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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D 예산 패러다임의 전환: 기초과학과 AI의 동반성장을 위하여

최근 기초생물학 연구를 하는 교수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중 연구비가 없어서 너무 힘들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과제를 계속 못따면 이러다 연구실 문을 닫을지도 모르겠다며 말이다. 지나가는 말로 했지만서도 주변에 그런 이야기를 하는 분들을 제법 자주 만나게 된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아주 예전부터 들어오던 이야기이긴 하다. 내가 주니어이던 십수년 전에도 이런 류의 이야기들을 선배님들로 부터 심심치않게 들어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요즈음의 사정은 좀 남다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정부의 연구개발 예산 삭감으로 인해 학계 전반에 큰 충격이 가해졌다. 2024년 정부는 33년 만에 처음으로 과학기술 R&D 예산을 전년 대비 약 16.6%나 대폭 삭감한 26.5조 원 규모로 편성하여 과학계의 불안을 초래하였다. 이로 인해 다수의 연구 과제가 중단되거나 축소되고, 젊은 연구자들을 비롯한 과학기술 인력의 고용 불안이 심화되었다. 실제로 정부출연연구기관들은 핵심 연구사업비의 30%가량을 삭감당해 인건비 조달에 어려움을 겪었고, 상당수 신진 연구자들의 미래가 위협받는 상황에 놓였다. 이러한 급작스러운 예산 축소는 연구 현장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두뇌 유출에 대한 우려까지 불러일으켰다. 국내 과학자들은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기고한 글을 통해 “예산 삭감 때문에 연구자들의 전반적인 삶이 더욱 어려워질 것”이며 “이미 자금 부족과 고용 불안정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신진 과학자들이 가장 큰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실제 주변에서도 오랜기간 연구에 매진하던 많은 분들이 안정적인 직업을 찾아 학계를 떠나는 모습들을 보곤 한다. 실제 과학계에서는 연구비 부족으로 대학원생과 박사후연구원 등 미래 과학 인력 양성 기반이 무너지고 있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러한 배경에서 2023년~2024년에 걸친 R&D 예산 삭감의 후폭풍은 한국 기초과학 연구 생태계의 토대를 뒤흔드는 심각한 문제로 부각되었다.

다행히 2024년 하반기부터 정부는 과학계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정책 기조를 수정하기 시작했다. 새 정부는 R&D 예산을 과거 수준으로 복구하고 향후 확대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하며 연구 현장의 불안을 해소하려 시도했다. 특히 2025년도 정부 R&D 예산안을 전년 대비 증액 편성(약 24.8조 원)하여 “역대 최대 규모”라고 발표하는 등 R&D 투자를 다시 늘리겠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예산 복구와 증액이 실제로 기초과학 분야의 회복으로 이어질지는 의문이라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정부가 밝힌 투자 확대의 방향을 살펴보면, “AI, 첨단바이오, 양자 등 3대 게임체인저와 국가미래전략기술 분야에 대한 집중 투자”를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즉, 증액된 예산의 상당 부분이 AI를 비롯한 산업적 응용기술 분야에 편중될 것으로 보이며, 정작 지난 삭감 국면에서 황폐화된 순수 기초연구 분야에는 얼마나 지원이 돌아갈지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실제 윤석열 대통령은 “앞으로 연구자들이 제대로 연구할 수 있도록 돈이 얼마가 들든지 국가가 적극 뒷받침할 것”이라 강조하면서도, 그 구체적 지원 방향으로 “AI, 첨단바이오, 양자” 등을 거론하여 국가 경쟁력 제고가 시급한 분야에 예산을 쏟겠다는 의지를 피력하였다. 