로영화 연출을 하며 경력을 쌓았고, 이후 2008년 영화 <굿바이>로 미국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다 . 실제로 “닛카츠 로망 포르노 출신 감독”들의 면면을 보면 구로사와 기요시, 모리타 요시미츠, 다키타 요지로 등 한국에도 익숙한 이름들이 다수이다 . 이들은 로망 포르노에서 연출 데뷔 또는 조감독 수련을 거치며 현장 경험을 축적했고, 이를 바탕으로 이후 주류 상업영화나 예술영화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러한 사실은 로망 포르노가 젊은 영화인들에게 훌륭한 훈련장이자 등용문이었음을 보여준다 . 로망 포르노가 없었다면 빛을 보기 어려웠을 신예들이 성인영화라는 틈새를 통해 경력을 시작했고, 일본 영화계 전체로 보면 세대 교체와 창작자 풀의 확장에 기여한 것이다. 다만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로망 포르노는 중대한 전환점을 맞는다. 1981년 가정용 비디오의 보급과 함께 등장한 성인 비디오가 폭발적 인기를 끌면서, 더 이상 관객들이 극장에 나와 연성 포르노를 볼 필요가 없어졌다 . 여기에 더해 1980년대 중반 정부의 영상물 규제 강화와 영화윤리위원회의 등급 규정 변화로 로망 포르노 상영 조건이 까다로워졌다 . 예컨대 1984년 새로운 검열정책으로 극장용 성인영화의 성표현에 대한 규제가 심화되었고, 1988년에는 성행위 관련 묘사에 대한 더욱 엄격한 규정이 도입되었다 . 이로써 극장용 에로 영화의 설 자리가 급격히 축소되었다. 결국 닛카츠는 1988년 <침대 파트너>를 마지막으로 17년 역사의 로망 포르노 시리즈를 공식 중단하였다 . 닛카츠는 이후 일반 영화를 재건하려 했지만 이전만큼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1993년 결국 파산 보호 신청을 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 한편 독립 핑크영화 계열은 명맥을 이어갔지만, 90년대 이후로는 규모가 대폭 줄어들고 소수 애호가의 영역으로 남았다 . 로망 포르노의 종언은 일본에서 극장용 연성 성인영화 시대의 마감을 의미했다. 일본의 로망 포르노와 유사하게, 다른 나라들도 영화산업 위기 시기에 성인 지향 콘텐츠로 활로를 모색한 사례가 있다. 대표적으로 미국 영화산업의 “뉴 할리우드” 시기를 들 수 있다. 1960년대 말 헐리우드는 관객 감소와 경직된 제작 관행으로 어려움을 겪었는데, 1968년 영화등급제도 도입으로 엄격한 사전 검열이 폐지되자 폭력과 섹스를 다룬 혁신적 영화들이 잇달아 등장했다. <보니와 클라이드>, <미드나잇 카우보이> 등은 당시로선 파격적 폭력 또는 성적 묘사와 사회적 금기를 담아냈고, 젊은 관객들의 관심을 되찾아왔다. 이는 헐리우드가 검열 완화를 통해 스콜세지와 코폴라 등 새로운 창작 세대를 등용하고 침체를 탈출한 사례로 볼 수 있다. 또한 유럽 영화계 역시 1970년대에 성애 영화 붐을 겪었다. 프랑스의 <엠마뉴엘>은 여성의 관능적 모험을 그린 소프트코어 영화로 프랑스에서만 약 889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고, 해외에서도 2천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려 국제적으로도 돌풍을 일으켰다 . 이 영화의 성공으로 1970년대 중후반 유럽에서는 엠마뉴엘 시리즈를 비롯한 여러 성인 취향의 에로틱 영화가 잇달아 제작되었고, 이는 침체된 유럽 영화시장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평가가 있다. 아시아에서도 홍콩의 카테고리 III 영화 붐이 한 사례다. 1988년 홍콩이 영화 등급분류에 Category III(18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신설하자, 1990년대 초 홍콩에서는 노골적 성애나 폭력 소재의 성인 영화들이 쏟아져 나왔다. <옥보단>은 당시 선정적인 내용으로 논란이 되었으나 홍콩 역대 청불 영화 흥행 1위를 기록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 이 영화는 홍콩에서 2백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거두고 10년 넘게 최고 흥행 성인영화 기록을 지켰으며 , 주연 배우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았다. 홍콩 영화계는 이러한 Category III 영화 붐을 통해 90년대 초 한때 침체를 돌파하고 수출시장에서도 주목받았으나, 이후 1997년 홍콩 반환 전후로 제도 변화와 시장 포화로 급속히 시들었다. 그럼에도 홍콩의 성인영화 실험은 짧지만 강렬했던 현상으로 남아 있다. 이런 해외 사례들은 검열 완화와 성인 지향 영화의 제작이 산업에 일시적 활력을 줄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문화적 배경과 산업 구조가 달라 일률 비교는 어렵지만, 공통적으로 기존 질서가 막혀 있을 때 파격적인 콘텐츠로 돌파구를 찾았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일본의 로망 포르노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으며, 각국의 사례는 긍정적 효과와 부정적 부작용을 모두 남겼다.