이러한 기조는 기초과학 연구자들에게 예산 증가의 혜택이 제한적일 것이라는 불안감을 남기고 있다. 실제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2024년 삭감 후 내놓은 2025년 예산안 세부내용을 살펴보면, 삭감되었던 기초연구 예산 항목들은 그대로 두고 정부가 전략적으로 선정한 특정 분야 예산만 크게 늘린 정황이 나타난다. YTN 사이언스에 따르면, 연구자 개인이 수행하는 1억원 미만 규모의 풀뿌리 기초연구 과제 예산은 작년에 이어 2025년에도 0원으로 책정된 반면, 국가 전략형 사업 등 일부 대형 분야의 예산은 크게 증가한 것으로 드러났다. 정부는 “풀뿌리 연구 대신 중견연구와 우수신진연구 지원을 늘렸다”고 해명하였으나, 이는 과학기술의 장기적 토양을 다지기보다는 단기 성과 위주의 분야만 지원하는 조치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한편, 이러한 정부 정책의 배경에는 전 세계적인 AI 경쟁의 격화라는 시대적 흐름이 깔려 있다. ChatGPT를 비롯한 초거대 인공지능 시대가 도래하면서, AI 기술력을 확보하는 일이 국가 미래 경쟁력을 좌우할 핵심 과제로 부상하였다. 특히 AI 연구개발을 뒷받침할 초고성능 GPU 등 컴퓨팅 인프라 확보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AI 모델 학습에는 막대한 연산자원이 필요하며, 이를 위한 최첨단 반도체 칩 수급이 연구 성패를 좌우한다. 최근 각국 정부는 자국 AI 역량 강화를 위해 앞다투어 거대 연산 인프라 구축에 투자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정부는 AI 3대 강국”도약을 목표로 2023년 말 추가경정예산 1조 8천억 원을 편성하여 AI 컴퓨팅 자원 확보를 최우선 과제로 추진하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2025년 상반기까지 국가 AI 데이터센터에 엔비디아 H200, 블랙웰 등 첨단 GPU 약 1만8천 장을 확보할 계획을 밝히며, 올 11월부터 우선 1만 장 규모를 ‘국가 AI 컴퓨팅 센터’에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대규모 투자로 선정된 기업과 기관에 클라우드 형태로 연산자원을 빌려주고, 5개의 “국가대표급” AI 모델 개발팀을 뽑아 GPU 2천 장씩을 우선 지원하는 등 초거대 AI 개발 올인 전략을 전개하고 있다. 정부는 “AI 경쟁은 시간 싸움이며 1년 늦으면 3년 뒤처진다”는 절박함을 강조하며, 향후 몇 년간 국가 자원을 AI 및 디지털 기술 분야에 집중 투입할 것을 예고하였다. 이처럼 AI 중심의 R&D 투자는 국가 미래산업 경쟁력 확보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산업계와 대중의 관심 또한 AI 혁신에 쏠려 있다. 그러나 AI 일변도의 R&D 지원 전략 이면에는 순수 기초과학 분야의 지속 가능한 발전에 대한 새로운 고민이 대두되고 있다. AI를 비롯한 첨단기술 분야는 투입된 자본이 비교적 단기간에 성과로 연결되고 산업적 가치 창출로 이어지는 반면, 물리학·화학·생물학 등 기초과학 연구는 장기적인 투자와 축적이 필요하고 당장의 경제적 성과로 환산되기 어렵다는 인식이 있다. 국내 연구 풍토에서도 흔히 과학과 산업의 구분이 모호해, 연구개발 예산을 미래 산업육성의 수단으로만 보는 경향이 지적되어 왔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산업적 응용이 두드러진 AI 분야에 자원이 편중되고 기초과학 분야는 후순위로 밀리는 현상이 심화될 가능성이 크다. 실제 많은 대학과 연구기관에서 유망한 AI·데이터사이언스 관련 학과와 프로젝트에는 인력과 지원이 집중되고 있지만, 순수기초 학문 분야는 연구비 감소로 인력 유출과 학과 통폐합 위기를 겪고 있다는 보고가 있다. 대한물리학회 윤진희 회장은 “현재 우리나라 상황은 연구 분야의 다양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전체 인력이 줄어들면서 학과의 존폐 위기까지 내몰리고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이는 지난 수년간 누적된 의대 선호 현상 등과 맞물려, 우수 이공계 학생들이 기초과학 대신 전문직이나 응용분야로 빠져나가는 구조적인 문제로도 이어진다. 다시 말해, 기초과학의 저변 약화는 단순히 한 학문의 쇠퇴에 그치지 않고 국가 전체 과학기술 혁신 역량의 기반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위험 요인이다.

정부의 R&D 예산 복구 선언에도 불구하고 기초과학 분야에 대한 지원 부족은 여전히 심각한 문제로 남아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2024년 예산 삭감 국면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기초연구 프로그램(예컨대 소규모 개인 기초연구 과제)은 2025년에도 예산이 전혀 복원되지 않았다. 반면 정부가 전략적으로 중점 투자하기로 한 AI 등 일부 분야 예산은 크게 늘어난 상황이다. 이는 절박한 심정으로 예산 복구를 기대했던 순수학문 분야 연구자들에게 또 다른 상대적 박탈감을 안겨주는 결과를 낳고 있다. 실제 기초과학 연구자들은 “삭감한 R&D 예산을 복구했다”는 과기정통부 발표와 달리, 정작 자신들의 연구환경은 나아진 것이 없다고 토로하고 있다. 정부가 국제협력이나 첨단기술 분야에서 성과를 내세울 만한 보여주기식 사업에만 치중하고, 국가 과학기술의 풀뿌리라 할 기초과학 육성 의지는 부족한 것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서강대 이덕환 명예교수는 “과기정통부가 기초과학 연구의 실질적 지원보다는 국제 무대에서의 위상이나 명분을 위한 사업에만 치중하고 있다”면서 한정된 예산을 보여주기식 협력사업에 쓰느니 절실하게 필요한 기초연구에 투입하는 편이 낫다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예산 배분의 불균형은 단지 한 해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학문 생태계의 장기적 황폐화로 이어질 수 있다. 기초과학 연구는 단기간에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 어렵지만, 거기서 축적된 지식과 발견이 결국에는 응용기술 혁신의 원천이 된다. 예를 들어 현재 AI 기술의 핵심인 딥러닝 알고리즘과 신경망 이론도 과거 수십 년간 이루어진 수학·뇌과학·인지과학 등의 기초연구 성과 위에서 꽃피운 것이다. 반대로, 첨단 AI 기술의 발전 역시 기초과학 연구에 새로운 도구와 접근법을 제공함으로써 과학탐구의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다. 이러한 기초와 응용의 선순환 구조가 유지되려면, 균형 잡힌 연구 생태계가 필수적이다. 어느 한쪽에만 치우친 투자는 다른 한쪽의 성장을 제약하며, 결국 전체 혁신 시스템의 활력을 감소시킨다. 현재 우리나라 상황은 예산 삭감 → 기초연구 위축 → 인재 이탈의 악순환이 우려되는 바, 이는 머지않아 응용 분야의 경쟁력 약화로도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 대한민국 과학기술 발전의 토대를 닦아온 기초과학이 무너진다면, 몇 년 후 AI와 첨단산업 역시 지속 가능한 혁신 동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귀담아들어야 한다. 실제 네이처 기고문에서도 “정부의 우선순위 변화가 당장의 연구 성과뿐 아니라 미래 세대 전문가 양성에 있어 R&D 투자의 중요한 역할을 간과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다시 말해 단기 성과 지상주의로 기초연구 투자를 경시하면 장차 과학기술 인재풀과 혁신 기반이 약화되어 국가 경쟁력에 치명적인 누수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우려되는 문제는, 정부 R&D 정책이 산업기술 개발과 과학기술 연구를 동일한 잣대로 다루고 있는 점이다. 산업적 성과를 목표로 하는 기술개발 사업은 투자 대비 결과를 빠르게 요구하지만, 기초과학 연구는 장기 비전과 호기심 주도형 탐구를 존중하는 별도의 평가와 지원 체계가 필요하다. 그러나 국내 R&D 예산 편성 및 집행 과정에서는 기초연구마저도 단기간 성과지표 위주로 평가하거나, 특정 응용 분야와의 연계를 강제함으로써 자율적 기초연구의 위축을 불러오는 사례가 지적되어 왔다. 예컨대 과거 정부 주도로 추진된 일부 대형 연구사업의 경우, 원천기술 개발을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산업계 수요에 끌려가는 과제들로 채워져 기초과학자들의 창의적 연구 여지를 좁혔다는 비판이 있었다. 현재 정부가 강조하는 “R&D 카르텔 척결”이나 “비효율 제거” 등의 명분 역시, 자칫하면 기초연구 분야의 다양성 축소로 이어질 수 있다. 실제 2024년 예산 삭감 당시 정부는 이공계 학문 분야 전반을 ‘이권 카르텔’의 온상처럼 몰아붙였으나, 구체적인 비효율 사례나 기준을 명확히 제시하지 못해 연구 현장의 반발을 샀다. 물론 R&D 예산 집행의 투명성과 효율성 제고는 중요하다. 하지만 산학연 협력의 부작용을 제거한다는 명분 아래 기초학문 분야 전체를 홀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궁극적으로 문제의 핵심은, 기초과학과 응용기술에 대한 분명한 철학과 기준 없이 정치적·경제적 논리로만 R&D 예산을 좌지우지할 때 발생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학과 산업의 균형 잡힌 동반성장 전략이다.