그렇다면 이러한 “로망 포르노식” 성인영화 장려 전략을 한국에 도입할 수 있을까? 이는 산업적·문화적 측면에서 여러 함의를 지닌 문제다. 한국 영화계도 최근 대형 자본 위주의 블록버스터와 프랜차이즈에 집중되면서 장르와 규모의 다양성 상실이 지적되고 있다. 젊은 감독들이 도전할 수 있는 중저예산 영화의 입지가 줄어들고, 창의적 실험이 설 자리가 좁아지는 현실에서 새로운 활력소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있다. 로망 포르노와 같은 소규모 성인 영화 분야를 활성화하면, 비교적 적은 자본으로 제작 가능하고 흥행 실패에 따른 리스크도 낮아 신인들에게 기회를 줄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실제 일본의 사례에서 보았듯, 제한된 예산과 조건 속에서도 감독들의 역량에 따라 독창적 작품이 탄생할 수 있고, 오히려 그런 제약이 새로운 표현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현실적으로 로망 포르노식 제작을 추진하려면 법·제도적 장벽부터 논의해야 한다. 현재 대한민국 법령상 포르노그라피의 제작·유포는 불법이며, 영상물 등급제에서도 가장 높은 수위인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으면 사실상 상영 불가 판정을 의미한다 . 한국영상등급위원회는 제한상영가 영화를 법으로 지정된 제한상영관에서만 틀 수 있도록 하지만, 전국에 제한상영관이 단 한 곳도 없기 때문에 제한상영가 판정은 사실상 개봉 금지와 같다고 지적된다 . 즉 현재 제도로는 성인만 관람 가능한 영화라도 노출 수위가 높으면 일반 극장 공개는커녕 광고나 홍보조차 할 수 없고, 유통 경로가 전무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식 로망 포르노에 해당하는 영화를 만든다면, 등급 문제로 공개 상영이나 수익 창출이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최근 OTT 플랫폼 등의 등장으로 규제가 다소 완화된 면이 있으나, 여전히 한국 사회는 영상물의 성적 묘사에 민감하며, 창작 표현의 자유와 사회적 규범 사이의 줄타기가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한국이 로망 포르노식 성인영화를 장려하려면 우선 제도 개선이 선행되어야 한다. 예컨대 제한상영가 등급 제도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실제 제한상영 전용관을 허가·설치하거나, 등급 체계를 개편해 성인물을 아우를 새로운 유통 창구를 마련하는 등의 방안을 고민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영화진흥법상의 표현 검열 기준을 완화하고, 예술영화로서 일정 수준의 성표현을 허용하는 명문화된 가이드라인이 필요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선정적 콘텐츠를 풀어준다는 차원을 넘어, 영화 창작의 다양성 확보와 성인 관객의 선택권 존중이라는 문화적 가치와 연결된다.