세계 과학기술 선도국인 미국의 최근 상황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미국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시기(특히 2025년 재집권 후) 정부 주도의 대대적인 R&D 예산 삭감과 과학정책 변화가 일어나 국제 과학계에 충격을 주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이후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 기치 아래 연방 정부의 과학 연구지원을 전례 없이 축소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예를 들어, 2025년 5월 백악관이 공개한 2026회계연도 예산안은 국립보건원 예산 40% 삭감, 국립과학재단 예산 55% 삭감 등 연구예산의 대폭 감축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는 미국 기초과학의 양대 축인 NIH와 NSF에 대한 사실상의 예산 반토막 계획으로, 과학계는 즉각 “전례 없는 충격”이라며 강력히 반발했다. 실제로 2025년 초부터 트럼프 행정부는 NIH가 지원하는 연구 중 해외 기관과 협력하는 프로젝트에 대한 신규 지원을 전면 중단하고, 이미 승인된 다수의 보건 연구 과제마저 취소 또는 축소시켰다. 그 결과 NIH를 통해 전 세계와 수행되던 다수의 의생명 공동연구, 임상시험이 중단 위기에 놓이고, 미국 내 대학 및 연구소들도 국제 협력 연구 지속 여부에 불안감이 커졌다. 과학계의 비판이 거세지자 미국 연방법원은 NIH의 일방적 연구비 삭감을 “위법”이라며 일부 중단시키기도 했지만, 상당수 프로젝트들은 이미 큰 타격을 입은 뒤였다. 이번 미국 사례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기초과학 분야의 급격한 예산 삭감이 가져온 부정적 파장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과학지원 축소로 2025년 6월까지 NIH에서 2,482개의 연구비가 취소되어 총 87억 달러 규모의 자금이 날아갔고, NSF에서도 1,669개 연구비가 취소된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러한 연구비 삭감은 고스란히 연구 현장의 인력 이탈과 과학계 인재양성 시스템 훼손으로 이어졌다. 미 존스홉킨스대 Andrew Pekosz 교수는 “연구비와 펠로우십을 삭감한다는 것은 곧 연구를 수행하는 사람들을 잘라내는 것”이라고 개탄하며, 자신의 연구실에서도 한때 코로나 관련 연구비가 끊겨 포닥과 연구원을 해고해야 했던 사례를 전했다. 이처럼 연구 인력에 대한 직접적 타격으로 인해 미국 대학들은 신규 채용을 동결하고 대학원생 정원을 줄이는 등 미래 연구인력 양성에 차질이 빚어졌다. 수십 년간 쌓아온 미국 과학계의 경쟁력이 급제동이 걸린 모습에 다급함을 느낀 과학자들은, “지금의 삭감이 지속되면 젊은 과학자들이 대거 과학계를 떠날 것이며 미국은 머지않아 두뇌 유출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실제 AP통신 등 보도에 따르면 미국의 유망 신진 연구자들이 안정적 지원을 찾아 해외로 눈을 돌리거나 아예 업계를 떠나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또한 미국의 사례는 국제공동연구와 과학 외교 측면에서도 시사점을 준다. 트럼프 행정부는 NIH의 해외 연구자 참여 과제를 차단하면서 그 이유로 “국가 안보”를 들었는데, 이는 코로나19 기원 논쟁과 연계되어 과학 협력을 정치화한 조치로 평가받았다. 이로 인해 미·유럽, 미·아시아 간에 진행되던 다수의 보건의료 연구 협력에 제동이 걸렸고, 대형 국제 연구프로젝트(예: 신약 임상시험, 전염병 연구 컨소시엄 등)의 파트너십이 흔들렸다. 더 나아가 2026년도 예산안에는 미 항공우주국 예산 24% 삭감, 에너지부 산하 기초과학 프로그램 약 11.5억 달러 삭감 등 대형 과학 인프라 및 기후연구 예산 축소도 포함되어 있었다. 예산안 문서에서는 기후과학 연구를 “그린뉴딜 사기 연구”로 폄하하며 관련 예산을 줄이고, 대신 그 재원을 초고성능 컴퓨팅, AI, 양자기술, 핵심광물 개발 등으로 돌리겠다고 명시하였다. 이러한 행보는 미국 내에서조차 “과학을 등한시하고 이념적 목표에만 치중한다”는 거센 비판을 불렀다. 미 과학진흥협회는 정부 예산안을 두고 재앙적, 반과학이라 평했고 대학협회는 “이런 삭감은 혁신과 발견을 저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대학 연구행정협의회는 “이번 조치들은 미국 기관들에 해를 끼칠 뿐 아니라 수많은 국제 파트너십을 중단시킬 것”이라 우려하며, “이런 삭감은 단순한 예산 감축을 넘어 의생명 혁신, 공중보건 대비, 미래 과학도 양성에 실질적인 퇴보를 의미한다”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요컨대, 미국 사례는 기초과학 예산의 경시가 초래할 수 있는 심각한 결과—국내 과학기술 역량 저하, 젊은 인재의 이탈, 국제협력 단절—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산업적 가치에만 주목하여 기초연구와 인력 양성을 등한시하는 정책이 얼마나 과학계 전반의 반발과 사회적 비용을 수반하는지도 잘 드러났다. 이러한 미국의 경험은 우리나라 과학기술 정책에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첫째, 기초과학 투자 축소는 돌이킬 수 어려운 장기 피해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이다. 미국은 건실한 민간 R&D와 글로벌 인재흡인력 덕분에 그나마 버티고 있지만, 연구 기반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우리는 기초연구 예산이 한번 붕괴하면 회복이 훨씬 어렵다. 둘째, R&D 예산의 균형 잡힌 분배와 정치적 일관성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미국의 급격한 정책 전환은 연구현장의 불확실성을 키우고 국제 신뢰를 떨어뜨렸다. 마찬가지로 한국도 2023년 삭감과 2024년 증액 사이의 급변하는 기조를 겪으며 연구현장이 큰 혼란을 맛보았다. 과학기술 정책은 단기 정권의 변화에 흔들리지 않는 안정적 기조가 필수적이며, 최소한 기초연구 분야만큼은 초정권적·초정치적 관점에서 꾸준한 투자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셋째, 기초과학과 첨단응용의 균형 전략이 국제적으로 요구되고 있다. 미국 역시 첨단기술 경쟁에 집중하는 한편, 한쪽에서는 NSF 등을 통한 기초연구 지원을 유지·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실제로 2019년 캐나다나 2017년 브라질 등도 정부 예산에서 기초과학 경시가 논란이 되어 정책을 수정한 바 있다. 결국 해외사례는 “산업을 위한 과학”과 “과학 그 자체”의 균형 없이는 과학기술 시스템이 제대로 기능하기 어렵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다음 장에서는 이러한 교훈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기초과학 진흥과 AI R&D 투자의 선순환적 발전을 도모할 정책 대안을 제시한다.

앞서 진단한 문제점을 해결하고 기초과학과 AI 분야의 균형 있는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정책적 노력이 필요하다.

1. R&D 예산 배분 원칙의 재정립: 정부 차원에서 기초연구 투자에 대한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수립해야 한다. 예컨대 매년 정부 총 R&D 예산의 일정 비율(예: 30~40% 이상)은 기초과학 및 인류보편적 지식창출 연구에 배정하도록 룰화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 윤석열 정부 출범 당시 내걸었던 “정부 총지출 대비 R&D 예산 5% 유지” 공약처럼, 이제는 기초연구 예산 비중의 하한선을 국정과제 수준에서 명시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일시적인 유행이나 압력에 휘둘리지 않고 기초과학 분야에 안정적 재원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예산 조정 시 산업적 성과사업 vs. 학문적 연구사업을 구분하여, 기초연구 예산은 경기 변동이나 효율 논리에 덜 영향을 받게 별도 트랙으로 보호해야 한다. 예컨대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나 과학기술예산배분조정 기능을 강화하여, 전략기술 투자와 기초학문 투자가 조화를 이루도록 중장기적 관점에서 통제하는 것이다. 현재처럼 특정 부처 주도로 전략 분야에 예산이 쏠릴 경우를 대비해, 범부처 기초과학 지원계획을 별도로 수립·시행하도록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요컨대 “과학을 위한 예산”과 “산업을 위한 예산”의 균형을 공식화함으로써, 기초과학이 매번 후순위로 밀리는 악순환을 차단해야 한다.