물론 사회적 저항과 부작용에 대한 대비도 중요하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유교문화와 보수적 윤리가 강하고, 영상물에 대한 규제 논란이 반복되어 왔다. 2000년대 초 <거짓말>이나 <욕망> 등의 국내 영화들이 수위 논란으로 검열에 걸러지고 법정 공방까지 간 사례는 잘 알려져 있다. 만약 일본식 성인영화 제작을 독려한다면, 보수 단체나 학부모 단체 등의 반발이 예상된다. 이들은 청소년 보호와 사회적 도덕성을 이유로 들며 정책 추진을 막을 수 있다. 또한 성인영화 활성화가 가져올 부작용으로 저급한 에로물 범람, 여성에 대한 객체화 조장, 배우 혹은 스태프에 대한 착취 문제 등이 우려된다. 실제 일본 로망 포르노 당시에도 일부 여성 배우들은 노출을 강요당하거나 이미지 소모를 겪었고, 이러한 업계 관행이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제작 여건이 열악한 상황에서 성인물이 난립하면 퀄리티보다는 자극에만 치중한 B급 영화의 양산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더구나 오늘날 인터넷을 통해 하드코어 포르노에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시대에, 과연 연성 포르노 영화가 관객에게 매력적인 상품이 될지 의문이라는 현실적 지적도 있다. 즉 1970년대의 로망 포르노 모델을 2020년대에 단순 이식하는 것은 한계가 있으며, 시대에 맞는 새로운 콘텐츠 기획이 필요할 것이다. 여성에 대한 대상화는 오늘날의 성, 윤리의식에 전혀 맞지 않기 때문에 더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의 사례를 들면 또다른 기대도 가능하다. 일본의 1970년대 로망포르노이후 2016년 닛카츠는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장르는 완전히 잊히지 않고, 일본 영화사에서 하나의 전설적 챕터로 회자되었다. 2016년 닛카츠는 로망 포르노 탄생 45주년을 맞아 소노 시온, 유키사다 이사오, 나카타 히데오 등 중견 감독 5인에게 로망 포르노를 리부트한 작품을 의뢰하는 특별 기획을 선보였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지금껏 포르노가 남성들의 판타지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소비되어왔다면, 로망포르노 리부트에서는 바뀐 시대의 흐름에 따라 여성관객들도 공감하고 즐길 수 있는 작품들로 탈바꿈하였다. 실제 이 리부트 프로젝트를 통해 <화이트 릴리>를 선보인 감독 나카타 히데오 감독은 시대가 바뀌었고 반드시 남성위주의 영화를 만드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레즈비언을 주인공으로 여성들만이 주인공이 되는 영화를 만들었다라고 인터뷰를 한 바도 있다. 아무튼 이러한 움직임은 로망 포르노가 남긴 유산 – 젊은 영화인들의 창의 실험장, 산업의 최후 보루로서의 역할 – 을 현대적으로 조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의 로망 포르노는 영화산업 침체기에 등장한 파격적 돌파구였으며, 상업적 성공과 더불어 수많은 영화 인재를 배출하고 독특한 영화 문화를 형성했다. 비록 시대 변화에 따라 사라졌지만, 그 17년간의 실험과 성취는 오늘날까지 영화사에 의미 있는 사례로 남아 있다. 한국 영화계도 산업적·창작적 침체를 겪는 지금, 로망 포르노가 던진 시사점을 새겨볼 필요가 있다. 물론 사회·문화적 환경 차이와 법적 제약을 감안하면 동일한 모델을 도입하기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다. 하지만 핵심은 검열의 완화와 창작 자유의 확대, 신진 영화인들에게 기회의 장을 열어주는 것이다. 성인 관객을 위한 영화의 스펙트럼을 넓히고 다양한 시도를 수용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든다면, 그것이 꼭 로망 포르노와 같은 형태가 아니더라도 새로운 영화 움직임을 촉발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영화예술의 발전은 표현의 자유와 다양성에 달려 있다. 자본에 지나치게 종속된 환경에서는 모험적이고 독창적인 작품이 나오기 어려운 법이다. 일본 닛카츠가 로망 포르노를 선택했던 “절박함”처럼, 우리 영화계도 기존의 틀을 깨는 과감한 상상력이 필요한 시점일지 모른다. 물론 그 과정에서 넘어야 할 산이 많겠지만, 한계 상황에서 탄생한 로망 포르노의 교훈은 분명하다. 규제를 유연하게 조정하고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을 때 비로소 젊은 재능이 꽃피고 산업에 활력이 돈다는 것이다 . 이런 맥락에서 정부와 영화계가 협력하여 일정 부분 규제를 풀고 창작을 지원한다면, 일본 로망 포르노와는 또 다른 한국형 성인 영화의 길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의 풍부한 웹툰이나 소설 IP 중 성인물을 영화화하여 OTT나 제한 상영으로 선보이는 프로젝트를 지원한다면, 신인 감독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개성 있는 작품을 만들어볼 수 있다. 또한 성인물을 단순히 흥행 수단이 아니라 예술영화와 상업영화의 중간지대로 포지셔닝하여, 새로운 영화제 섹션이나 기금을 마련하는 것도 방법일 수 있다한국 영화계가 미래 세대의 이창동이나 봉준호를 맞이하기 위해 어떤 환경을 마련해야 할지, 로망 포르노의 역사는 한 가지 힌트를 제공하고 있다. 다양성과 창의성이 존중받는 풍토 속에서, 설령 그것이 논란을 동반한 길일지라도, 영화 예술의 영역을 확장하는 도전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형 새로운 돌파구의 모색이 절실한 지금, 일본 로망 포르노의 성공과 한계를 타산지석 삼아 지혜로운 정책적 결단과 업계의 용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