2. 기초연구 지원체계의 강화: 기초과학 연구자들이 안정적으로 연구에 몰입할 수 있는 지원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위해 풀뿌리 기초연구사업의 부활과 확대가 시급하다. 앞서 지적된 바와 같이 1억원 미만 소규모 연구과제 지원이 0원으로 동결된 것은 기초학문의 모세혈관을 끊어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국정운영 차원에서 이 부분을 즉시 시정하여, 대학과 연구소 곳곳에서 창의적 아이디어를 가진 연구자가 소액 씨드펀딩이라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나아가 대학원생, 박사후연구원 등 학문 후속세대에 대한 투자를 대폭 늘릴 필요가 있다. 미국 사례에서 보았듯, 연구비 삭감은 가장 약한 고리인 대학원생·포닥에게 치명적 영향을 미친다. 이를 막으려면 정부가 인건비 지원 프로그램을 확충하여, 국가 R&D 과제에 참여하는 대학원생에게 적정 수준의 생활비를 보장하고, 우수 신진연구인력에게 안정적인 펠로우십을 제공해야 한다. 다행히 정부도 최근 “국가 R&D 참여 대학원생에게 월 80~110만원 지원” 방안을 내놓는 등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정책은 차질 없이 시행·확대되어야 한다. 또한 중견 연구자들이 연구 경력을 유지하도록 지원하는 제도도 중요하다. 현재 기초과학 분야 박사들은 경력단절 위기나 불안정한 비정규직 문제를 겪고 있는데, 이들을 위해 정부출연연구소 및 대학의 테뉴어트랙 연구직 포지션을 늘리는 등 커리어 경로를 마련해야 우수 인재의 이탈을 막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의사과학자 R&D도 늘려 중개연구의 가능성을 보다 증대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3. 평가 및 지원 방식의 혁신: 기초연구에 적합한 평가제도를 도입하여 연구자들이 단기 실적 압박 없이 도전적 연구를 수행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현재 정부 R&D 과제 평가에서는 논문 편수, 특허, 기술이전 등의 정량적 지표가 강조되지만, 기초과학에서는 연구의 질과 장기적 파급력을 더 중시해야 한다. 이를 위해 장기과제 제도를 확대하는 방안을 제안한다. 예컨대 선진국의 사례처럼 유망한 젊은 과학자에게 5~10년간 안정적으로 지원하는 중장기 기초연구 프로그램을 늘리고, 중간평가 간소화와 성과에 대한 유연한 잣대를 적용한다. 또한 동료평가의 질을 높여,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연구의 학술적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하여 모든 연구계획서와 평가를 영어중심으로 하고 평가자에 해외연구자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고려해야한다. 이렇게 할 때 소위 카르텔이라 불리우는 인원들이 자신들끼리 예산을 주고 받는 일을 어느정도라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기초과학 연구성과의 사회적 기여를 정성적으로 평가하는 프레임워크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산업화 가능성만이 아니라, 인류 지식에 기여한 정도, 후속 연구 토대 형성, 차세대 연구자 훈련 기여 등 종합적 관점에서 가치평가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 혁신은 궁극적으로 정부와 국민이 기초연구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지지하는 기반을 넓히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4. 기초과학-첨단기술 간 연계 강화 및 선순환 구조 구축: 기초과학과 AI를 비롯한 첨단기술 분야의 상호보완적 발전을 촉진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예산을 배분함에 있어 두 분야를 대립구도로 보기보다, 협력구도로 설정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AI 등 전략 분야 예산의 일부를 기초과학과의 융합 연구에 활용할 수 있다. 최근 AI는 신약 개발, 재료과학, 물리학 시뮬레이션 등 기초 연구에 새로운 돌파구를 제공하고 있다. 정부는 AI+과학 융합 연구사업을 통해, AI 연구자와 기초과학자가 팀을 이뤄 상호 관심 주제를 연구하도록 지원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AI 분야 예산이 기초과학 연구를 도구적으로 지원하는 효과와 함께, 기초과학 분야도 AI 기술을 활용하여 성과를 높이는 윈윈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또한 국가 전략 프로젝트 기획 시 기초과학자의 참여를 의무화하거나, 반대로 기초연구센터에도 데이터사이언스 전문가를 두는 등 인력 교류를 활성화하여 두 커뮤니티 간 벽을 허물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AI, 양자, 바이오 같은 첨단 분야의 근간이 되는 수학, 물리, 화학 등에 기초원천연구 프로그램을 설정하여 투자의 연속성을 보장해야 한다. 예컨대 양자기술 국가프로그램이라면, 그 예산 중 일부는 양자물리 기초이론 연구 그룹에 안정적으로 지원되도록 설계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계 전략은 단기적으로는 기초과학계에 신규 자금 유입을 가져오고, 장기적으로는 첨단기술 발전을 가속화하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5. 과학기술에 대한 사회적 인식 제고와 합의 형성: 끝으로, 과학과 산업의 역할 차이에 대한 국민적 이해를 높이는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 정책 입안자와 대중이 기초과학의 가치를 충분히 인식할 때 비로소 안정적 지원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다. 이를 위해 정부와 과학계는 기초과학 성과와 중요성에 대해 적극적으로 홍보와 소통에 나서야 한다. 예컨대 기초과학 연구로부터 파생된 성공 사례(산업 혁신이나 노벨상 수상 등)를 국민들에게 알기 쉽게 전달하고, 과학문화 확산 프로그램을 통해 기초연구의 장기적 혜택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또한 정부는 과학기술 거버넌스를 개선하여 정책 결정 과정에 다양한 과학자들의 목소리가 반영되도록 해야 한다. 과학기술 관련 주요 의사결정 시 단기 산출에 치중한 관료 논리가 지배하지 않도록, 독립적인 과학자문 기구를 활성화하고 과학계와 소통 창구를 상시적으로 열어두어야 한다. 과학계 역시 책임 있는 연구문화를 정착시켜 국민 신뢰를 높여야 한다. 투명한 연구비 사용, 윤리 준수, 그리고 성실한 연구수행을 통해 “세금으로 낭비한다”는 오해를 불식시키고, 투자의 선순환 구조를 구축해야 한다. 이러한 사회적 합의와 지원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기초과학에 대한 꾸준한 투자가 정치적 환경 변화와 무관하게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과학기술 강국으로의 도약을 꿈꾸는 대한민국에게 기초과학과 첨단산업의 균형 발전은 피할 수 없는 과제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최근의 R&D 예산 삭감과 AI 집중 투자 국면에서 드러난 문제점들은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분명히 보여준다. 기초과학은 미래 혁신의 씨앗이며, AI를 비롯한 산업 기술은 그 씨앗을 열매로 키워내는 토양이다. 어느 한쪽만 건강해서는 지속적인 풍요를 기대하기 어렵다. 미국의 사례는 기초과학을 경시할 때 어떤 위험이 따르는지를 경고하고 있으며, 동시에 우리에게 반면교사가 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과학과 산업을 조화롭게 발전시킬 수 있는 새로운 R&D 정책 패러다임을 구축해야 한다. 정부는 정책의 일관성과 균형감각을 갖고 기초과학을 든든히 지원함과 동시에 AI 등 전략분야에 과감히 투자하는 투트랙 전략을 실행해야 할 것이다. 과학계도 이에 발맞춰 응용분야와의 소통을 강화하고 공공의 신뢰 속에 연구에 매진함으로써 사회적 지원에 부응해야 한다. 사실,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는 단순히 한두 해의 예산 항목이 아니라 국가의 미래에 대한 투자이다. AI 시대의 승자가 되기 위해 슈퍼컴퓨터와 GPU를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알고리즘을 만들고 활용할 창의적 두뇌를 기르는 일은 그보다 더 근본적이다. 오늘의 기초과학자가 없이는 내일의 AI도 없다. 반대로 AI 등의 발전을 통해 기초과학이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할 수도 있다. 이처럼 선순환하는 과학기술 생태계를 이룩하기 위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멀리 내다보는 통찰과 꾸준한 실천이다. R&D 예산 배분의 패러다임 전환을 통해 기초와 응용이 함께 융성하는 토대를 마련한다면, 대한민국은 미래 산업혁명 시대에도 굳건한 과학강국으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도, 몇일 전 충남에서 열린 타운홀 미팅에서는 KAIST 이재경 교수가 독립적인 기초과학예산의 필요성을 피력하였고, 이재명 대통령 또한 이를 진지하게 검토할 것을 지시한 바 있다. 이를 기점으로 과학과 산업이라는 두 수레바퀴에 고르게 힘을 실어, 지속가능한 혁신성장의 길로 나아가게 되길 기대한다. 정부와 학계, 산업계가 한마음으로 이러한 방향을 추진해나간다면, 우리는 R&D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미래 세대에 풍부한 과학유산과 기술역량을 물려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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